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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82대 천황 고토바 천황 後鳥羽天皇 | |||
| |||
<colbgcolor=#AF001F><colcolor=#dca600> 출생 | 1180년 8월 6일 | ||
사망 | 1239년 3월 28일 (향년 58세) | ||
능묘 | 오오하라능 (大原陵) | ||
재위기간 | 제82대 천황 | ||
1183년 9월 8일 ~ 1198년 2월 18일 | |||
상황 인세이 | |||
1198년 2월 18일 ~ 1239년 3월 28일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AF001F><colcolor=#dca600> 휘 | 타카나리 (尊成) | |
부모 | 부친 다카쿠라 덴노 모친 후지와라노 쇼쿠시 | ||
배우자 | 후지와라노 닌시 미나모토노 아리코 (源在子) 타카쿠라 시게코 (高倉重子) | ||
자녀 | 쇼시 내친왕 (昇子内親王) 타메히토 친왕 (為仁親王) 모리나리 친왕 (守成親王) 마사나리 친왕 (雅成親王) | ||
황거 | 헤이안쿄 (平安宮) 칸인 (閑院) 오오이노미카도도노 (大炊御門殿) | ||
연호 | 주에이 (壽永):1183년 ~ 1184년[1] 겐랴쿠 (元暦):1184년 ~ 1185년 분지 (文治):1185년 ~ 1190년 겐큐 (建久):1190년 ~ 1198년 | }}}}}}}}} |
1. 개요
일본의 제82대 천황.가마쿠라 막부로부터 권력을 되찾기 위해 조큐의 난을 일으켰으나 참패하였다. 이로 인해 덴노와 조정의 권위가 추락하고, 신생 무가정권인 가마쿠라 막부와 싯켄(집권) 호조씨[2]의 권력이 강고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2. 생애
2.1. 신기(神器)가 없는 즉위
고토바 덴노는 불과 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주에이(壽永) 2년(1183) 7월 25일, 호쿠리도(북륙도)의 맹장이었던 키소 요시나카(木曾義仲)의 겐지 군대가 교토에 육박하자 무능력한 타이라노 무네모리가 이끌던 헤이케 정권은 타이라노 도쿠시의 아들 안토쿠 덴노와 3종의 신기를 받들고 서국(西國)으로 피신했다. 이를 따르지 않고 교토에 남아 있었던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과 공가(구케) 사이에는 이세 헤이시, 즉 헤이케를 추토할 것인지 아니면 평화적인 교섭을 통해 주상인 안토쿠 덴노와 삼종의 신기를 귀환시킬지를 두고 의견이 나뉘었다. 이 과정에서 헤이케 타도에 공을 세운 기소 요시나카나 간토(관동)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대한 은상 문제 및 정무의 정체, 공석이 된 옥좌를 채우기 위해 새 주상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부상했다. 8월에 이르러 고시라카와 법황은 삼종의 신기 없이 그대로 새 주상을 즉위시킬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안토쿠 덴노에게 기대를 걸지를 두고 점쳐보게 한 후, 점을 친 결과를 가지고 측근인 구조 가네자네(九條兼實)에게 칙문했다. 결과는 후자인 안토쿠였지만 당시 헤이케 토벌을 위해 새로운 주상을 세울 의사를 굳히고 있었던 법황은 재차 점치게 해 '길흉이 반반'이라는 결과를 얻어냈다.고시라카와 법황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불만을 가진 구조 가네자네였지만, 천자의 자리를 하루라도 비워둘 수 없다는 입장에서 새로운 주상을 세우는 데 찬동했고, 선대 게이타이 덴노도 즉위 이전에 이미 천황을 칭하고 그 다음에 삼종의 신기를 받았던 선례가 있다는 대답을 전했다. 다만 《일본서기》에 이런 기술은 없고 그냥 구조 가네자네의 오인이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10일에 고시라카와 법황은 재차 좌•우•내대신 등에게 의견을 요구했으며 나아가 박사들에게까지도 자문을 요구했다. 그 가운데 후지와라노 도시쓰네(藤原俊經)가 올린 <이려파자류초>(伊呂波字類抄)가 있었는데,
"신기는 신령한 물건이니 (정당한 주인에게) 반드시 돌아갈 것이다"(神若爲レ神其寶蓋歸)
라고 하여, 신기 없이 즉위할 새로운 천황을 지지하는 내용이었다.새 주상의 후보로 호쿠리쿠노미야(北陸宮)가 거론되기도 했지만, 고시라카와 법황은 안토쿠 덴노의 이복동생이었던 4세의 다카히라 친왕을 즉위시키기로 결정했다. 《구칸쇼》에는 제4황자의 성격이 좋고 낯가림도 심하지 않은 점을 법황이 높이 샀다고 하고, 아울러 법황의 후궁이었던 단고노 쓰보네(丹後局)도 찬동했다고 한다. 8월 20일, 태상천황인 고시라카와 법황의 인센(院宣, 원선)을 받는 형태로 천조(踐祚)를 거행했다. 그 의식은 삼종의 신기가 없다는 것을 빼고는 양위의 예를 그대로 모방해 행했고, 즉위식도 마찬가지로 겐랴쿠(建曆) 원년(1184) 7월 28일에, 똑같이 신기가 없이 행해졌다. 안토쿠 덴노가 퇴위하지 않은 채 즉위했기에, 1183년부터 헤이케가 멸망하는 1185년까지 두 천황의 재위기간이 2년 겹친다.
단노우라 전투로 헤이케가 멸망하면서 다른 헤이케 일문의 사람들과 함께 안토쿠 덴노도 바다에 투신 자살했지만, 삼종신기 가운데 보검만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채 결국 회수되지 못했다. 분지 3년(1188) 9월 27일, 보검의 수색을 맡았던 사에키 가게히로(佐伯景弘)로부터 보검을 찾는데 실패했다는 보고가 전해진 뒤 수색은 사실상 중지되었다. 이후 겐큐(建久) 원년(1190) 1월 3일에 행해진 천황의 원복 의식도 삼종신기가 모두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조겐(承元) 4년(1210)에 준토쿠 덴노의 천조에 즈음해서 이미 상황으로 물러나 있었던 고토바 덴노는, 삼종신기가 교토로부터 꺼내지기 1개월 전에 이세 신궁에서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헌상했던 검을 보검 대신으로 간주하기로 했다. 하지만 고토바 상황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겐랴쿠 2년(1212)에 다시 게비이시(검비위사)인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秀能)를 서쪽으로 파견해 보검 탐색에 임하도록했다.
'전통'을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궁정 사회에 있어서 황위의 상징인 삼종의 신기가 갖추어지지도 않은 채 치세를 보냈던 고토바 덴노에게 이것은 일종의 '컴플렉스'로 그가 폐위되어 붕어하는 순간까지도 이어졌다. 그의 천황(혹은 상황)으로서의 치세를 비판할 때면 으레 튀어나오는 것이 바로 신기의 부재였다. 이것을 천황의 부덕과 연결지어 말하는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 일련의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황권의 존재를 안팎으로 드러낼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그의 과격한 성격만큼이나 강경적인 정치 자세, 나아가 조큐의 난이라고도 부르는 그의 인생 그리고 일본 천황가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끔찍했던 역사의 원인이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고토바 천황은 자신이 무예와 수렵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성격 또한 과격하고 불같아서, 어느 날에는 죄를 짓고 게비이시에게 붙들려온 도적을 심문하는 자리에서 직접 도적의 팔을 잡아 비틀기도 했다고 한다.
2.2. 치세와 인세이(원정)
겐큐 3년(1192) 3월까지는 고시라카와 법황이 인세이(院政)를 통해 조정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 사후에는 관백 구조 가네자네(九条兼実)가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 시기 덴노로 즉위한 고토바는 명목상 군주에 불과했고, 정치적 실권은 거의 행사하지 못하였다.가네자네는 고시라카와가 끝까지 경계하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 정이대장군 직위를 수여함으로써, 가마쿠라 막부와 조정 간의 공식적 연계 체제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이후 요리토모의 딸 오오히메(大姫)의 입궁 문제를 둘러싸고 양측 관계가 소원해졌고, 결정적으로 겐큐 7년(1196), 쓰치미카도 미치치카(土御門通親)의 양녀가 황자를 출산한 것을 계기로 조정 내 정변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인해 구조 가네자네는 정계에서 축출되었고, 가네자네의 딸이자 중궁이었던 구조 닌시(任子) 또한 궁중에서 쫓겨났다. 이 사건의 배후에 오오히메 사건으로 가네자네와 사이가 틀어진 요리토모의 묵인 내지 간접적 개입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겐큐 9년(1198) 1월 11일, 고토바 덴노는 황자 타메히토(爲仁)에게 양위하고 상황(上皇)이 되었다. 그리고 조큐(承久) 3년(1221)까지, 쓰치미카도·준토쿠·주쿄 등 세 덴노에 걸쳐 무려 23년에 걸친 인세이 체제를 직접 주도하였다. 요리토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했는데, 후대에는 고토바가 막부와의 권력 분점을 넘어 조정 주도권을 되찾고자 한 정치적 야심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한다.
고토바 상황은 황실 외척인 미치치카마저 배제하고, 덴조비토(殿上人)[3]에 대한 인사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원래 재위 중 임명된 덴조비토는 퇴위 후에도 관례적으로 인(院)의 덴조비토로 전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고토바는 이러한 관례를 무시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세력 중심으로 조정 구조를 재편하였다. 이로써 고토바는 단순한 명예직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냈다.
거기에 더해 인쵸(院廳, 원청)의 개혁을 단행하는 등 적극적인 정치 노선을 채택하였으며,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망한 겐큐(建久) 10년(1199) 이후에는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에 대해서도 강경한 태도로 노선을 전환했다. 쇼지(正治) 3년(1201)에는 백수의 와카(和歌)를 짓게 하는 문학 기획인 《백수가(百首歌)》를 주도하였으며, 이때 후지와라노 사다이에를 작가로 발탁하였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와카를 매개로 긴밀한 교류를 이어가게 되었다.
이듬해 겐닌(建仁) 원년(1201) 7월 27일, 고토바 상황은 궁중 내에 와카쇼(和歌所, 화가소)를 설치하고, 와카 문학의 부흥을 국정 과제로 삼았다. 그 결실로 겐닌 2년(1202)에는 새로운 와카집인 《신고킨와카슈(新古今和歌集)》가 편찬되었으며, 이 와카집의 서문에서 고토바 상황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와카는 세상을 통치하고, 백성의 마음을 온화하게 만드는 길이다."
이 문장에서 드러나듯, 고토바 상황은 와카를 단순한 문학을 넘어 정치적 통치 수단으로 간주하였고, 덴노 친정 체제의 정당성을 문화적으로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신고킨와카슈》가 편찬된 바로 그해, 권세를 누리던 구조 가네자네는 출가하였고, 정치 실세였던 쓰치미카도 미치치카도 급사하였다. 이미 고시라카와 법황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마저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고토바 상황은 실질적 의미에서 명실상부한 치천지군(治天の君)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이듬해인 겐닌 3년(1203), 고토바 상황이 주도한 지모쿠(除目, 헤이안 시대 여러 관리의 임관 의식)는 이러한 권력 집중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지모쿠와 관련하여 후지와라노 사다이에는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모쿠는 숫제 예려(叡慮)[4]에 치우친 것이었다고 한다"
이는 덴노 또는 상황이 직접 국정을 주도하고자 한 고토바의 정치적 열망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공사의 재흥, 궁중 의례의 정비 등 제도적 측면에서도 친정 체제의 복원을 도모하였으며, 덴노 중심 질서를 재건하려는 시도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궁극적으로 가마쿠라 막부와의 정면 충돌로 이어졌고, 그 난관은 실로 ‘호랑이의 꼬리를 밟는 것’과도 같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요리토모 사후 시간이 흘러, 그의 넷째 아들 센만(千幡)이 1203년 가마쿠라 막부의 제3대 쇼군으로 옹립되자, 고토바 상황은 직접 사네토모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이후 고토바는 사네토모에게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며, 막부 내부에 교토 조정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막부 측에서도 자식이 없던 사네토모의 후계자로 고토바의 아들을 맞이하는 방안을 모색하면서, 황족 쇼군(宮將軍)을 통한 신생 무가정권의 안정을 꾀하였고, 이로써 양자는 요리토모 사후 오랜만에 한동안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사네토모의 쇼군 취임을 계기로 고토바 상황은 한동안의 적대적 태도를 버리고 보다 적극적인 대막부 공작에 나섰다. 막부의 요청에 따라 사네토모에게 새로운 관직을 수여했으며, 자신의 측근인 보몬 노부키요(坊門信淸)의 딸을 사네토모에게 출가시켰다. 또한 사네토모의 문학적 스승으로 박사 미나모토노 나카아키라(源中章)를 가마쿠라로 파견하기도 했는데, 요리토모 사후 막부의 실권을 장악한 싯켄 호조씨를 견제하기 위한 술책이란 평이 있다.
그러던 중, 막부와 조정의 관계에 결정적 전환점이 되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네토모가 츠루가오카 하치만궁에서 조카 구교(公曉)[5]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이 사태는 단순한 권력 암투를 넘어, 조정과 막부 양측이 구상하던 권력 재편의 계획마저 흔들리게 만들었고 특히 막부가 추진하던 ‘황족 쇼군’ 구상이 무산되고 말앗다.
사네토모 사후 고토바 상황은 황족 쇼군을 파견하려는 구상을 유지하는 명목으로 자신이 총비(寵妃)에게 하사한 영지 내에 설치된 막부 지토(地頭)를 철폐하라고 요구했으나, 막부가 이를 거부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결국 막부는 요리토모와 먼 친척에 해당하는 구조 가문의 인물 미토라를 데려다 후지와라노 요리츠네라는 이름으로 원복시키고, 제4대 쇼군으로 옹립하였다. 이른바 섭가(摂家) 쇼군 체제의 시작이었다. 미나모토 가문이 아닌 쇼군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고토바 상황의 계획과 달리 실질적으로 싯켄 호조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체제가 됐고, 조정과 막부의 사이는 다시 소원해져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조큐 원년(1219), 다이리(大內裏)의 슈고(守護)를 맡고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모치(源賴茂)가 고토바 상황의 경호무사 조직인 사이멘노 부시(西面武士)의 습격을 받아 인수전(仁壽殿)에서 살해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그 배경에 대해선, 요리모치가 쇼군 자리를 노렸다는 설, 혹은 고토바 상황의 가마쿠라 토벌 계획을 눈치챘기 때문에 입막음을 당했다는 설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이때 당시 화재로 인수전을 비롯해 의양전(宜陽殿), 교서전(校書殿) 등 여러 전각이 함께 소실되었는데, 고토바 상황은 상경(上卿) 미나모토노 미치토모(源通具)에게 명하여 대궐 복구 사업을 지시하고, 각 국마다 요역(徭役)을 매겼다.
그러나 동국(東國)의 지토들이 이에 협조하지 않아, 결국 서국(西國)의 재정만으로 다이리 복구가 진행되었다. 당시 막부가 주도권을 지닌 동국에서의 부역 거부는 조정과 막부 간 갈등이 이미 수면 아래서 깊어지고 있었음을 방증한다. 막부가 이때부터 이미 조정의 권위에 등을 돌린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강제할 권력이 조정에 없었던 것인지는 오늘날까지도 불분명하고. 다이리의 재건이 조큐의 난 이전에 완료되었는지, 난으로 인해 중단되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복구 사업이 교토 조정이 주도한 마지막 대규모 공사였다는 점이다
2.3. 조큐의 난과 천황 권력의 추락
조큐 3년(1221) 5월 14일, 고토바 상황은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호조 요시토키에 대한 토벌(誅討)을 명령하는 선지(院宣)를 내리고, 기나이(畿内)를 비롯한 인근 여러 국들의 병사들을 소집해 막부 타도의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곧바로 가마쿠라 막부의 대규모 반격을 불러왔고, 고토바 측은 결국 완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조큐의 난(承久の乱)이다.불과 두 달 뒤인 7월 9일, 요시토키의 장남인 호조 야스토키는 무려 19만 기(騎)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교토 코앞까지 진군하였다. 처음부터 이런 대군이었던 것은 아닌데, 야스토키가 가마쿠라에서 출발해 오는 길에 각지 무사들이 자신의 이해득실을 저울질한 끝에 자발적으로 막부 편에 가세한 결과였다. 한편 싯켄 요시토키는 야스토키를 출병시킨 뒤 고토바인의 사자를 돌려보내며 이런 조롱 섞인 ‘블러핑’을 남겼다고 한다.
인(院)께서 싸움을 즐기시는 듯하여, 동생 도키후사(北条時房)와 아들 야스토키에게 19만 기를 주어 보냈습니다. 부족하시거든 발 빠른 사자를 다시 보내주십시오. 그 즉시 나 요시토키가 20만 기를 거느리고 교토로 올라가 인께서 주렴 뒤에서 편히 싸움을 관전하시도록 해드릴 터이니.
사실 어디까지나 허세에 불과했는데 야스토키가 출병한 직후, 요시토키에게 "만일 상황께서 직접 출전해 지휘하고 계신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고, 요시토키는 "신하가 임금에게 활을 겨눌 수는 없다. 상황께서 몸소 출전했다면 활시위를 끊고 항복하라. 그러나 단지 병력만 왔다면 전력을 다해 깨부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는 가마쿠라 막부 초기까지도 “신하가 국왕에게 함부로 칼을 겨눌 수는 없다”는 인식이 여전히 유효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 일화는 아즈마카가미의 서술이므로, 어느 정도의 편향이 개입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야스토키의 군세가 교토에 도달하면서 고토바 상황은 패배를 인정하고 오키 제도로 유배되었고, 함께 막부 타도에 협력했던 준토쿠 상황도 사도섬으로 유배되었다. 이에 앞서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이었던 쓰치미카도 상황은 화를 피하기 위해 자진해 토사(土佐)로 거처를 옮겼다. 이 외에도 마사나리(雅成) 친왕은 다지마(但馬)로, 요리히토(賴仁) 친왕은 비젠(備前)으로 유배되었다.
황실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4세에 불과했던 주쿄 덴노가 재위 3개월 만에 폐위되었고, 다카쿠라 덴노의 손자인 시게히토 왕(茂仁王)이 고호리카와 덴노로 즉위했다. 덕분에 고호리카와의 부친이자 즉위한 적이 없던 고타카쿠라인(後高倉院)이 명목상의 인세이(院政)를 맡게 되었다.
고토바 상황은 오키에 유배되기 직전 출가하여 법황이 되었다. 분랴쿠 2년(1235) 봄, 섭정이었던 구조 미치이에(九條道家)가 고토바 법황과 준토쿠 상황의 귀환을 막부에 건의했으나, 싯켄이 된 호조 야스토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메이게쓰키(明月記)는 전한다.
엔오 원년(1239) 2월 20일, 고토바 법황은 유배지 오키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후 3개월 뒤에는 '겐토쿠인(顯德院)'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닌지 3년(1242) 6월, 호조 야스토키가 사망하자 구조 미치이에가 시호 변경을 제안했고, 고토바 상황은 마침내 공식적으로 '고토바인(後鳥羽院)'이라는 원호를 얻게 되었다. 이는 같은 해 7월, 고타카쿠라 황통이 단절되고 쓰치미카도 상황의 아들 고사가 덴노로 즉위한 것과 때를 같이했다.
한편 고토바 상황이 오키에 유배되어 읊었다는 와카가 《원도백수》에 남아 있다.
われこそは/にゐじま守よ/隠岐の海の/あらきなみかぜ/心してふけ
여기 이 몸이 새로이 머무노라. 저 오키 앞바다의 매서운 파도들아, 조심하고 삼가라.
여기 이 몸이 새로이 머무노라. 저 오키 앞바다의 매서운 파도들아, 조심하고 삼가라.
3. 가족관계
- 중궁 기쇼몬인(宜秋門院) 후지와라노 닌시(藤原任子)(1173-1238) - 쿠죠 카네자네(九条兼実)의 딸
- 제1황녀 슌카몬인(春華門院) 쇼시 내친왕(昇子 内親王)(1195-1211)
- 비 쇼메이몬인(承明門院) 미나모토노 자이시(源 在子)(1171-1258) - 호쇼지(法勝寺) 승려 노엔(能円)의 딸이자, 미나모토노 미치치카(源 通親)의 양녀
- 제1황자 다메히토 친왕(為仁親王)
- 비 슈메이몬인(修明門院) 후지와라노 쥬시(藤原重子)(1182-1264) - 다카쿠라 노리스에(高倉範季)의 딸
- 제3황자 모리나리 친왕(守成 親王) - (준토쿠 천황)
- 제6황자 야스나리 친왕(雅成 親王) (1200-1255)
- 제8황자 손카 입도친왕 히로나리 친왕(尊快 入道親王 寛成 親王))(1204-1246)
- 갱의(更衣) 비초노 츠보네(尾張局) (?-1204) - 승려 호겐(法眼) 겐세이(顕清)의 딸
- 제9황자 도카쿠 법친왕 아사히토 친왕(道覚 法親王 朝仁 親王)) (1204-1250)
- 전시(典侍) 소납언 전시(少納言典侍) 후지와라 씨(藤原氏)
- 제5황자 도슈 법친왕(道守 法親王) (1198-?)
- 후궁 보몬노 츠보네(坊門局) 후지와라 씨(藤原氏) - 보몬 노부키요(坊門 信清)의 딸
- 제2황자 도조 법친왕 나카히토 친왕(道助 法親王 長仁 親王) (1196-1249)
- 제3황녀 가요몬인(嘉陽門院) 레이시 내친왕(礼子 内親王) (1200-1273)
- 제7황자 요리히토 친왕(頼仁 親王) (1201-1264)
- 후궁 효에토쿠노 츠보네(兵衛督局) 미나모토씨(源氏) - 미나모토노 노부야스(源 信康)의 딸
- 제2황녀 슈쿠시 내친왕(粛子 内親王) (1196-?)
- 후궁 다이쿠노 츠보네(大宮局) 후지와라씨(藤原氏) - 후지와라노 사다요시(藤原定能)의 딸
- 10황자 손엔 법친왕(尊円 法親王) (1207-1231)
- 황자 고추 법친왕(行超 法親王)
- 후궁 이가노 츠보네(伊賀局) 키키(亀菊)
- 후궁 다키(滝) (?-1265)
- 제4황자 가쿠닌 법친왕(覚仁 法親王) (1198-1266)
- 후궁 우에몬토쿠노 츠보네(右衛門督局)
- 제4황녀 히로코 내친왕(凞子 内親王) (1205-?)
- 후궁 부노키호시(舞女姫法師)
- 황자 가쿠요(覚誉)
- 황자 도엔(道縁)
- 황자 도이(道伊)
==# 천황 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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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고토바 덴노는 무슨 일이든 자신이 몸소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고, 이는 할아버지 고시라카와인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기도 했다. 활을 쏘는 등의 무예나 스모에 관심을 갖기도 했고, 천황 자신이 몸소 칼을 담금질하는가 하면 도적 포획을 지휘하기도 했다. 《조큐기》에는"수영과 스모뿐 아니라 아침, 저녁으로 무예를 일삼고 밤낮으로 무기를 정리하며 병란에 대비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기 위해 몸소 군사를 일으킨 것도 그러한 황권 과시적 행위의 하나였다. 그는 조큐의 난을 통한 막부 타도를 통해 막부를 공가정권하에 통합하고자 했다. 그러한 통합을 먼저 문화적으로 표현한 것이 거듭된 와카에 대한 관심이나 제3대 쇼군 사네토모에 대한 유화책이었고, 이것이 실패하자 결국 무력을 써서 거병했던 것이다.겐큐 3년(1206) 친정을 시작하고부터 천황의 정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와카의 달인이었던 후지와라노 사다이에(데이카)를 비롯해, 경제적으로 고토바 천황을 섬긴 미나모토노 나카쿠니(源仲國)와 그 동생으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미나모토노 나카아키라, 스모에 뛰어났고 가마쿠라 막부와의 교섭을 맡았던 후지와라노 타다쓰나(藤原忠綱), 궁예와 와카로 고토바 천황에게 인정받은 미나모토노 도모치카(源具親), 축국과 와카 시중을 들었던 아스카이 마사쓰네(飛鳥井雅經) 그리고 조큐의 난 당시 교토 조정측 군사를 지휘했던 후지와라노 히데야스(藤原秀康) 등이었다.
고시라카와 법황이 붕어한 뒤 스스로 친정했고, 인세이도 행했지만, '치천의 군'으로서 쓰치미카도 천황을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총애하던 준토쿠 천황을 앉혀 그 자손이 황위를 잇도록 한 일에 대해서는 당시의 귀족 사회는 물론 다른 황자들의 불만까지 불러 일으켰고[6] 인(院)의 전제적인 폭정때문에, 막부 토벌이라는 무모한 계획에 대해서 소수의 인의 근신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귀족들이 싸늘하게 대응했다. 때문에 조큐의 난 이후 이루어진 가마쿠라 막부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라는 상황을 제외하더라도 고토바인을 동정하는 의견은 적었고, 《구간쇼》(愚管抄),《로쿠다이승사기》(六代勝事記),《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등의 문헌들 또한 모두 고토바인의 최후를
"패도(覇道)를 지향한 정책이 불러온 자업자득"
이라며 냉혹하게 평가했다. 조큐의 난 참고.조큐의 난 이후 막부의 동의없이 황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된 교토의 조정, 즉 구게 정권은 정치의 자율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간겐 2년(1244)에 고토바 상황을 위한 추선팔강(追善八講) 법회가 구게가 참석하는 조정 차원의 행사로 격상되었고, 특히 고사가 상황은 호지(宝治) 2년(1248)에 앞서 고토바 상황이 정한 행사로서 제도화했다가 조큐의 난으로 중단된 인노고쇼에서의 최승강(最勝講) 법회를 '선례'로 부활시켰다. 이는 쓰치미카도 천황 계통인 고사가 천황(상황)이 황위 계승 문제를 놓고 긴장 관계에 있었던 준토쿠 천황 계통의 타다나리 왕(忠成王, 주쿄 천황의 남동생)과 맞서기 위해 쓰치미카도 계통이 고토바인의 정통 후계자임을 주장할 필요가 있었고, 그 전제 조건으로서 고토바인의 명예를 회복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타다나리 왕 지지파를 억제하고, 고사가 천황의 즉위를 강행한 가마쿠라 막부의 묵인 이후에 이루어진 행위였다.
이러한 정치적 의도하의 고토바인 복권에 수반하여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한 뒤에는 가인(歌人)으로서의 고토바인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도 높아져서, 《마스카가미》(增鏡)에서의 고토바인의 이미지는 이러한 와카를 비롯한 궁정 문화의 옹호자로서의 측면이 보다 강조되고 있다.
4.1. 칼덕후 천황
일본도에 관심이 매우 깊은 칼덕후이기도 했다. 고토바 덴노는 겐페이 쟁란 중에 삼종신기의 하나인 신검 아마노무라쿠모노츠루기를 잃어버렸다는 점에 큰 죄책감을 가져[7] 일본도에 집착하게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 타도가 한참이던 시기에 이름난 일본도 장인들을 초빙하여 명검의 제작을 주문했는데, 이때 만들어진 일본도에는 국화가 새겨져 있어서 키쿠이치몬지(菊一文字)라고 불린다. 뿐만 아니라 황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자신이 직접 제자가 되어 칼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가 만든 일본도에도 국화 문양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키쿠고사쿠(菊御作)라고 부른다. 일본 천황가의 상징이 국화가 된 것은 이로부터 유래한 것이었다.5. 원령
안 알려져서 그렇지, 이 사람도 원령 소문이 돌았던 사람이다. 유배된 뒤인 가테이(嘉禎) 3년(1237)에 고토바인은"만일 이 세상의 망념에 끌려 마연(마귀)이 된다면 나는 이 세상에 재앙을 가져올 것이다. 내 자손이 세상을 차지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내 힘에 의한 것이다. 내 자손이 세상을 취하게 되는 날, 나의 명복을 빌게 하라."
라는 치문(置文)을 기록했다. 또한 《히라도기》에는 미우라 요시무라(三浦義村)나 호조 도키후사(北条時房)의 죽음을 고토바인의 원령 때문이라고 적은 기술이 있어서 그 무렵부터 이미 원령이 되었다고 여겨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찾아보면 원령신의 정점을 찍는 스토쿠 덴노가 아니더라도 일본 덴노나 황족들 중에 저주나 원령 소문에 엮인 사람이 상당히 많다. 오죽하면 누구도 황위까지 노리지 않는 원인이었다는 '일본 덴노의 신격화'라는 것이 저주를 내리는 원령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냐는 추측이 있을 정도이다. 흠좀무.
6. 백인일수
百人一首 백인일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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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번 고토바 덴노(後鳥羽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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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다 원망스러운 사람 속절없는 세상 덧없이 생각 되네 괴로운 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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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하다 원망스러운 사람 속절없는 세상 덧없이 생각 되네 괴로운 이 마을
[1] 선황인 안토쿠 덴노의 연호 습용.[2] 간무 헤이시의 분파였다.[3] 정6위 이상의 고위관직자 중 덴노의 거처인 청량전에 오를 자격을 갖추었던 측근들을 의미한다.[4] 임금의 뜻을 말한다.[5] 제2대 쇼군 요리이에의 아들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있었다.[6] 앞서 말했듯이 삼종의 신기가 없이 즉위한 점도 고토바 상황에 대한 악평을 부추겼다.[7] 죄책감도 죄책감이지만 삼종의 신기 없이 즉위한 덴노라는 점이 즉위 내내 고토바 덴노의 발목을 잡았다. 격식이나 예법, 전통 같은 것에 목숨을 거는 상류 귀족사회에서 천황의 상징과도 같은 삼종의 신기도 없이 즉위했다는 점은 고토바 덴노 자신이 천황으로서의 자격이 있는가의 여부에 대한 문제 제기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실제로 고토바 덴노를 안 좋게 보던 귀족들은 천황이 뭔가 실책 비스무리한 것을 하거나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이게 다 하늘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천황 때문이다! 하늘이 내려주신 천황의 신기를 제대로 간수 못해 잃어버린 천황을 하늘에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나라에 안 좋은 일만 터진다!"라고 걸고 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