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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12:25:46

효성 배구단 선수 체벌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배경3. 경과4. 사건 직후5. 결과6. 이후7. 유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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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2년 제9회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대회 도중 경기도 안양시 호계동 소재 효성 여자배구단 선수단 숙소에서 벌어진 집단 체벌 사건. 기사 사진

2. 배경

효성 배구단[1] 제3회 대통령배 전국남녀배구대회에서 1차경기 3위를 한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잘해야 2차 리그까지 가서 탈락하는 것이 매년 되풀이되던 팀이었다. 그만큼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고 당시 미도파현대와의 라이벌전에 시선이 집중되는 바람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효성의 성적은 후지필름이나 도로공사, 한국담배인삼공사보다는 나은 수준이었지만 한일합섬이나 선경인더스트리(현 SK케미칼), 호남정유, 흥국생명에 비하면 조금은 부족한 수준이었다.

당시 효성 배구단의 주요 선수로는 황경자, 양순이, 양점덕, 김경희,[2] 김성순, 손명숙 등이었고 훗날 한국배구연맹의 심판이 되는 강주희가 1989년에 이 팀에 입단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강주희는 키가 186cm로, 당시 여자 배구 선수로서는 매우 컸고 장래가 촉망되는 유망주였다.[3][4][5] 지금이야 이 사람이 한국배구연맹 심판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그저 그런 배구인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경북여상을 졸업하고 억대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 선수였다. 그 외에도 김정애, 주순란 등 나름대로 괜찮은 선수들이 들어왔다. 이런 가운데 효성은 나름 유망주들을 보강하면서 제9회 대통령배 대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3. 경과

그러던 중 수원 순회경기 중에 건수가 잡혔다.[6][7] 효성 선수단은 1992년 1월 18일 수원 순회경기에서 다른 팀도 아니고 최하위팀인 후지필름에게 1-3으로 지고 만다.[8] 경기력은 당연히 효성이 앞섰지만 후지필름의 세터 유은미의 빠른 토스와 강애란을 위시로 한 빠른 속공으로 연거푸 득점에 성공했고 당황한 효성은 어이없는 범실을 남발하였다. 경기 결과는 1세트 13-15, 2세트 11-15, 3세트 15-6, 4세트 13-15였다. 그렇게 효성이 후지필름에게 졌는데...

파일:체벌 사건 직후 효성 선수들.jpg

이틀 뒤인 1월 20일에 현대-효성 경기가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는데 이 때 효성 선수들은 위 사진처럼 평범하게 경기 직전에 연습을 하고 있었다.[9] 그러나...

사진1(혐오주의)

경기 시작 직전 선수들이 하나같이 엉덩이 아래와 허벅지 뒤쪽에 피멍이 든 것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말았다. 이에 장충체육관을 찾은 관중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효성 선수단에 하나같이 야유를 보냈다. 당연히 선수들의 부모들도 이를 봤는데 오열하면서 난리가 나고 말았다.

사건의 전말은 얼마 못 가서 알려졌는데 앞서 열렸던 후지필름과의 경기를 진 것에 임태호[10] 감독이 화가 많이 났고 코칭스텝으로 하여금 기합을 주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선수들의 엉덩이를 피멍이 들도록 몽둥이로 때렸던 것이다.

당시 효성 배구단 임태호 감독은 “선수들의 정신이 많이 해이해진 것 같아 정신무장을 시키기 위해서였다”며 폭행 이유를 해명했는데 사실 이 때 폭행한 사람은 당시 코치였던 신일균이다. 당시 김경희는 주장인 것도 있지만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대통령배 대회를 끝으로 은퇴하기 때문에 체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4. 사건 직후

선수들은 기자들의 취재에도 폭력 사실을 부인했고 한 선수는 부모에게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하지만 누가 봐도 맞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관중들은 현대-효성 경기 내내 선수들이 왜 저렇게 되었는지 진상을 규명하라며 난리를 쳤다.

물론 선수들이 누가 봐도 약체를 상대로 졌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책임은 있을 수 있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지도자가 선수를 상대로 한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당시는 때마침 성폭력인신매매 문제가 대두되고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커졌다.[11]

5. 결과

이 사건 이후 대한배구협회는 효성 배구단 임태호 감독에게 체벌 사건에 대한 경위서를 제출하게 하였다. 효성은 이후 벌어진 도로공사의 경기를 다시 한 번 0-3으로 졌고 결국 대회가 끝난 뒤 임태호 감독과 신일균 코치[12]가 경질되었고 김동한 감독과 이정철 코치[13]가 새로 부임했다.

훗날 심판으로 일하는 강주희 선수(1971년생)는 이 사건의 영향을 받아 은퇴한 것 같다. 많은 일이 있었다. 이 사례들을 모아 나무위키의 강주희 심판 문서를 작성해야 한다. 지금 강주희를 검색하면 쌍둥이 코미디언만 나온다. 강주희의 생애에 대한 관련 자료

6. 이후

이 사건은 인터넷은 고사하고 PC통신이 널리 보급되기 전에 일어난 데다 체벌을 묵인하는 당대 사회 분위기상 심하게 공론화되지 않아 배구 팬들 사이에서나 도는 일화로만 남았으며 스포츠 웹진인 후추닷컴 내지 디시인사이드 배구 갤러리에서나 어느 정도 소개될 뿐이었다.(후추닷컴 백업본)

그러나 훗날 배구계 학교폭력 폭로 사건이 터지면서 재조명되었다. 왜냐하면 학교폭력 가해자인 이재영, 이다영의 어머니가 위에 언급된 대로 김경희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모자라 이재영이 2017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대놓고 "엄마가 깡패였대요."라고 말한 사실이 재조명되면서 김경희도 당시 체벌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되기에 이른다.

한일합섬 배구단의 선수였던 강애란이 빙고맨MC휘와 인터뷰하는 시간에 이 사건을 예고했다.

7. 유사 사건

게다가 이 사건이 터진 후 2000년 WKBL 팀 현대건설 하이페리온 감독 진성호의 선수 구타 사건을 비롯해 2002년에는 KBO 리그 KIA 타이거즈김성한 감독이 훈련 중 자리를 잡지 못한다는 이유로 김지영의 머리를 배트로 구타하는 김성한 구타 사건이 발생했고 2005년에는 신영철 당시 LG화재 감독이 하현용, 곽동혁을 폭행했다.

2008년에는 김춘수 한양대 농구부 감독이 농구대잔치 고려대전 도중 락커룸에서 선수를 구타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 언론에 공개되자 감독직에서 사임했고[14] 2009년에는 이상렬 당시 국가대표팀 코치가 박철우를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15] 급기야 2018년 조재범 코치의 심석희 성폭행 사건, 2020년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 팀 집단 가혹행위 사건까지 터지면서 체육계 전반적으로 지도자의 선수 폭행 문제는 정점을 제대로 찍고 말았다.[16] 이러한 인권침해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2020년 4월 '스포츠인권연구소'가 세워졌고 10월 '경기도 운동선수·체육인 스포츠인권 조례'가 제정되어 2022년 7월 지자체 최초로 '경기도 스포츠인권센터'가 개설되었다.


[1] 1998년 IMF 사태로 인해 해체되었다.[2] 훗날 이재영, 이다영의 엄마가 되는 그 사람 맞다.[3] 참고로 당시 여자 최장신 배구 선수는 호남정유의 이시은(188cm)이었는데 코트보다는 웜업존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 다음이 호남정유의 홍지연(187cm).[4] 이뿐만 아니라 강주희는 비디오 시스템 게임 파워 스파이크에서 한국 선수 6명 중 한 명으로도 나왔다. 나머지 5명은 임혜숙, 김미숙, 지경희, 김경희, 남순옥이다.[5] 강주희는 2021년 발리볼 네이션스 리그 여자부 결승전 미국 vs 브라질 경기의 주심으로 나서면서 자신의 이름을 세계 배구계에 알리게 된다.[6] 당시 대통령배 배구대회는 서울에서 시작하여 부산, 대구, 광주, 대전을 필수로 하여 수원, 마산, 전주를 돌았고 심지어 목포, 제주, 원주, 포항에서도 개최되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마무리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농구대잔치도 마찬가지였다.[7] 프로리그 출범 전에는 천안, 인천, 구미, 의정부, 안산은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다.[8] 후지필름 배구단은 모기업(당시에는 롯데그룹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후지필름 구단버스에도 롯데그룹 로고가 찍혀 있었다.)조차 배구단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어른들의 사정으로 운영되는 팀이였다. 그래서 스카웃에서도 신경을 쓰지 않았고 선수단 대우는 최악이였다. 실업팀 시절 타구단은 오전에 설렁설렁 회사 일을 하고 오후에 배구 연습을 했지만 후지필름 배구단은 진지하게 회사 일을 했을 정도... 그래서 배구계에서도 '후지필름은 배구팀도 아니다' 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당시 롯데그룹은 계열사 직원들에게 짠 월급으로도 악명이 높았던 데다 롯데 자이언츠에 대해 투자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롯데 자이언츠나 후지필름 배구단이나 성적은 자연히 시원치 않았다. 사실 두 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최동원, 염종석을 갈아서 만든 우승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롯데 자이언츠는 선수층이 얇았고 전력도 약했다.[9] V-리그 출범 이후에는 트레이닝 바지 기장이 길어져서 남자 선수들 바지와 똑같아졌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트레이닝 바지는 기장이 무릎 위에 살짝 걸칠 정도로 짧았다.[10] 1939년 충남 청양군 출생. 청양중/농고-경기대 출신으로 1960년부터 15년간 국가대표 선수로 뛰면서 '아시아의 토스왕' 등으로 이름을 날렸다. 은퇴 후 경기대와 금성 배구단, 한국 남자 주니어 대표팀 등지에서 감독을 역임한 바 있다. 1986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알 힐랄 배구단 감독으로도 해외에 진출했다.[11] 노태우 정부 시절이다. 그 때는 그 유명한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대적으로 범죄자들을 소탕하고 있었다.[12] 이후 한국도로공사 배구단 감독 역임.[13] 훗날 IBK기업은행 감독으로 부임하는 그 분 맞다. 이정철 코치는 1994년 효성 배구단이 미도파 배구단을 흡수 통합할 때 팀을 떠나 호남정유 코치로 자리를 옮겼고 이 때 효성 소속 세터 김귀현을 같이 데리고 갔다.[14] 김춘수는 전주고 출신 김학섭조성민을 입학시켰으나 에이스 김학섭 대신 조성민을 중용했다. 김춘수는 2012년 7월 별세했다.[15] 특히 이상렬 감독은 배구계 학교폭력 폭로 사건이 터진 후 2021년 2월 17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무슨 일이든 인과응보가 있다”며 폭력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했는데 당연히 박철우는 자신의 SNS에 정말 피꺼솟이네...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느낌이 이런 것인가라고 글을 남기면서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이게 끝이 아니라 박철우는 이후 OK금융그룹과의 경기를 마치고 기자 회견을 열더니 이상렬 감독은 고등학교 지도자 시절부터 폭행을 했으며 그 중에는 기절을 하거나 고막이 나간 선수도 있었다고 폭로했다. 결국 이상열 감독은 스스로 잔여 경기에 출장을 포기하겠다고 말하고 시즌을 내려놓았다.[16] 최숙현의 소속팀 선수들은 물론이고 코칭 스텝까지 집단으로 선수를 구타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