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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1 21:55:08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

고대생 습격 사건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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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641B27,#e5e5e5> 1960 4.18 학생 시위
2011 의과대학생 성추행 사건
2013 김지훈 일병 자살 사건
화공생명공학과 살인 사건
2017 독어독문학과 학생회 신고자 사과요구문 사건
2019 조민 부정입학 의혹
2020 집단 부정행위 사태
2021 비대면 수업 신음 사건
2022 의대생 불법촬영 사건
개별 문서가 없는 사건에 대해서는 고려대학교/사건사고 문서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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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4.18 기념비.jpg
고려대학교에 있는 4.18 기념비[1]
1. 개요2. 설명
2.1. 고려대생 사망자 1명 발생2.2. 4.18 고려대생 부상자 명단, 국가문화재로 지정2.3. 깡패들의 최후2.4. 고려대학생 4.18 선언문2.5. 조지훈 시인의 헌시
3. 다른 매체에서4. 관련 문서5. 참고 문헌

1. 개요

친애하는 고대 학생 제군!
한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만약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말할 나위도 없이 학생이 상아탑에 안주치 못하고 대사회투쟁에 참여해야만 하는 오늘의 이십대는 확실히 불행한 세대이다. 그러나 동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악랄한 현실을 방관하랴.

존경하는 고대 학생 동지 제군!
우리 고대는 과거 일제하에서는 항일투쟁의 총본산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전선의 전위적 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하겠다.

고대 학생 동지 제군!
우리는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총궐기하자.
고려대학교 4.18 선언문 (1960. 4. 18.)

3.15 부정선거자유당의 독재를 규탄하기 위하여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서울에서 벌인 학생 시위. '4.18 의거'라고도 한다.

평화적인 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가 동원한 정치깡패들이 시위 후 돌아가는 학생 시위대를 습격하여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국민들이 분노하게 되어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2. 설명

3.15 부정선거 직후 부산, 대구 등 전국적으로 번져나간 시위는 4월에 들어서야 서울에도 상륙했다.[2]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을 중심으로 대학 연합 시위가 본격적으로 계획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4월 11일 김주열 군의 유기되었던 시신이 마산항 부두에서 발견되며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러한 사건들은 초기에는 시위에 다소 미온적이었던 대학생들도 거리로 뛰쳐나오게 만들었고[3] 4월 15일에 있었던 합의에 따른 서울 시내 대학의 전체 거사일은 21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선수를 날린 것은 고려대학교였다. 마침 고려대 총학생회에서는 4월 16일 전체 신입생 환영회를 준비하고 있었으며[4] 이때 학생들이 모인 틈을 타서 한꺼번에 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학내에 상주하고 있던 경찰의 움직임이 감지되었고 고려대 총학생회에서는 이 행사를 18일로 연기한다.[5]

파일:external/cham4.jinbo.net/4.18%EA%B5%AD%ED%9A%8C.gif

당일인 18일, 10시 50분 '인촌 동상 앞으로!'라는 신호에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 명은 고대 본관 앞에 있는 인촌 동상 앞에 모여, "민주역적 몰아내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태평로 국회의사당[6] 앞까지 행진하면서 재선거 실시를 요구했다. 행진 도중 경찰의 곤봉에 맞아 여러 사람이 쓰러지기도 했다. 지켜보던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대를 응원해 주기도 했다고.

국회의사당에서 유진오 당시 고려대 총장과 이철승 의원[7] 등과 면담한 학생들은 일단 저녁이 되자 집회를 해산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일부는 국회의사당 앞에 남아 농성을 결정했다. 나머지 시위대는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안전하게 학교로 복귀하기로 했다. 이때에도 복귀하는 동안 경찰로부터 평화시위를 할 수 있도록 보장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경찰차가 갑자기 시청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을지로 쪽으로 갔다. 경찰차가 깡패 습격을 위해 원래 경로가 아닌 다른 경로로 유도한 것이다.[8]

어쨌든 평화시위를 하면서 학교로 돌아가던 중 청계4가에서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과 동대문파 소속 정치깡패들에게 습격받아 수십 명의 학생들과 몇 명의 기자들이 부상을 입었다. 이후 비교적 경미한 부상을 당한 학생들은 깡패들은 나오라는 구호를 외치며 학교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아직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후술할 '학생 1명 사망?'의 주인공 되겠다.

당시에도 언론의 자유는 명목상으로나마 보장되어 있었으므로 학생들이 정치깡패에게 구타당하여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사진이 다음날 조간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이를 본 전국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크게 분노했다. #기사 당시 사진

지금도 그렇지만 대한민국에는 학문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의 기풍이 짙게 남아 있었으며 학생 인구의 대다수가 대학 교육을 거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 이후와는 달리 문맹 퇴치 교육으로 겨우 문맹에서 벗어난 세대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부모님 일을 돕거나 따로 취직을 해서 밥벌이를 하는 경우가 많던 때가 바로 이 시절이었다. 따라서 당시 대학생이라고 하면 21세기 대학원생의 위치도 가볍게 넘어서는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들이며 그야말로 앞으로 사회를 짊어지고 갈 동량이 될 인재로서 여겨졌기 때문에 국민들의 분노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9] 그리고 정치깡패들은 일반 사회에서는 인간 쓰레기로 여겨지고 있어서 이후 군사 정권에서는 마구 사형시켜도 반발이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학생 한 명이 한쪽 눈을 심하게 다쳐 사경을 헤맬 정도로 다치는 바람에 병원으로 옮겨져 기사 표제로 '학생 1명 피살?'이라고 나갔는데, 물음표가 실제로 보면 눈에 띄지 않았기에 "깡패 새끼들이 대학생을 때려죽였다더라!"로 와전되어 시민들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특히 동아일보가 이를 앞장서서 보도했다. 동아일보 사주인 김성수가 인수한 보성전문학교가 고려대의 전신이었기 때문.[10] 그러나 동아일보는 이미 2월부터 특집코너로 부정선거 관련속보를 전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날 보도도 그의 연장선이라고 추측된다.[11]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에는 이 날을 기리는 의미에서 4.18기념관이 존재한다. 다만 4.18과 관련된 전시 공간은 아니며 교내 부처 사무실 혹은 복지공간으로 사용된다. 관련 전시물 관람은 고려대학교 박물관 백년사전시실에서 가능하다. 또한 4.18 구국대장정 혹은 정파에 따라서는 민중해방대장정이라 부르기도 하는 행사를 통해 매년 4.18을 기리고 있다.

그런데 이 당시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구타를 당한 건 사실인데 깡패들이 먼저 학생들한테 시비 걸었다가 발리고 쪽팔린 나머지 나중에 몰래 습격해 구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미 낮부터 학생들과 깡패들의 소규모 충돌은 있었고[12] 이러한 것이 누적되어서 학생들이 동대문파의 구역에 들어섰을 때 대규모 충돌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를 주장하는 쪽은 주로 당시의 깡패들이다. 자신들이 한 일이 계획적인 집단 폭력이 아닌 우발적인 일이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애초에 시위하고 있는 군중에게 시비를 건 것부터 무리수였다. 게다가 고려대학교 항목의 '야사모음집'에도 나와 있지만 당시 고려대생들은 어지간한 깡패들보다 더 깡패 같은 학생들이었다.[13] 실제로 깡패가 쇠갈고리를 들고 "야 이 새끼들아!"라고 시비를 걸어서 한 학생이 "뭐 임마?"라고 대꾸했더니 그 학생이 깡패가 형님으로 모시는 학생이어서 깡패가 "어이쿠 형님"하고 조용히 사라졌다는 일화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대 학생 측에서도 부상자가 꽤 많이 나왔고 심지어 깡패들에게 서서히 밀리기도 했다. 이때 고려대학교 공수도부(現 태권도부)의 부장인 사학과 주석환이 "고대 죽었느냐, 공격 개시!"라고 외쳐서 고대생이 반격에 들어갔고 결국 깡패들은 퇴각했다.[14]

2.1. 고려대생 사망자 1명 발생

고대신문 관련 기사

4월 18일의 사건으로 인하여 고려대는 60년 동안 4.19 혁명으로 인한 사망자가 없던 기이한 학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4월 19일 당일에는 이미 시위 대오가 지친 상태였던 데다 제1공화국의 경찰력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가운데 학생회 간부들이 수배령이 떨어진 상태여서 조직적으로 대열을 움직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4.18 고대생 의거의 60주년을 맞는 2020년에 60년만에 4.19 혁명의 고려대 희생자를 발견하였다. 유일한 고대생 4.19 혁명 희생자로 확인된 김왈영(金曰寧)은 서울 출신으로 1935년 7월 3일생이다. 서울 중앙고등학교[15]를 졸업해 1954년 4월 1일 고려대학교 문리대 화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1956년 휴학하고 군에 입대했다가 전역한 후 1960년 4월 당시에는 복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왈영 열사는 4월 19일 데모 학생들이 탄 차를 몰고 경무대 입구 바리케이드를 뚫다 목에 총상을 입었다. 이후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오후 5시경 사망했다.

한동안 조명되지 않았으나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2020년 '4.18 의거 60주년 특별전'을 위해 전시 자료를 준비하던 중 언론에 보도된 사망자 명단 속 ‘고대문리대 김일녕’을 찾았다. 검토 끝에 '김일녕'이 고대생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국립4·19민주묘지 안장자 기록과 ‘김일녕’이라는 이름으로 전산화된 고려대학교 학적부의 생년월일과 사진을 비교해 본 결과 '김왈영'임을 확인했다.

이는 당시 보도 과정에서 ‘김왈영’의 ‘왈(曰)’을 ‘일(日)’로 착각하고 ‘김일녕’이라 오기한 탓이었다. 게다가 김왈영 열사도 휴학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4월 18일 고려대학교 시위 대열에는 참여하지도 않았고 당일 경무대로 나간 것도 홀로 나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가지 우연이 기가 막히게 겹쳐서 60년 동안 고대 출신 사망자가 밝혀지지 않은 것. 물론 그렇다고 해도 학생회 주도 공식 대열에서 사망자가 없었던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2.2. 4.18 고려대생 부상자 명단, 국가문화재로 지정

관련 기사

문화재청은 2020년 4.19 혁명 60주년을 맞아 '고려대생 시위대 피습 사건' 부상자 명단을 공개했다.

이 문서에는 4월 18일 당시 고려대 학생들이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돌아오는 길에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은 상황이 드러나 있다. 자세히는 "곤봉 엇개(어깨) 맞다", "머리 터지다", "천일 백화점 근처에서 깡패의 몽둥이로 후두부를 맞고 실신" 등의 구체적인 표현이 기재되어 있다.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의 학과, 학번, 이름, 부상 정도 등 또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2020년 4월 9일, 문화재청은 이를 포함한 4.19혁명 관련 문화유산 7건을 국가문화재로 등록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그중에서도 '고려대생 부상자 명단'은 2020년 상반기 우선 등록을 추진하기로 했다.

문화재청은 ​당시 정황을 자세히 알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높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민주화 문화유산으로는 최초로 지정된 국가문화재인 셈.

2.3. 깡패들의 최후

나중에 이 습격을 지휘한 임화수와 습격을 현장에서 주도했던 신정식5.16 군사정변 이후 체포되었고 혁명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정재의 부하인 낙화유수는 죽을 때까지 이 사건이 우발적이었으며 학생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서 발생했다고 주장했지만 현장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동아일보 기자에게 계획적이었다고 반박당하는 등 많은 이들에게 비판받았다.

2.4. 고려대학생 4.18 선언문

친애하는 고대학생제군!

한 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생생한 증언자적 사명을 띤 우리들 청년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만고 이와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말할 나위도 없이 학생이 상아탑에 안주치 못하고 대사회투쟁에 참여해야만 하는 오늘의 20대는 확실히 불행한 세대이다. 그러나 동족의 손으로 동족의 피를 뽑고 있는 이 악랄한 현실을 방관하랴.

존경하는 고대학생동지제군!

우리 고대는 과거 일제하에서는 항일투쟁의 총본산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경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전선의 전위적 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하겠다.

고대학생동지제군!

우리는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총궐기하자.

구호
하나.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하나.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하나. 우리는 행동성이 없는 지식인을 배격한다.
하나. 경찰의 학원출입을 엄금하라.
하나.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치 말라.
고려대학생 4.18 선언문

1960년 4월 18일 오후 12시 50분 박찬세 고대신문 편집국장이 쓰고 이세기 정경대 학생위원장이 읽었다.

2.5. 조지훈 시인의 헌시

이날의 시위를 지켜본 이들 가운데 1947년부터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시인 조지훈이 있었다. 이틀 뒤인 4월 20일에 조지훈은 고대신문에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어느 스승의 뉘우침에서」라는 헌시(獻詩)를 투고했고, 일약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날 너희 오래 참고 참았던 義憤이 터져
怒濤와 같이 거리로 거리로 몰려가던 그때
나는 그런 줄 모르고 硏究室 창턱에 기대앉아
먼산을 넋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午後 二時 거리에 나갔다가 비로소 나는
너희들 그 무엇으로 막을 수 없는 물결이
議事堂 앞에 넘치고 있음을 알고
늬들 옆에서 우리는 너희의
불타는 눈망울을 보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날 비로소 너희들이
갑자기 이뻐져서 죽겠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쩐 까닭이냐.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발길이 무거웠다.
나의 두 뺨을 적시는 아 그것은 뉘우침이었다.
늬들 가슴 속에 그렇게 뜨거운 불덩이를 간직한 줄 알았더라면
우린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기개가 없다고
병든 선배의 썩은 풍습을 배워 불의에 팔린다고
사람이면 늙으면 썩느니라 나도 썩어 가고 있는 사람
늬들도 자칫하면 썩는다고…

그것을 정말 우리가 몰랐던 탓이다.
나라를 빼앗긴 땅에 자라 악을 쓰며 지켜 왔어도
우리 머리에는 어쩔 수 없는 병든 그림자가 어리어 있는 것을
너희 그 淸明한 하늘 같은 머리를 나무램 했더란 말이다.
나라를 찾고 侵略을 막아내고 그러한 自主의 피가
흘러서 젖은 땅에서 자란 늬들이 아니냐.
그 雨露에 잔뼈가 굵고 눈이 트인 늬들이 어찌
民族萬代의 脈脈한 바른 핏줄을 모를리가 있었겠느냐.

사랑하는 학생들아
늬들은 너희 스승을 얼마나 원망했느냐.
現實에 눈감은 學問으로 보따리장수나 한다고
너희들이 우리를 민망히 여겼을 것을 생각하면
정말 우린 얼굴이 뜨거워진다 등골에 식은 땀이 흐른다.
사실 너희 先輩가 약했던 것이다 氣槪가 없었던 것이다.

每事에 쉬쉬하며 바른 말 한마디 못한 것
그 늙은 탓 純粹의 탓 超然의 탓
어찌 苛責이 없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너희를 꾸짖고 욕한 것은
너희를 경계하는 마음이었다.
우리처럼 되지 말라고 너희를 기대함이었다.
우리가 못할 일을 한 사람은
늬들뿐이라고…

사랑하는 학생들아
가르치기는 옳게 가르치고 行하기는 옳게 行하지 못하게 하는 세상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스승의 따귀를 때리는 것쯤은 보통인
그 무지한 깡패떼에게 정치를 맡겨 놓고
원통하고 억울한 것은 늬들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럴 줄 알았더면 정말
우리는 너희에게 훈장이니
선비의 정신이나마 깨우쳐 주겠다던 것이
이제 생각하면 정말 쑥스러운 일이었구나.

사랑하는 젊은이들아
붉은 피를 쏟으며 빛을 불러놓고
어둠 속에 먼저 간 수탉의 넋들아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
늬들의 공을 온 겨례가 안다.
하늘도 敬虔히 고개 숙일 너희 빛나는 죽음 앞에
해마다 해마다 더 많은 꽃이 피리라.

아 自由를 正義를 眞理를 念願하던
늬들 마음의 고향 여기에
이제 모두 다 모였구나
우리 永遠히 늬들과 함께 있으리라. #

조지훈 시인은 이밖에도 고려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고려대학교의 교가와 '호상비문'을 지었고, 이 호상비문에서 따온 민족의 아리아라는 응원가가 고대생들 사이에 사랑받고 있다. 한편 2000년대 초에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의 시비가 고려대 문과대학 부근에 설치되었으나, 조금 뒤에 얼마 안 가 '승무'의 시비로 교체되었다.

3. 다른 매체에서

3.1. 제2공화국

시위 규모가 갈수록 커지자 박마리아가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그냥 사태를 확 키워 계엄령을 선포할 명분이라도 만들자는 의도에서 신도환에게 시위대 습격을 지시하는 식으로 나온다. 이에 신도환이 임화수, 유지광에게 지시해서 깡패들을 곳곳에 배치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고대생들을 습격한다. 물론 이 때문에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켜 4.19 혁명이 촉발되어 박마리아가 의도한 대로 계엄령이 선포되지만 정작 계엄 사령관인 송요찬이 선을 지키면서 과격 진압을 거부했기에 이기붕 일가는 결국 집까지 잃고 도망다녀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깡패들의 분장은 그야말로 동네 양아치들 수준이며 심지어 쇠사슬까지 들고 다니기도 한다.

3.2. 야인시대

파일:야인시대 로고.png
야인시대 작중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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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동대문 사단 주먹패들의 생사가 갈리게 된 사건.
임화수: 반공청년단 본부로부터 데모를 적극 저지하라는 엄명이 떨어졌어. 자유당이 망하면 우리도 망한다는 거 잘들 알 거야.
도꾸야마: 회장님. 우린 도대체 언제까지 반공청년단들의 지시를 받아야 되는 겁니까?
임화수: 지금 불벼락이 떨어지고 있는데,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어딨어?
유지광: 회장님. 지금 전국이 온통 혼란 속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데모는 전국적 일입니다. 그걸 어떻게 우리 손으로 막습니까?
임화수: 이봐, 유사장! 그걸 지금 몰라서 묻는거야? 우리한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자유당이 제자리에 올라오고, 이기붕 선생께서 부통령에 앉으면 우리한테 큰 대가가 있을게야.
이영숙: 대가가 문제가 아니라, 저렇게 분노한 수십만인 데모들을 우리가 어떻게 막습니까?
임화수: 그러니까 반공청년단의 지시를 하달하는거 아닌가? 여기 있는 여러 오야붕들은 각기 소속 부대원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학생데모대를 만나면 선봉을 가차없이 까부시라고 해. 알겠어?! (불안해지는 유지광은 임화수를 쳐다본다.) 알아들었냐고?(유지광은 외면한다.)
학생을 상대로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된다고 판단한 유지광은 부하 주먹패들에게 절대로 시위진압에 참여하지 말라고 명령했고, 때문에 유지광, 도꾸야마, 낙화유수, 독사는 시위를 관전만 할 뿐 시위진압에 참여하지 않았다.
차량에 타고 있는 유지광과 낙화유수는 학생들의 데모를 지켜본다.
낙화유수: 형님, 정말 데모대를 공격 하실 생각입니까?
유지광: 무슨 소리 하고 있어? 그저 지켜만 보자고. 절대로 학생들을 손대선 안돼!
낙화유수: 알겠습니다.
유지광: (걱정돼서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천일 백화점 골목에 있던 고바우와 돼지, 망치, 김삼수, 권상사 등 다른 하급 주먹패들은 시위하던 고대생들을 습격해, 학생들을 몽둥이로 진압해버린다.
자유당 군인:(한 군인 및 경찰과 함께 뛰면서) 무진장 와요! 데모들이 일로와요!
(반공청년단 단원들이 벽 쪽으로 움직여 그 자리에 지켜본다.)
권상사: 어쩌지?
고바우: 명령이니 어쩌겠어? 막아봐야지!
돼지: 그래요. 학생 놈들 혼 좀 내주자고요!
(고대생들이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
권상사: (모자 쓰면서)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
망치: 까부숩시다!
돼지: 막아! 까부셔!!!
이 때 최동열 등 언론인들이 있었기에[16] 깡패들이 학생들을 여럿 때려죽였다는 기사가 대문장만하게 신문에 실린다. 사건 직후 유지광은 부하들에게 왜 그런 짓을 했냐고 혼을 낸다.[17]
이석재: (이정재에게 급하게 뛰어가면서) 회장님! 회장님!
이정재: 어, 석재야. 어서와라. 뭐가 이렇게 급해서 숨이 차도록 뛰어왔어?
이석재: 바깥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이정재: 데모 말인가?
이석재: 그게 아니고요. 신문과 방송에서 온통 난리입니다. 온 시내가 학생, 시민 할 것 없이 발칵 뒤집혔어요.
이정재: 무슨 얘기야?
이석재: 어제 저녁에 종로4가 천일백화점 앞에서 고대생이 우리 애들의 습격을 받고 맞아 죽었다는 겁니다.
이정재: (엄청난 충격을 먹는다.) 뭐야?!?!
이석재: 이 신문기사를 보세요. 깡패들이 고대생들을 여럿 때려죽이고, 그 시체들을 끌어다 감췄다는 거에요.
조열승: 뭐시라고야?!?
이석재: 온 시내가 사람들 물결이 입니다. 잠잠하던 고등학생, 중학생까지 모두 들고 일어났어요.
조열승: 아니, 그게 우리 애들이 한걸 뭐로 증명하나?
이석재: 사고가 일어난 곳이 종로4가에요. 우리 구역입니다.
이정재: 가서 임화수와 유지광이 빨리 잡아 와!
이석재: 예! (차를 타며 임화수와 유지광이를 잡으러 간다.)
이정재: (엄청난 불안감을 주며) 보통 일이 아니구만. 무슨 일을 낼려고 학생들을 때려?
거기다 이석재까지 회장님이 찾으신다며 유지광을 찾아온다.[18] 조열승은 임화수를 찾아가 왜 이런 짓을 했냐며 크게 따지지만[19] 때는 이미 늦었다.[20] 이 와중에 반공청년단이 전화를 걸어 신문사를 테러할 것을[21] 요구했으나 도꾸야마는 대놓고 거부하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학생들을 구타한 주먹패들은 훗날 혁명재판에서 사형이나 중형을 선고받아 조리돌림을 당하고 파멸한 반면 시위 당시 가만히 있던 주먹패들은 책임자 유지광을 제외하고는 잡혀가지 않았고 그나마 잡혀갔던 유지광도 재판 과정에서 사형→무기징역을 거쳐 훗날 석방됐다.

습격 시간이나 시위대가 경무대로 진입하는 장면의 시간대 등 극소수의 일부만 빼면 연출이나 대사 상당수가 무풍지대와 겹치는 게 많은데 그 이유가 무풍지대나 야인시대나 둘 다 이환경이 극본을 맡았기 때문이다.

4. 관련 문서

5. 참고 문헌


[1] 서울특별시 시도등록문화재 제7호다.[2] 다만 부정선거가 알 사람들은 다 알 정도인지라 시위는 소규모지만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다 보니 소규모의 시위가 더 큰 시위가 되지 못하고 해산당하기 일쑤였다.[3] 2.28, 3.15 등 초기 시위는 고등학생이 주도했다.[4] 1961년까지는 학교 입학이 3월이 아닌 4월이었다.[5] 현재와는 다르게 당시는 사람이 조금만 모여도 "데모하는 것 아니냐"며 해산, 구금 등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분위기였다. 신입생 환영회는 합법적으로 여러 인원이 한 자리에 모이는 구실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6]서울특별시의회 본관[7] 야당인 민주당(1955년) 소속이었으면서도 이 습격 사건 지휘자인 깡패 임화수와 친구 사이였으며 명색이 야당 의원이면서도 임화수를 두둔하는 바람에 고려대 학생들은 이철승도 정치깡패와 한패라고 분노했다.[8] 일단 고려대생들을 잘 달래서 학교로 복귀 시키되 잔인하게 응징해서 다른 대학의 저항을 막으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9] 1960년 당시 4년제 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 수가 9만 3천명 정도였다.# 반면 2021년 신규 석사학위 취득자가 8만명, 박사학위 취득자가 1만 6천명 정도이다.# 당시 대학 재학생 1/4가 졸업한다고 하더라도 2만 3천명인데 현재 석사 졸업생보다 훨씬 적고 박사 졸업생 수에 가깝다.[10] 훗날 이 때문에 동아일보는 언론통폐합 당시 DBS를 KBS에 빼앗겼다. 비슷한 맥락으로 CBS도 보도기능을 빼앗기게 되었는데 이 또한 4.19 당시 침묵하던 KBS와 달리 CBS는 미국계 종교자본이었기 때문에 속보를 빵빵 날렸던 이유가 컸다. 신군부 측에서 이들 방송의 전력을 두려워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11] 1975년 동아일보 해직사태 이전이다.[12] 당시 깡패들 중에는 정치깡패가 다수 있었고 이들은 사실상 자유당의 수족이었다.[13] 여담이지만 당시는 사실 지금처럼 조직폭력배가 기업화나 조직화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다지 멀리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쉽게 말해 대부분 동네 불량배 수준이었다. 후대에 미화된 이미지 때문에 당시 조폭들이 거창해 보이지만 그 시대에는 주먹 좀 쓰고 성질 사나우면 대충 깡패 취급을 받았다. 실제로 적지 않은 깡패들이 본업이 따로 있거나(나이트클럽 기도, 도박, 미군 면세품 밀수 등) 필요할 때만 모이곤 했다. 그래서 싸움 잘하는 대학생을 형님으로 모시는 깡패가 존재할 수 있었다.[14] 주석환은 훗날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고 회고했다. 한편 당시 현장에 있었던 기자 중 한 명은 "이봐, 고대 죽었어? 다 일어나 공격!"이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15] 공교롭게도 이 사건을 일으킨 깡패들의 두목 이정재 역시 중앙고등학교 출신이었다. 정확히는 중앙고에 입학했다가 휘문고로 전학갔다.[16] 그 중 기자였던 이만섭도 여기에 말려들어 깡패들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17] 책임자였던 고바우는 상황이 너무 급해서 어쩔 수 없었다, 기사는 거짓이다, 쓰러진 애들 중 넷 중 둘은 고대생이고 둘은 우리 애들이다는 식으로 변명을 하지만 씨알도 안 먹혔다. 사실 당시 묘사만 봐도 데모하던 고대생들은 무장은 커넝 플래카드나 팻말만 구호를 외치면서 전진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깡패들이 구태여 습격을 해서라도 막아야 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고바우의 발언은 신빙성이 제로인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깡패들은 약자를 대상으로 한 악행 때문에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데 당시의 깡패들은 자유당의 수족으로 활동하면서 갖가지 범죄를 저질러도 공권력의 비호로 인해 제대로 처벌받지 않아서 국민들의 증오를 받고 있었다. 반면에 대학생, 특히 고대생이라면 학벌주의 풍조가 많이 꺾인 21세기에도 여전히 다수의 또래들보다 우수한 자원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존재하는 데다 사건이 벌어진 1960년 4월 18일에 고려대에 다니는 재학생은 말 그대로 당대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이자 졸업 이후 오랜 기간 동안 국가를 이끌어갈 재목으로 대접받았다. 이런 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독재에 맞서 시위하다가 자신들을 습격하러 온 깡패들을 구타한 것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한 사건이 언론을 통해 쫙 퍼지게 된다면 국민 여론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 것은 자명했다. 유지광은 이걸 미리 알고 있었지만 조직의 우두머리인 임화수와 자유당의 압력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병력을 배치하되, 실제 행동은 하지 않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부하들이 저지른 독단적인 행동 때문에 자신이 세운 모든 계획이 어그러져 버렸으니 부하들한테 대노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18] 이석재는 유지광에게 "회장님 지시야 급히 와줘야겠어." 유지광: "무슨 일 입니까?". 이석재: "고대생들 습격 문제로, 단단히 화가나 계시거든." 유지광은 석재의 말대로 같이 가려다가 경무대에 있는 최창수가 경무대에 뚫리고 있다며 유지광에게 도와달라며 연락해 왔다. 유지광이는 어쩔 수 없이 유지광의 부하와 최창수의 부하들, 경찰들, 군인들을 도와 학생들을 막기 위해 사건 이후에 찾아뵙겠다고 석재에게 전달하여 퇴장한다.[19] 임화수가 "무슨 소립니까? 지금 이 판국에 누구보고 오라가라 하는 거에요? 눈 앞에 벼락이 떨어지고 있어요. 그런 한가한 소릴 하려거든, 이 직접 오라고 하세요!" 라고 적반하장 식으로 항의한다.[20] 전 학생들이 임화수의 극장에 돌을 던지며 유리창을 깨트리는 등 난장판을 만들기 시작했고 눈물의 곡절이 나타나 '지금 흥분한 학생들이 이리로 오고 있으니, 빨리 피하십시오!'라고 보고한다. 이에 임화수는 곽영주에게 연락해 조치를 취해달라고 했지만 곽영주는 "조치는 무슨 조치야! 여긴 지금 전쟁이야, 전쟁! 살고 싶거든 알아서 피해 있어!"라고며 도움 요청을 거절한다. 연락이 끝나고 임화수는 "전쟁?!"이라고 말하며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한다.[21] 동아일보 윤전기에 모래를 붓는 테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