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f,#1f2023><tablebgcolor=#ffffff,#1f2023> [[M26 퍼싱| | }}} | |||||
파생형 | 실전 | 운용국 | 미디어 |
1. 제2차 세계 대전
1.1. 서부전선
1.1.1.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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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스도르프의 201호 티거와 그 티거에게 반파된 T26E3 38번 퍼싱 'Fireball' |
유럽 전선에 투입된 퍼싱은 슈퍼 퍼싱을 포함하여 310대였는데 그중에 격파된 퍼싱은 나스호른에게 피격된 단 1대뿐이고 반파된 퍼싱이 2대였다. 완파된 퍼싱은 슈퍼 퍼싱이 아니라 M26(T26E3) 퍼싱으로, 1945년 3월 6일 쾰른 북쪽의 닐(Niehl)에서 나스호른이 퍼싱의 후방을 근거리에서 가격, 격파한 예가 있다.
또한 반파된 퍼싱은 1945년 2월 26일 독일 엘스도르프(elsdorf)에서 매복한 6호 전차 티거 201호에게 100m 거리에서 8.8cm 포탄 세 발을 얻어 맞아 반파되었는데 첫발은 동축 기관총구를 뚫고 들어가 탄약수와 포수를 사망시켰고, 또 한발은 머즐 브레이크를 찢어 버렸다. 나머지 한 발은 포탑 정면의 우측 끄트머리를 맞고 튕겨져 나갔다. 실제 운이 나빴다기보단 독일의 베테랑 승무원의 숙련된 솜씨라 보는 경우도 있는데 연도가 1945년 2월이라 숙련병은 얼마 남지 않았을 시점으로서 가능성이 낮다. 이 201호는 퇴각 중 장애물에 걸려 기동불능이 되자 유기되었다.
전투가 끝나고 미군은 이 반파된 퍼싱 전차를 유기하지 않고 다시 수리해 전선에 투입했는데 완전히 망가진 머즐 브레이크와 포방패, 그리고 포탑 내부의 일부 부품을 교체하는 것만으로도 전투력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탄약고나 연료탱크에 피격당해 포탄이나 연료가 유폭되어 말 그대로 산산조각난 경우가 아니라면 반파된 전차는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여 재사용이 가능하다. 동부전선에서는 독일 육군과 소련 육군이 상대방의 격파된 전차를 수리하여 노획무기로 사용한 사례가 많았다.
뒤셀도르프에서 퍼싱의 반파를 뒤로 하고, 2월 27일 제33기갑연대 E중대의 40번째 M26 퍼싱이 엘스도르프 근처에서 티거를 823m(1천 야드) 거리에서 기동중에 네 발을 사격하여 격파하고 1,097m 거리에서 4호 전차 두 대를 격파했다.
그것말고도 반파된 퍼싱은 1945년 3월 1일, 라인강의 레마겐(Remagen) 지역에서 독일군의 15cm 야포 세례를 받고 반파되었다. 엔진에 화재가 발생했으나 이 전차 또한 수리되어 다시 전투에 투입되었다.
1.1.1.1. 쾰른 대성당 전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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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 제3기갑사단 소속 M26 퍼싱에 격파당한 독일 국방군 소속 판터 |
쾰른 대성당 전차전 기록 영상[1] |
포성의 초탄은 측면을 관통했고 판터는 차내 포탄의 유폭으로 연기를 뿜으며 타오르기 시작한다. 이제 가망이 없음을 안 전차장을 포함한 모든 전차 승무원들은 탈출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차탄이 발사되었으나 판터의 포방패에 맞고 도탄되었다. 그렇게 모든 승무원들이 탈출하면서 무력화된 판터 전차는 이후 확인사살겸 날아오는 2발을 더 맞고 대폭발을 일으킨다. 이때의 경험이 꽤 충격적이었는지, 탈출해 생존한 판터 전차장은 전후에도 자신의 판터를 격파한 것은 퍼싱이 아니라 미군에게 노획당한 판터라고 믿었다고 한다.
이 전차전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편인데,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이 정도로 명확하게 영상으로 기록된 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차전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대전 당시 전차전은 절대다수가 참전자들의 수기에 의존하고 전후 사진이라도 남아있으면 다행인 수준인데, 이쪽은 아예 전투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부 온전히 영상으로 녹화되었다. 게다가 전투에 휘말린 전차가 대전 후반에야 투입되어서 활약상이 상대적으로 적은 M26 퍼싱이라는 점과, 전투의 장소 역시 쾰른의 명소 중 하나인 대성당 앞이라는 점 역시 이러한 인기에 크게 작용했다. 현재도 이 전투의 인기는 식을 줄 몰라서 인터넷에 가보면 시간별 전투 분석은 기본이오, 판터 전차가 관통당한 구획을 설계도면상에 표시해둔 자료까지 있다.
당시 찍힌 기념사진
당시 이 퍼싱의 포수였던 95세의 참전용사 클래런스 스마이어 씨가 뉴스에 나왔다.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뒷이야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당시 M26 퍼싱 포수 클라렌스 스마이어(Clarence Smoyer)와 그에게 격파당한 5호 전차 판터 포수 구스타브 쉐퍼 (Gustav Schaefer)가 둘 간의 교전 중 희생당한 독일 민간인 추모 이야기 쾰른 대성당 난전 중 스마이어 씨가 탄 M26 퍼싱은 쉐퍼 씨의 판터의 조준을 피해 우회하는 도중 독일 민간인 식료품 가게 점장과 여점원 카타리나 엣세가 차를 타고 피난하는 것을 보고 퍼싱, 판터 양측이 동시에 공축기관총으로 사격했다. 후에 이 둘 모두 한참 잘못된 목표를 향해 쏘았다는 것을 알곤 두고두고 잊지 못하다 전쟁이 끝나고도 50여년 뒤에 우연히 서로가 만나 숨진 엣세 씨를 추모했다. | }}}}}}}}} |
한 일반인이 직접 쾰른에 방문해 이 전투에서 판터가 격파된 자리를 찾고는 당시 사진과 대조를 했다.
1.1.1.2. 데사우 조우전: 슈퍼 퍼싱의 데뷔전
이 중 눈여겨볼 만한 증언으로, 45년 4월경에 T26E4-1 슈퍼 퍼싱이 티거 2를 격파했다는 증언이 있다.티거 2는 독일에서 거의 고갈되어 있었고, 위에서 보듯 슈퍼 퍼싱도 전 유럽을 통틀어 2대, 그 중 실전투입과 야전개수가 된 문제의 슈퍼퍼싱은 해당 차량 하나밖에 없었다. 만날 확률은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지만 1945년 데사우(Dessau)에서 그토록 바라던 티거 2와 교전을 치렀다는 이야기가 있다.미 육군 3기갑사단 역사재단 홈페이지의 역사기록 부문에서 소개된 이 전투는 다음과 같다.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미 육군 제3기갑사단 역사재단 홈페이지 작성글 번역본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 |
티거 II 와의 결투 |
위 3명의 단체사진 중 중간의 인물, 그리고 독사진 속에서 나온 이는 1945년 경 촬영된 미 육군 제3기갑사단 소속 슈퍼 퍼싱 전차장이던 메사추세츠 주 출신 조셉 마두리(Joseph Maduri) 육군 하사이다. 단체사진 맨 오른쪽의 인물은 팬실베니아 주 출신 존 P. 어윈(John P. Irwin) 육군 상병이다. 단체사진 맨 왼쪽의 인물은 “피트(Pete, 지금도 알려지지 않은 성)”로 추정이 되는 바이다. 이 외의 2명(조종수와 기관총수)의 승무원들은 사진 속에 나타나 있지 않다. (마두리 가문 제공)
1945년 4월 21일에 있던 데사우에서의 결투
선두에서 일대일로 맞서 싸운 전차전 승리
작성자: 미 육군 제3기갑사단 공식 역사재단사이트(3AD.com) 관계자 빅 데이먼(Vic Damon)
1945년 4월 21일, 제2차 세계대전 중 미 육군 제3기갑사단의 공식적인 마지막 전투작전을 불과 사흘 앞둔 날이었다. 해당 부대 예하 33기갑연대의 슈퍼 퍼싱이 2차세계대전에서 가장 강력한 중무장 스펙을 지닌 독일산 전차 티거 2 또는 타이거 로열(Tiger Royal)등으로 알려진 77톤급의 전설적인 킹타이거를 조우하여 격파했다. 그 사실은 오늘날까지 군사 역사학자들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으로,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53톤급 M26 퍼싱을 개조한 슈퍼 퍼싱(Super Pershing)이 킹타이거와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전한 유일한 사례가 될 것이다.
미 육군 제3기갑사단은 서부유럽 전선에서 유일하게 기존형(M26)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더 긴 주포를 탑재하고 단 두대만 개조되어 탄생된 슈퍼 퍼싱을 운용하는 부대였다. 대전 말기(1945년 3월)에 미 본토에서부터 늦게나마 도착한 이 전차는 독일 내에서 야전 시험과 개조가 이루어졌고, 파데르본 전투 이후 약 열흘 간의 실제 전투가 있었으며, 며칠 후 시작되어 엘베 강 근처의 데사우 전투로 공식 전투는 종료되었다.
미국 기갑병기 설계안 코드번호 T26E4-1의 일명 슈퍼 퍼싱은 T15E1 90mm의 긴 신형 주포를 장착해, 킹타이거의 독일산 고속 88mm 71구경장 43식 전차포의 성능을 능가하도록 설계됐다. 미국의 이 신형 주포는 시험에서 1,000야드 거리에서 30도 경사의 8.5인치의 장갑판을 성공적으로 관통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은 100야드 거리에서 13인치의 장갑판을 관통했다는 것이다. 90mm의 특수 탄약은 초속 3,850피트, 즉 킹 타이거의 88mm보다 600피트 더 빠른 속도로 발사되었다. 또한 90mm의 신형 탄약은 이전 버전에 비해 뛰어난 사거리와 정확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입증되었다.
유럽과 미국에 있는 육군의 기술자들은 이 신형 전차가 킹타이거에 대항할 수 있기를 바라며 전투에 참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1945년 4월까지 베를린 서쪽에 있던 전선의 독일군의 전차는 연료가 바닥날 만큼 부족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렇기에 이 독일산 괴물 전차를 발견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4월 21일 데사우에서, 10개월 연속 전투에 참가한 베테랑 미 육군 제3기갑사단 조셉 조 마두리 육군 하사가 지휘하는 슈퍼 퍼싱 대원들이 괴물과 조우할 행운이 돌아갔다.
당시 미 육군 제3기갑사단은 해당 도시인 데사우에 네 갈래로 나눠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강렬한 저항으로 방어되었다. 사단의 전차들은 콘크리트 전차 장애물이 파괴되고 나서야 고전 끝에 도심으로 서서히 진격하게 되었다. 제 3기갑사단이 흩어지며, 미 육군 제36보병연대 병력이 뒤를 따랐고, 이 슈퍼 퍼싱이 중심교차로에 다다르자 우측으로 차체를 돌리기 시작했다. 슈퍼 퍼싱의 전차 승무원들은 몰랐겠지만, 이들이 들어선 교차로와 같은 방향에 약 두 블록, 혹은 600야드 정도 거리에 킹타이거가 매복 대기중임이 분명하였다.
이 킹타이거는 자신의 능력선에서 정리될 것이라 파악하고 충분한 거리에서 슈퍼 퍼싱에게 포를 발사하였다. 하지만 전쟁 내내 미군의 많은 전차와 차량을 격파해 온 그 악명높은 88mm의 고속 탄에도 불구하고, 슈퍼 퍼싱의 상부로 날아가 명중은 고사하고 근접한 방향으로 날아가지도 못하였다. 18살의 어린 나이였던 포수 존 “잭” 어윈 육군 상병은 거의 즉각적으로 킹타이거 차체 정면의 큼지막한 경사장갑에 포를 발사하여 대응을 하였다. 그러나 관통목적이 아니었던 고폭탄이었기에 효과는 전무하였다. 이 고폭탄은 장갑에서 도탄이 되었고, 킹타이거 상부로 날아가 아무런 피해 없이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어윈 상병은 시가지에서 전차가 아닌 건물이나 적 보병, 그리고 경형 대전차포 등의 다른 표적을 상대하리라 예상하여, 슈퍼 퍼싱 주포에 위해 고폭탄을 장전된 상태였었다. “당장 철갑탄을 장전해!!“라며 어윈은 급박하게 소리쳤고, 전차장전수(탄약수)였던 “피트”가 철갑탄을 곧이어 장전하게 되었다.
그때, 전차장 마두리 하사와 다른 승무원들은 포탑에 충격이 가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굉음이 코앞의 킹타이거의 공격인지, 아니면 다른 대전차 무기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심각한 피해는 없었고, 비스듬하게 도탄되었거나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곧바로, 어윈은 이 고성능의 괴물이 부서진 잔해 돌무더기를 밟고, 위를 바라보며 등판하기 시작하자, 준비된 두 번째 포탄을 발사하였다. 90mm 철갑탄은 이 킹타이거의 정면 하단을 관통하였고, 탄약 적재공간에 명중하여 포탑이 유폭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 거의 확실하게도, 킹타이거의 내부 승무원들은 전원 폭사하였다.
하지만 슈퍼 퍼싱 승무원들은 그들이 잡은 사냥감을 확인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전투가 격렬하게 진행되었고, 슈퍼 퍼싱은 이미 처참하게 격파되어 불길이 오른 킹타이거를 지나 다음 거리를 따라 전투를 지속하였다. 독일군 대전차 보병화기인 판처파우스트와 기관총이 창문과 문틈에서 발사되며, 여전히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킹타이거와의 접전은 20초도 채 되지 않는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평원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격렬한 전차전은 아니었지만, 재빠르게 반응한 슈퍼 퍼싱과 승무원들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데사우 전투는 이후 약 이틀이 지나서 종료되었지만, 그 과정에서도 5호전차 판터로 추정되는 독일 중형전차를 단 2발로 사냥을 한 바가 있다. 초탄은 판터의 기동륜을 박살냈고, 차탄은 측면을 완전히 관통하였다. 판터 또한 적재된 탄약으로 인해, 내부 폭발을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이후 데사우에서, 슈퍼 퍼싱을 이끄는 마두리와 승무원들이 독일 중형전차의 전차장에게 저항없이 무조건 항복하라고 강요하였다. 주포 탄약을 모두 소진하여 결국 항복한 독일군 전차 승무원들이 보고 기겁한 슈퍼 퍼싱이 탑재한 위협적인 외관의 90mm 장포신 주포는 이들의 그나마 남겨진 전투의지를 완전히 꺾었고, 아니면 아예 탈주하게 하였다.
원문출처.}}}}}}}}} ||
첫 번째로, 당시 데사우 근처에는 티거 2를 보유하고 있었던 부대가 존재하지 않았다. 교전이 일어났던 45년 4월 21일 즈음에 티거 2를 보유했을 가능성이 있던 부대들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제501중전차대대 | 파더본 근처에서 이미 해산됨 |
제502중전차대대 | 4월 19일 하르츠 산에서 이미 해산됨 |
제503중전차대대 | 스트롱스트로프 근교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국경에서 전투 중 |
제504중전차대대 | 이탈리아 페라라 근처에서 작전 중 |
제505중전차대대 | 오스트프로이센 주 에서 대대 자체가 해체됨. 보유중이었던 마지막 티거 2가 4월 15일에 격파되었음. |
제506중전차대대 | 4월 14일에 아이서론 (루르 인근)에서 해산됨 |
제507중전차대대 | 4월 11일에 오스터로데 (하르츠)에서 마지막 티거 운용이 있었음 |
제508중전차대대 | 이탈리아에 있었고 기록상 티거 2는 보유하지 않았음.[4] |
제509중전차대대 | 남부 오스트리아 세인트 폴텐와 암스테텐 사이에서 작전중 |
제510중전차대대 | 4월 18일 보드 계곡에서 해산됨 |
무장친위대 소속 제501중전차대대 | 오스트리아 에슈체나우 에서 작전중 |
무장친위대 소속 제502중전차대대 | 포르트슈텐발데 (베를린 남부) 근처에서 작전중 |
무장친위대 소속 제503중전차대대 | 베를린에서 작전중 |
두 번째로, 해당 교전이 일어났음을 뒷받침하는 근거 자체도 부족하다. 티거 2와 슈퍼 퍼싱의 교전이 일어났음을 주장하는 글들은 대부분 3AD.com 또는 존 어윈의 증언에 의존하고 있으며, 3AD.com의 게시글 또한 어윈의 자서전을 출처로 하고 있음을 생각해 볼 때, 티거 2와 슈퍼 퍼싱의 교전이 일어났음을 주장하는 자료는 어윈의 증언 하나뿐이다. 또한, 슈퍼 퍼싱을 현지에서 개조한 벨톤 Y. 쿠퍼(Belton Y. Cooper)는 슈퍼 퍼싱이 판터뿐 아니라 티거 2를 상대로도 충분히 우세를 점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슈퍼 퍼싱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으며, 3월 30일에 벌어졌던 셔먼 열일곱 대 및 잭슨 한 대와 티거 열 대 간의 교전 또한 상세히 묘사하였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죽음의 덫》(Death Traps)에서 해당 교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을 뿐더러, 교전 사실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만일 슈퍼 퍼싱과 티거 2 간의 교전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가 자신의 자서전에 해당 내용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해당 전투 이후 미군이 데사우를 점령했는데, 만일 실제로 티거 2가 격파되었다면, 아군 전차가 적의 최신예 전차를 격파했음을 알려서 홍보 가능했을 것이고, 이것을 홍보하는 데 사용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증거나 기념 형식의 사진 자료는 남길 수도 있었을 테지만 사진 자료 하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슈퍼 퍼싱과 티거 2 간의 교전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에 힘을 실어준다.
세 번째로, 해당 교전이 일어났음을 뒷받침하는 근거의 신뢰성에도 많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윗 문단에서 말했듯이, 티거 2와 슈퍼 퍼싱간의 교전을 주장하는 자료는 어윈의 증언 하나뿐이다. 어윈의 증언에서, 실제 교전한 전차는 판터 또는 4호 전차였음에도, 티거 2라고 착각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어윈은 45년 1월경에야 자대에 배치되어 전선에 투입된 신병이었고, 당시 미군은 독일 전차를 보면 무턱대고 티거라고 지칭하였다는 점,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베테랑이었던 오토 카리우스조차도 소련의 IS-2와 티거 2를 착각하였다는 점 등은 어윈이 적 전차가 티거 2라고 착각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그리고 어윈은 히스토리의 다큐멘터리에 출현해 티거 2라고 증언했으나 인터뷰 시점보다 훨씬 젊었을 때 작성되었으며, 3AD.com에서 인용했던 어윈의 자서전인《Another River, Another Town》(또 다른 강, 또 다른 읍내)에선 자신의 슈퍼 퍼싱이 상대한 전차를 티거 2라고 서술하지 않았고, 단지 티거라고만 서술하였다는 것은 참전자의 증언에서, 적 전차의 종류에 대한 증언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며, 오히려 나중에 더 이야깃거리가 되는 방향으로 살이 붙여져서 티거 2라고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드러낸다.
네 번째로, 어윈의 전투 상황에 대한 증언 역시 적 전차가 티거 2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어윈은 자신의 자서전에, 적 전차에 고폭탄을 한 발 발사하고 후에 적의 차체 하단에 철갑탄을 꽂아 넣자 전차가 유폭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티거 2는 차체 측면과 포탑 후방 버슬에만 탄약을 적재하고 차체 하단 부분에는 탄약을 적재하지 않았으므로, 차체 하단에 맞은 철갑탄이 탄약을 유폭시켰을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조종수 뒤편에 탄약을 적재하던 판터와 4호 전차, 포탑 바로 아래쪽에도 탄약을 적재하던 티거 1은 차체 하단을 관통한 철갑탄이 탄약을 유폭시킬 가능성이 존재한다. 추가적으로 판터나 티거는 4호 전차와는 달리 항상 포탑 아래쪽에 탄약을 적재하고 있던 것이 아니므로 만일 교전이 실제로 발생하였다면 적 전차는 4호 전차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를 종합해 보았을 때 데사우에서 슈퍼 퍼싱과 독일 전차 사이에서 교전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허구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당시 3기갑사단은, 데사우에서 전투에 참여한 티거 부대는 하나도 없었다고 보고하였다. 미군들이 독일 전차를 전반적으로 티거라고 불렀음을 감안하면 어윈이 자서전을 작성할 때 이전에 있었던 전투와 착각했거나, 아니면 아예 적 전차와의 전투가 발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데사우에서 슈퍼 퍼싱과 티거 2 사이에서 교전이 발생했다고 보는 것보다는 데사우에서 전차 간 교전이 일어났다는 증언 자체가 허구거나, 데사우에서 슈퍼 퍼싱과 독일 전차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다는 것까지는 사실이나 그 독일 전차는 티거 2가 아닌 티거와 비슷하게 생긴 4호 전차 H형이나 티거 2와 비슷하게 생긴 판터[5]였다고 보는 것이 정황 증거상 더 가능성이 높다.
1.1.2. 체코슬로바키아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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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슬로바키아 플젠을 해방한 미 육군 제8기갑사단의 M26 퍼싱 |
1.2. 태평양 전쟁
유럽전선 승리 이후 태평양 전선에서도 오키나와 전투,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위해 투입되었다. 하지만 오키나와에선 패잔병 소탕을 위해 포격 몇 번 하다 끝나고 일본 본토 상륙은 일본이 핵 2방에 항복하여 물거품이 되었다.2.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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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전선에서 포격 지원 중인 미 육군 소속 M26 퍼싱 |
낙동강 방어선 전투 당시 T-34-85를 상대한 미 해병대 소속 M26 퍼싱을 다룬 영상 |
당시 미국에서는 소련의 IS-3같은 신형 전차들을 경계하고 있었고, 미국 육군사령부는 소련과 있을 냉전에 대비하기 위해 기갑전력 업그레이드를 계획했다. 신형 전차들의 개발 계획이 잡히기 전에 우선 미군은 보유한 M26들을 대상으로 기동성을 중심으로 성능을 강화하기로 결정하여, 차체 후방을 확장하고 신형 엔진과 변속기를 장착, 신형탄 사용이 가능한 M3A1 주포를 장비한 M46 패튼을 개발하였고 많은 퍼싱들을 M46으로 개수하기 시작했다. 다만 종전 직후의 군비 감축에 의한 예산 문제로 인하여 구동계는 손대지 못한 채 주포를 비롯한 일부 개수만 거친 M26A1도 상당수였다.
전쟁 전 이승만 대통령은 100여 대 가량의 퍼싱을 요청하였는데, 미국은 당장 셔먼은 커녕 M36 GMC나 M10 GMC, 심지어 M3 GMC같은 대전차 자주포도 줄 생각과 시간적 여유나 예산도 없었던 터라 당연히 무시당했다. 다른 말로는 당시 트루먼 정권이 호전적인 이승만 정권에게 퍼싱같은 전차를 주면 당장 남침이 아니라 역으로 북침이 일어날 거라 생각해서 안 줬다는 말도 있다. 일단 강경한 태도 때문에 공격용으로 쓸 만한 무기를 최대한 배제하려고 했던 건 사실이다.
애초에 미군은 한반도의 지형을 보고 전차는 별로 한국에서 필요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런 것은 아니고, 한국과 비슷한 지형을 가졌던 이탈리아 전역에서 고생했던 전훈[6]을 고려했던 것이긴 하지만 개전과 동시에 대전차능력이 변변찮은 상대에게 전차라는 무기체계가 얼마나 위력적인지를 간과한 생각이었음이 드러났다.[7] 그 결과 T-34-85의 공세로 스미스 특임대가 전차여단을 앞세운 북한군에게 처절하게 패배한다. 당시 미군은 북한 T-34에 대해 일본에 배치해둔 M24 채피 경전차로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그런 거 없고 채피들이 T-34에게 신나게 박살나자 셔먼뿐만 아니라 퍼싱도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미군 기갑부대가 흐트러진 상황이라 미군은 기지에 기념물로 둔 퍼싱까지 다시 재생해서 쓰는 난리법석을 떨게 된다.
흔히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M24 채피가 성능이 부족하여 초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였다고 평하는데, 이에 대하여 채피에 대한 변론을 이야기하자면, 우선 채피의 성능은 당대 전차들과 비교하여도 절대로 낮은 성능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시대의 경전차들 중 최강이라고 평가받는 전차였으며, 불과 겨우 5년전인 2차 세계 대전 당시만 하더라도 자기보다 상위 체급인 4호 전차를 역으로 부수고 다니는 정도였다. T-34-85와 성능적인 비교를 하자면 T-34가 채피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오직 화력과 장갑뿐인 수준이다. 물론 전차에게 있어서 화력과 방어력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어찌하여 T-34-85에게 쓸려나가게 되었는가 하면 우선 주일미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장갑이 약한 대신 기동성이 뛰어난 우회전술 및 정찰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경전차의 특수한 지위를 무시하고 상위 체급의 전차와 전면전으로 나선다는 전술을 구사하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는 사용하는 탄종의 문제점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은 위에서 설명하였듯 교육이 부족하였기에 대전차전에서 대전차용인 철갑탄이 아닌 대인용 내지는 축성진지 파괴용 고폭탄을 사용하는 등의 문제점을 보였으며,[8] 결국 체급의 무시와 교육의 부족으로 인한 참극이라 논할 수 있을 것으로, 조금만 더 시간이 있어서 전술을 좀 더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었더라면 오히려 북한군을 압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게 참 아쉬울 따름.
이렇게 급하게 재생하여 한국으로 보내 배치된 퍼싱은 3대로 T-34에게 속절없이 털리던 대한민국 국군과 UN군의 희망이었으나 곧 북한군에게 털려서 모두 노획되었고 뒤이어 배치된 M4 셔먼도 주행을 시작하자 곧 엔진에서 연기가 나는 등 초기 UN군의 기갑병기는 쇠퇴 일로를 걸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한국전에 300대가 배치되었으며 T-34를 상대로 강력한 위력을 보여줬다. 의외로 초기에 미군들은 소 잡는 칼인 퍼싱보다 닭 잡는 칼인 이지에잇 셔먼(M4A3E8)을 선호했다. 일단 이지에잇 셔먼도 HVAP 철갑탄을 충분히 지급받았기에 T-34와의 교전에서 선제탄을 쏜다면 불리하지 않았고, 당시 퍼싱을 지급받은 승무원들 대부분이 훈련소에서 셔먼으로 교육을 받은 상태라 조종성이 너무 좋은 퍼싱에 적응하지 못해 사고가 속출한 것, 그리고 40톤을 넘는 중량에는 상당히 부족한 편인 500마력대 엔진 때문에 한국 지형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셔먼의 고폭탄 화력 부족 때문에 얼마 가지 않아 90mm 포를 탑재한 퍼싱의 인기가 더 높아졌고, 더욱 강력한 엔진을 탑재한 M46 패튼에 이르러서는 잠정생산 전차임에도 불구하고 셔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의 기동성을 발휘하여 승무원들의 인기를 누렸다. 최초 기갑전은 다부동 전투에서 치러졌으며 여기서 북쪽에서 남하하던 북한군 T-34 떼를 가로막고 격파에 성공하여 더이상 전차를 이용한 공세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다.
M26의 이런 활약 덕분에 명예 훈장 수훈자도 생기는데, 어니스트 R. 코우마 상사의 사례가 그것으로, 1950년 8월 31일 낙동강 전선에서 호위하는 보병도 없이 단 한 대의 M26 퍼싱으로[9] 길을 틀어막고 500명의 북한군을 상대로 9시간 동안 버텨내었는데 북한군이 전차에 들러붙자 포탑과 포신을 돌려 북한군을 쳐서 떨어뜨리는 상황까지 있었다. 전투가 끝난 뒤, 약 250명의 북한군이 단 한대의 전차에 도륙당했고 코우마 상사는 한국전쟁 당시의 미군 전차 승무원으로선 최초로 명예 훈장을 수여받았다.
반대로 손쉽게 격파당한 사례도 있는데, 1950년 9월 15일 두곡리에서 미 해병대 소속 M26 퍼싱 한 대가 T-34-85 두 대의 기습 공격을 받아 격파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M26 퍼싱은 한국전쟁 기간의 작전 중 약 32%를 담당하였으며 최소 97대의 T-34 전차를 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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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강을 도하중인 M45 퍼싱 |
전차호에 언덕을 쌓고 그 위로 올라가 포격을 가하는 M26 퍼싱의 기록 영상[10] |
초기부터 엔진과 구동계에 문제점이 지적되었는데, 조종계통 자체는 우수한 편이었지만 M4A3의 포드 GAA엔진을 개량한 포드 GAF 엔진의 출력이 500마력에 불과한 것이 문제였다. 판터와 비슷한 중량에 출력이 200마력 딸리는데 최고속도는 판터와 비슷하게 조정되었으니 당연히 엔진과 구동계통 전반에 무리가 컸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개량형 차량이 냉전시기 미군과 서방 세계 주력 전차로 활약한 패튼 패밀리의 원조 M46 패튼이며 M46도 M26과 함께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다. 또한 중전차로 억지 변경되었던 것 역시 1946년 1월에 다시 중형전차로 조정되었으며, 제한적인 개수를 거친 M26A1이 미 육군 및 해병대에서 운용되었다.
그러나 일단 부족한 엔진 출력 등의 과도기적인 측면이 많아 한국전쟁에 투입된 차량 중에서 미군이 사용하던 전차는 모두 1951년까지 철수했지만 백선엽 장군의 회고록에 의하면 미군이 사용하던 전차의 일부는 M46 패튼과 함께 남아서 대한민국 국군에게 공여되었다고 한다. 특히 M26 퍼싱의 개량형이자 1세대 전차인 M46 패튼의 경우 1961년 6월에 제작된 대한뉴스 316호에서 등장한다. 물론 철수한 퍼싱의 경우 그 즉시 M46 패튼으로 대체되었다. 미 육군 정규군에서의 공식적인 퇴역은 1952년이었고, 퇴역 장비는 즉각 외국에 공여되었다.
[1] 25초나 3분 18초 등에서 쾰른 대성당의 모습이 보인다. 2분 24초 탈출하는 셔먼 전차장의 다리가 잘려나갔다.[2] 위스콘신 주 출신 "칼 케르너" 전차장이 몰던 전차였다. 후술하는 탈출 도중 다리가 절단된 사람으로, 과다출혈로 사망.[3] 비록 실루엣만 비교하면 판터와 퍼싱은 확연한 차이가 있지만, 두 전차 모두 전면에 경사장갑을 채용했고 장포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혼란스러운 전장에서는 충분히 범할 수 있는 오류였다.[4] 이 대대는 최악의 졸전(...) 기록으로도 유명하다.[5] 실제로 많은 미군들이 판터를 티거 2로 오해를 자주 했다고 한다. 만약 어윈이 적 전차를 데사우에서 조우했고, 그것이 티거 2라고 식별했다는게 사실이라면 판터일 가능성이 가장 클 것이다.[6] 이탈리아 전선에서 티거와 판터는 위용을 뽐내던 동부전선과 다르게 험준한 이탈리아의 산악과 언덕을 오르다 엔진이 과부하를 견뎌내질 못해 퍼져서 유기되는 추태를 보일 정도였다. 오히려 가벼운 나스호른이나 Mk.I 아처같은 대전차 자주포나 중량이 많이 나감에도 1차대전 시절의 참호전을 고려해 접지 면적이 매우 넓은 궤도를 가진 처칠 전차가 상상도 못할 고지로 올라가서 상대를 격파하는 기현상이 자주 발생했다. 이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미군이 안일했으며 49년에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가져간 M18 헬캣이나 M7 프리스트를 두고 갔어야 했다.[7] 사실 한반도가 산악 지형이 많기는 하지만 산과 산 사이에는 상당 규모의 기갑 세력이 기동할 만한 지형이 있다. 사단급은 무리라도 연대 내지는 여단급이 전투를 벌이기는 충분하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군도 여태 기갑사단은 만들지 않으면서도 대규모의 전차 전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8] 이는 북한군도 마찬가지여서 대전차전에서 고폭탄을 사용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군과는 다르게 북한군이 사용한 포의 화력은 구경이 10mm가 더 큰 85mm였으며 경전차인 채피는 경사도에 의존하는, 두께 자체는 매우 얇은 장갑을 가졌으므로 대구경 고폭탄에 취약했다.[9] 원래는 두 대였으나 한 대는 고장나 쓸 수가 없었다.[10] 낙동강 전선에서 촬영된 영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