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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07:06:29

연소양왕

희직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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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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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 제3대 왕'''
희(姬)
직(職)
아버지 연왕 쾌(燕王 噲)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279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313년 ~ 기원전 279년

1. 개요2. 이름 논란3. 생애
3.1. 왕위에 오르기 전3.2. 제나라를 치다3.3. 재위 말기
4. 한국 역사에 끼친 영향력
4.1. 고조선-연 전쟁4.2. 초기 철기 문화 유입4.3. 사상·문화 전파 및 공유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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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나라의 제39대 국군이자 제3대 . 시호는 소양왕(昭襄王)이지만, 약칭 시호로는 소왕(昭王) 혹은 양왕(襄王)으로도 불린다. 제나라의 침공과 자지(子之)의 반란으로 피폐해진 연나라를 살리기 위해 곽외(郭隗)와 악의(樂毅)를 등용하여 연나라의 번영을 이룩한 정복군주이자 중흥의 명군이었다.

2. 이름 논란

연소왕의 본명이 희평(姬平)으로 알려져있기도 하지만, 이는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이 당시 연나라의 상황이 워낙 혼란스러운 탓에 제대로 기록하지 못한 사료 혹은 진시황분서갱유 때문에 이름을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본명은 희직(姬職)이 맞다.

《사기》<연소공세가>에 따르면 당시 태자의 이름이 평(平)이었고, 평이 연소왕으로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연나라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에 새겨진 연소왕의 이름은 직(職)이었다. 《사기》<조세가>에 따르면 공자 직(職)이 연나라로 가서 즉위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기》와 연나라의 유물 및 《죽서기년》의 차이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재상 자지(子之)에 의해 장군 시피(市被)와 태자 평(太子 平)이 살해되고, 다른 나라에 가 있었던 공자 직(公子 職)이 와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죽서기년》의 기록이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연 소양왕 희직(姬職)은 형의 이름인 희평(姬平)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대를 살았던 진나라소양왕 역시 한자는 다르지만 이름이 직(稷)이었다. 둘 다 왕위에 오르기 전 타국에서 인질로 있다가 형이 죽자 왕위에 오른 점, 진 소양왕은 천하통일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 연 소양왕은 제나라와 조선, 동호를 토벌하면서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진 소양왕은 어머니인 선태후와 함께 연나라에서 인질 생활을 했었다.

3. 생애

3.1. 왕위에 오르기 전

연왕 쾌 5년(기원전 316년), 쾌(燕王 噲)는 간신인 자지에게 전권을 위임했고, 그 결과 자지는 권력을 남용하여 연왕 쾌로부터 선양을 받아 왕을 자칭하는 등 연나라의 정세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에 태자 평(平)이 장군인 시피(市被)와 함께 거병하여 이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연왕 자지 3년(기원전 314년), 이틈을 노린 제나라선왕이 장수 광장(匡章)을 보내 연나라를 기습하여 내전에 개입하고 자지의 무리를 진압했다. 이 와중에 연왕 쾌가 자살했다.

3.2. 제나라를 치다

연 소양왕 원년(기원전 313년), 연나라가 제나라의 속국이 되는 조건으로 연왕 쾌의 서자인 공자 직이 연나라의 왕으로 즉위했다.

재위 초기부터 연 소양왕은 마음속으로 제나라에 절대로 복종하지 않을 것을 결심했기 때문에 절치부심하여 여러 인재를 등용하고, 부국 강병에 힘썼다. 곽외(郭隗)를 스승으로 삼고, 그 조언에 따라 널리 인재를 끌어모아 등용했다.

그리하여 들어온 인재가 바로 명장 악의였다. 그를 등용한 소양왕은 악의를 보내 제나라의 민왕을 쳤는데, 연나라 혼자서 제나라를 치기에는 제나라의 힘이 당시에 매우 막강했으므로, 한나라, 조나라, 위나라, 진나라와 동맹을 맺고 제나라를 공격했다.

악의가 이끄는 연합군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제군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며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를 포위했다. 이에 기뻐한 소양왕은 악의의 공적을 기려 그를 창국군에 봉했다. 그리고 악의에게 제나라를 완전하게 멸할 것을 명령했다.

3.3. 재위 말기

연 소양왕 30년(기원전 284년), 제 민왕은 수도 임치가 함락되고 남은 땅이 (莒)와 즉묵(即墨)뿐이라 결국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그래서 초나라의 장수 요치(淖齒)가 오기는 왔는데, 그가 오히려 제 민왕을 배신하여 감금하니 결국 민왕은 굶어죽고 말았다.

하지만 악의의 상황도 좋아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왕손 가에 의해 즉위한 제 양왕이 연나라를 상대로 즉묵에서 항쟁을 지속했기 때문이다.

연 소양왕 33년(기원전 281년) 무렵, 소양왕은 장군 진개(秦開)를 보내 동호(東胡)와 고조선(古朝鮮)을 쳐서 동호의 땅 1,000리를 포함해 요서와 요동에 걸친 2,000여 리의 땅을 차지했다(고조선-연 전쟁).[1]

연 소양왕 35년(기원전 279년), 연나라를 중흥시킨 명군 소양왕이 훙했다.[2]

4. 한국 역사에 끼친 영향력

4.1. 고조선-연 전쟁

진개의 침략과 상곡(上谷) · 어양(漁陽) · 우북평(右北 平) · 요서(遼西) · 요동(遼東) 등의 5군(郡)이 설치되었다.

4.2. 초기 철기 문화 유입

한국 역사에서 철기 시대가 시작 되었다. 서기전 8세기경에는 북방 흑해연안에도 야철기술이 전파되어 이 지방 주민들의 기마유목화(騎馬遊牧化)를 촉진시켜 스키타이(Scythai)문화를 꽃피우게 하였다. 스키타이 유목족에 전파된 철기문화는 동방으로 퍼져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파급되었다. 중국에서 인공철은 춘추시대(春秋時代) 말에서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에 등장한다. 기원전 4세기~기원전 3세기부터 연나라의 철기문화가 파급되어 철기사용이 시작되지만 대체로 몇 종류의 농공구류만이 우선 철기화된다.

4.3. 사상·문화 전파 및 공유

단군 신화부터 별자리가 새겨진 고인돌[3], 화장 풍습, 동경 중시[4], 불로장생 의식[5] 등 신선 사상·선도의 발원지가 고조선이 활동했던 지역으로 보인다.[6] 신선 신앙과 관련하여 동경도 주목되는 바이다. 신선 설화에서 거울은 달의 중요한 상징물이라는 점에서 달 숭배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고조선 지역의 신앙에는 신선 신앙의 요소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연소양왕은 고조선 지역을 정복하고 군현을 설치하기는 하였지만, 토착 세력의 풍습을 적극적으로 개변하기 보다는 그 풍습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동호, 조선 지역의 풍습이 연에 유입되기도 하였는데, 이 시기에 연에 본격적인 신선 신앙이 유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조선으로부터 신선 사상을 받아들였다.

불사 관념이 번지면서, 사기(역사책)제위왕(B.C. 356~320), 제선왕(B.C. 319~301), 연소왕(B.C. 313 ~279)이 선인과 불로장생약이 있다는 삼신산을 찾기 위해 사람들을 바다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습유기 권4에는 연소왕이 선도에 뜻을 두고 장생구시의 도를 배우고자 했다고 전한다. 고조선의 활동 무대였던 점령한 연소왕 때부터 연 지역에 신선 신앙이 유행하였다는 점에서 고조선의 신앙 요소의 일부가 연에 의해 받아들여졌음을 추론할 수 있다. 또한 연소왕은 추연을 스승으로 삼았기에 추연의 음양오행 사상이 전파되었으며, 한국 역사에서는 풍수와 도참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5. 미디어 믹스

파일:external/san.nobuwiki.org/1054.jpg
삼국지 12, 13, 14

<삼국지 시리즈>에서 고대무장으로 등장하는데, '희평'(姬平)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진평'이라고 오역될 때도 있다. 그런데 정작 고대 무장으로 나와도 될법한 진짜 전한진평은 <삼국지 시리즈>에서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1] 기록에 의하면 만번한까지 넓혔다고 한다. 그 위치가 어딘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현재 요동의 천산산맥 부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2] 일단 왕이긴 해도 주나라의 천자가 아니었으므로 '훙'으로 표기한다.[3] 서북한 지역에는 고인돌이 많이 확인되고 있는데, 덮개돌 위에 북두칠성을 비롯한 별자리가 새겨진 것이 많이 보인다.[4] 동경은 고조선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었는데 동경이 부장된 무덤은 여타 무덤보다도 규모나 부장 유물면에서 뛰어나다는 점에서 최고 지위를 지닌 자의 무덤임을 알 수 있다.[5] 후한서 동이전 서문이나 설문 양부에서 ‘동이는 군자가 있어 불사하는 나라’라는 언급 등 신선 신앙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확인하고 있다.[6] 정재서·(한국도교의 기원과 역사), 안동준·(한국도교문화의 탐구), 안동준·(고구려계신화와 도교, 백산학회,2000), 김남중·(국사관논총107집 고조선의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