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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20:39:57

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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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 개요2. 재해석?
2.1. 노력하지 않는 태만?2.2. 부지런한 놀부와 게으른 흥부?
3. 기타

1. 개요

興夫
아이고 성님 동상을 나가라고하니 어느곳으로 가오리요. 이 엄동설한에
육각수, 흥보가 기가 막혀
흥부전주인공으로 놀부의 동생,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형 놀부에게 전재산을 모두 털리고 쫓겨나서 길에서 품팔이를 하면서 살다가 구렁이에게 공격받는 제비를 구해주고 다리를 치료한 보답으로 그 제비가 물고 온 박씨를 키워 그 박을 갈라보았더니 보물이 나와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1]

자식들의 숫자가 상당히 오락가락한다. 적게는 3명에서 많게는 30명까지 설화마다 숫자가 다르다. 흥부전이 본래 구전되어오던 거라 오락가락하는 것인 듯. 어떤 판본에서는 이 많은 수의 자녀들이 전부 친자식은 아니고, 흥부의 마음이 어질어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떠돌아다니는 아이들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보는 대로 거둬들여서 자기 자식으로 삼았다는 설정도 있다.

판본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판본에서는 흥부 아내가 마지막 박은 어쩐지 느낌이 안 좋다고 타지 말자고 했지만 결국 타게 되고 거기서 첩이 나오자 아내 하는 말이 '아이고, 그래서 내가 저 박은 타지 말자고 했는데' 그러자 입이 쭉 째진 흥부가 하는 말이 가관으로 "여보 걱정마오, 설마하니 조강지처 박대할까?" 일부 판본에서는 박에서 나오는 여인이 양귀비로 소개되기도 한다. 박 속에서 사람의 기척이 들리니, 흥부가 "뉘시오?" 물으니, "'비'옵니다." "'비'가 누구요?" 다시 물으니, "양귀비옵니다."하면서 절세미인인 양귀비가 나왔고, 놀부의 박에서는 '비'는 비인데, 성이 장씨였다.

몰락한 양반이나 조선 후기 발생하는 초기적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예전보다 가난해진 소작농의 자화상과 꿈이 만들어낸 캐릭터라는 설이 있다.

소설상에서 흥부가 박을 탔을 때 나오는 물건 중 하나가 흥부 자식들이 공부할 책이었다. 물론 시대상으로는 그 때 가장 대표적인 꿈은 벼슬하는 거였다. 조선시대에 공부해서 출세를 할 수 있었던 일의 99.9%가 과거시험 혹은 하급 관리에서 시작하는 것들이라서 그 당시에 공부를 하는 것은 모두 벼슬을 하는 것이 목적이다.

애당초 지금처럼 직업이 세분화가 이루어지지도 않았고 사농공상에 의해서 직업이 천대를 받았기 때문. 양반의 경우에는 3대에 걸쳐 과거에 한 명도 급제하지 못하면 양반의 신분이 박탈됐다. 출세 뿐만 아니라 양반의 작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과거는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였던 것.

흥부가의 버전 중엔 놀부가 흥부를 쫒아낸 땅으로 온갖 작물들을 키우는데, 그게 고추, 담배, 인삼 등이었다는 것도 있다. 당시 이런 상품 작물을 키우기 위해 그 동안 밭 갈던 빈농들의 땅을 빼앗거나 소작하는 자를 쫓아내는 경우도 많아서 흥부는 그런 상업 발달의 과정에서 소외된 자들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과 인월면이 서로 흥부의 고향이라고 주장해왔다. 아영면은 정조 때 만들어진 절충장군임세강지묘라는 비석의 내용을 근거로, 인월면은 판소리 흥보가에서 제비가 박씨를 물고 흥부네 집 찾아오는 대목[2]을 근거로 내세운다.

최근에 밝혀진 최고 오래된 버전인 1833년 필사본인 흥보만보록의 내용에 의하면 진짜 배경은 조선 시대도 아닌 고려 시대 인물로 추정되며 평안도 평원군 순안면 일대에서 장천의 두 아들이 있는데 장남의 이름은 우리가 익히 아는 놀부이고 차남인 흥부가 훗날 덕수 장씨의 시조라고 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참고로 이 덕수 장씨라는 가문은 고려 충렬왕위구르족 출신으로서 제국대장공주를 호위하러 고려에 온 셍게(三哥)라는 사람이 시조인데 고려에 온 이후 장순룡(張舜龍)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해 덕수 장씨의 시조가 되었다. 흥보만보록 내용대로라면 흥부와 놀부 형제는 모두 위구르족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놀부와 흥부는 평양지역의 부잣집의 데릴사위로 갔었으나 흥부는 부모님 공양을 위해서 집에 금방 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계속 그대로 데릴사위로 있던 놀부는 처가의 재산을 물려받은 탓에 재산을 동생에게 나눠줄 수 없어서 흥부가 가난하게 지낸것이라고 한다. 이후 내용은 비슷하게 흘러가다가 흥부가 훗날 무과에 급제했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작중 흥부의 성씨는 제비 연(燕)씨(소설) 혹은 성 박(朴[3])씨(흥보가)로 설정되어 있다. 작품에서 제비이 지니는 위상을 생각해볼 때 매우 알맞은 성씨다. 다만 1833년에 작성된 흥보만보록의 필사본에는 덕수 장(張)씨로 설정되어 있어 진짜 성씨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2. 재해석?

워낙 유명한 캐릭터인지라 그 유명세 때문인지 흥부전을 어설프게 해석하고 흥부에 대한 비판론이(아울러 놀부에 대한 옹호론도) 종종 제기되곤 했다.[4] 때문에 일반적인 관점인 '착하고 성실하지만 가난한 흥부', '모질고 박하지만 부자인 놀부'를, 반대되는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문제 곧잘 출시되기도 했다.

하지만 흥부전에 대한 본적인 연구와 출판이 이루어지면서 위에서 언급한 흥부와 놀부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들이 풀려났고, 오히려 흥부 쪽이 가족을 위해 목숨걸고 노력했고(예를 들어 후술할 매품팔이) 반대로 놀부 쪽이 오만 범죄들과 악행들로 첨철된 것이 명백히 드러나면서 재해석을 빙자한 왜곡적 주장들도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2.1. 노력하지 않는 태만?

먹고 살기 힘든 상황에서 가족을 늘린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가난의 대물림을 통한 고통의 확산이라는 것. 그러나 당시에는 농업이 국가의 기반 산업이었으며, 아직 피임이라는 개념이 분명하게 정립되지 않았고 관련 기술도 미비했던 그 시대는 다산은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5] 게다가 삼강오륜이라는 윤리가 공고하던 시대의 작품이기에 '부위자강', '부자유친'이라는 말에 따라 힘이 들더라도 자식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정성을 들이는 것이 당시에도 흥부 같은 아버지의 중요한 도덕으로 여겨졌다. 신채호본에서 흥부는 놀부에게 아예 '원찮은 자식들'을 묘사하거나, 심지어 '남의 자식 같으면 농사하네 나무하네 한창들 벌이를 하련마는 원 늦되어서 부르는게 어메 아비 음식 이름, 아는 것이 밥뿐이로구나.'라고 하여 당대에도 자식을 키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음을 묘사하는 대목이 있다. #

2.2. 부지런한 놀부와 게으른 흥부?

간혹 흥부가 가난했던 것은 게을렀기 때문이고 놀부가 부유했던 것은 부지런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찾아볼 수 있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는 이야기다. 일단 흥부가 게을렀다는 정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는 놀부에게 유산을 일방적으로 다 빼앗기고 강제로 쫓겨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손수 집을 짓고 밭을 개간해서 먹고 살면서 가족들을 부양하려고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는 것에서부터 기생들 편지 심부름[6]을 하고 심지어는 곤장을 대신 맞아주는[7] 일까지 하게 된다. 즉, 게으르기는커녕,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라면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미천한 일도 꺼리지 않고 심지어 목숨까지 거는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던 인물이다.

더 큰 문제는 많은 동화 버전들이 무슨 이유인지 흥부가 가난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일하는 부분을 아예 삭제하고, 그냥 쪼달리니 놀부에게 찾아가 도와달라는 애원하는 파트로 바로 이어지는 경우가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다. 이런 알 수 없는 편집이 흥부가 아무 일이나 노력도 한 것도 없는 게으름뱅이였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데 아주 큰 역할을 했다. 물론 동화들이 고전을 축약이나 삭제를 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건 의도조차 이해하기 힘든데, 대부분이라고 봐도 좋을 많은 동화 출판사들에 흥부를 의도적으로 게으름뱅이로 만드는 편집을 했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단 웅진씽크빅의 호롱불 옛이야기에서는 흥부도 열심히 일했다는 묘사가 나온다.#

또한 놀부가 부지런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그는 자신이 장남이라는 것을 악용해서[8]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을 독식하고는 흥부를 빈털터리로 만들고 내쫓은 뒤 온갖 민폐들을 끼치며 살았다. 즉, 그가 부유해진 것은 장남이라는 권위를 앞세워서 흥부에게 돌아갔어야 할 유산까지 모조리 강탈했기 때문이지 노력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부유해진 뒤에도 하릴없이 빈둥빈둥 놀기나 하면서 근면이라는 말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모습들만 보였다. 한 마디로 게으름뱅이는 동생 흥부가 아니고 바로 형 놀부인 셈.

끝으로 흥부가 놀부에게 도움을 청했던 부분 역시 흥부의 잘못으로 보기는 어려운데, 무일푼 신세에서 출발하여 많은 자식들을 혼자 양육하려면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흥부는 형에게 찾아가기 전까지 상술했듯 온갖 노력들을 다 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 중 한 명도 굶겨 죽이거나 노비로 파는 비인격적인 행위들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제비의 다리를 고쳐주고 천벌을 받아서 빈털터리가 된 형 놀부를 도와주는 등 자비를 베풀 줄 아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일.

요컨대 흥부가 가난했던 것은 게을렀기 때문이고 놀부가 부유했던 것은 부지런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근거도 전혀 없고 설득력도 떨어지며,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모습들만 찾아볼 수 있다. 어쩌면 황금만능주의의 영향으로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 바라보게 되는 경향이 생긴 것이나 놀부가 이야기 말미에 몰락하는 과정을 당시의 시각이 아니라 현재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동정심을 느낀 것이 이러한 주장이 나오게 된 계기로 보인다.

3. 기타



[1] 이후 놀부는 이 소식을 듣고 일부러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린 후 치료해 주었고, 이듬해 박씨를 받기는 받았지만, 그 박씨에서는 온갖 재앙들이 튀어나오면서 놀부는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고, 이후 흥부의 도움을 받아 예전과 같은 삶을 되찾은 뒤 개과천선했다.[2] 가령 김창환 제 흥보가의 제비노정기 중 "경상도는 함양이요, 전라도는 운봉이라. 운봉함양 두얼품에 흥보가 사는지라."라는 구절. 운봉읍과 함양군의 중간에 인월면과 아영면이 있다.[3] 식물 을 뜻하기도 한다. 애초에 박씨 성의 유래[4] 동화 다시읽기류의 그림책 중에서는 흥부가 놀고 먹으며 형 부부에게 구걸하는 동안 놀부는 쌓아둔 재산으로 재테크를 하며 돈을 벌었다는 작품도 있었다.[5] 지금처럼 기계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직접 일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사람 자체가 노동력이었다. 그러니까 맨손이나 하다못해 농기구를 들고 직접 논밭 갈았던 시대여서 두 세명으로는 그 넓은 논밭을 하루만에 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가난해서 땅이 없는데 뭔 논밭 타령 그래서 아이를 더 많이 낳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했고 논밭을 넓게 경작한다 한들 사람 수가 많은만큼 먹을 것도 많이 들어가기 마련이었으므로 일반 농부가 부유해지기는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옛날에는 잉여 식량 생산량 자체가 낮을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 직접 노동하기 때문에 농부들이 에너지를 많이 써야 했으므로 쌀을 비축하기도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이 괜히 많이 먹은 게 아니었다 힘든 일 하니까 많이 먹는 거였다[6] 비슷한 행동을 현대에서 찾는다면 룸살롱 아가씨들 밑에서 삐끼로 일하는 것으로, 스타킹이나 생리대를 사다 주는 심부름을 하는 정도라고 보면 된다.[7] 이를 '매품팔이'라고 하는데, 실제 조선 빈민들의 주요 수집원 중 하나였다. 당시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더불어 곤장을 맞다가 불구가 되거나 하는 일은 흔했으며, 아예 숨지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러니 대신 곤장을 맞는다는 것 역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한국 사극에서 곤장을 맞는 죄인 역할을 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이 괜히 엉덩이를 보호하는 조치를 받는 것이 아니다.[8] 조선 중후기에 들어서는 주자가례가 일상 생활을 지배하게 되면서 제사를 지내야 하는 장남이 재산 대부분 혹은 전부를 상속받았다. 하지만 장남에게는 우선 상속이라는 권리와 함께 동생들을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었다.[9] 참고로 덕수 장씨의 실제 시조는 위구르인 장순룡(본명은 삼가)으로 고려말기에 귀화한 인물이다.[10] 이후에 뭐라고 했길래 추가로 뺨을 맞았는지 물아보는 경우도 있으며 정답은 "제가 사정할 곳은 형수님밖에 없습니다."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