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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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강
1.1. 1경기 잉글랜드 1 vs 0 아르헨티나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8강 제1경기 1966년 7월 23일 15:00(UTC+0) | ||
웸블리 스타디움 (영국, 런던) | ||
주심: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서독) | ||
1 : 0 | ||
잉글랜드 | 아르헨티나 | |
78' 제프 허스트 | 득점 | - |
- | 퇴장 | 35′ 안토니오 라틴 |
관중: 90,584명 |
후반 33분 마틴 피터스의 크로스를 제프 허스트가 헤더로 마무리하였는데, 이게 결승골이 되면서 잉글랜드가 승리했다. 1962년에 이어 아르헨티나에 2전 2승을 거두었고 4경기 연속 무실점과 함께 사상 첫 월드컵 준결승에 올라갔다. 그런데 이 경기는 다른 부분에서 주목을 받았다. 스페인어를 할 줄도 몰랐던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주심이 전반전 35분 아르헨티나 주장 안토니오 라틴을 '언어 폭력'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퇴장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라틴은 그저 항의를 했을 뿐이지만, 크라이틀라인은 단호하게 퇴장을 선언했다.
"나는 그 모든 끔찍한 기억들을 잊고 싶다. 그 경기는 내가 주관한 모든 경기 중 가장 거칠었다. 끔찍했다. 수치스러웠다. 나는 라틴이 나를 따라오며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퇴장시켰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없었다. 그는 스스로 심판이 되려고 했다."[1]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잉글랜드전을 회고하는 안토니오 라틴 |
경기장에서 씁쓸하게 빠져나가던 라틴은 유니언 잭을 비틀어 쥐며 억울한 심정을 표출했다. 그리고 영국 여왕의 이동경로인 레드카펫 위에 주저앉아 영국인들에게 무언의 항의를 계속했다. 하지만 빨리 나가라는 말만 들려올 뿐이었고, 결국 라틴은 경찰들에게 붙들려 경기장 밖으로 끌려나갔다. 남미 기자들에 대한 잉글랜드 측의 차별적 대우 때문에 열 받아 있던 아르헨티나 기자들은 이때다 하고 언론에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잉글랜드에 대한 반감이 커졌고, 승리를 도둑맞았다며 개최국의 승리를 맹비난했다. 혹자는 이 경기를 두고 히혼의 수치에 버금가는 월드컵 역사상 최악의 경기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잉글랜드 측에서도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다. 라틴의 퇴장 이후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잉글랜드 선수들을 감정적인 면에서 자극했는데, 정당한 태클이 들어와도 오버액션하며 넘어지는가 하면 파울을 범한 선수와 주심에게 단체로 달려들어 노골적으로 밀치는 등 자신들의 불쾌함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이에 잉글랜드 선수들이 더욱 강력한 태클로 맞대응하고 아르헨티나 선수들 역시 파울로 맞불을 놓으며 파울 잔치가 열렸다. 경기 직후 양 팀 선수들이 유니폼을 교환하려 하자 알프 램지 감독이 직접 나서서 선수들의 유니폼 교환을 막기도 했는데, 이 행동을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나기 전까지는 불가능한 일인데, 여기서 '제대로 된 상대'란 짐승처럼 플레이하지 않는 팀을 의미합니다.[2]
알프 램지
잉글랜드의 감독인 램지가 보기에는 아르헨티나의 플레이가 상당히 매너 없는 행동으로 보였을 수 있지만, 사실 양 팀 모두 파울로 얼룩진 경기를 했다. 크라이틀라인 주심이 칼같이 휘슬을 불어대는 통에 양 팀 합산 50개가 넘는 파울이 나왔다. 잉글랜드는 33회의 파울을 저질렀고 아르헨티나는 19회의 파울을 저질렀다.[3] 전반전에는 양 팀의 파울 개수가 비슷했으나, 라틴의 노골적인 농성과 아르헨티나 선수들의 시간 지연 및 폭력적 행동에 격분한 잉글랜드 선수들이 굉장히 거칠게 경기에 임했기에 잉글랜드가 압도적으로 많은 파울 수를 기록하게 되었다. 잉글랜드-아르헨티나의 악연은 포클랜드 전쟁 이전인 이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4]알프 램지
경기 후 분노한 바비 무어도 알프 램지 감독과 비슷하게 이런 말을 남겼다.
"더러운 짓을 했습니다. 그들은 공이 멀리 떨어져 있고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 우리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침을 뱉고, 눈을 찌르고 발로 찼습니다. 놈들을 상대할 유일한 방법은 놈들을 이기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승리가 그들에게 상처가 될 테니까요."[5]
바비 무어
바비 무어
이 경기는 어느 면에서 봐도 논란이 정말 많은 경기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만 해도 미흡하고 자의적이었던 경고, 퇴장 관련 룰이 정비되었고, 잉글랜드의 심판 켄 애스턴의 아이디어인 옐로우 카드와 레드 카드 제도가 채택되어 1970년 월드컵부터 최초로 도입되었다.[6] 그리고 이 때 이후로 두 나라간의 사이는 더 나빠졌고 1982년 포클랜드 전쟁으로 두 나라간의 악감정에 정점을 찍었으며 4년 후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이 터지면서 더욱 악화된다.
1.2. 2경기 서독 4 vs 0 우루과이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8강 제2경기 1966년 7월 23일 15:00(UTC+0) | ||
힐스버러 스타디움 (영국, 셰필드) | ||
주심: 짐 피니 (잉글랜드) | ||
4 : 0 | ||
서독 | 우루과이 | |
11′, 83' 헬무트 할러 70' 프란츠 베켄바워 75' 우베 젤러 | 득점 | - |
- | 퇴장 | 49′ 오라시오 트로체 54′ 엑토르 실바 |
관중: 40,007명 |
물론 우루과이도 판정 피해를 입었다. 우루과이의 세트피스 상황에서 골문 안으로 들어가는 헤더를 서독의 수비수 카를하인츠 슈넬링어가 손으로 쳐냈다. 1978년 마리오 켐페스, 2010년 루이스 수아레스의 싱황과 비슷하다. 그러나 심판은 슈넬링어가 교묘하게 핸드볼 파울을 저지른 것을 보지 못했다. 슈넬링어 자체가 원체 이런 교묘한 눈속임에 능한 선수였고, 반칙을 쥐도새도 모르게 저지르는 데에 아주 도가 튼 선수였기 때문이다.[7] 우루과이 선수들이 슈넬링어의 핸드볼 파울에 대해 항의했으나 짐 피니는 쿨하게 씹어버렸다.
그 후 몇 분 안 되어 헬무트 할러가 선제골을 득점한다. 경기 15분경에는 우베 젤러가 페널티 박스 안에서 백태클에 걸려 넘어졌지만 PK 선언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젤러는 별 항의 없이 프로답게 경기에 임했다. 경기 29분에는 슈넬링어가 특유의 끈질긴 태클 모션으로 공을 빼앗다가 우루과이 선수들에게 둘러싸여 노골적으로 걷어차였다. 그럼에도 슈넬링어가 맞은 티를 안 내서인지 주심은 서독에게 프리킥을 주지 않았다. 양 팀 모두 심판 판정에 강한 불만을 품기 시작했고, 경기 분위기가 계속 험악해지다가 전반전이 끝났다.
후반 1분에는 우루과이 좌측 진영에서 패스플레이를 이어가던 지기 헬트를 도밍고 페레스가 파울로 넘어뜨렸는데, 이후 페레스의 행동이 기가 막힌다. 헬트가 명백한 파울을 당해 쓰러져 있는 상황에서 헬트의 팔을 잡아끌고 강제로 일으키는 비매너 플레이를 한 것이 그것이다. 서독 선수들은 이게 무슨 짓이냐며 모두 달려들었고 경기장 분위기는 더 험악해졌다.
후반 4분에는 서독의 에머리히가 압박을 하다가 발을 높게 들어 우루과이 주장 오라시오 트로체의 정강이를 찍어버렸다. 이미 공이 트로체의 발에서 떠난 상태였던지라 짐 피니는 이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후 벌어진 사태는 심각했다. 파울만 나왔다 하면 떼로 달려들어 주심에게 항의하는 서독 선수들의 행동에 진절머리가 났던 트로체가 에머리히의 배를 걷어차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에머리히는 이때다 하고 맞은 티를 심하게 냈다. 네스토르 곤살베스가 다가와 일으키려고 했지만 주심에게 어필하려고 드러누운 건데 일어날 리가 없었다. 트로체의 비매너 플레이를 지켜본 서독 선수들이 일제히 다가가 주심에게 항의했고, 결국 트로체는 퇴장당했다. 나가면서 한 행동이 그야말로 압권인데, 상대팀 주장 우베 젤러가 자신을 쳐다보자 그의 뺨을 때려버렸다. 베테랑 우베 젤러는 이와 같은 트로체의 야만적인 행동에 응수하지 않고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5분 후에는 우루과이의 엑토르 실바와 오마르 카에타노가 소림축구를 제대로 보여주었는데, 앞뒤에서 달려들어 헬무트 할러를 둘러싸고 카에타노는 할러의 정강이 뒷부분을 걷어찼으며 엑토르 실바는 허벅지 쪽을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8] 엑토르 실바는 이미 전반전에 저지른 파울 때문에 피니 주심의 수첩에 적힌 상태였고, 거기에 더해 이런 비매너 행위까지 저지르자 결국 퇴장을 당하고 말았다. 피니 주심은 단호했다.
후반 18분에는 우베 젤러가 페널티 박스에서 태클을 당해 넘어졌는데, 액션이 작아서 어필이 덜 되었는지는 몰라도 짐 피니 주심이 이를 파울로 받아들이지 않아 페널티킥이 선언되지 않았다. 젤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9명이 뛰게 된 우루과이는 중원이 텅텅 비게 되었고, 젤러의 간력한 슈팅과 베켄바우어의 통렬한 드리블에 완전히 유린당하며 0 : 3 으로 밀려났다.
후반 31분에는 젤러가 페널티 박스에서 공을 받다가 우루과이 수비수와 충돌했고, 이를 젤러의 파울로 간주한 주심이 휘슬을 부는데, 젤러는 이를 무시하고 몇 초 정도 더 공을 가지고 드리블하다가 수비수의 더블 백태클로 응징을 당한다. 펠레를 향했던 주앙 모라이스의 백태클과 다름없는 맹목적인 걷어차임을 당했음에도 젤러는 쿨하게 자신의 잘못(심판의 휘슬이 울렸음에도 드리블을 지속하며 시간을 끈 행위)을 인정하고 웃으면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막판에는 스로인 상황에서 젤러와 할러가 원투패스를 시도했는데, 이 상황에서 뒷공간을 할러에게 완전히 내주며 순식간에 1:1 상황이 되었고 우루과이는 또 실점하였다. 결국 0 : 4 스코어로 자멸하여 8강에서 짐을 쌌다. 서독 선수들은 승리를 챙겼지만 너무 많은 반칙을 당했기에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모습이었다.
이후로도 우루과이는 1970년, 1986년, 2010년까지 3번이나 독일을 만나 약한 모습을 보였다.
1.3. 3경기 소련 2 vs 1 헝가리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8강 제3경기 1966년 7월 23일 15:00(UTC+0) | ||
로커 파크 (영국, 선덜랜드) | ||
주심: 후안 가르데아자발 가라이 (스페인) | ||
2 : 1 | ||
소련 | 헝가리 | |
5′ 이고르 치슬렌코 46′ 발레리 포르쿠얀 | 득점 | 57′ 페렌츠 베네 |
관중: 26,844명 |
소련이 헝가리에 2:1 승리를 거두며 우승후보다운 면모를 보이며 월드컵 첫 준결승에 올랐다. 헝가리는 1954년 준우승 이후 1라운드-8강-8강에 머무르며 매직 마자르의 명성을 회복하는데 실패했다.
1.4. 4경기 포르투갈 5 vs 3 북한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8강 제4경기 1966년 7월 23일 15:00(UTC+0) | ||
구디슨 파크 (영국, 리버풀) | ||
주심: 메나헴 아슈케나지 (이스라엘) | ||
5 : 3 | ||
포르투갈 | 북한 | |
27', 42'[9], 56', 59'[10] 에우제비우 78′ 주제 아우구스토 | 득점 | 1′[11]23초이다.] 박승진 21′ 리동운 22′ 양성국 |
관중: 40,248명 |
자신의 손에 의해 짐을 싼 이탈리아가 쓰기로 예약된 호텔을 대신 쓰며 푹 쉰 북한은 초반부터 포르투갈을 강력히 몰아붙였고, 전반 1분만에 터진 박승진의 선제골을 시작으로 전반 22분 리동운의 추가골, 25분 양성국의 사실상의 쐐기골로 전 세계 축구계를 경악시키며 승부를 결정지었다고 다들 생각했으나… 한 선수가 포르투갈을 승리로 이끌었다.
북한은 경기 시작 1분도 채 되지 않아 박승진의 선취골로 1 : 0으로 앞서갔다. 기세가 오른 북한은 계속해서 속공으로 포르투갈을 몰아붙였고 전반 21분, 리동운의 추가골로 2 : 0으로 앞서갔다. 관중들은 일제히 "We want three!(우리는 3번째 골을 원한다.)"를 연호했고 북한은 그 기대에 부응해 바로 1분 뒤 양성국의 추가골로 스코어를 3 : 0으로 벌렸다. 이렇게 경기는 북한의 완승으로 끝나는 듯했으나..... 포르투갈에는 흑표범이라 불리는 에우제비오가 버티고 있었다. 전반 중반까지 0 : 3으로 뒤지는 상황이 되자 에우제비오는 그 때부터 힘을 내기 시작했다. 전반 27분에 북한 수비의 허점을 뚫고 만회골을 터뜨렸고 전반 42분에는 북한 수비수 신영규의 반칙으로 얻어낸 페널티킥을 성공시켜 순식간에 2 : 3으로 점수를 따라붙었다. 후반전 동안은 잠그고 수비를 강화하기만 해도 이길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국제 경기 경험이 부족했던 북한 선수들은 지능적으로 시간을 끄는 방법을 몰랐고 그저 최선을 다해 뛰는 것밖에 몰랐다. 결국 후반 11분, 에우제비오에게 동점골을 허용하고 말았고 불과 3분 뒤에 수비수 림중선의 반칙으로 또 페널티킥을 허용해 에우제비오에게만 4골을 허용하며 스코어가 3 : 4로 역전되고 말았다. 그리고 후반 33분, 상대의 세트피스 찬스에서 아우구스토에게 굿바이 쐐기골을 얻어맞으며 결국 3 : 5로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관중들은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준 북한 선수들을 극찬했고 북한 선수들도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관중들의 열렬한 응원과 찬사를 받으며 퇴장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2010년에 44년 만에 본선에 올라온 북한을 다시 만나 이번에는 아예 실점 없이 7골을 퍼부으며 무자비하게 학살해버린다.
이로써 1934년 월드컵 이후 32년만에 4강 진출팀이 전부 유럽 국가들로 채워졌다.
[1] 기사 원문: I just want to forget the whole dreadful experience, The match was the roughest I have ever refereed. It was terrible. A disgrace. I sent Rattín off because he was following me and shouting at me. I had no option. He was trying to be the referee. 기사 출처:https://www.google.com/amp/s/amp.theguardian.com/football/blog/2016/jul/24/1966-world-cup-final-conspiracy-refereeing-50-years[2] 즉, 아르헨티나 선수들을 짐승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3] 역으로 생각해 보면 잉글랜드의 파울을 그냥 지나치는 일 없이 매 번 확실하게 휘슬을 불어 통제를 해 주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라틴의 퇴장 장면은 당연히 문제가 있었지만, 그 외의 판정에는 문제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풋볼리아 같은 사이트에서 풀경기를 찾아보면 알 수 있다.[4] 그리고 4년 후 멕시코 월드컵 8강전 잉글랜드 vs 서독 경기에서는 아르헨티나 국적의 앙헬 노르베르토 코에레사 주심이 경기를 주관했는데, 연장전 후반에 페널티 박스 안에서 베켄바워가 콜린 벨을 향해 고의성이 다분한 명백한 파울성 태클을 걸었지만 그냥 무시했다. 누가 봐도 파울인 장면을 그냥 넘어갔고, 동점골을 넣을 수 있는 페널티킥 기회를 이 판정으로 인해 날렸기 때문에 축구 역사에 관심이 많은 잉글랜드 사람들은 여전히 이 판정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내곤 한다. 댓글창을 살펴보자.[5] 원문:did do nasty things. They did tug your hair, spit at you, poke you in the eyes and kick you when the ball was miles away and nobody was looking. I just said the only way to deal with them was to beat the bastards. That’s what would hurt them.[6] 물론, 상대 팀의 거친 태클로 부상을 입은데다가 조국의 조별리그 탈락까지 겪은 브라질의 펠레가 선수 보호 제도를 만들어달라는 요구도 이에 한몫했다.[7] 이 대회 결승전에서도 슈넬링어는 침투하는 앨런 볼에게 슬그머니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놓고 뻔뻔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척을 했는데, 관중들은 이를 보자마자 야유를 퍼부었지만 주심을 비롯한 심판진은 이걸 보지도 못했다.[8] 고추를 붙잡고 늘어지는 반칙을 저질렀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악질적인 파울이었다.[9] 페널티킥[10] 페널티킥[11] 공식 기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