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2-01-22 11:51:05

구스타브 다비드 하밀톤



파일:Gustaf_David_Hamilton_(1699‑1788)_av_Brander.jpg

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7년 전쟁과 말년

1. 개요

스웨덴의 군인. 7년 전쟁 시기 포메른에 주둔한 스웨덴군 총사령관으로서 프로이센군과 맞섰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해밀턴은 바르셰베크의 영주였다. 그의 아버지는 베스테르노를란드 주지사였으며 스웨덴 장군이었다. 1713년, 해밀턴은 왕실 호위연대의 기수로서 군 경력을 시작했고 1715년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1733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해밀턴은 라인강과 모젤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전역에 가담했고 1734년 척탄병 대위로서 트라바흐 포위전과 필립스부르크 포위전에 참가했다.

1735년, 해밀턴은 스웨덴으로 돌아와 중위에 임명되었고 1740년 6월 12일 자코비나 헨리에타 힐데브란트와 결혼했다. 1741년, 해밀턴은 해밀턴스카 보병대의 대령이 되었고 1745년 스웨덴 국왕 아돌프 프레드리크에 의해 프로이센으로 파견되어 프리드리히 대왕의 전쟁을 연구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해밀턴은 스웨덴으로 복귀해 1747년 보병 소장으로 진급했고, 1755년에는 중장이 되었다.

2.2. 7년 전쟁과 말년

1758년 7월 4일, 해밀턴은 포메른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스웨덴군의 총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당시 그의 군대의 상당수인 5천 명 이상이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먹고 식중독에 걸려 있었다. 다행히 스웨덴으로부터 지원군이 도착하면서 병력을 수습할 수 있게 된 해밀턴은 베를린에 대한 공세를 계획했다. 이후 그의 군대는 베를린을 향해 꾸준히 진군했지만 곧 프로이센군의 역습을 받고 구스토우 전투에서 패배한 뒤 슈트랄순트로 퇴각했다. 이후 해밀턴은 12월 19일 직위에서 물러나 스웨덴으로 복귀했다.

이후 해밀턴은 1765년 스웨덴군 원수로 승진했고 스웨덴의 최고 명예 훈장인 세라핌 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1778년에는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3세에 의해 스웨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말년을 평안하게 보내던 해밀턴은 1788년에 사망했다. 향년 89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