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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30 23:36:18

강동 6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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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강동 6주.jpg
강동 6주의 위치.
1. 개요2. 특징3. 역사4. 관련 문서

1. 개요

강동 6주(江東六州)는 제1차 여요전쟁서희의 담판을 통해 고려가 획득한 6개 지역을 의미한다. 압록강 이남이자 청천강의 이북, 거란의 보주와 고려의 안주를 잇는 해안길과 내륙길의 주요 요충지에 해당한다. 현재 북한 체계의 평안북도와 대충 구역이 맞는것으로 추정된다.

2. 특징

고대로부터 요동에서 육로로 한반도에 진입할 때 반드시 거치는 지역으로 군사적 요충지 겸 주요 통로인 곳이다.

한반도가 압록강두만강을 경계로 해서 유라시아 대륙과 상당히 길고 넓게 붙어있긴 하지만 의외로 한반도의 심층부로 들어갈 수 있는 편리한 통로가 한정된 상태다. 당장 의주를 거쳐서 강동 6주를 지나가는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압록강을 건넌 후에 바로 강남산맥적유령산맥을 넘어간 후에 청천강을 도하한 후 묘향산맥까지 넘어가야 간신히 평양 동쪽까지 도달할 수 있다. 이렇게 할 경우에는 산맥을 3개나 넘고 강을 2개나 건너가면서 멀리 돌아가기 때문에 보급로 마련이 힘들게 되고 방어군에게 대비할 시간까지 준다.[1]

만일 조금 더 돌아가서 함경도의 동해안 방면으로 우회하는 길을 선택하려고 한다면 일단 개마고원을 통과해서 낭림산맥을 넘어가는 길을 선택하던지 아예 함흥을 거쳐서 원산방면을 통해서 추가령 구조곡을 지나가며 서울로 갈 수는 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우회하면 기본적으로 거리 자체가 보급로를 만들기 힘들 정도로 길어지며 척박하고 자체적인 보급이 불가능한 개마고원을 통과해야 하며 특히 함경산맥 방면에서 높은 고도차 때문에 도저히 제대로 된 보급로 건설이 어렵기 때문에 아예 만주의 동부 지역이 거점인 여진족 같은 경우가 아니면 선택할 이유가 없는 진격로이며 여진족도 어지간해서는 함경도에 대한 노략질 정도로 그쳤다. 그리고 강원도로 들어가면 철령관이라는 관문 겸 요새가 있어서 더 이상의 진격이 곤란해진다.

따라서 강동 6주만 확보하더라도 요동 방면에서 오는 공격로의 대부분을 차단하기 쉽고 당시에는 보주라고 불리는 의주까지 확보하면 아예 압록강부터 적을 막아낼 수 있다. 반대로 강동 6주를 잃어버리게 되면 국경선이 청천강이 되버리고 청천강 하류의 안북부를 중심으로 한 1차 방어선이 돌파된 후에는 서경까지 제대로 방어할만한 지형이 없어서 매우 위험해진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강동 6주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은 요나라가 해당 지역으로 지속적으로 침범하면서 계속 내놓으라고 고려에게 압박을 가한 것이며 고려도 절대로 강동 6주를 내놓지 않은 것이다.

3. 역사

3.1. 제1차 여요전쟁

고려 성종 12년인 993년,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의 80만 대군이 고려를 침공하였다.[2] 이에 성종은 상중하 3군을 편성하고 시중 박양유를 상군사로, 내사시랑 서희를 중군사로, 문하시랑 최량을 하군사로 삼아 대비하게 하였다. 또한 성종은 친히 서경 너머 안북부까지 나아가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봉산군(蓬山郡)[3]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윤서안(尹庶顔)의 고려군 선봉대가 패배하자 고려 조정은 "거란에게 항복하자"는 의견으로 모였는데, 여기서 "거란과 단순히 화친만 하자"는 화친론과 "서경 이북의 영토를 떼어주자"는 할지론이 대립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안융진에서 유방대도수의 활약으로 승리를 거두고 전선이 고착화되자, 성종은 서희 및 이지백의 건의를 받아들여 강화론을 채택한다.

고려 측의 협상자로서 거란 진영에 간 서희가 강직한 태도로 소손녕의 기선을 제압한 후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고 평양에 도읍하였으므로 오히려 거란이 고려에게 땅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희는 조공 문제를 따지는 소손녕에게 "여진이 길을 막고 있으니 그들을 쫓아내고 압록강 하구 일대의 통제권을 주면 거란과 친하게 지내겠다"는 말로 압록강 동쪽의 영토를 얻어내었다.[4]

이렇게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고 송나라와의 통교를 끊으며 거란에 형식적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거란으로부터 '안북부에서 압록강까지의 280리(從安北府 至鴨江東 計二百八十里)'의 점유를 인정한다는 확약을 받았다. 이후 이듬해인 994년부터 이 일대의 여진족을 소탕하고 점진적으로 성을 쌓은 후 이곳을 통치하기 위해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를 설치하니 이것이 강동 6주이다.
파일:강동6주_지도v3.png
여요전쟁 격전지의 주요 위치 추정
명칭 위치
흥화진(興化鎭)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 상단동 흥화진성
용주(龍州) 평안북도 용천군 동상면 성동동 용주고성
철주(鐵州)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면 서림동 철주고성
통주(通州) 평안북도 선천군 심천면 동림동 동림성
곽주(郭州)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염호동 능한산성
귀주(龜州) 평안북도 구성군 구성면 좌부동 귀주성

3.2. 제2차 여요전쟁

이후 고려거란과의 약속과 달리 송나라와의 통교를 계속 이어가고 거란 역시 뒤늦게 이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5]을 깨달았다. 거란은 고려에 야율행평(耶律行平), 이송무(李松茂) 등을 파견해 돌려주길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거절하였다.

이에 거란은 압록강 위에 부교를 설치하고, 보주을 쌓는 등 고려에 대한 무력 침략 태세를 갖추었다.

1010년, 요 성종이 친정을 나섰으나 강동 6주의 하나인 흥화진에서 양규 장군에게 40만으로 3천명을 이기지 못 한 굴욕을 맛보았으며, 퇴각길에는 귀주성김숙흥 장군에게 1만이 죽는 피해를 입는다. 양규김숙흥의 군은 강동 6주 일대에서 퇴각하는 요 성종의 군대를 타격하여 2만 이상을 죽이고 3만 이상의 포로를 구출하는 성과를 거둔다.

고려 측에선 흥화진이 '거란이 망한 성'이란 뜻으로 걸망성이란 별명을 붙였으며, 강동 6주의 보주에서 안주까지의 큰 길은 흥화진의 이름을 따 흥화도라고 정식 이름을 붙였다.

3.3. 제3차 여요전쟁

거란은 끝없이 국지도발로 고려의 약점을 찾으려 했고, 고려 역시 용주성-철주성(해안길), 안의진(제1내륙길)을 증축하고, 운림진(제2내륙길)까지 신설해서 오는 세 길목을 꽁꽁 틀어막았다.

1018년, 소배압이 거란군 10만을 이끌고 쳐들어왔으나, 고려 측은 강감찬 장군이 이끈 흥화진 전투와 퇴각길에서의 귀주 대첩으로 거란군을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거란은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했고, 강동 6주는 완벽하게 고려의 땅으로 귀속되었다.

3.4. 이후

이후로도 강동 6주 일대는 여진과의 전쟁, 대몽항쟁, 호란 등 한민족 국가들의 대북방 전쟁의 군사적 요충지로 기능하였다.

4. 관련 문서



[1] 병자호란처럼 모든 것을 다 무시하고 수도를 직공하는 경우도 있으나 방어측에 제대로 된 국왕이 있으면 실패하는 위험천만하고 뒷수습이 안되는 전술이다. 보통은 제3차 여요전쟁처럼 소득 없이 대실패하거나 제2차 여요전쟁처럼 수도는 함락시켰는데 국왕이 멀리 남쪽으로 피난가서 잡을 수 없으므로 전략적인 실패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2] 소손녕 문서에 나와있듯 거란군 편제상 80만은 과장이고 거란군의 실제 규모는 최대 6만 정도였다는 것이 중론이다.[3] 지금의 태천군과 구성군 사이.[4] 그러나 밑에 지도를 보면 보주(내원성)을 볼 수 있는데, 여기는 거란이 쌓은 성이다. 이곳은 여진이 거란을 멸망시킬 때에야 대국이 된 여진의 양해를 받아서 고려가 얻을 수 있었다.[5]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에 비견할 만한 고려의 북방 방어선이다. 이곳의 동쪽은 거친 과 해발 2천 미터의 개마고원까지 위치하고 있고 여진족까지 있어 여기를 통해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2차, 3차 침입에서 이곳을 함락하지 못한 채 개경으로 진격한 요나라 군의 발목을 잡은 것은 물론 본국으로 퇴각하는 틈에 공격을 가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힌다. 고구려에서도 압록강을 따라 설치된 방어선은 1차 방어선인 요동 방어선에 이은 2차 방어선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