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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6 22:02:27

1차 적색공포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전국적 파업3.2.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3.3. 대규모 검거와 추방3.4. 노동절 음모론과 몰락
4. 부작용

1. 개요

파일:the first red scare.jpg
1919년 11월 1일자 뉴욕 이브닝 텔레그램 만평[1]
Reading Through History '역사요약: 1920년대의 적색공포'.

First Red Scare

20세기 초반 러시아 혁명 이후 미국에서 만연했던 공산주의아나키즘에 대한 피해망상적 공포. 당시 미국에서 나날이 커져가던 노동운동과 러시아의 공산화로 인해 아나키즘과 공산주의가 자유의 땅 아메리카를 오염시킬 것이라는 공포가 사회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언론은 이러한 공포를 더욱 부채질하며 노동운동의 배후에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이 있다는 근거 없는 음모론을 살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좌파 계열로 의심되는 사람들의 표현의 자유가 억압되었고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졌으며 남유럽동유럽 출신 이민자에 대한 혐오가 확산되었다.

2. 배경

미국에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한 공포는 19세기 말 헤이마켓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헤이마켓 사건 이후 노동운동이 급격하게 성장하기 시작하였고 전국 곳곳에서 파업이 일어나면서 당시 공화당을 비롯한 보수주의자들과 기업은 물론 민주당마저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 아나키스트이자 폭력주의자였던 루이자 갈레아니를 중심으로 파업이 일어나났으며 아나키즘 신문을 창립해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당시 신문 가입자 수만 5000명에 이를 정도였으며 그를 추종하는 이념인 갈레아니즘이 탄생하였고 갈레아니스트의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다.

이러한 공산주의와 아나키즘의 성장을 막기 위해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법무부 검찰국을 설치하였고 법무부는 본격적으로 노조 및 좌파 단체의 지도자들을 체포, 기소하며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맞춰 의회 또한 1917년에 간첩법을 통과시켰고 저명한 노동운동 지도자였던 유진 데브스는 청년들에게 전쟁 참여와 징병 등록을 거부하는 연설을 했다가 간첩법으로 체포되었고 유죄 판결을 받은 후 감옥에 수감되었다. 1918년에는 치안법과 이민법이 제정되어 미국 정부와 국기 등에 대한 모욕 행위를 불법화하고 정치적 위험 인물들을 미국에서 추방할 수 있게 되었다.[2]

여기에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러시아 혁명의 소식은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더욱 더 확산시켰다. 자기들과 같은 강대국이 순식간에 공산화되어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했다는 소식은 미국의 경각심을 더욱 더 키우게 되었다. 미국은 이러한 공포와 사회주의 확산의 방지를 위해 러시아 내전에 참전하여 병사들을 파병하였다.

3. 전개

3.1. 전국적 파업

1919년 1월 21일 시애틀에 있는 조선소에서 35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주장하며 파업에 돌입하였다. 이에 맞서 3000여명의 경찰과 연방군이 시내 곳곳에 배치된 한편 언론에서는 파업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쏟아부었다. 여기에 시애틀 시의 강경대응으로 인해 결국 파업은 5일도 가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파업의 성공 여부와 별개로 시애틀에서 일어난 총파업은 미국 전역에 노동운동에 대한 두려움을 확산시켰으며 적색공포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시애틀 총파업에 이어 보스턴 경찰청, 철강과 석탄산업 등에서도 임금 및 근로 여건 개선을 주장하며 파업이 일어났다.[3] 여기에 소방노조 등의 동조 파업도 예고되면서 노동운동은 더욱 격렬해졌다. 하지만 당시 경찰의 파업은 공공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비판에 직면했고 훗날 대통령이 되는 캘빈 쿨리지 매사추세츠 주지사의 단호한 대응과 통보[4]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철강파업 또한 수천여명이 투옥되었고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언론에서 체제전복 세력들이 배후에서 주도하고 있다고 보도하며 부정적 여론이 강해졌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5]

3.2.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

무정부주의에 대한 공포심이 사회 전역으로 번져나간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이어진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였다. 1919년 4월에는 36개의 부비트랩형 폭탄이 정치인, 판사, 기업인, 검사 등에게 우편으로 보내졌는데 이는 무정부주의자들의 소행임이 드러나게 되었다.[6] 루이자 갈레아니의 추종자들에 의해 당시 법무부장관인 알렉산더 팔머에 대한 테러가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그의 자택이 파괴되었다.[7] 1920년 9월 16일에는 갈레아니의 추종자에 의해 월스트리트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서 30명 이상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3.3. 대규모 검거와 추방

전국적 파업과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는 공산주의와 아나키즘 세력에 대한 탄압에 제트 엔진을 달아주었다. 법무부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팔머는 좌익 정당 및 단체와 노조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시작하였고 수천여명이 구속되거나 연행되었으며 불법적인 압수수색까지 이루어지는 등 탄압을 일삼았다.[8] 1919년 12월 21일에 249명의 이민자, 외국인, 노조와 좌익 지도자들에 대한 추방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추방이 잇따르기 시작하였다. 좌익 단체와 노동운동에 연루된 556명의 외국인들이 추방되었고 뉴욕주의회는 압도적 표결을 통해 5명의 사회주의자들을 추방시켰고 이로 인해 많은 비판을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검거와 추방은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가지고 있던 대다수 미국인들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언론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었다.

3.4. 노동절 음모론과 몰락

대대적인 검거와 추방이 이루어지고 있던 와중에 팔머 법무부장관은 1920년 노동절을 앞두고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체제전복 음모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급진주의자들이 유럽의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하여 노동절에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고 발표하였고 전국에서 무장경찰들이 배치되었고 일부 주에서는 자경단까지 만들어졌다. 그러나 정작 5월 1일 당일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팔머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적색공포는 순식간에 잦아들기 시작하였다.[9] 언론은 이러한 팔머의 거짓된 공포 조장을 공격하였고 법조계에서도 팔머에 대한 비판 여론이 커졌다. 의회에서도 공포가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팔머는 대선을 앞두고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4. 부작용

매카시즘에 비해 별로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1차 적색공포의 발생한 부작용은 매카시즘에 의한 부작용에 버금갈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당시 이루어졌던 대규모 검거와 추방으로 인해 미국의 노동운동과 좌익 단체들은 거의 궤멸되었으며 노동자들의 인권과 정치적 다양성은 더욱 후퇴하고 말았다. 미국 정부, 군, 국기에 대한 모욕 행위는 물론 반전 운동마저 불법화되어 표현의 자유도 탄압을 받았다. 공산주의와 아나키즘 활동을 주도한 세력의 상당수가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유럽-동유럽 이민자 출신이었다는 이유로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 또한 사회에 확산되었다. 이러한 혐오감이 표출된 대표적인 사건이 사코와 반제티 사건이다. 단순히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에 무정부주의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살인 누명을 쓰고 말았고 결국 사법살인을 당하고 말았다.
[1] 노동자 혹은 노조가 파업, 무질서, 볼셰비즘의 길에 들어서면서 사회가 단계적으로 폭동과 살인 그리고 혼란에 빠지게 되며 그 결과는 알 수 없다고 풍자하는 만평이다.[2] Laws of the United States, Espionage Act of 1917 (Act of June 15, 1917), ch. 30, title I, §3, 40 Stat. 219, amended by Act of May 16, 1918, ch. 75, 40 Stat. 553-54, reenacted by Act of Mar. 3, 1921, ch. 136, 41 Stat. 1359, (codified at 18 U.S.C. §2388); Laws of the United States, Sedition Act of 1918, (1918 Amendments to §3 of The Espionage Act of 1917), Act of May 16, 1918, ch. 75, 40 Stat. 553-54, (repealed by Act of Mar. 3, 1921, ch. 136, 41 Stat. 1359)[3] 김형곤, 철강산업파업 ( 1919 . 9 ) 을 통해 본 미국 적색공포의 일 연구[4] 당신 말대로 (경찰 당국) 위원이 잘못된 조처를 했다고 해도, 그게 도시 치안을 직무유기하는 걸 정당화할 수는 없소. 공공의 안전을 위협하는 파업을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언제라도 있을 수 없소![5] Rayback, 287; Brody, 244–253; Dubofsky and Dulles, 220[6] Avrich, Paul, Sacco and Vanzetti: The Anarchist Background,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1), pp. 147[7] Avrich, Paul, Anarchist Voices: An Oral History of Anarchism in America (AK Press, 2005) ISBN 1-904859-27-5, ISBN 978-1-904859-27-7, p. 496[8] https://www.history.com/topics/red-scare/palmer-raids[9] 김형곤, 『미국의 적색공포, 1919-1920』(서울: 역민사,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