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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1-22 21:37:09

권오길(생물학자)

<colbgcolor=#003863><colcolor=#fff> 대한민국의 생물학자
권오길
權伍吉
파일:권오길 생물학자.jpg
본관 안동 권씨[1]
출생 1940년 8월 13일 ([age(1940-08-13)]세)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진주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이학부 생물과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물학 / 석사[2])
중앙대학교 대학원 (생물학 / 박사[3])
경력 수도여자고등학교 교사
경기고등학교 교사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교사
강원대학교 생명과학과 교수
미시간 대학교 생명과학과 방문교수
현직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생물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2. 생애

1940년 8월 13일 일본 오사카부 오사카시에서 유학생으로 대학을 다니던 아버지 권영두(權寧斗, 1906 ~ 1943. 6. 6)와 어머니 합천 이씨(? ~ 1991. 7. 13)[4]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권영두는 1940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에 의해 징집되었으며, 본래 캄보디아에 배치될 예정이었으나 태풍으로 오키나와에 배치되었다가 1943년 6월 6일 그곳에서 미군과의 교전 중에 전사했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은 그는 8.15 광복 후 고향인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백운리로 돌아가 작은아버지 권영희(權寧熙, 1923. 3. 21 ~ ?)[5]의 도움을 받으며 형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1년간 집안일을 도우며 지내다가 순경으로 근무하던 친척의 경제적 지원으로 단성중학교에 입학하여 3년 내내 매일 8km을 걸으며 통학하였다.

중학교 졸업 후 어머니를 설득하여 진주고등학교에 고입 시험을 치러 합격하였고, 고모 집에서 지내는 한편 외숙부의 경제적 지원 아래 고등학교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 어머니께서는 종종 그에게 "공부 열심히 해서 아버지의 원을 풀어라"라는 말씀을 하셨고, 이러한 어머니의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기곤 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학비 걱정이 없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O다리를 지녔던 탓에 포기하고 등록금이 비교적 적었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이학부 생물과에 지원, 합격하였다. 입학금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었지만 당시 시외버스 운전에 종사하던 외삼촌이 소를 팔아 학비를 마련해주었고 마침내 입학할 수 있었다.

서울대학교 졸업 후에는 동 대학원 동물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하였으며, 1965년 졸업하였다. 석사 졸업 후 고등학교 교사에 채용되어 이후 수도여자중학교[6]·수도여자고등학교·경기고등학교[7]·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등 중·고등학교에서 15년간 교사로 근무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교장의 허락으로 중앙대학교 대학원 생물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하였고, 토요일을 할애하여 박사 공부에 매진하였다. 이후 1980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듬해인 1981년 교직을 그만두고 강원대학교 생명과학과 교수에 채용되어 줄곧 재직하였다.#

2005년 퇴임하였으며 현재 강원대학교 명예교수로 재직 중에 있다.

주 전공은 패류, 즉 조개류의 분류학이며 그 중에서도 달팽이 연구를 주로 하여서 '달팽이 박사'로 알려져 있다.

대중들을 위한 교양 서적의 저술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특히 과학 에세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꿈꾸는 달팽이>, <생물의 다살이>, <흙에도 뭇 생명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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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야공파 두양(斗陽)1계 35세 오(五, 悟, 梧) 숙(肅) 항렬이나 한자를 로 썼다.[2] 석사 학위 논문 제목은 混濁度와 鹽度에 따른 Tapes philippinarum 幼生의 生存과 成長에 관하여(혼탁도와 염도에 따른 '바지락' 유생의 생존과 성장에 관하여, 1965).[3] 박사 학위 논문 제목은 韓國産 陸産貝의 分布에 關한 硏究(한국산 육지에서 서식하는 조개의 분포에 관한 연구, 1980).[4] 이태주(李泰柱)의 딸이다.[5] 아들이 없었기에 족보상으로는 작은아버지에게 양자로 입적되기도 했다.[6] 1971년 2월 28일 폐교되었다.[7] 고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았을 당시 한 반에 서울대학교를 36명씩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