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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14:50:56

토야마류

군도의 조법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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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고류 무술과 현대 무도를 나누는 기준점은 메이지 유신(1868)으로 여겨지나, 창시가 그 기간에 걸쳐있거나 그 이후지만 고류의 형식으로 수련되고 있는 경우 여기에 넣었다.
일본 고류 무술의 유파들의 경우 창시 세기별로 분류해 외래어 표기법/일본어 기준 가나다순으로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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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토야마류의 기원3. 민간유파 토야마류로 부흥하다4. 특징5. 약점6. 한국과의 관계7. 관련 문서

1. 개요


戶山流

일본의 검술 유파. 정식명칭은 '토야마류 돌격 발도도' 또는 '토야마류 군용 호신 거합술'로써 1925년에 제정된 일본 육군의 군도술 체계 軍刀の操法及試斬 (군도의 조법 및 시참)을 기반으로 하여 일본의 패전 이후로 일본군이 사라진 뒤에 이 검술을 배웠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만들었다. 어원은 '군도의 조법 및 시참'의 연구에 관여한 일본 육군 토야마 육군병 학교.

2. 토야마류의 기원

일본 육군은 러일전쟁 시대까지 프로이센 왕국군의 화력기동전 교리를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도나 군도술을 정비하는 데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이미 일본 군내에 복무하는 장교들이 구 무사 계층으로써 검술에 소양이 있다는 점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일본이 생각하는 미래전쟁은 대포와 총으로 승부가 나지 구태의연한 칼이 나설 여지는 별로 없다고 생각했으며, 병사의 총검술과 기병의 군도술을 간략한 내용으로 채택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러일전쟁과 함께 전환을 맞았다.

세간에 알려진 상식과는 반대로 러시아군은 전쟁 내내 백병전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으며 특히 뤼순 요새 공방전에서 일본군이 간신히 제압하고 점령한 방어진지를 백병돌격으로 재탈환하는 사례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 또 강력한 방어진지로 보호받는 러시아군의 진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일본군도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총검돌격으로 전투할 수밖에 없었다. 기관총과 풍부한 탄약이 완료된 토치카를 상대로 총격전을 벌여도 결국 화력에서 크게 밀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1] 이 경험은 일본군이 백병전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채택하고 있던 독일식 화력기동전 교리는 충분한 공업기반에 의한 군수물자의 생산력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그러나 신흥국가인 일본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경제지출로 다가왔으며, 영국 등지에서 막대한 전쟁 차관을 빌려 전쟁 이후에는 당분간 경제침체가 계속되었다. 이때 일본이 주목한 것이 당시 제일의 육군국인 프랑스엘랑 비탈 이론이었다. 강대한 전투의지를 잃지 않을 것을 중심으로 돌격전, 백병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리는 분명히 독일식 교리보다 자금 소모가 적었다. 1차 세계대전 중 제1차 마른 회전에서 프랑스군의 공격 정신과 백병전으로 독일의 공세를 돈좌시킴을 보고, 일본군은 일본의 낮은 경제수준과 공업력에 걸맞은, 효과가 입증된 교리라고 생각하고 도입하였다.[2]

이 교리에서는 일선에서 장교는 지휘통제 이외에도 병사들에 앞장서 돌격을 선도해야만 했으며, 그 과정에서 호신용 무기이자 상징으로써 군도가 새롭게 주목받았다. 군도 자체는 이미 일본도처럼 쓸 수 있는 양손세이버를 대중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기병을 제외하면 따로 군도술을 교육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보병장교들에게 가르칠 군도술 연구 수요가 발생하였다. 더불어 1차대전에서도 참호전이 벌어져, 이 과정에서 짧은 나이프나 도검 등이 활약했고, 독일조차 백병돌격 전문부대인 스톰트루퍼를 편제하였으므로 연구의 당위성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연구는 백병전 연구를 전문으로 하던 육군 토야마학교(陸軍戶山學敎)에서 시행하여 1915년 교범으로 정리하였다. 교육주해서인 총검술, 양손군도술 교육의 범례(銃剣術、両手軍刀術教育法の範例)도 1916년 출간되었다.

그러나 1915교범은 그 전신인 1894년 교범의 내용을 계승-확장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죽도와 목총, 호구를 이용해 시합 형태로 교습하는 내용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토야마학교에서는 이러한 점 탓에 진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검도식의 작은 베기로는 실전에서 의미가 없다는 의견도 뒤를 이었다. 따라서 진검 베기의 방법론을 토야마학교에서 연구하였고, 뒤이어 장교가 전장에서 행군이나 평시 기습당할 것에 대비한 기술을 개발하였다. 이에 따라 몽상신전류의 나카야마 하쿠도(中山博道), 가시마신류의 쿠니이 젠야(國井善弥), 일도류 나카니시파의 다카노 사사부로(高野佐三郞), 대일본무덕회 오오시마 지키타(大島治喜太) 등 검도의 형성에도 관여한 당대 검객 4명이 모여 5본의 거합발도술을 창시하였다. 이것을 토야마 육군병학교에서 1925년에 공식으로 채택하여 교습했으며, 전쟁터에서 장교준사관의 호신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발도술과 짚단이나 대나무를 활용한 베기술이 포함되었다. 이것이 바로 군도의 조법 및 시참(軍刀の操法及試斬)인데, 토야마류의 기원이다. 이때의 기술은 다음과 같았다.

하지만 이 내용은 토야마학교에서만 교습되었고, 다른 병학교나 사관학교에서는 기존의 1915교범을 기준으로 교습하였다. 토야마학교는 일종의 후반기교육을 주목적으로 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에 토야마학교에 입교하지 못한 장교준사관은 최신식 교육을 배우지 못했고, 아예 소속이 다른 해군은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던 와중 발발한 제1차 상해사변(1932)는 1915교범의 문제점을 만 천하에 드러낸다. 검도식의 작은 베기가 효과가 없었으며, 시합형의 검술교육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돌격의 기세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적에게 치명상도 가하지 못하더라는 점이 제기된 것이었다.

이에 따라 군령육제3호로 1934년에 검술교범이 갱신되고, 1935년에는 토야마학교에서 검술교범주해를 발표하며 기존의 거합술을 전면 개편하고 새로운 커리큘럼을 제시했다. 이토 키요시(伊藤清司) 소장, 가와구치 우키치(江口卯吉) 소령, 모치다 모리지(持田盛二) 범사, 사이무라 고로 (斎村五郎)범사와 같은 내외부 인사들이 모여 연구한 신검법은 다음과 같은 변화를 겪었다.

우선 기존 5본 직전의 적은 실제 쓸 일이 적을 거라는 판단하에 폐지. 그대신 일대다수의 검법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5본을 전후의 적으로 대체하고, 6본 좌우의 적을 추가했다. 또 야쿠마루 지겐류(薬丸自顕流)의 카카리우치(懸り打ち)[3]를 참고한 돌격형 검법, 7본 돌격을 추가했다. 추가된 기술들은 다음과 같았다.

그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1940년 11월에는 육군장교의 친목단체인 해행사(偕行社)에서 전군에 소책자 <군도의 조법(사용법) 및 시참:軍刀の操法及試斬>을 배포하여 전군에 완전히 보급되었다. 이때의 내용은 돌격이 5본으로 변경되고, 6본 전후적, 7본 좌우적으로 순서가 재배치되었다. 1937년과 1940년 사이에 어떤 변경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해군 군속인 타카야마 마사요시가 참여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얼마나 어떻게 관여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40년 소책자를 대량 배포함으로써 비로소 군도의 조법이 전군에 알려졌다. 뒤이어 더욱 쉽고 간편한 실전도법을 보급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1942년 1월 토야마육군병학교에서 가르치던 돌격형 도법의 구체적인 훈련방법과 기본해설을 함축한 훈련가이드『단기속성교육군도(일격필살)훈련요령』을 발표했고, 이 내용을 단행본 한 권으로 소장하고 싶다는 육군 내 여론에 부응하여 마침내 쇼와 19년(1944) 『단기속성교육군도(일격필살)훈련요령』을 포함한 최종판이 발간되었다.대한민국 국립중앙도서관에 수장된 군도의 조법 및 시참. 1944년판번역본 PDF버젼

1944년판 교범의 내용은 크게 3가지 챕터로 나뉜다.
1944년 교범 이후에는 더 이상 개정은 공식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토야마학교 검술과장 모리나가 세이(林永淸)가 두 명이서 수행하는 카타 훈련을 만들었다고도 하나 구체적인 내용은 모른다.

3. 민간유파 토야마류로 부흥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일본에 진주한 미군정 GHQ는 일본군에 학을 뗐으므로 일본 내부의 모든 무도를 금지시킨다는 명령을 내렸다. 또 육군 토야마학교도 캠프 자마(Camp Zama)로 개칭되어 미군의 숙소로 쓰였고, 토야마학교의 교관과 간부들도 제대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이루어지고 1952년에 무도가 부활하자 토야마학교 출신 간부들이 모여 검술과장이었던 모리나가 세이(林永淸)를 중심으로 민간유파로 새출발하였다. 모리나가 세이는 1954년 즈음 자신의 판단을 바탕으로 몇가지 기술을 추가하고 체계를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이로 인해 전쟁 당시 육군검술과 차이가 생겼다. 개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체에 따라 용어나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토야마류의 이름을 가진 단체는 모두 이 1954년에 모리나가 세이가 개정한 내용을 따라 훈련하고 있다. 사실상 민간무도로써의 토야마류를 새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모리나가 세이(森永清)는 류조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이쪽이 압도적. 다만 검술과장으로 재직했던 야마구치 유우키치(山口勇喜)를 류조로 삼는 곳도 있다. 나카무라 타이사부로의 연구를 받아들여 체계를 약간 개정한 곳도 있다. 다만 어느 쪽이든 1925년 당시 주도적으로 참여한 나카야마 하쿠도를 시조로 삼는다. 원래 군대무술로써 딱히 시조나 류조를 정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통의 탈을 쓰고 민간유파로 부흥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모리나가 세이(森永清)

4. 특징

토야마류는 검술이 아니라 거합술로 분류된다. 제자리에서 칼을 뽑아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을 주로 하는데, 특히 일도양단의 기세로 상대를 일격에 참살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한다. 이에 따라 다양한 상황에서의 발도술, 그리고 상하좌우와 대각선까지 8방향 베기를 연습하는 것, 그리고 물체를 베는 타메시기리(試斬)훈련 등에 비중을 많이 둔다.

고류 거합술과 비교하여 가장 큰 차이점은 서서 발도한다는 것이다. 고류 거합술이 상대와 대면하는 중 불의의 사태, 즉 기습이나 암살, 습격과 같은 상황에 대비하여 급히 칼을 뽑아 제압하고 생존함을 목표로 하므로[4] 잔심(残心)을 중시하고 일본식으로 정좌하여 앉은 상태에서 시작한다고 상정하는 데 비하여, 토야마류는 전쟁터에서 적과 마주쳤을 때 군도를 이용해 적을 살상하는 것을 상정하므로 서서 발도한다. 또 고류 거합술이 기법의 훈련에 중심을 두고 베기는 단순히 수련의 보조적 용도로 보는 반면, 토야마류는 베기술의 비중을 높게 둔다는 점도 차이이다.

토야마류의 근본인 군도의 조법이 만들어진 20세기 초반 당시의 전쟁터에서는 검대 검의 싸움이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따라서 굳이 검으로 검을 상대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고, 대신 칼을 빠르게 뽑고 강하게 베어 속전속결로 적을 살상함을 추구하여 불시의 조우나 급변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하고, 군인들로 하여금 쉽고 빠르게 배워 짧은 시일 내에 실전에서 사용이 가능할 만큼 소양을 갖추도록 가르치려 했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생겼다.
현대의 토야마류는 민간 유파가 되면서 군복과 군도가 아닌[5] 전통 복장과 전통 카타나를 사용하며, 예법이나 잔심, 칼을 든 상대를 제압하는 이치 등의 옛 요소를 도입한 경향이 있다. 후술하겠지만 자신들의 정체성 일부를 버려 가면서까지 군국주의적 색채를 지우려고 힘을 썼기 때문에 군대스러운 모습은 거의 남지 않았으나, 오리지널 군도술은 군도의 조법(軍刀の操法)이라 불리며 현대 토야마류에도 남아 있다. 군도의 조법 및 시참의 내용이 토야마류의 가장 근본이자 근간을 이룬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메뉴얼은 현대에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현대 일본 유파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비밀스럽고 보수적이며 배우기 힘든 경우가 많은 고류에 비해[6] 원래부터 쉽고 빠르게 익힐 수 있도록 고안된 군도술에 뿌리를 둔 만큼 배우기가 쉽고 간편하거니와, 특히 베기 시참을 통해 시각적으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겨 신규 수련자의 유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수련자의 입장에서도 베기 실력이 늘어나는 것을 통해 재미와 성취감을 느끼기 쉽다. 이런 점이 전후 민간유파로 새출발한 토야마류가 급격히 세를 확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현대무도에 토야마류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나카무라류가 여기에서 파생되어 발도도(拔刀道)라는 장르를 확립했고, 이것이 또 다양한 단체들을 파생시켰기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일본 현대 유파의 중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약점

비록 검성이라 불리는 유명한 검객들이 나서 체계를 확립했다고는 해도 근본적으로 혼자서 하는 거합술이며, 가장 기본적인 내용들만 빠르게 습득하도록 한 만큼 칼을 든 사람을 제압하거나 다른 무기를 든 병사들과 싸워 이기는 방법은 따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토야마류의 원형인 군도술의 요점은 적과 무기를 맞대고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백병전이 벌어지기 이전에 신속하게 칼을 뽑아 적을 참살하는데에 중점을 두었다. 즉, 검술의 기본인 상대와 공방을 벌이는 부분까지 빼버렸으므로 당연히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검술이라 부르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러나 시대가 현대전의 효시인 1차대전 이후이고, 그러한 점에서 빠른 소양 교육과 습득, 당시의 전장을 고려한 실용적 기술들만을 배우기 쉽도록 간단하게 제정한 점에서 볼 때는 '군용무술'로서는 나름대로 합리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술적인 의의가 크지는 않다는건 분명히 문제이기 때문에 현대의 토야마류에서는 고류에서 모방한 쿠미타치 등의 훈련법을 추가하여 이런 문제를 일부나마 보완하고 있다. 또한 현대 유파인 만큼 고류에 비해 사고의 폭이 넓고 새로운 것을 자주 시도하여 약점을 보완하고 발전해나가고자 한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고류와는 대조적으로 개방적이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현대의 고류는 실용적인 전투기술이 아니라 전통문화 보존이란 성격이 강해져서,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서 다음 세대로 넘겨줄 것을 추구한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보수적인 성향을 띄고, 자신들의 기술이 외부로 유출되어 왜곡되거나 반대로 타 유파의 기술이 유입되어 기술체계가 오염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기에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반면 토야마류는 근현대의 군도술을 기반으로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유파이기 때문에 그 깊이가 얕을 수밖에 없고, 전통이라 할 만한 부분 역시 거의 없기 때문에 굳이 옛 모습을 유지함을 고집할 필요성 역시 별로 없다.

토야마류 스스로가 이러한 사실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려 하지 않고, 외부와 적극 교류함으로써 자신들의 약점을 보완해 가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려는 경향을 띤다. 그 예로 날을 죽인 진검을 이용한 격검을 개최하기도 했다. 참고로 아래의 영상에서 뒤쪽에 보면 서양 갑옷을 입은 사람이 보이는데, SCA소속 일본인이다. 타 단체의 사람이 격검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토야마류의 개방성을 엿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전 군도술을 제대로 계승했는지도 의문인 부분이 있다. 군도의 조법을 계승한 본거합 8본에서도 문제가 있는데, 군도의 조법 3본 좌적과 6본 전후적의 경우, 상대 칼을 자기 칼을 들어 막는 동작이 있다. 그런데 교범에서는 그냥 제자리에서 막는 게 아니라, 좌측으로 빠지면서 막고(우케나가시) 대각선베기로 제압하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토야마류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고 그냥 제자리에 서서 보폭만 벌리고 칼을 들었다가 대각선베기를 하는 식으로 한다.[7] 가장 중요한 교범의 내용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 거합술적인 측면을 강조하다 보니, 또 다른 정체성인 돌격검술의 면모는 아주 희미해졌다. 수련자들의 수련 정도가 전체적으로 낮음도 단점이다.[8]

위와 같은 문제는 1934년 육군검술교범을 전후 토야마류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면서 발생한 것. 1934년 교범은 제1차 상해사변의 전훈을 따라 몸받음과 유술기, 이종격검을 도입한 획기적인 교범이었으나 죽도와 호구를 이용한 격검이라는 한계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육군 토야마학교에서 진검술 교범을 군도의 조법이라는 이름으로 발간한 것은 격검술은 1934년 교범으로 배우고, 진검술은 군도의 조법으로 배움으로써 상호 보완을 꾀했던 것이었다. 군도조법 교범에서 가끔 "검술을 참고하라"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바로 1934년 육군검술교범의 항목을 참고하라는 것.

그러나 전후 토야마류의 형성과정에서 군국주의를 연상케 하는 육군검술교범이 배제되면서, 토야마류는 실전격검술뿐만 아니라 자체적으로 포함하던 돌격검술의 정체성까지 상당 부분을 버리게 되면서 고유의 특징들은 많이 죽어 버리고, 현재와 같은 반쪽짜리 발도술이 된 것이었다.

고류 유파들도 토야마류를 별로 좋게 보지 않는다. 일본인들의 특성상 대놓고 비난하거나 비웃지는 않지만 일본군에서 속성교육용으로 만든 검술을 가지고 전통옷을 입고 고류 코스프레를 한다는 점,[9] 거기에 검술의 깊이나 이치 자체가 아주 얕다는 점도 고류 유파들이 우습게 보는 이유 중 하나. 특히 토야마류가 거합을 표방하는 탓에 고류 거합유파들은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별것도 아닌 것이 우리랑 비슷하게 보이면서 이미지에 묻어가려고 한다는 반응 정도로 압축될 수 있다.

6. 한국과의 관계

토야마류가 흔히 난징대학살에 쓰인 검법으로도 국내에는 알려져 있지만, 실제론 전군보급이 1940년 되어서야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경학살검법이라고 도매금으로 넘길 수는 없다. 토야마학교에서 후반기교육을 받은 장교준사관들이 기법을 활용했을 가능성은 있다고 하지만 중일전쟁을 맞아 급격히 확장된 일본군의 사정상 남경공략 시점에서 검술교육을 받은 장교준사관의 숫자가 매우 적었으므로 토야마학교 검술이 활용되었을 비율은 매우 적다고 할 수 있다. 본래 돌격 및 호신을 위한 검술이었으므로 결국 쓰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악명은 상당부분 나카무라 타이사부로(中村泰三郞)에게서 시작되었다. 토야마학교에서 검술교관교육을 받고 부사관으로써 중일전쟁과 2차대전에 참전했던 나카무라 타이사부로는 만주 흑천성 방면으로 배치되면서 베기술 연구를 거듭했다. 전후 그는 자신의 전쟁중의 경험과 토야마류에 합류하면서 배운 것[10], 그리고 사람을 실제로 참살한 전범과 대화를 통해 얻은 정보 등을 살려 자체적으로 연구를 더해 나카무라류 팔방베기 발도도(中村流八方切り抜刀道)를 창시했다. 베기술과 도검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매우 깊어 전후 일본 검술계에서는 이름이 높았는데,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는 베기술이나 시참에 대한 인식이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이에 베기술을 추구하던 비천 이영식이 우연히 나카무라류의 교본을 입수하여 자체적으로 연구에 연구를 더하고, 마침내 나카무라 타이사부로를 초빙하여 나카무라류를 직접 사사해 베기술에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마침 세를 한창 늘리던 해동검도에 이영식의 제자들이 들어갔고, 해동검도에서 마침내 베기술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베기라는 것이 짚단과 대나무를 베는 일본식 시참의 형식을 그대로 따오게 된 것. 해동검도가 이 점에서는 가장 유명하고 베기술과 진검검리를 최고의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지만, 국내의 대부분의 검술 단체들도 이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한 다리 건너 나카무라류를 통하기는 했지만, 그 근원은 토야마류에 있는 만큼 토야마류는 한국 현대 무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셈이다. 그 외에는 무술인 최영철이 스포츠 찬바라 창시자이자 토야마류 수련자인 타나베 테츤도(田邊哲人)에게 토야마류를 배워 잠시 보급한 적이 있었다.

7. 관련 문서



[1] 당시 러일전쟁을 참관하던 유럽의 무관들은 이런 모습을 비웃었다. 프랑스의 최첨단 75mm 야전속사포의 화력을 적재적소에 투입함으로써 토치카나 참호를 쉽게 제압할 수 있으며 무모한 백병돌격 자체를 덜떨어진 행동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또 일본군의 공업생산력의 부족으로 준비포격을 위한 포탄조차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려 충분한 준비포격이 어려웠기 때문에, 압도적 생산능력을 가진 유럽에서는 애초에 포탄이 부족할 일 자체가 없으므로 충분히 사전 제압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이 우쭐함은 피로써 값을 치르었다.[2] 다만 엘랑 비탈교리를 바탕으로 한 프랑스는 1차대전에서 엄청난 피를 봤다. 프랑스는 2차대전보다 1차대전에서 희생된 병사가 더 많다.[3] 공터에 막대기를 여러 개 세우고 괴성을 지르면서 돌진하여 모두 쳐서 쓰러트리는 훈련법. 중간중간에 장병기를 든 상대가 가끔씩 교전한다.[4] 실제 거합술은 모두 이런 식으로 호신과 자기 방어, 혹은 역으로 상대를 기습해 암살하기 위한 기술이다. 애초에 기습이 아닌 전투 상황이라면 잘 빼들고 있는 칼을 굳이 다시 칼집에 집어넣어서 발도술로 적을 공격할 이유가 전혀 없다. 발도술이 필살기처럼 묘사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창작물 속 허구적 묘사일 뿐이다.[5] 다만 일부 수련자들은 자의적으로 전통 일본도의 칼날에 신군도의 외장을 구해다가 끼우거나, 모조 신군도를 사용하기도 한다. 일본의 총도법 상 일본도로 인정되는 것은 일본 내에서 장인이 전통적인 기법으로 만든 도검에 한정되는데, 일본도는 어디까지나 칼날 부분만을 본체로 간주하고 그 외의 외장은 모두 일종의 장식품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칼날만 전통 일본도라면 외장을 어떻게 꾸미든 소유자의 자유이다.[6] 오랜 역사를 가진 만큼 체계의 수준이 깊고 높아 다 배우려면 10여 년도 넘게 걸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진검 수련보다는 목검으로 하는 형 수련이 대부분이라 젋은 사람들은 고리타분해하는 경우도 많다. 그 외에도 고류 특유의 보수적인 부분이라던지, 기술 유출에 민감해서 폐쇄적인 성향을 띄는 부분들도 신규 수련자가 입문하려는 데 있어서 상당히 큰 장벽이다. 관류야규신간류의 시마즈 켄지 계열 등이 이런 점을 좀 완화해서 장벽을 낮춘 덕분에 수련자가 다른 고류에 비해 비교적 많은 편이다.[7] 상대의 공격 라인, 중심선으로도 표현하는 부분에서 벗어나야 상대의 강한 베기를 안정적으로 빗겨내며 반격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대 토야마류식으로 제자리에서 상대 중심선을 벗어나지 않으면, 강한 베기에 칼이 밀려버린다! 어떻게든 힘으로 막아낸다 하더라도 이 상태에서 어거지로 대각선베기를 시도하려고 하면 머리나 어깨에 칼이 꽂힐 수도 있다. 모든 고전 검술에서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애초에 현대 토야마류를 정립한 모리나가 세이 자신이 전문 무술인이 아니라 군인으로서 검술과장으로 재직하며 군도조법을 배워 가르치던 사람인 만큼 중요한 개념을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아니면 창시 당시에 영향을 주었던 뛰어난 검객들의 피드백이 끊긴 상황에서 20여 년간 토야마 학교에서 군도술을 가르치다가 점점 내용이 변질된 상태로 훈련되었고, 모리나가 세이는 본인도 모르고 이것을 충실히 흡수했을 뿐일 가능성도 있다.[8] 발도시 빠르게 하지 못하고 사고 날 것을 지나치게 의식하거나, 자세가 어설프고 속도가 느린 것 등[9] 다만 토야마류가 스스로를 고류라고 칭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토야마류는 자신들이 구 일본군의 군도술에 뿌리를 둔 유파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10] 나카무라 타이사부로가 전쟁중 토야마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것을 근거로 군도조법을 민간인 학살에 사용했다는 인식이 있으나 실제로 나카무라가 얻은 것은 검술/총검술 즉 목총과 죽도를 이용한 격검교관 인증서였다. 토야마학교의 진검술 자체는 전후 나카무라가 토야마류 재건 이후 합류하면서 배우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