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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수(권투선수)

1. 개요2. 생애3. 여담4. 같이 보기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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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벤베누티와의 타이틀매치에서 승리해 한국 최초로 세계챔피언에 오른 김기수의 경기 장면

金基洙

1939년 9월 17일 ~ 1997년 6월 10일

대한민국의 전 권투 선수로 한국 권투 역사상 최초의 메이저 기구 세계 챔피언.[1]

WBA, WBC 통합 챔피언을 지냈으며, 1960년대에는 메이저 기구가 딱 이 2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언디스퓨티드 챔피언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 복싱 역사상 유일한 사례로, 기구나 체급을 오가며 여러 개의 메이저 기구 벨트를 수집한 선수들은 있었으나 동시에 한 체급의 메이저 타이틀을 모두 차지했던 선수는 김기수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2. 생애

1938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1951년 1.4 후퇴 당시 월남하였다. 이후 전라남도 여수시에 정착한 그는 1954년 여수 여항중학교 김기봉 교사의 호의로 학교에 들어가 육상부 단거리에서 활약하다 권투로 전향했다. 이후 서울 성북고등학교 복싱부에 들어갔다.

1958 도쿄 아시안 게임에서 웰터급 금메달을 딴 뒤 1961년에 프로로 전향, 1966년 장충체육관에서 이탈리아 출신의 주니어 미들급 세계챔피언 니노 벤베누티[2][3]를 상대로 15회 판정승을 따내 한국인 최초로 복싱 세계챔피언에 등극했다.[4][5]

그 시절 세계 챔피언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타이틀 매치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 한국의 국민소득이 200달러 수준이었던 그당시 벤베누티가 요구한 대전료는 무려 5만 5천 달러선으로, 경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정부에서 지급 보증을 나설 정도였다. 사실 산드로 마징기, 미나미 히사오 등 동시대에 김기수와 경쟁을 벌이던 선수들의 타이틀 매치 전적을 봐도 판정까지 간 경우에는 사정이 비슷하다. 그만큼 원정경기가 굉장한 부담이었다. 21세기에도 크게 다르진 않다. 또한 당시 김기수의 코치가 바비 리차즈였는데[6], 외국인 코치까지 기용할 정도로 대대적힌 국가 차원의 준비가 진행되었던 모양. 사실 챔피언 대전료를 마련 못하던 김기수가 박정희와 직접 만나고 정부가 거액의 지급보증까지 한 일화는 유명하니, 박정희 정부가 직접 나서서 김기수를 밀어준 것만은 틀림없다. 이것이 챔피언이 된 직후에 신문에 나온 일화였고, 이때 대중에 나온 유행어가 바로 김기수의 명언인 젖먹던 힘까지 싸운다[7]라는 말이다.

1966년 12월 17일에는 미국의 스탠 해링턴#장충체육관으로 불러들여 15회 판정승으로 1차 방어에 성공한다. 이듬해 6월 3일에는 다시 한 번 미국의 프레디 리틀#동대문야구장으로 불러들여 다운을 당하는 등 고전 끝에 다소 논란이 있었던 스플릿 디시전 판정승으로 2차 방어에 성공한다.[8] 하지만 결국 1968년 5월 26일 이탈리아 밀란산 시로에서 산드로 마징기와 가진 원정 방어전에서는 역으로 스플릿 디시전으로 판정패하며 타이틀을 상실한다.[9] 이후 아직 보유중이던 동양 태평양 (OPBF) 미들급 타이틀의 방어에 나섰지만, 오사카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미나미 히사오에게 판정패해서 동양 챔피언 자리마저 내어주었다. 김기수의 프로 복싱 패전은 이렇게 딱 2회. 1969년 삼일절에 다시 미나미 히사오를 홈으로 불러들여 판정승으로 동양 타이틀을 되찾아온 뒤 미련없이 은퇴한다.[10] 프로복싱 총 전적은 33승 (17KO) 2무승부 2패.

은퇴 후에는 명동다방 '챔피언'을 차렸고 제주도에서 백화점을 경영할 정도로 사업에도 성공했으나, 1997년 간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57세.

3. 여담

해태 타이거즈의 레전드 김봉연동서이자 이상윤장인어른이었다. 해태 타이거즈김응용 감독을 광주에 안착시켜준 인물로 같은 실향민 출신으로서 공통분모가 많아 함께 어울려 술을 자주 마셨다. 당시 감독 초년생이자 타향살이하던 김응용의 유일한 낙이 같은 광주에 살던 김기수와 술 한잔 걸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윤의 장인이었기에 선수단에서 "누군(이상윤) 장인 잘 둬서 맨날 주전이네.."라는 소문이 돌자 김응용은 오랜 친구와의 만남을 끊어버렸다고 한다.

1966년 개봉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내 주먹을 사라에서 시합 도중 상대 선수를 사망시키고 방황하는 권투선수 윤정호 역으로 캐스팅되면서 영화배우 경력도 있다. 이 영화에는 김지미, 박노식, 전계현, 이예춘, 김천만 등이 출연하였다.

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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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번째는 홍수환이다. 홍수환의 모친은 실제로 자기 아들이 권투선수가 되자, 성공해서 김기수처럼 되길 바랐다고 한다. 그래서 홍수환이 세계챔피언이 된 날의 그 유명한 전화통화(당시 라디오에서 통화를 아예 실시간으로 방송해서 한국 국민들이 다 들었다)에서도 "대한국민 만세다"라는 말로 기뻐한 뒤, "김기수씨 어머니가 그렇게 부러웠는데 나는 오늘 소원을 풀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정확히 말하면 과거부터 아들 홍수환이 김기수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며, 홍수환의 모친이 김기수처럼 북한사람(신의주 태생)이라 동향의 청년을 남들보다 더 자랑스러워한 경향이 있어서이다. 홍수환이 프로복싱을 결심한 것이 김기수의 챔피언이 된 날 중계를 듣다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고, 이후 권투를 시작하고 아는 인맥이 없는 김기수를 직접 만나려고 김기수의 체육관이 있는 지역을 얼쩡거리며 동네사람들에게 정보를 수집하여 김기수의 단골 목욕탕을 알아내 직접 김기수에게 말을 걸어 친분을 만들어낼 정도였다. 모친에게도 평소 "내 이제 프로선수가 되기로 하였으니 언젠가 꼭 김기수 선배처럼 세계참피온이 되어, 중학교때 돌아가신 아버지 묘소에 참피온 벨트를 갖다 바치겠어요"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참고로 이건 챔피언이 되고 실제로 부친 묘소에 가서 했다. 부모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그만큼 김기수를 너무나 좋아했다. 단, 1970년대초까지 김기수는 한국 프로스포츠의 대명사였기에 그런 운동부 청소년들이 많긴 많았다.[2] 이탈리아 권투 선수로 1938년 4월 26일 현재 슬로베니아 영역인 이졸라에서 태어났다. 세계복싱협회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을 지낸 인물로 1960년에 하계 올림픽 웰터급 금메달을 따낸 뒤 1961년 1월 프로로 전향해 1971년 3월 은퇴했다.[3] 벤베누티가 이 타이틀을 빼앗아온 상대가 바로 후술할 산드로 마징기였다.[4] 벤베누티는 김기수에게 패하기 전까지 프로 전적 65전 전승으로 무패 행진을 계속했다.[5] 이 두 선수는 1960년 로마 올림픽 복싱의 예선 3차전에서 서로 상대한 적이 있다. 그때는 김기수가 심판 판정 5대0으로 패배하고 벤베누티는 금메달을 획득했다. 출처[6] 기사에는 '리처드'라고 되어 있지만 영문 이름을 확인해보면 Bobby Richards 이다.[7] 김기수는 당시 청와대로 불려가서 박정희와 직접 만났지만 김기수의 증언상 막상 별 대화를 안했다고 한다. 김기수가 인사만 하고 앉으라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박정희는 허공만 몇십초를 계속 보고 있다가, 뻘쭘하게 앉아있던 김기수에게 갑자기 "거 자네, 할 수 있겠어?"라고 말했고, 이를 들은 김기수가 즉시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싸우겠습니다 각하"라고 답하고 대화가 끝났다고 한다. 박정희는 고개는 끄덕였으나 또 말은 전혀 안하고 허공을 계속 보더니 "그래 가봐"라고 말했고 김기수는 시키는대로 인사만 하고 그대로 나갔다고 한다. 근데 체육관에 돌아오고 나니 정부가 대전료를 내주겠다는 소식을 관장에게 들었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김기수나 박정희나 사적으로 말이 적은 성격이기는 했다. 김기수는 연습하는 날에 하루 한마디나 할까말까한 극도로 과묵한 선수로 정평이 나 있었다.[8] 이후 리틀은 김기수에게서 타이틀을 빼앗아간 산드로 마징기를 상대로 다시 한 번 타이틀 획득에 도전하지만, TKO에 가깝게 몰아붙여놓고도 심판에게 노 컨테스트를 선언당하는 불운을 겪는다. 결국에는 세계 챔피언이 되고 2차 방어에까지 성공하긴 하지만.[9] 이때부터 산드로 마징기는 이렇게 따낸 생애 두 번째 통합 세계 타이틀을 프레디 리틀과의 재경기 거부로 박탈당할 때까지 이탈리아에서만 경기를 갖는다.[10] 여담으로 미나미 히사오는 이 경기에서 패하고도 주니어 미들급 세계 타이틀에 도전할 기회를 얻어 위에 언급된 프레디 리틀과 경기를 가졌지만 KO로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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