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5-02-04 00:11:20

92식 70mm 보병포

제2차 세계대전기의 일본군 화포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px -11px"
곡사포 <colbgcolor=#fefefe,#191919>91식 10cm 곡사포, 92식 10cm 캐논포, 12cm 캐논포, 96식 150mm 곡사포
야포/산포 90식 75mm 야포, 41식 산포, 94식 산포
대전차포/전차포 90/97식 57mm 전차포, 94식 37mm 속사포, 1식 기동 47mm 속사포, 시제 57mm 대전차포, 시제 105mm 전차포
보병포 11식 37mm 보병포, 92식 70mm 보병포
대공포 96식 25mm 고각기총, 98식 20mm 기관포, 5식 40mm 중대공포, 88식 75mm 대공포, 99식 88mm 대공포, 5식 15cm 대공포
함포 98식 10cm 65구경장 함포, 3식 12.7cm 50 구경장 함포, 89식 12.7cm 40 구경장 함포, 3년식 155mm 60구경장 함포, 3년식 20cm 50구경장 함포, 41식 36cm 45구경장 함포, 3년식 40cm 45구경장 함포, 94식 40cm 45구경장 함포 }}}
{{{#!wiki style="margin-top: -30px; margin-bottom: -10px; letter-spacing: -0.9px; font-size: 0.82em"
※둘러보기 :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군의 운용장비 | 파일:cannon_icon__.png 화포 }}}
}}}}}}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c0119758_584e880261d27.jpg
九二式歩兵砲 (きゅうにしきほへいほう)

1. 개요2. 제원3. 개발4. 특징5. 실전6. 둘러보기

1. 개요

일본군대대보병 지원 화기로서, 동시대 미군의 81mm 박격포나 현대 대한민국 국군의 81mm 박격포와 비슷한 목적과 위치에 편제된 대대급 지원 화기인 보병포였다. 하지만 운용목적만 비슷할 뿐, 박격포가 아니라 경 곡사포였다. 1개 대대에 2문씩 배치되었으며, 그 때문에 '대대포'(大隊砲)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본래의 이원화된 대대 지원 화기였던 11식 37mm 보병포11식 70mm 박격포를 함께 대체하기 위해 1920년대 후반부터 개발되기 시작하여 1932년 부터 배치되기 시작했는데, 1932년이 황기 2592년(쇼와 7년)이었기에 뒷글자를 따 92식 보병포로서 명명되었다.

2. 제원

구분 상세
형식 곡사포 방식 보병포
중량 204kg
전장 2,006mm
전폭 914mm
전고 775mm
구경 70mm
포신 790mm
포신부앙각도 -8도에서 +70도
포신선회각도 좌우 각각 20도
포구초속 197m/s
유효사정거리 2,800m
연사속도 분당 10발
운용인원 5명
생산기간 1932년에서 1945년
생산량 2,876문

3. 개발

본래의 11식 37mm 보병포는 37mm라는 작은 구경 때문에 화력과 저지력이 부족했고, 70mm 곡사보병포(박격포)[1]는 일본군이 원하는 직사화력을 제공해줄 수 없었으며 박격포 구조상 발사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확인하지 않고 포탄을 이중으로 넣는 바람에 사고도 빈발했다. 더불어 이원화된 보급체계는 일본군에게 있어서 부담이었고, 그들은 직사와 곡사가 모두 가능한 보병 지원화기를 원해 해당 보병포를 개발, 배치하였다.

1928년부터 육군기술본부가 연구를 시작하여 1930년 3월에 시제경보병포(試製軽歩兵砲)라는 명칭으로 첫번째 프로토타입이 완성되었다. 해당 화포로 1930년 6월까지 시험을 실시하고 문제점을 발견해서 개선한 결과 1931년에 두번째 프로토타입이 완성되었다. 1931년 6월부터 두번째 프로토타입 화포를 시험한 육군보병학교는 시제경보병포와 시제보병수반포(試製歩兵随伴砲)를 비교하면서 기존의 평사포 방식 보병포와 곡사보병포와 비교를 한 결과 평사포 방식 보병포에 비해 가벼워서 곡사보병포 수준으로 운용하기 편하며 필요할 경우 직사도 가능하고 명중률도 좋은 편이라 곡사보병포에 비해서도 운용하기가 좋다는 판단이 나왔다. 시제보병수반포와의 비교에서는 유효사정거리와 포탄의 운동에너지는 약해서 대전차포로는 활용이 불가능하지만 보병포로 쓰기에는 편하며 기동성이 좋으므로 시제경보병포가 더 유리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시제경보병포를 1932년 3월 12일에 제식채용을 해야 한다는 보고서가 상부에 올라간 후 1932년 7월 6일에 92식 보병포로 제식채용된다.

4. 특징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c0119758_584e880c86435.jpg
포가를 높게 올린 모습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c0119758_584e8805ead17.jpg
낮게 내린 모습[2]

일본군이 원했던 대로 92식 보병포는 차축 크랭크축의 조절로 직사와 곡사의 사격이 모두 가능했고, 크랭크축 조절을 통해 포가와 포신을 가장 밑으로 내린 상태에서도 곡사사격이 가능했다. 가장 아래로 내렸을때는 -6도에서 +51도의 각도로 사격이 가능했고, 올린 상태에서는 +13도에서 +70도의 각도로 사격이 가능했으며 포가를 아래로 내린 상태에서는 지면과의 충돌 방지를 위해 후면에 구멍을 팔 필요성이 있었다. 최대 사거리는 2.8km 였으며, 발사 속도는 분당 10발이었다.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11식 보병포 보다는 다방면에서 뛰어났고, 11식 박격포와 비교해선 화력에서 뒤쳐졌지만 그럭저럭 정확도나 안정성에서 뛰어나다 평가되어 좋은 평가를 얻었다.

탄약의 경우에는 약협과 탄두로 구성되는 분리결합식 구조로 약협은 사격 후 재사용이 가능했다. 운용방식은 약협에 목표와의 거리를 감안해서 적정량의 장약을 넣거나 뺀 후에 탄두와 결합하고 약실에 장전해서 사격하는 방식이다. 포탄은 고폭탄인 92식 유탄, 연습탄인 92식 대용탄, 조명탄인 95식 조명탄, 전시긴급용 간이제조식 고폭탄인 97식 강제선유탄, 대전차고폭탄인 3식 천갑유탄, 공포탄이 있었다. 97식 강제선유탄은 강철이 아닌 일반 연철이나 주철같은 다른 철을 사용한 품질저하포탄으로 일단 사용에 지장은 없었다. 약협은 92식 보병포탄약협으로 내부에 들어가는 장약이 1호 50g, 2호 31g, 3호 22g, 4호 17g로 나누어지며 사정거리에 따라서 장약의 종류를 골라서 조정이 가능하며 공포탄을 사격시에는 1호공포약이라는 장약을 약협에 넣고 탄두가 없는 상태로 발사하게 된다. 그 외에도 포탄과 약협이 일체형인 단일형 포탄이 있으며 해당 포탄은 을(乙)이라는 표기가 붙는다.

운반시엔 말 한마리로 운반하거나, 세등분으로 분해하여 세마리로 나눠 운반했으며, 인력으로 운반할땐 10명이 동원되었다. 차로 견인할 때는 포 자체에 서스펜션이 없는 통짜 철제 구조이기에 그대로 견인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트럭 위에 따로 싣거나 해야 했다. 탄약은 1상자당 5발이 들어가며 중량은 30kg이었고 말로 운반할 때는 세개씩, 인력 운반할 때는 한개씩 짊어졌는데 당시 일본군의 부실한 체격에다 탄약운반엔 그 체격보다 더 떨어지는 인원을 유용했기에 이것저것 힘든 것이 많았다.

이미 1933년에 북만주에서 관동군이 실험한 결과 별도의 운반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들어와서 1934년 2월에 말로 견인되는 92식 보병포탄약차라는 전용 탄약 운반 차량이 개발되어 포탄 상자 5개를 적재해서 총 25발의 탄약을 운반하며 1마리의 말로 견인하는 게 가능한 수단도 만들어졌다. 해당 보병포탄약차는 긴급시에는 인력으로도 견인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졌으나 탄약 운반 문제가 크게 개선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92식 70mm 보병포를 전선에서 운용할 때는 일단 보병포 자체와 즉응탄 20발이 먼저 전선에 도착한 후에 탄약 운송 분대 20개를 동원해서 144발의 탄약을 계속 공급해야 했다. 하지만 운송용 군마도 부족한 상황인지라 대부분은 인력으로 보병포와 탄약을 운송해야 하니 보병포가 쓸 탄약이 모자른 것이 일반적이었다.

바퀴가 매우 특이한 모습을 한 것이 특징인데 초기에는 강판 여러장을 겹쳐서 제작했다가 가동시에 겹친 철판이 서로 쓸리면서 엄청난 소음을 내기 때문에 1935년 1월부터 두꺼운 강판에 원형 구명 여러 개를 뚫고 목제 타이어를 겉에 씌운 것으로 교체한다. 그러나 중일전쟁에서 바퀴의 내구성에 문제가 발생했으므로 1939년에 나고야 조병창에서 목제 바퀴살 형태의 바퀴가 시제품으로 나오기도 했다. 기존의 일체형 강판방식 바퀴도 태평양 전쟁 패전시까지 사용된다.

5. 실전

실전에선 일본군이 원했던 대로 보병에게 수반되어 다용도로 사용되었다. 약협은 재활용이 가능했으며 그다지 크지 않은 크기로 공격과 방어시 모두 활용되었고 경곡사포와 직사포를 겸하는 양용성으로 운용이 용이했다. 중일전쟁 부터 할힌골 전투, 그리고 태평양 전쟁까지 사용되었다.

그러나 같은 급의 박격포와 비교해서 크고 무거워 진지 변환이 용이하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종래의 곡사포와 다름없는 포연으로 발사위치를 파악하기 쉬웠다. 이는 진지변환의 어려움과 중첩되어 단점으로 작용했으며, 공세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전의 보병포보다는 나았지만 포신이 매우 짧은 단포신인데다가 중량도 적어서 반동흡수가 잘 안되므로 정밀사격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가 운용하는 병력에게 나올 수준이었다. 그래서 대분포(大体(だいたい)砲)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뜻은 대충 사격하는 포라는 소리였다.

대전차전을 위한 철갑탄도 일단은 개발되어 있었지만, 원래부터 포신이 짧은 단포신 보병포인데다가 포구초속이 197m/s로 너무 느려서 여타 일본군 대전차포가 그렇듯 성능은 매우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100m에서 30mm, 500m에서 25mm, 1000m에서 20mm 정도의 관통력 밖에 없었다. 그래서 공급량이 사실상 없다시피하므로 실전에서는 그냥 92식 유탄같은 고폭탄을 전차에 명중시키는 일이 많았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개발된 3식 천갑유탄(三式穿甲榴弾)이라는 성형작약탄이 존재했고 수직장갑판 기준으로 100mm를 관통하고 60도 경사장갑 기준으로 80mm를 관통한다고 하지만 신빙성이 매우 낮다. 원래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로부터 성형작약탄 기술을 받아올 때까지 제대로 된 대전차고폭탄을 전혀 개발하지 못했던 상황이었고 성형작약탄 기술개발 시작시기도 늦었다. 덤으로 양산품의 성능이 크게 저하되는 바람에 자돌폭뢰에서 보듯이 나치 독일흡착지뢰를 그대로 복제한 초기형 관통력이 150mm 인데 양산품 관통력이 60mm까지 폭락하기도 하며 일반적인 화포인 강선포로 대전차고폭탄을 사격하면 강선에 의한 회전력으로 인해 착탄시 발생하는 메탈제트가 사방으로 흩어지므로 관통력이 격감하므로 8,8cm FlaK의 대전차고폭탄인 Gr. 39이 고작 90mm의 관통력을 보일 정도였다. 해당 문제는 2차대전 종전 이후에나 해결이 되기 때문에 당시 추축국중에서 가장 대전차고폭탄 개발 및 양산능력이 좋은 나치 독일에서 판처파우스트같은 보병용 대전차 로켓은 관통력이 200mm 이상에 도달했으나 강선포 쪽에서는 더 큰 구경을 가져서 성능이 더 높아야 할 88mm 포탄이 고작 90mm 관통력을 보이는 상황인데 일본 제국의 92식 70mm 보병포의 성형작약탄이 100mm의 관통력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실제로 해당 관통력을 기록한 문건은 현유대전차병기자재효력개견표(現有対戦車兵器資材効力槪見表)인데 해당 문건은 결호작전을 대비해서 일본 제국 육군의 제3근위사단에서 만든 것으로 M4 셔먼을 포탑 하부만 빼고 정면장갑을 관통할 수 있다는 등의 선전문구가 붙어있는 등 전쟁 말기에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실제 성능을 나타내기에는 매우 부적합한 자료다. 여기에 더해서 전쟁 말기에 개발되고 오산 전투에 투입되어 T-34-85 1대를 잡은 미국제 105mm M67 대전차고폭탄도 M2 105mm 곡사포에서 사격하면 강선효과로 인해 메탈제트가 흩어지므로 최소관통력이 고작 102mm에 불과하다는 것을 볼 때 3식 천갑유탄의 실제 성능은 기록과는 매우 다를 정도로 낮아지는 것이 확실하다. 실제로도 92식 70mm 보병포를 M4 셔먼 전차를 상대로 사격한 경우는 많지만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둔 경우가 전혀 없으며 전후의 평가에서도 보병포로서의 성능을 강조하지 대전차 방면 성능은 너무 미약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을 정도다.[3]

일본에도 스토크블랑식 박격포가 도입되어 97식 곡사보병포라는 이름으로 제식화 되었지만, 도입시기가 92식 보병포 배치시기와 맞물렸기에 다시 체계를 바꾸고 편제를 재편성하는데에 부담이 컸던데다, 스토크블랑식 특성상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명중률은 일본군에게 감점요소였다. 발사속도가 높지만 명중률이 낮은 체계는 일본군의 부실한 보급체계로 탄약 소모량을 받쳐 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92식 보병포만 해도 탄약보급에 무리가 따랐다. 그 때문에 97식 박격포는 소수만 도입되었고 92식 보병포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했다.

중국 전장에서는 그럭저럭 쓸만했다. 우선 상대하는 중국군은 중화기가 변변치 않았고, 방호시설의 수준도 낮았기 때문에 92식 보병포의 화력으로도 충분했고, 도로사정이 열악한 중국 전장의 특성상 상대적으로 가볍다는 것도 제법 이점이였다. 일본의 항복 이후, 중공군이나 국민당군이나 모두 중화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노획한 92식 보병포를 국공내전에 투입했고, 자체로 카피 제작하기도 했다. 6.25 전쟁에서도 중공군은 92식 보병포를 다수 운용했다.

해당 체계를 노획한 미군보병포로서는 그럭저럭 좋은 평가를 내렸고, 따로 노획무기 운용교본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6. 둘러보기

화포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 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34292d>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군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추축군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냉전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현대전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




[1] 1차대전 독일군의 박격포에서 영향을 받아 개발한 것으로, 현대의 스토크블랑식 박격포와는 다른 방아쇠끈 격발식 구조의 강선 박격포였다.[2] 출처: #[3] 일본 제국의 병기중 대전차전에 사용한 무기들에게는 항상 성형작약탄을 쓰면 관통력이 높다는 식의 이야기가 항상 언급되는데 상세하게 살펴보면 원본 자료부터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져서 객관적이지 못하며 해당 성형작약탄 자체도 전쟁 말기에 개발되었고 일본 본토의 창고에만 극소량 있어서 실전을 겪지도 못하는 등의 문제가 항상 있고 성형작약탄 기술이 더 높은 나치 독일과 미국의 동급 포탄과 비교하면 관통력에 모순점이 나올 정도로 관통력 수치가 높은 등 전혀 신뢰가 불가능할 수준의 기록이다. 실제로 해당 성형작약탄이 기록대로 성능이 높다면 M4 셔먼 정도는 수십대 정도는 정면장갑이 관통당해서 격파당한 기록이라도 나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