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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5:54:39

92년 장마, 종로에서

92년 장마, 종로에서
Rainy day, Jongno, 1992
파일:external/img.maniadb.com/127648_f_3.jpg
<colbgcolor=#c59519><colcolor=#000000> 발매일 1993년 10월
장르 포크
재생 시간 39:56
곡 수 9곡
레이블 삶의 문화
타이틀 곡 92년 장마, 종로에서

||<tablealign=center><tablebgcolor=#fff,#191919><tablebordercolor=#4d3a93><width=80>
파일:KBestAlbums100.jpg
||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
91위 ||
||<tablealign=center><tablebgcolor=#fff,#191919><tablebordercolor=#4d3a93><width=80>
파일:KBestAlbums100.jpg
||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
1998년 91위 ||

파일:Music Y Logo.jpg
음악취향Y
Best 100

파일:100BEAT 로고.png


1. 개요2. 상세3. 공윤과의 투쟁4. 트랙 리스트
4.1. 양단 몇 마름4.2. 저 들에 불을 놓아4.3. 비둘기의 꿈4.4.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4.5. 비둘기의 꿈 (경음악)4.6. 사람들4.7. LA 스케치4.8. 나 살던 고향4.9. 92년 장마, 종로에서
[clearfix]

1. 개요

1993년 배포된 정태춘과 박은옥의 여덟 번째 앨범.

2. 상세

전작인 '아, 대한민국...' 못지 않게 중요한 음반인데, 우선 예술적 관점에서 이 음반은 정태춘이 그동안 쌓아오던 정서와 메시지들이 한 마디로 익을대로 익은 결과물이었다. 당시 시대상황도 상황이었으나 이전의 '아, 대한민국...'의 경우 다소 투박하고 거친 면이 많았는데, 이 앨범에 와서는 조금 더 정제되고 절제된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다소 독특한 것은 그동안 지향해오던 전통적인 분위기, 혹은 농촌에 기반한 정서가 많이 누그러진 반면, 도시적인 분위기가 더욱 가미되었다는 것이다. 앨범 재킷 또한 종로를 배경으로 촬영되었고 전통 악기의 사용의 빈도 역시 줄어들었다.

이 앨범을 관통하는 전반적인 정서는 회한의 성격이 강했는데, 이는 이 앨범의 내용들이 당시 정치적, 사회적 상황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1991년 연쇄 분신 파동 이후 한국 사회는 한차례의 가두 투쟁이 실패로 끝났고,[1] 사람들은 그저 한차례 몸살을 앓은것 마냥 민주화 과정을 과거의 것으로 치부하게 된다. 이는 고스란히 사회의 보수화로 이어진다. 1993년 한국의 정치, 사회적 상황은 야권, 혹은 민주화 세력의 한 축이었던 김영삼이 전격적으로 노태우, 김종필3당 합당을 거친 후 대통령 후보가 되어 김대중과 대결한 제 14대 대선에서 승리한 상황으로, 80년대 중반부터 민주화를 열망하며 정권교체를 희망하던 이들에게 엄청난 상실감을 주던 시기였다.[2]

파일:external/af019874e632d679d395c0ba506414c6bc8cf4b13726391298f35241ab087d8f.jpg
거리풍경, 박재동, 1992년 12월 22일 한겨례 그림판

당시 상황을 만평으로 잘 요약해 주는 것이 대선 직후 박재동 화백이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위의 만평인데, 당시 운동권, 혹은 진보진영의 이들이 느꼈던 상실감을 잘 표현해주고 있고, 정태춘의 앨범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김대중은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으며, 재야진보정당 민중당도 해체되고 운동권은 대중 대신 교조적 이념만 남아 점차 지리멸렬해져갔다.

80년대 중후반과 90년대 초반을 거쳐 저항하던 학생들은 이미 대부분 사회인이 되어 바빠지기 시작했고, 소위 '민중문화계'의 핵심인사들도 뿔뿔이 흩어지던 시대였다. 정태춘을 위시한 많은 이들에게 이 시기는 패배의 시기였고 절망의 시기였으며, 반성의 차원을 넘어 회한을 느끼는 시기였다. 심지어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일정 부분 개혁조처가 내려져 반정부 투쟁의 명분이 약해졌고, 대학가 역시 자유와 개인주의를 표방한 'X세대'들이 주류가 되면서 상명하복형 NL운동권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이 앨범에 수록된 '사람들'이라는 곡의 가사에서 이러한 정서가 잘 드러나 있으며, 타이틀 곡이라고 할 수 있는 '92년 장마, 종로에서'도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희망을 얘기하고 있지만 회한의 정서가 주를 차지하고 있다.

3. 공윤과의 투쟁

이 앨범 역시 공윤 심의를 거부하고 배포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공윤 사전검열제와의 투쟁은 더더욱 본격적이 되는데, 단순히 심의를 거치지 않은 음반의 배포 및 판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연장과 집회를 통해 해당 내용을 홍보하고 사인 판매를 진행했으며, 관객들의 지지 서명까지 받는가 하면, 1993년 10월 30일 KBS1 <생방송 심야토론: 전화를 받습니다>에 출연해[3] 사전심의의 부당함을 알리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LP 재킷에는 아예 ‘창작 · 표현의 자유 만세’라는 붉은 스티커를 찍은 버전까지 있다.

이에 공윤은 10월 27일 문체부에 정태춘을 위법 조치하도록 의뢰, 30일에는 문체부가 본 음반을 발매한 광주 지역 6개 음반상에 영업정지 10일을 내렸다. 11월 1일 문화체육부는 정태춘을 서울지검에 고발했으며 1994년 1월 25일 그는 서울지방검찰청에 의해 불구속 기소된다.

또 1993년 10월 29일 및 11월 5일에 방영된 KBS1 <노영심의 작은음악회[4]> '정태춘-박은옥 특집 에피소드'에 해당 앨범 2곡이 수록되었다는 이유로 담당 연출자 박해선 PD가 KBS 측에 의해 경고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정태춘의 기소는 공윤 음반사전검열에 대해 전 문화계가 집중하는 계기가 되는데, 기소된 바로 다음 날인 1994년 1월 26일 민예총은 즉각 기소에 대해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많은 문화계 인사들이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 변호사로는 천정배 변호사가 선임되어 재판이 진행되었고 28일 정태춘이 <가요검열제 폐지에 관한 대안 및 그 입장>이란 자료집을 내고 그 음반을 전국 공연장 등에서 사인 판매했다.

1994년 3월 22일 시작된 1차 공판을 거쳐 1994년 4월 19일 2차 공판에서는 해당 법률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이 있게 된다. 이 위헌심판제청은 같은 해 5월 10일 있었던 3차 공판에서 위헌제청 결정 판결이 남에 따라 헌법재판소에서 음비법에 대한 위헌 판단이 진행되었다. 8월 3일 한국가요작가협회도 음반 사전심의제도 폐지 운동을 지지한다고 표명하며 음비법 개정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국회에 냈다. 1995년 2월 20일 문체부가 '음비법 개정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고 3월 7일 변호인 측은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 신청 건에 관한 결정 촉구서'를 냈다.

이에 법무부는 그해 3월 10일 정태춘의 위헌제청에 대해 "예술표현의 자유도 공공복리를 위해 제한할 수 있으며[5] 현행 사전심의제도와 공윤은 검열제도나 검열기구가 아니므로 정태춘의 위헌제청 신청 및 건의를 기각하여야 한다."고 하여 헌재에 <음비법 위헌제청 신청 건에 관한 의견서>를 접수했고, 문체부와 서울지검도 이와 비슷한 의견을 냈다.(당시 사건 경과)

1년이 넘게 진행된 이 위헌 심판은 1996년 10월 31일,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 일치로 위헌(94헌가6)으로 판정되어 해당 법률은 즉각 효력을 상실했고, 1996년 12월 31일 서울지법이 정태춘의 기소에 대해 선고유예를 판결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된다. 실질적으로 그가 5년이 넘게 투쟁해 온 결과인 사전검열제의 위헌 판결에 따른 폐지는 한국의 대중문화사에 기념비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담 내지는 해프닝에 불과한 일이지만, 이 위헌 판결의 주인공이 정태춘이 아니라 서태지로 잘못 알려진 일도 있었다. 위헌 판결 이전인 1995년, 공윤은 발매 예정이었던 서태지의 4집 수록곡인 '시대유감'의 가사에 대해 수정 권고를 했고, 이에 대해 서태지는 가사를 전면 삭제하고 연주곡으로 수록함으로써 공윤의 권고에 대해 다소 소극적인 저항을 한다. 이 내용에 대해 당시의 서태지 팬덤들은 자신들이 추종하는 가수가 부당한 권력과 투쟁한다는 것으로 과대하게 해석했고, 대중적 유명세에 따라 다수 언론에 해당 관련 기사들이 노출되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전검열제가 폐지되었으니 팬덤들 및 일반 대중들에게는 사전검열제의 주인공이 서태지로 여겨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물론 소수이긴 하지만 정태춘의 팬덤들에게는 그저 소극적인 저항에 그친 행위일 뿐이고, 애초에 공윤에 심의를 진행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작은 반항을 한 이에게 문화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기념비가 돌아간다는 점에서 심히 저항감을 가질만도 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태지 또한 사전검열제에 제한적인 형태이나마 저항의 표시를 함으로써 당시 한창이던 위헌 심판에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로 보인다.

<시대유감> 가사 삭제 외에도 저항의 표시가 또 하나 있었는데 4집 앨범 수록곡 <필승> 가사는 원래 공윤에 제출했던 가사와 다르다. 사전심의제 시절에는 앨범 발매 전에 공윤에 가사를 제출했는데, 공윤 제출본에는 없었던 빌어먹을이란 말이 앨범에 갑자기 추가되었던 것이다. 기사 이 때문에 공윤에서는 서태지와 아이들 4집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냈다. 그러나 이게 오히려 서태지 팬들을 자극해 사전심의폐지 운동에 불을 붙인 격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다른 세계에서 활동하던 서태지와 정태춘이 진보 언론에서 같이 다뤄지게 된 것이다.

당시 이 위헌심판의 주인공인 정태춘 본인이 서태지의 대중적 위상에 따른 역할에 대해 긍정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볼 때, 이 해프닝은 그저 팬덤에 의해 발생한 해프닝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2022년 5월 17일 KBS 아침마당에 출연해 음반사전심의 폐지에 대한 인터뷰를 하면서 정태춘은 "나는 6년간 싸웠다. 그사이 강산에와 서태지도 의견을 드러냈다"라며 "6년간 싸움 중에 다른 장르의 예술인들도 도와줬다. 나 혼자만 한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1996년에 사전심의가 폐지된 이후로 공윤은 '등급보류'라는 이름으로 또다른 검열제를 만들어 표현의 자유를 제한했으나, 2006년에 음비게법이 폐지되고 '음반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음반에 대한 유해성 여부는 청소년보호법에 따라 현재 청소년보호위원회가 맡고 있다.

4. 트랙 리스트

트랙 곡명 작사 작곡 편곡 재생 시간
<colbgcolor=#c59519><colcolor=#000000> 1 양단 몇 마름 정태춘 정태춘 유지연 2:22
2 저 들에 불을 놓아 정태춘 정태춘 함춘호 4:58
3 비둘기의 꿈 정태춘 정태춘 함춘호 4:37
4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정태춘 정태춘 함춘호 4:47
5 비둘기의 꿈 (경음악) - 정태춘 - 4:35
6 사람들 정태춘 정태춘 정태춘 7:00
7 LA 스케치 정태춘 정태춘 정태춘 4:22
8 나 살던 고향 곽재구 정태춘 정태춘 4:10
9 92년 장마, 종로에서 정태춘 정태춘 함춘호 5:48

4.1. 양단 몇 마름

양단 몇 마름
시집올 때 가져온 양단 몇 마름

4.2. 저 들에 불을 놓아

저 들에 불을 놓아
저 들에 불을 놓아 그 연기 들판 가득히

4.3. 비둘기의 꿈

비둘기의 꿈
봄 햇살 드는 창밖으로 뛰어나갈 수 없네

4.4.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우리는 긴긴 철교 위를 달리는

4.5. 비둘기의 꿈 (경음악)

4.6. 사람들

사람들
문승현[7]이는 쏘련으로 가고

4.7. LA 스케치

LA 스케치
해는 기울고 한낮 더위도 식어

4.8. 나 살던 고향

나 살던 고향
육만 엥이란다

4.9. 92년 장마, 종로에서

92년 장마, 종로에서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1] 이 부분은 '92년 장마, 종로에서'에서 "다시는 시청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로 묘사된다.[2] 정태춘은 전작에 수록된 곡인 '아, 대한민국...'에서 '하루 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인사와 함께' 라는 구절을 넣어서 대놓고 김영삼을 깠다.[3] 방영 당시 정태춘 외에 김순규 문화체육부 예술진흥국장, 김동호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 정지영 영화감독, 동아일보 논설위원 등이 출연했다.[4]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선조격 프로그램.[5] 헌법 제37조 2항도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대한 유보를 언급하고 있다.[6] 후반부에 읇조리는 사망자 통계의 나열이 이걸 대신한다.[7] 민중가요 그 날이 오면, 사계의 작곡가.[8] 실제로 정태춘은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9] 밑의 가사를 잘 보면 알겠지만, 일본인들의 매춘관광과 그런 일본인들에게 매춘을 하는 한국인 모두를 비판한 시이다.시집 <서울 세노야>에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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