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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4 23:20:43

과학사/한국/조선시대

한국 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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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의 건국과 성리학2. 세종 대의 과학3. 조선 초 재이론 논의

1. 조선의 건국과 성리학

한국 과학사의 관점에서 여말선초 시기 일어난 중요한 변화는 유교적인 자연관점이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14세기부터 성리학의 영향이 커지기 시작했고, 조선의 건국은 이를 더욱 가속화했다. 신진 유학자들은 불교가 이미 극도로 타락했다면서, 이전의 전통적이며 비합리적인 불교적 자연관 대신 유학의 내용에 근거해 합리적인 사상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선배격인 이색(李穡) 같은 학자들은 14세기 중반까지도 아직 불교 등에 대하여 그렇게 극단적 비판을 가하지는 않았다. 불교 그 자체는 훌륭한 가르침이지만 승려와 사찰이 타락하고 부패하여 있던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음 세대의 학자들에 의하여 배불론(排佛論)이 날카롭게 펼쳐진 1390년 전후에 신진유학자들의 주장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기 시작하였고, 그 근본을 이룬 것은 유교적인 과학사상이었다.[1]

이들은 물론 승려들의 도덕적 타락이나 절의 지나친 경제적 팽창 등을 공격하고 있기도 하였지만, 또한 그들의 주요 공격대상은 불교적이거나 그 밖의 미신적인 관행들이었다. 특히 자연의 이변에 대한 반응을 논의하는 재이론(災異論)에서 두드러졌는데, 이전처럼 불교또는 도교적인 기도(道場 또는 齋醮)로 물리치고, 기도를 통하여 나라의 운명을 연장하여 보겠다는 왕실의 태도를 맹렬히 비난한 것이다. 감로나 사리처럼 불교적 관념에 따라 상서로 해석되는 개념에 대해서도 비판이 이어졌다.

김자수(金自粹)·김초(金貂)·정도전 등 신진사대부들은 승려와 도사 등을 목베어 제거하고, 국가의 어려움은 귀신의 힘을 빌 것이 아니라 사람의 노력, 특히 군주의 덕을 닦는 행위로 극복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새 왕조의 건설에 밑거름이 된 이들의 반종교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사상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15세기 이래 풍수지리설도참사상은 비교적 유교의 합리적인 태도에 억눌리기 시작하였다.

물론 조선의 건국과 동시에 불교, 도교의 영향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태조나 태종은 적극적으로 불교를 배척하지는 않았고, 세조는 적극적일정도로 불교를 옹호했다. 유교적인 자연관이 확고해진 것은 성종 대 즈음에 이루어진다. 물론, 이것은 정부를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고 민간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불교와 도교 역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2. 세종 대의 과학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세종(조선)/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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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4대 왕 세종 대는 조선사를 넘어 한국사를 대표하는 황금기로 여겨진다. 폭넓은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투자, 다양한 성과를 얻어냈으며 특히 천문학과 같은 분야는 당대 그 어느 지역과 비교해도 뒤쳐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곤 한다.

다만 유의할 점은, 세종 대 이루어진 이러한 치적들이 정말 현대적인 관점에서 '과학'에 대한 투자를 하기 위해 이루어진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종이 자연에 대한 관심이 있었거나, 각종 기술의 원리에 관심이 있어서 과학기술 연구에 투자한 것이 아니다. 세종 대는 고려 말부터 누적되어 온 개혁 욕구에 부응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 과제를 맞닥뜨린 시기였다. 조선 왕조가 건국된 정당성을 널리 알리고, 유교적인 국가 이념에 따라 나라를 정비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국가의 안정화를 위해서 당시 사회경제의 핵심이던 농학, 의학에 대한 정비 역시 요구되던 시기라 할 수 있다.[2]

이런 상황에서 세종은 자신에게 주어진 문물 정비와 국가 체제의 마련을 수행했다. 세종은 스스로를 태종에 이은 수성(守成)의 군주로 여겼고, 태조가 창업한 나라에 미비한 법과 제도를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았다. 유교적 민본주의를 내세우며 농사직설을 편찬했고, 측우기가 제작되었다. 아악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종묘제례악을 마련하고 편경과 같은 악기 제작에 나서기도 했다. 의학 부문에서는 조선에 맞는 의약 재료 위주로 향약집성방을 편찬하기도 했다.

또한 유학에 따르면 군주라면 관상수시(觀象授時), 즉 하늘의 모양을 보고 시간을 내려줄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천문학을 정비하는 작업 역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그것을 반영해 달력을 만드는, 역법과 관련된 프로젝트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다. 세종이 즉위한 직후에는 선명력 대신 수시력을 중심으로 역산을 연구하고 이에 기반해 달력이 제작되었다. 이후, 문물제도를 갖추기 위한 목적 하에서 이천의 주도로 대간의, 소간의, 혼천의 규표를 비롯한 각종 천문의기를 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측후에 나섰다. 그 결과로 한양의 일출입분, 주야각을 반영한 칠정산이 편찬되었다.

흔히 세종 대 이후 조선의 과학이 '쇠퇴'나 '정체'의 시기에 빠져있다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세종 대 이러한 작업들이 결국 국가 건국 직후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가는 시기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즉, 세종 대에 이미 제도적 틀을 마련해두면서 각 분야의 정비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 대에는 이를 보수하고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실제로 세종 본인도 한 분야에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더 이상 그 분야를 깊이 살피거나 구체적인 원리를 살피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즉, 세종 대 이뤄졌던 이러한 과학활동들은 현대적인 과학 프로젝트보다는, 국가의 운영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는 작업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3. 조선 초 재이론 논의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재이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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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자연현상에 대한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영역이 바로 재이론이다. 재이론이란 자연의 이상현상들, 즉 각종 자연재해나 쳔변 등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하는지에 대한 논의이다. 재이론은 조선의 현실 정치에서 직접적으로 반영되었고, 특히 조선 초 권력을 둘러싼 각종 논의에서 핵심적인 재료로 사용되곤 했다.[3]

가장 먼저 재이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진 것은 바로 정도전과 태종의 갈등이다. 정도전은 <심문천답> 등을 통해, 자연에서 일어나는 재앙과 상서가 국가의 잘못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꾸지람이라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것이 '군주의 잘못'이 아니라 정치의 잘못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는 <조선경국전> 등에서 정치의 총책임은 임금이 아닌 총재, 즉 영의정과 같은 재상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습군주제 속에서 항상 뛰어난 임금이 나올수는 없지만, 그 임금이 재상을 잘 뽑아 정치를 총괄하게한다면 안정을 이룰 수 있다고 바라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도전은 재이가 일어날 경우 그 책임이 재상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즉, 재상이 정치를 잘 운영하는 것이 곧 음양을 다스리는 것이며 재이를 막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두 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을 제압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정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그는 영의정 책임제 대신, 국왕이 실제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이 있는 강력한 군주정을 추구했다. 그는 이를 위해 재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구언이나 신문고 등을 활용해, 재이를 빠르게 보고받고 그것에 대해 조치를 취하는 모습을 과시한 것이다. 즉 재이가 일어난 책임이 조정이 아닌 국왕에게 있다고 천명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한 것이다. 그는 재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직접 대응하려 노력했고, 하륜이 가뭄 등 재이가 일어나서 사직하려 하자 "재이가 옴은 재상의 허물이 아니다. 죄가 실로 내게 있지 어찌 정승에게 관계되겠는가?" 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그 책임을 돌렸다.

이후, 쿠데타로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즉 세조의 재이론에 대한 반응도 주목할 만하다. 유교적 질서에 익숙해진 관료들에게 세조의 즉위는 쉽게 정당화하기 힘들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재이를 지적하는 것은 곧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었고, 세조의 도덕성 및 정당성을 비판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자연스러게 세조는 재이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고, 국왕에게 재이의 책임을 묻는 재이론에 반감을 보였다. 대신 그는 불교를 옹호하면서, 불교적인 자연관에 따라 재이에 대응하려 노력했다. 혜성과 같은 재이가 일어나도 그것이 임금의 정치와 무관하다고 주장했고, 각종 자연현상에 대한 보고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세조실록에 가뭄을 비롯해 각종 자연재해 기록이 드문 편인데, 이 역시 재이를 보고받기 꺼리는 세조의 영향이다.
대신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불교적인 상서, 즉 사리감로 등이었다. 세종이나 문종만 해도, 이러한 상서가 나타나도 크게 신경쓰지 않고 오히려 별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조는 이러한 상서를 보고받자 크게 좋아하며 하례했고, 불교를 진흥하는 구실로 삼기도 했다. 그 결과로, 실록에 유독 상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시기가 바로 세조 대이다.

반면 세조의 손자이면서도 어린 시절부터 재위에 오른 후, 경연을 통해 신하들에게 유학을 철저히 교육받은 성종은 다시 유교적인 방향으로 돌아갔다. 혜성의 보고를 꺼린 세조와 달리 성종의 경우 혹시 모르는 정변에 경계함과 동시에 사면령을 내렸다. 성종 5년 3월, 성종 7년 3월 과거에 책문으로는 직접 재이에 대한 문제를 출제하기도 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유교적 입장을 받아들였는데, 특히 재이와 특정 현상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경향보다는, 재이가 일어났을 때 포괄적으로 정치에 대해 반성을 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자연스럽게 재이가 일어났을 때 기우제와 같은 종교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경향도 줄었고, 점차 정치에 대한 반성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 경향은 연산군 대에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특히 갑자사화의 경우, 성리학적 자연관과 재이론을 둘러싼 왕과 신히, 특히 사림의 갈등이 폭발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연산군은 재이가 일어났을 때 왕의 책임을 강조하는 신하들의 간언을 극히 싫어했고, 그것은 자연현상일 뿐이니 자신의 탓을 하지 말라고 발언하곤 했다. 연산 10년 갑자사화가 진행될 무렵, 연산군은 약 7년 전인 연산 3년 선정전에 벼락이 친 것과 관련해 자신을 비판한 이를 처벌하라 지적했고, 또 그 해 우박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도 자신에게 어떠한 책임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군주와 재이의 관계를 철저히 부정하면서, 군주의 잘못을 지적하고 왕권을 통제하던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던 재이론을 갑자사화 시기에 봉인하려 시도한 것이다.

갑자사화 이후 자연현상에 대한 보고는 극도로 줄었고, 간혹 재이가 일어나더라도 정치와 연결되어 해석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재이의 관측 자체를 막기 위해, 천문을 담당하던 관상감에게 명하여 천문 보고를 축소시키고 간의대를 뜯어버리라고 명령하기도 한다. 이처럼 재이론에 대한 억압을 통해 연산군은 신하의 발언권을 축소시켜 갔고, 결국 이러한 폭정이 반정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중종 반정 이후, 당연히 재이론 역시 부활하였다. 다만 이 시기가 되면 불교/도교적 색채가 더욱 줄어들고 성리학의 내용에 충실해져서, 인격천 개념이 제거되고 자연을 철저히 기(氣)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또한 재이가 일어나는 원인을 철저하게 인간사회의 도덕적 성취, 특히 군주의 도덕적 성취에 돌리면서, 재이를 통해 신하가 간언하고, 임금은 그에 책임지며 끊임없이 수양하며 덕을 닦고 정치를 되돌아보는 체계가 구축되었다.



[1] 현대의 관점에서 유교는 과학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당대에 유교는 자연을 나름의 법칙에 따라 최대한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했다. 특히 성리학에서 동원된 태극, 기, 음양과 같은 개념은 모두 종교적 요인을 배제하고 자연을 설명하려고 도입된 경우이다.[2] 이상의 내용과 이하 서술한 내용에 대해 자세한 논의는 구만옥, "세종, 조선 과학의 범형(範型)을 구축하다", 한국과학사학회 35 (2013), 203-224; 문중양, "세종대 과학기술의 자주성 다시보기", 역사학보 189 (2006), 39-72; 전용훈, "한국 천문학사의 한국적 특질에 관한 시론: 세종 시대 역산(歷算) 연구를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38 (2016), 1-34 참고.[3] 이 문단과 관련해 자세한 내용은 박성래, '한국과학사상사', 책과함께 (2015)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