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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4 10:26:12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1. 개요2. 역사
2.1. 러시아 제국 시대2.2. 소련 시대
2.2.1. 폭파로 철거되다2.2.2. 세계에서 가장 큰 노천 수영장이 되다
2.3. 소련 붕괴 후 완전 복원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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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 Cathedral of Christ the Savior
러시아어 : Храм Христа Спасителя
파일:external/bestmaps.ru/20131004132459.jpg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의 복원은 경건한 러시아 부활의 상징이다.
- 모스크바와 전 러시아의 총대주교 알렉시 2세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러시아 정교회 대성당.

2. 역사

2.1. 러시아 제국 시대

러시아 제국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1812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친정한 러시아 원정에 맞서 승리하였다. 이후 그는 모스크바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면서 이 승리를 기념하고자 대성당을 짓기로 결정했다. 황제의 명령을 받고 건축가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대성당을 설계하고 모스크바 강가의 참새 언덕에서 공사를 시작했지만 건설이 안전 문제로 취소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의 후계자이자 동생인 니콜라이 1세는 대성당 공사를 재개하기로 했지만 형이 채택한 설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니콜라이 1세는 다른 건축가에게 설계를 의뢰했고 얼마 후 하기아 소피아 성당을 참고한 새로운 설계가 완성되었으며 자리도 크렘린과 좀 더 가까운 곳으로 옮겨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했다.

1837년 니콜라이 1세가 설계를 채택한 후 오랜 세월이 지난 1860년에야 건물이 완공되었고 성화 작가들을 동원하여 실내 인테리어 작업을 계속했는데 이 작업에 다시 20년이 흘렀다. 결국 1881년에 니콜라이 1세의 손자 알렉산드르 3세가 대관식을 할 때에야 대성당도 축성식을 거행하여 진정한 성당으로 거듭났다.

이 대성당은 높이 103미터, 넓이 9000제곱미터로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 되었고 인원 약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표트르 차이콥스키1812년 서곡을 이곳에서 초연한 1882년에서 다시 1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오랜 세월을 소모하며 지어진 대성당인 만큼 그 규모는 엄청났고 아직까지도 세계에 이 성당보다 높은 정교회 성당은 없다고 한다.

2.2. 소련 시대

2.2.1. 폭파로 철거되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정교회가 탄압받으면서 성당은 유명무실해졌다.

192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하면서 자금이 모자랐고 이 성당의 황금돔의 장식에 쓰인 황금의 가치가 꽤 크다는 것을 알고 이를 뜯어내 경제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성당 철거를 결정한다.

소련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일어난 홍위병마냥 공산주의 이전의 문화재는 전부 가치가 없고 때려부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지 않았다. 그건 홍위병이 지나친 교조주의를 보였던 것이었고 소련은 왠만하면 보존했다.[1] 카잔 대성당이 무신론 박물관으로 쓰였듯 파괴하기보단 역사의 흔적으로 웬만하면 보존했다. 다만 이 시기 소련은 전세계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제개발용 자금을 외채로 빌릴 수도 없어서 궁리 끝에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된 라파엘로 작품 등 여러 르네상스 명작들을 서방 암거래 시장에 비밀리에 내다 팔아 경제개발 자금으로 사용할 정도로 자금이 모자랐다.

경제적 이유만 있던 건 아니고 국가 무신론을 내세운 소련 체제상 이렇게 대표적인 구시대의 성당을 폭파해서 국가권위가 종교보다 우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의 성격도 있었을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차르와 함께 민중을 착취하던 정교회 상징을 철거하고 인민의 전당인 소비에트 궁전을 짓기 위함이라고 선전했는데 단순히 부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으로 재탄생시킨다는 명분을 내걸어서 납득을 시켰다. 이런 결정에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이 당시 기준으로 완공된 지 50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건물이라 모스크바의 수많은 수백년 된 건물들에 비해 문화재라는 인식이 약했던 이유도 있었다. 한국으로 따져도 2020년대 기준으로 50년 전 1970년대에 지은 시멘트 건물이라고 하면 보존 필요성이 크게 와닿지 않을 텐데[2] 모스크바는 중세부터 러시아의 수도였기 때문에 여느 유럽의 고도처럼 성 바실리 대성당, 크렘린의 부속건물들 등 수백년 된 건축물이 많다. 고참 볼셰비키였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조차도 철거 필요성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표했다.
추예프: 하지만 대성당을 왜 폭파시켰습니까? 원했다면 다른 장소에 레닌 동상을 세울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몰로토프: 그건 일부러 없애버린 거요, 대성당 자체를 말이오. 그것에 대해 반대가 있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반대하지 않았어... 무엇 때문에 모스크바 중심지에 대성당을 보존해야 하는가? 그것이 고대의 귀한 유물도 아닌데. 우리는 그 점을 생각했소. 대성당은 소비에트 권력에, 권력의 최중심지에 어울리지가 않았소.
추예프: 거기에 어떤 박물관 같은 것을 만들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몰로토프: 그렇지, 옳은 말이오. 하지만 전혀 예기치 않게 기념물 대신 수영장이 만들어졌는데, 그것도 참 웃기는 일이오.
추예프: 사람들이 말하길, 그곳에 훌륭한 작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몰로토프: 그렇지, 그곳에 훌륭한 작품들이 있었지. 일부는 보존되어 있을 걸.
추예프: 지금 그것들이 어딘가 굴러다니고 있겠지만, 예전에 그곳에 전부 함께 모아져 있었습니다.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사람들의 이름도 모두 파손되었습니다. 그것은 러시아 군인의 영예입니다.
몰로토프: 교회 같은 건 우리에게 아무 소용이 없소. 모스크바 최중심부에 있는 교회 같은 것은 전혀 좋지 않소.
추예프: 왜 그것을 폭파시켰습니까? 그냥 그곳에 있게 두시지요!
몰로토프: 깊이 생각하지 못했소. 그냥 둘수도 없었지만, 폭파시켜 버린 것은 좀 심했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지금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도 그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 참여했는데...

다만 예술작품으로 볼 만한 여러 이콘이나 조각물들은 인근 돈스코이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원래는 통상적인 철거작업을 통해 철거하려고 했으나 규모가 너무 컸기 때문에 빠른 철거를 위해 이 작업을 책임진 소련 건설부 장관 카가노비치의 명령에 의해 1931년 12월 5일 다이너마이트로 한 번에 폭파되었다. 잔해를 치우는데 1년 이상 걸릴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대성당을 폭파하면서 나온 대리석 조각들은 모스크바 지하철 자모스크보레츠카야선 테아트랄나야 역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후 대숙청이 벌어져 나라가 어수선해지고 바로 독소전쟁이 발발하여 목표한 소비에트 궁전의 건설은 착수가 불가능했고 결국 이 자리는 약 20여년간 흉물로 방치되었다.

2.2.2. 세계에서 가장 큰 노천 수영장이 되다

파일:moskva pool 1985 2.jpg
파일:moskva pool 1985.jpg
1985년 여름 촬영된 모스크바 수영장. 중앙의 사다리꼴 모양 레인과 그 위의 다이빙벨이 있는 사각형 풀은 수영 선수들이 훈련 용도로 이용하기도 했다.
성당이 철거된 후 스탈린은 이 자리에 꼭대기에 100m짜리 블라디미르 레닌 동상이 서 있는 거대한 소비에트 궁전을 지으려고 했는데 독소전쟁의 발발로 무산되었고 결국 1950년대 중반까지 쓰레기가 잔뜩 버려진 공터로 방치되다가 니키타 흐루쇼프의 지원 하에 1958년 세계에서 가장 크고 넓은 노천 수영장으로 재탄생했다. 이름은 모스크바(Moskva) 수영장으로, 스탈린주의 건축가인 드미트리 체출린(Дми́трий Никола́евич Чечу́лин, 1901~1981)이 설계했다.

원래는 마천루를 세울 땅이었다 보니 부지가 꽤나 커서 이왕 수영장을 짓는 김에 엄청 크게 지었는데 세계 최대의 노천 수영장 답게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으며 수영장 시설도 당대 기준으로는 최신식으로 공을 들여서 겨울철에도 영상 30도 이상의 수온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덕택에 야외수영장이었음에도 겨울철에도 문을 열었다.[3]

1980년대 후반 소련에 자유화 물결이 일었고 1988년부터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의 재건에 들어가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이에 힘입어 1989년에는 수영장 한 켠에 이곳에 과거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이 있었다는 내용의 표지석이 설치되기도 했다.

한국 MBC 뉴스데스크 취재팀이 1989년 3월 이 수영장을 방문해 소개한 적도 있다. #

수영장은 오랜 기간 동안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1991년 소련 붕괴 후 신생 러시아의 혼란상 속에서 전기와 가스요금의 인상으로 수영장 운영에 수익을 제대로 낼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1994년 폐쇄되었다. 특히 상술했듯 이 수영장은 정말 찢어지게 추운 날씨를 제외하면 거의 연중으로 운영했는데 경제 혼란 속에서 겨울에 초대형 수영장의 물을 덥히기 위해 보일러실을 가동하는 데 난방비가 상당히 많이 깨져서 폐장을 오히려 가속화시켰다.

수영장이 폐쇄된 직후인 1995년 1월부터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이 본격적인 재건축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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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소련 붕괴 후 완전 복원

1990년 아직 소련이 해체되지 않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로 점점 기지개를 펴던 러시아 정교회는 소련 정부로부터 성당 복원의 허가를 받고 재건을 기획했다. 소련 붕괴 후인 1992년 러시아 정교회는 복원 기금을 신도들로부터 모금했고 100만명의 신앙심 깊은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기부해서 건축기금을 만들었다. 1995년 모스크바 탄생 850주년을 기념해 삽을 뜨고 2000년 8월 19일 변모축일에 완전히 복원된 성당이 문을 열었다.

결국 건물 자체는 현대에 다시 지었지만 무지하게 거대한 규모나 황금빛 가득한 화려한 장식 덕분에 러시아인들에게나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나 명소가 됐다. 대성당 외부는 얼마든지 사진 촬영이 가능하지만 내부는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내부 모습을 보려면 직접 방문하거나 인터넷에 올라온 홍보용 또는 학술용 사진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입구에는 대성당의 연혁과 소련 시절의 박해사를 기록한 문구가 벽 전체를 메웠음이 특이한 점이다.

대성당 자체도 진귀한 볼거리지만 그 주변에도 눈여겨 볼 만한 것들이 많다. 대성당 옆에는 알렉산드르 2세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부황 니콜라이 1세 때 발발한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가 처참히 패배한 원인이 뒤떨어진 사회체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개혁을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알렉산드르 2세 시대의 절정은 바로 그 유명한 1861년의 농노 해방령(Крестьянская реформа)이다. 비록 그 실효성은 미미했다고 전해지지만 사회 근본 체계를 바꿔보려고 했던 알렉산드르 2세의 노력 자체는 되새겨 볼 만하다. 그의 아들 알렉산드르 3세는 부황의 기념비를 세우라고 명령했는데 니콜라이 2세 때 완성되었다. 당시에는 좌우로 복도가 딸린 상당한 규모의 기념비였다고 하지만 러시아 혁명 이후 조각상이 파괴되었으며 몇 년 후 복도까지 완전히 파괴됐다. 2006년에야 당시 모스크바 시장 유리 루즈코프가 다시 세웠지만 복도까지는 완전히 복원되지 않았다.

3. 여담

대성당 뒤쪽으로는 모스크바 강을 가로지르는 총대주교 다리(Патриарший Мост)가 있다. 다리 위에 서면 북쪽으로는 저 멀리 크렘린이 한눈에 들어오고 반대쪽으로는 조지아계 러시아인 미술가인 주라프 체레텔리가 만든 표트르 대제 기념비가 서 있다. 그런데 이 기념비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한다. 이 기념비가 본래는 표트르 대제를 기념하려고 만든 작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문에 따르면 이 기념비는 본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으나, 미국 정부는 이 기념비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자 러시아 정부가 체레텔리에게 구입을 제안하였고 체레텔리도 이에 동의하여 전신상의 머리 부분만 교체한 뒤 모스크바 강가에 설치했다고 한다.

위치는 붉은 광장성 바실리 성당 쪽 강가로 나가면 이게 워낙 건물이 커서 잘 보이지만 보기보단 먼데 충분히 걸어갈 수 있다. 굳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자 한다면 크로포트킨스카야 역에서 하차할 것.

아래에 이슬람의 상징인 초승달이 있는 특이한 십자가를 달고 있는데 이는 이슬람권인 중앙아시아 정복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크고 아름다운 종소리가 유명하다. 멀리 크렘린에서도 들릴 정도다.


[1] 굳이 이념적 이유보다는 도시 계획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철거된 옛 건물들이 많았다. 붉은 광장랜드마크 중 하나인 성 바실리 성당 조차도 교통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철거될 뻔 했다.[2] 예를 들어 2020년대에 1970년대 지어진 랜드마크인 삼일빌딩 을 헐고 백 층 넘는 건물로 재건축하자고 하면 한국에서도 그다지 반대가 나오지 않을 것이다.[3] 다만 그렇다고 해도 실내수영장은 아니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날씨가 영하 20도를 밑돌았을 때는 수영장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