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할러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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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1966 FIFA 월드컵 실버슈 |
독일의 前 축구 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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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 헬무트 할러 Helmut Haller | |
출생 | 1939년 7월 21일 | |
나치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 ||
사망 | 2012년 10월 11일 (향년 73세) | |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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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8cm | |
직업 | 축구 선수 (미드필더[1] / 은퇴)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유스 | BC 아우크스부르크 (1948~1957) |
선수 | BC 아우크스부르크 (1957~1962) 볼로냐 FC 1909 (1962~1968) 유벤투스 FC (1968~1973) FC 아우크스부르크 (1973~1976) BSV 슈베닝겐 (1976~1977) FC 아우크스부르크 (1977~1979) | |
국가대표 | 33경기 13골 (서독 / 1958~1970) |
1. 개요
독일의 前 축구 선수.2. 경력
1962년, 1966년, 1970년까지 3번의 월드컵에 참가를 하였다. 그 중에서도 1966년 월드컵에서는 6골을 기록하며 득점 순위 2위를 차지하였다.3. 사망
2012년 10월 11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4. 플레이 스타일
주 커리어는 볼로냐,유벤투스,아우크스 부르크에서 뛰었으며 가장 뛰어났던 시기는 볼로냐와 유벤투스 시기로 알려져 있다.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으며 아우크스 부르크에서의 데뷔 이후 5년간 최고의 활약을 보이며 팀을 캐리했고 이후 이적한 볼로냐에서 팀을 진두지휘하며 1963년 리그우승을 이끈다.[2] 헬무트 할러는 조율 능력이나 키패스능력도 물론 좋았지만 가장 위력적인 부분은 득점능력에 있었다. 그는 플레이메이커 겸 골잡이로, 각종 킬패스와 득점 능력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에서 60년대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일뿐 아니라 최고의 측면 미드필더로서 손꼽히는 선수로 평가되었으며 볼로냐의 대표적인 선수로 여겨졌다. 특히 1966년 국대에서는 팀내의 중심이던 베켄바우어와 함께 당시 강호였던 우루과이를 4대0으로 이기는 이변을 만들었으며 당시 2득점을 하며 팀내에서 핵심적인 퍼포먼스를 보였다. [3] [4] 이경기를 기반으로 베켄바우어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고, 헬무트 할러는 유벤투스의 눈에 들어 1968년 이적하게 된다. 유벤투스에서도 여전히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었고 볼로냐에서 처럼 팀내 에이스급 활약을 하게 된다. 당시 유벤투스는 디노조프,살바도레,쿠쿠레두,파비오 카펠로, 카우시오, 베테가 등등 최상급의 선수들을 꾸렸는데 팀은 항상 그 명성에 걸맞는 최강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선수또한 헬무트 할러였다. 허나 헬무트 할러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팀의 상황은 녹록치 않았는데 항상 결승 문턱에서 좌절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팀내에서 가장 좋은 기량을 보였던 선수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항상 결승에서 아깝게 무너졌다. 1970년에는 인터시티스 페이스 컵 결승에서 빌리브렘너의 리즈에게 패배하고 1972년에는 유로피언컵 결승에 올랐지만 요한크루이프의 아약스에게 근소한 차이로 밀려 아깝게 무너지고 말았다.
허나 국대에서는 1970년에는 테오필리 쿠비야스의 페루를 상대로 3대1 로 이기고 우루과이에는 1대0 으로 이기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월드컵 3위에 진출하는등 서독의 역사를 이루었다.이후, 1973년 아우크스 부르크에 복귀하였고 당시 2부리그였던 팀을 하드캐리 하며 승격전 결승에 오르지만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며 아쉽게 마무리 했다. [5] 아우크스 부르크와 볼로냐에서는 팀내에서 가장 위대했던 선수중 하나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는 선수이며 당대최고의 선수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아우크스 부르크 팬투표 역대 베스트 11에 뽑혔던 구자철 선수의 대선배 격이라 할 수 있으며[6] [7] 구단 내부에서는 구자철을 자국 선수인 헬무트 할러 보다도 아낀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8][9][10]
5. 기록
- 볼로냐 FC 1909
- 세리에 A : 1963-64
- 유벤투스 FC
- 세리에 A : 1971-72, 1972-73
- FC 아우크스부르크
- 레기오날리가 쥐트 : 1973-74
[1] 공격형 미드필더[2] 당시 이루었던 리그 우승은 23년만의 것이었으며 아직까지도 볼로냐는 리그우승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3] 당시 알베르트 스펜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페냐롤선수들은 우루과이에서 주축으로 뛰고 있었고 특히, 팀내 에이스였던 페드로 로차는 남미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중 하나 였기에 당시 우루과이의 4대0 대패는 전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게다가 현재까지도 페냐롤은 남미 역대 최고의 팀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 중 1966년은 그팀의 최고 전성기였기도 하다.[4] 또한 월드컵 결승에 올라서도 득점을 하는등 무시무시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5] 다만 1973년 레기오 날리가 쥐트에서 1부리그 팀을 상대로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우승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당시 팀내에서 보이는 아우라는 엄청났던 것으로 보인다.[6] 당시 구자철 선수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보인 퍼포먼스는 팀내 최고였기에 당연히 뽑히는게 맞을 뿐더러 엄청난 득점 퍼포먼스를 과시하며 팀을 구해냈다.[7] 구자철 선수는 분데스리가에서 총 50골 19어시를 해내며 최고의 기량을 보였고 아우쿠스 부르크 에서의 퍼포머스는 단연 최고였다. 다시 재림한 "제2의 헬무트 할러"라 해도 될정도이다.[8] 베른트 슈스터와 헬무트 할러가 유스시절 보냈던 팀이 아우크스부르크인 만큼 선수키우는 능력이 좋다.[9] 헬무트 할러는 유스기간만 9년, 프로기간만 10년으로 무려 19년을 뛴 선수로, 현재까지도 아우스크 부르크를 상징하는 선수이며 팀내에서 가장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인 선수이다. 즉, 아우크스 부르크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바로 헬무트 할러인것[10] 헬무트 할러는 역대 위상으로만 따져도 리켈메나 데쿠,후이코스타 이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엄청난 선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