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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9:11:25

효정경황후

융유태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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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유황태후 | 隆裕皇太后
파일:孝定景皇后 寫眞.jpg
봉호 융유황태후(隆裕皇太后)
시호 효정융유관혜신철협천보성경황후
(孝定隆裕寬惠愼哲協天保聖景皇后)
출생 1868년 1월 28일
사망 1913년 2월 22일 (향년 45세)
중화민국 경조지방 자금성 서육궁 태극전
(現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자금성)
능묘 숭릉
재위 청의 황후
1889년 ~ 1908년 12월 2일
청의 황태후
1908년 12월 2일 ~ 1913년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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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cd21><colcolor=#00386a> 성씨 예허나라(葉赫那拉)
부모 아버지 예허나라 규양[1]
어머니 아이신기오로씨
형제 2남 3녀
부군 청 덕종 경황제 }}}}}}}}}
1. 개요2. 생애
2.1. 제국의 황혼2.2. 사망
3. 미디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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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내 어찌 일개 성씨의 존영을 위하여 억조 인민[2]의 호오를 저버리겠는가."
1912년 선통제의 퇴위조서를 발표하면서.[3]
청나라 제11대 황제인 광서제의 황후이자 청나라, 더 나아가 중국사의 마지막 황태후. 이름은 정분(靜芬). 일반적으로 융유황후(隆裕皇后)로 알려져 있으며 시호는 효정융유관혜신철협천보성경황후(孝定隆裕寬惠愼哲協天保聖景皇后)이다. 서태후의 조카이기도 하며, 광서제의 생모가 서태후의 여동생이기 때문에 광서제에게는 외사촌 누나가 된다. 효정경황후의 아버지인 엽혁나랍 계상(葉赫那拉 桂祥)은 서태후의 이복 동생이다.

또한 실질적으로는 청나라, 아니 중국사의 마지막 황후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다음 대인 선통제의 아내인 효각민황후(완룽)은 청나라 소조정 시절인 1922년에 결혼했으며, 중화제국위안스카이는 제대로 된 황제 취급도 못 받았기 때문에 그의 아내들도 황후로 인정받지 못했다. 즉 공식적으로 황후 자리에 올라서 황후-황태후의 권위를 가져본 인물은 그녀가 마지막이다.

2. 생애

서태후가 고모였던[4] 관계로 광서제는 원치않은 혼인으로 융유황후를 싫어하였으며 융유황후는 자신의 황후지위와 황태후와의 특수관계를 이용하여 광서제의 후궁들을 괴롭혔다. 이런 문제 때문에 광서제 사이에서의 자녀는 없었다.

2.1. 제국의 황혼

1908년 광서제와 서태후가 승하하자 선통제의 모후가 되어 경친왕의 보좌를 받아 이미 기울대로 기운 청나라를 맡게 된다. 황후는 '융유황태후' 및 '겸조모후’라 칭하며, 지위는 동치제의 태비들보다 위라 여겨져 서육궁 중 하나인 태극전으로 옮겼다. 이때 푸이는 겨우 3세였기에 황태후는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는데, 조정은 선통제의 생부이자 광서제의 동생인 섭정왕 재풍에게 맡겼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진압을 명하였으나, 사령관이었던 위안스카이쑨원과 협상하여 이를 받아들이고 당시 어린 선통제를 대신하여 청 황실 우대 조건을 내걸고 퇴위 조서를 반포한다. 이로써 1616년 천명제가 세운 후금에서 출발한 중국 최후의 왕조인 청나라는 1912년에 종말을 고하게 된다. 우대조건에 따라 자금성의 내조는 여전히 청 황실이 사용하고, 황실은 자금성에 남을 수 있게 되어 계속 기거한다. 이것이 바로 청나라 소조정이다.

2.2. 사망

융유태후는 이듬해인 1913년 2월 22일 자금성에서 숨을 거두었다. 청 왕조가 멸망하고 정신적 충격을 받아서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진 것으로 추정한다. 융유태후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선통제에게 남긴다.
"그대는 제왕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느 일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나라는 이미 망해버렸소. 이제는 이 어미마저 죽을 참인데 그대는 아직 망연하기만 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나와 그대는 이제 영원히 이별하오. 앞길이 순탄치 않을 텐데, 그대 스스로를 지켜야만 하오. 나는 더이상 그대를 지켜줄 수 없으니 말이오."

중국의 신문인 대공보에서 융유태후를 추모하는 아래의 글이 유명하다.
제왕에게 기대지 않고, 수렴청정을 한 바도 없이, 양보의 미덕과 고상한 마음으로 4억 국민에게 따뜻한 은의를 주었다. 예전에 국체를 바꾸지 않아 점점 국민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은 자이니, 자고 이래로 융유태후만이 유일하다 할 것이다.

융유태후가 서거하자 위안스카이는 융유태후에게 여중요순(女中堯舜, 여인 중의 요, 순 임금)이라는 칭호를 부여한다.[5]

융유태후의 장례는 중국사에서 마지막으로 행한 황후의 장례식이기도 했다. 시신을 운구할 때 열차가 이용되었는데, 이전에는 열차로 황후의 시신을 운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시신이 열차로 운구된 유일한 중국 황후로 남게 되었다. 그녀의 장례에는 만청의 유신들은 물론이거니와 북양정부의 고관대작들이 모두 청나라 시절의 대례복으로 갈아입고 조문했다. 이때 유신들은 북양정부의 각료들이 황제를 버리고 민국으로 붙은 배신자들이라고 보아 이를 갈았는데 이중에서 쑨바오치는 양복을 입고 찾아왔다가 유신들에게 포위되어 인간도 아니라고 조리돌림을 당했다.

3. 미디어에서

흔히 황후이던 시절에는 광서제를 핍박하고 그의 후궁들을 모질게 대하는 추녀의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BTV에서 방영한 중일합작 드라마 창궁의 묘에서 그런 모습이 나온다.

그러나 황태후가 된 후의 이미지는 완전히 다르다. 쓰러져가는 왕조를 부여잡으려고 애쓰는 안쓰러운 모습이다. 외모 또한 이에 맞게 기품있는 분위기의 미인 배우가 배역을 맡는 편. 건당위업이나 말대황제전기 등을 보면 창궁의 묘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 동일인물인지도 모를 정도다. 건당위업에서는 판빙빙이, 말대황제전기에서는 후이잉훙(惠英紅)이 효정경황후 역을 맡았다.

[1] 서태후의 오빠다.[2] 당시에는 인구가 4억 정도 되었다.[3] 물론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 아닌 혁명세력의 강압에서 나온 것도 있다.[4] 융유황후에게 고모였으며 광서제에게는 이모였다.[5] 여성들로서는 최고의 칭찬으로 이 정도 평을 들은 이는 문왕(주)의 모 태임이나 신종(송)의 모 선인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