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 ||||
<colbgcolor=#004f9f> 대회 이전 | 지역예선 | |||
조별 리그 | 1조 | 2조 | 3조 | 4조 |
결선 토너먼트 | 8강 | 4강 | 3·4위전 | 결승 |
대회 이후 | 팀별 리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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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조
<rowcolor=#000> 순위 | 국가 | 경기수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비 | 승점 | 비고 | |
<colcolor=#000,#fff> 1 | 소련 | 3 | 3 | 0 | 0 | 6 | 1 | 6.000 | 6 | ||
2 | 북한 | 3 | 1 | 1 | 1 | 2 | 4 | 0.500 | 3 | ||
3 | 이탈리아 | 3 | 1 | 0 | 2 | 2 | 2 | 1.000 | 2 | ||
4 | 칠레 | 3 | 0 | 1 | 2 | 2 | 5 | 0.400 | 1 | ||
■ 16강 진출 | ■ 탈락 |
1.1. 1경기 소련 3 vs 0 북한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4조 제1경기 1966년 7월 12일 19:30(UTC+0) | ||
에이섬 파크 (영국, 미들즈브러) | ||
주심: 후안 가르데아자발 가라이 (스페인) | ||
3 : 0 | ||
소련 | 북한 | |
12′, 88' 에두아르트 말로페예프 72′ 아나톨리 바니셰프스키 | 득점자 | - |
관중: 23,000명 |
3회 연속 본선에 출전하는 조 최강자 소련과 처음 본선에 나가는 북한의 공산주의 국가들 간의 맞대결은 소련의 가벼운 3:0 완승으로 마무리되었다. 북한은 월드컵 직전에 있던 동구권 순회 경기에서 소련 스파르타크팀을 2대0으로 이긴 적이 있었기 때문에 소련은 북한이 특기인 속도전을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 평균키가 162센티에 불과했던 북한팀을 상대로 상대로 피지컬과 완력을 앞세운 더티 플레이로 일관해서 가히 북한 선수들을 때려눕혀가며 경기를 했다. 이에 북한팀도 당황했지만 북한이 어디에 붙은지도 모르고, 혹은 6.25 때 싸운 적성국 정도로 알고 심심해서 구경온 영국 관객들이 흥분해서 일제히 소련팀에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고 영국 언론도 소련의 승리를 비웃고 씹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다들 북한팀이 곧 집에 갈 것으로 예상하였다.
1.2. 2경기 이탈리아 2 vs 0 칠레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4조 제2경기 1966년 7월 13일 19:30(UTC+0) | ||
로커 파크 (영국, 선덜랜드) | ||
주심: 고트프리드 딘스트 (스위스) | ||
2 : 0 | ||
이탈리아 | 칠레 | |
8′ 산드로 마촐라 88′ 파올로 바리손 | 득점자 | - |
관중: 27,200명 |
이탈리아는 4년 전 산티아고에서 겪은 난투극 끝 패배를 마촐라와 바리손의 득점으로 똑같은 스코어로 리벤지 매치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이게 이 대회 마지막 승리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3. 3경기 칠레 1 vs 1 북한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4조 제3경기 1966년 7월 15일 19:30(UTC+0) | ||
에이섬 파크 (영국, 미들즈브러) | ||
주심: 알리 칸딜 (아랍 연합 공화국)[1] | ||
1 : 1 | ||
북한 | 칠레 | |
88′ 박승진 | 득점자 | 26' 루벤 마르코스(PK) |
관중: 13,792명 |
칠레가 루벤 마르코스의 페널티킥으로 경기 내내 1:0으로 앞서갔으나 종료를 얼마 안남기고 북한의 박승진에게 극적인 동점골을 허용하며 칠레와 북한 모두 1무 1패가 되었다. 칠레는 승점자판기로 여겨졌던 북한에 비기며 최종전 상대가 최강자 소련인 탓에 8강에 먹구름이 끼었고 북한은 남미 칠레를 상대로 승점 1점을 획득했다.
이 경기는 아시아 팀이 처음으로 톱시드 팀에게 득점을 하고 무승부로 마감해 승점을 얻어낸 경기이기도 하다.[2][3][4]
1.4. 4경기 소련 1 vs 0 이탈리아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4조 제4경기 1966년 7월 16일 15:00(UTC+0) | ||
로커 파크 (영국, 선덜랜드) | ||
주심: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서독) | ||
1 : 0 | ||
소련 | 이탈리아 | |
57′ 이고르 치슬렌코 | 득점자 | - |
관중: 27,793명 |
승자는 8강이 확정되는 경기에서 소련이 후반 12분 치슬렌코의 결승골로 8강행을 확정지었다. 이탈리아는 이제 북한과의 최종전에서 비기기만 해도 사실상 8강행을 확정했을 상황이었다. 그런데...
1.5. 5경기 북한 1 vs 0 이탈리아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4조 제5경기 1966년 7월 19일 19:30(UTC+0) | ||
에이섬 파크 (영국, 미들즈브러) | ||
주심: 피에르 슈빈테 (프랑스) | ||
1 : 0 | ||
북한 | 이탈리아 | |
42′ 박두익 | 득점자 | - |
관중: 17,829명 |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북한 vs 이탈리아 문서 참조.
1.6. 6경기 소련 2 vs 1 칠레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4조 제6경기 1966년 7월 20일 19:30(UTC+0) | ||
로커 파크 (영국, 선덜랜드) | ||
주심: 존 아다이르 (북아일랜드) | ||
2 : 1 | ||
소련 | 칠레 | |
28′, 85' 발레리 포르쿠얀 | 득점자 | 32′ 루벤 마르코스 |
관중: 22,000명 |
칠레는 최종전 이탈리아의 패배로 조 1위가 확정된 소련에 이기기만 하면 북한을 골득실에서 앞서 8강에 올라갈 수 있었으나 소련의 벽은 높아 결국 패배하며 조 최하위로 66월드컵 프랑스와 공동 13위로 탈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탈리아에 이어 지난 대회에서의 승리를 복수당했다.칠레가 패배하면서 북한의 조 2위 8강이 확정되었다. 북한은 아시아 국가 첫 월드컵 본선 승리와 함께 3조의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첫 본선 진출에 2라운드 진출, 그리고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제외하고 처음으로 본선 1라운드를 통과한 첫 팀이라는 기록도 작성하게 되었다. 유럽/남미가 독식하던 본선 2라운드에 최초로 비유럽/미주팀이 올라가는 사건이었다.[5][6] 그다음 비유럽/미주팀이 올라간 사례는 20년 후인 1986 월드컵 모로코에게서 나왔다.
[1] 1958년에 이집트와 시리아의 연합으로 결성된 나라인데 불과 3년 후에 시리아가 탈퇴하며 유명무실해졌고 결국 1971년에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다시 국호를 이집트 아랍 공화국으로 고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므로 이 주심은 그냥 이집트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2] 당시 4조의 톱시드는 칠레였다.[3] 1938 월드컵에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출전한 인도네시아와 독립국가로는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월드컵 본선진출에 성공해 1954 월드컵에 아시아 두번째로 출전했던 대한민국은 무득점으로 전패했었다.[4] 그다음으론 대한민국이며 경기는 북한을 거의 본받았다고 무방한데 북한에 더 높은 4강과 4포트로 1포트(톱시드)를 최초로 잡는데 성공했다.[5] 비유럽/남미팀 중 가장 꾸준히 월드컵을 밟은 멕시코도 이때까지 본선 2라운드는 꿈도 못꾸고 있었다. 초대 대회에서 미국이 4강 3위를 기록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선수가 스코틀랜드 프로리그에서 뛰어서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팀이라는 비아냥을 받았었다. 사실상 비유럽/비남미 팀에서는 38년 쿠바 이후 두번째라 봐도 무방하다.[6] 대한민국은 5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해외 월드컵에서 8강 이상 올라가본 적이 단 한번도 없기에 이념을 떠나서 북한의 8강 진출은 굉장히 의미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물론 이 대회 본선 자체가 16개국 체제라 조별리그만 통과하면 8강부터 시작하긴 했으나, 당시 16강 조별리그 진출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66월드컵 8강 8위라는 것은 전 세계 국가들이 예선과 본선을 통해 경쟁을 했는데 그 중에서 8개국만 살아남았다는 의미이다. 결국 북한 축구의 성과가 폄하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