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리 黃正利 | |
2009년《씨네 21》인터뷰 촬영 | |
출생 | 1944년 12월 21일 ([age(1944-12-21)]세) |
일본 제국 오사카부 오사카시 | |
본적 | 경상남도 함양군 |
최종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0cm, 75kg, B형 |
소속 | 황정리세계무술총연합회 총재 대테러국제용병협회 최고고문 비케이시큐리티서비스 명예회장 |
학력 | 마산고등학교 |
데뷔 | 1967년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속)'[1] 1974년 영화 '돌아온 외다리'[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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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무술 배우.1970년대에서 1980~9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한 시대를 풍미할 정도로 활약했다. 한국 내에선 무협이나 무술영화 마니아가 아니라면 생소하고 낯선 이름일 수도 있지만, 무협물을 즐기는 양덕후들이나 그 외 무협영화 팬들 사이에선 그야말로 지존 대우를 받는다. 그 인기는 무협 마니아라면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일본에도 따로 팬 사이트가 존재할 정도다.
2. 생애
1944년 12월 21일에 일본의 오사카에서 재일교포의 자녀로 출생했고, 해방 후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가끔 '황태수'라는 이름이 본명이라는 얘기도 나오지만, 이는 국내에서만 쓰던 예명이다. 황정리 본인도 인터뷰에서 이를 부정한 바 있다.베트남 전쟁 당시에 미군에서 군무원으로 근무하며 미군 장병들의 태권도 교관으로 활약했다고 전한다. 이때에 베트남 칼잡이에게 도전을 받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결투를 하였다가 원치 않았던 살인을 하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고 한다.[3] 물론 이는 그냥 떠도는 이야기로, 사실인지는 황정리 본인만 안다. 영어판 위키백과에도 이 일화가 올라와있기는 하나, citation need란 단서를 붙여 놓았다. 출처가 요구될 정도라는 건, 한마디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후에 이두용 감독[4]이 오디션을 열었을 때 나가서 솜씨를 보인 후 영화계에 진출했는데, 돌아온 배역은 결국 단역뿐이었다. [5]당시 영화계 인물 몇몇의 얘기에 따르면, 황정리의 무술 실력은 나무랄 데 없었지만, 주연을 맡기기에는 외모가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장래를 진지하게 고민할 무렵, 마침 오사원 감독[6]이 한국-중국 합작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방한했고, 그의 무술 실력이 눈에 띄어 영화 《남권북퇴》에 출연하게 된다.
이때의 인연으로 홍콩으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그리고 《남권북퇴》의 흥행 성공과, 이어 출연한 《사형조수(蛇形刁手)》에서의 상관일운(上官逸雲) 역과 《취권》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킹왕짱 발차기 고수인 악역, 염왕신각(閻王伸脚)[7] 염철심(閻鐵心)으로 나와 큰 명성을 얻었다.
실제로도 태권도[8] 고수로 이름이 높아, 정작 영화를 본 일반 관객들은 몰라도, 1970~80년대에 무술을 수련하여 제법 수준에 오른 수련자들치고 황정리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가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화려하고 강렬한 발차기 솜씨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과장이 아니라, 고전적 쿵후 액션의 경극 스타일 아크로바틱 액션에 익숙했던 1970년대 관객들에게, 이는 거의 컬쳐 쇼크나 다름없었다. 손으로만 보여주던 여러 기술들, 심지어는 금나술(擒拿術)이라 하여 잡아 비틀거나 하는 기술까지 발과 다리로 해내니, 당시 홍콩 관객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이다.
《사제출마》,《용소야》에서 합기도를 기반으로 한 신묘한 손기술과 함께 엄청난 속도와 변화의 발차기 기술을 보인 황인식이나, 공중에서 4번을 걷어차는 사방(四方)가위차기를 보인 왕호 등과 함께, 이 시대 한국 액션 배우들이 홍콩 액션 영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당시 메이킹 필름을 보면 성룡이 살짝 어눌한 한국말로 액션 지시를 하는 걸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중국의 무협 드라마에도 출연하였고, 이 중 몇몇 작품은 국내에서도 VHS로 출시되었으나(삼원프로덕션에서 출시한《천룡검협》이라든가) 인지도는 거의 없다.
이소룡에게 척 노리스가 있다면, 성룡에게는 황정리가 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실제로 성룡 영화(특히《취권》 시리즈)에서 이소룡 영화의 척 노리스가 했던 포지션을 그대로 담당했다. 그만큼 성룡과 오랫동안 같이 호흡을 맞춰온 사이이다.
물론 영화배우로서 주연을 맡고 싶어 했던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황정리는 거의 모든 영화에서 사실상 주연 가운데 1인이었지만, 주로 악역으로만 나왔으니, 그 아쉬움이 더 컸다고 한다. 이후 악역 연기를 통해 번 많은 돈과 인지도를 바탕으로 주연에 도전하여, 콧수염도 떼는 등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며, 황정리가 선한 주연을 맡은 영화도 나왔으나 그 반응은 영 신통찮았다고 한다. 결과만 놓고 보면, 황정리의 데뷔 초기, 이두용 감독의 판단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게 된 셈이다.
SBS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무술 감독과 동시에 극중 윤재용 회장의 보디가드 장근섭 역을 맡은 것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여, 제주도에서 사업에 전념했다. 그렇게 10년 넘게 지나며 완전히 잊히는 듯했으나, 2008년,《돌아온 일지매》에 출연하여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10년에는 서울현대전문학교 액션연기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신시아 로스록과 함께 찍은 사진; 우측에 서있는 남자가 황정리, 좌측에 있는 남자가 장일도)
2012년, 지인의 생일잔치 현장에서.
현재는 액션 배우를 은퇴한 뒤 평범한 일반인으로 살고 있다가 최근 세계무술총연합회(World Federation of Martial Arts) 본부를 한국으로 이전, 무술 제자 겸 마산고등학교 동문 후배인 김진용 IMACT(대테러국제용병협회) 회장을 WFMA 의장으로 추대, 국내 법인 설립자인 황정리무술사관학교와 엔터테인먼트 사업 등을 주관하는 황정리그룹 법인을 경영해나가며 홍콩 제작자 오사원 감독의 <아메리칸소림 2>에 캐스팅되었고(2019년 12월) 취권 레턴즈 제작 준비, 글로벌 오디션 개최, TV 프로그램 출연을 재개하고 있으며 제 2의 황정리를 물색하며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2020년 6월부터는 고향인 경상남도 함양에 초대되어 현지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생가를 되찾아 황정리 기념관 건립, 무술테마파크(세계무예성지) 조성 사업으로 인한 국제적 관광 명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기울이고 있다.
서구권에서는 'Hwang Jang Lee'란 이름으로 유명하다. 그밖에 《남권북퇴》에서 맡은 역인 'Silver Fox'가 별명으로 유명하여, 'King of Legfighters' 라는 엄청난 숭배를 받는다. 60~70년대 중국 배우인 왕우가 당시 유명한 영화였던 천황거성(天皇巨星)이라는 별호로 중화권에서 숭배 받았다면, 황정리는 서구권에서 숭배받았던 셈이다.
양덕이 만든 숭배 매드 영상
또한 최근에는 한국인(마산고등학교 동문 후배인 김진용)이 창설한 세계 최대의 무장경호 단체인 대테러국제용병협회(IMACT)의 최고고문으로 2020년 2월 17일 공식 위촉된 바 있다. 그를 전설처럼 생각해왔던 해외 지부장들과 용병 회원들은 그의 합류에 열띤 축하와 환영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후문이다.
3. 여담
- 화려한 발차기 실력 외에도 무표정한 얼굴과 시니컬한 말투, 그리고 콧수염 등도 트레이드마크. 발차기와 함께 황정리가 뿜어내는 카리스마의 원천이다. 덕분에 영화에 출연할 때 왠지 캐릭터가 Bad Ass삘이 나는 경우가 많다.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들의 리 밴 클리프와 비슷한 분위기이다.
- 외화 더빙판에서는 성우 임성표가 주로 전담하는데, 특히 90년대 중반에 명절 특집으로 방영되던 《취권》이나 《예스 마담 3 - 중화전사》 등에서는, 원판을 초월하는 악역 포스를 제대로 보여주었다.[9]
- 《드래곤볼》의 등장인물 타오파이파이의 모티브가 바로 황정리라는 추측도 있다. 직업이 암살객이라는 점은 《취권》의 염철심에서, 특유의 복장과 헤어스타일은 《사형조수(蛇形刁手)》의 악역이자 최종보스인 상관일운에서 따온 듯.[10] 버추어 파이터 시리즈의 라우 첸, 모탈 컴뱃 9 한정으로 섕쑹 또한 황정리가 모티브인 듯 하다.
- 성룡과 《취권》을 촬영하던 중, 성룡이 황정리가 자신의 공격을 잘 받아치고 게다가 다음에 어떤 동작을 취할지 미리 간파하자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본래 팬들 사이에서 떠돌던 일화였는데, 황정리 본인도 인터뷰에서, 과장되었지만 사실이라 밝힌 바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합이 놀라울 정도로 너무 잘 맞아서 취권을 촬영할 당시 NG가 거의 나지 않았다고 한다.
- 사실 이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건 최근에야 널리 알려졌지 황정리의 전성기 시절에는 이 사람이 한국인이라는 걸 아는 사람들이 굉장히 드물었다. 홍콩이나 중국이나 서방 세계에서도 다들 중국인으로 알고 있었다.
- 홍콩과 한국의 합작 영화를 촬영하던 중에, 한국인 스탭들이 중국인 스탭들과 불화가 생겨 촬영을 포기하고 모두 돌아갔는데, 황정리는 영화를 끝마치지 못한 채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바람에 한국인 스탭들에게 찍혀서 한동안 한국에서 영화를 촬영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 한국에서 '황태수'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다가, 중국으로 진출하여서는 유독 본명인 황정리를 고집한 이유는 이름의 뜻(正利)도 좋고, 무엇보다 광동어로 발음하면 황짱리!하며 이름 끝부분이 멋지게 올라가는 게 좋았기 때문이라고 한다.[11]
- 본래 악역으로 명성을 떨쳤고, 실제 인상도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여 촬영 중에도 스탭들이 진짜 악인이라 착각하여 같이 어울리기를 피했다고 한다. 일본 배우인 사나다 히로유키와 함께 《용지닌자》를 촬영할 적에도, 그가 황정리와 사적으로 만나는 것을 피하였으며, 후에 인상이 무서워서 함께 어울리지 못했다 라고 회고할 정도였다고 한다.
- 일본인 액션 여배우인 오오시마 유카리도 《부귀열차》 촬영 당시, 황정리의 외모에서 풍기는 위압감과, 촬영 때 강렬한 발차기 기술을 보이는 위압감에 압도되어, 엄청나게 무서운 사람인 줄 알고 가까이 하지 않았다가, "난 지금 일본인 역할[12]이니까 가능하면 일본어를 잘 해야 한다" 라며 일본어 교습을 해달라고 청해서 겨우겨우 어울리다가, 외모와는 달리 속은 대단히 부드럽고 장난도 잘 치는 아저씨라고 이해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 처음 홍콩 영화계에 진출하여 명성을 떨쳤을 적에는 영화 출연료를 현금으로 받았는데, 당시에 홍콩에서 매니저도 없었고 은행에 계좌도 없는 형편인지라, 방 한구석에 출연료로 받은 돈을 차곡차곡 쌓아 모았다고 한다. 이는 실제 인터뷰에서도 본인이 언급하여 인증한 바 있다. 아래에도 서술했듯 황정리는 이 당시의 홍콩을 부정부패와 온갖 범죄가 만연했었던 굉장히 무서운 동네였다고 회고한다.
황정리가 홍콩에 처음 영화를 촬영하러 갔을 때 정말 괴상한 기자회견을 했다. "남녀노소 누구든 좋으니까 다 덤벼도 좋다. 단 3분 안에 끝내주겠다."라는 발언을 한 탓에 날이면 날마다 도전자들 때문에 한동안 골치를 썩었다. 황정리 본인은 며칠동안만 싸워주면 되겠지 싶어서 이런 짓을 저질렀는데 이게 년도 단위로 장기간 이어져 버리는 바람에 오죽하면 당시 황정리와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조용해질 때까지 한국으로 귀국해 있다가 조용해지면 다시 와라"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 도전자들을 전부 이기자 황정리는 엄청나게 유명해졌고 그것 때문에 온갖 영화인들로부터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다. 당대의 홍콩은 삼합회가 여전히 건재했고, 인근에 구룡성채가 아직 존재하는 등 엄청난 우범지대였다. 상당히 기발한 아이디어이긴 했지만 위험부담 역시 장난이 아니었는데 쳐발리면 업계에서 매장당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 1970~80년대 홍콩의 무술 영화계에서 악역으로서의 황정리의 지명도는 독보적이었는데, 한창 영화를 찍고 있던 현장에, 갑자기 승용차와 용달차가 들어오더니, 승용차에서 내린 자칭 영화제작자가, 용달차 뒤에 싣고 온 현금을 황정리에게 보여주며 악역으로 황정리를 캐스팅해가려는 통에, 영화제작자들끼리 싸움이 날 뻔했다는 증언이 있다.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이런 얘기가 나올 정도로 당시 그의 인기와 지명도가 대단했던 셈. 자기 영화에 악역으로 모셔가려고 영화제작자들끼리 쟁탈전을 벌일 정도였다. 저렇게 된 이유는 전술한 자유현피 발언 때문이었다. 생긴 것도 범죄형 얼굴인 데다가 저래놓고 도전자들을 전부 이겼기 때문에[13] 험상궂은 인상과 뛰어난 싸움 실력을 같이 보고 악역배우로서는 인기만점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당시 홍콩 무술 영화에서는 최종보스 전문 배우로 손색이 없었을 포스와 임팩트를 갖춘 셈.
- 2011년 9월 즈음,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그의 일화를 소재로 한 에피소드가 방영된 적이 있다.
- 2020년 4월 23일, 유튜브 근황올림픽 채널에서 그의 근황이 밝혀졌는데 만 75세임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 특유의 수염과 엄한 인상 때문에 리즈시절 때도 나이가 좀 있어보일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사형도수나 취권에 출연했을 당시에는 겨우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였다. 저 시절에는 노안에 가까운 외모였지만 최근 70대를 넘긴 이후에는 오히려 전성기 시절 때와 변함이 없는 정정한 모습을 가지고 있어서 동안이 되었다.
4. 주요 작품
- 《미워도 다시 한번(속)》(1967)
- 《돌아온 외다리》(1974)
- 《남권북퇴(南拳北腿)》(1975)
- 《흑룡강》(1976)
- 《밀명객》(1976)
- 《남권북태투금호》(1977)
- 《사형조수(蛇形刁手)》(1978)
- 《취권》(1978): 자객 염철심 역.[14]
- 《남북취권》 (1979): 북취권의 대가 천취옹 역
- 《오조십팔번》(1979): 링코퐁 역
- 《사망탑》(1980) - 작품은 망했지만 황정리의 격투 장면은 꽤 볼만하다. [15]
- 《인무가인》(1980)
- 《용지닌자》(1982) : 어처구니없게도 한국영화로 편집하여 개봉했다. 흑룡통첩장(黑龍通牒狀)이란 제목으로 1986년 5월 10일 개봉하여 서울관객 2만 7천여명을 기록했다. 한국배우들이 촬영한 것을 섞어서 한국어 성우진으로 더빙을 하여 개봉했다. 이 버젼 감독이 바로 남기남이었다(........) 1987년에 금성비디오에서 비디오로 발매했다. 이걸, 1989년에 벧엘 프로그램에서 용지닌자란 제목으로 비디오로 냈었는데, 빌려보다가 도중에 때려 친 이들도 적지 않았다는 전설까지 있다! 그런데, 이 용지닌자 국내 출시 비디오도 삭제와 엉터리 자막으로 더 엉망으로 만들었기에, 당시 이걸 빌려보고 쌍욕하던 이들이 서구권에서 제법 인지도가 있다는 것에 어이없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액션 팬에겐 좀 다른 의미로 유명하다. 일본 액션 스타 사나다 히로유키가 공동 주연으로 등장하는데다 최종보스가 바로 황정리. 그 당시는 유난히 닌자라는 이름을 단 미국 영화&중국 영화가 비디오로 많이 출시되던 시절이었다. 쇼 코스기 주연의 닌자물도 이때 국내출시됐다. 여담으로 흑룡통첩장은 2014년에 DVD까지 나왔다...
- 《광동관소화자》(1983)
- 《제일척강시》(第一隻疆屍,1985) - 난데없는 강시 영화에도 나왔다. 강시는 아니고, 극중 생뚱맞게 과거 악명높던 원령 벼슬아치로 나오는데, 극중 강시잡는 도사가 젊을 적에 벼슬아치로서 적발해 사형당했는데 원귀로 부활해 도사와 제자들을 신나게 패준다.생뚱맞은 등장씬이지만 같이 참수된 아들은 착했기에 아버지 원령 폭주를 막으며 스스로 아버지랑 일시적으로 같이 봉인했다. 봉인당하면서 "20년 뒤에는 다시 돌아와 네놈을 반드시 죽인다!" 라고 외치지만 도사는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그때쯤이면 난 죽고 없을 걸?"라고 비웃는다. 닭이 강시로 부활하여 사람을 쪼면 사람이 아침해가 뜨면 자신도 모르게 꼬끼오오오오오! 라고 운다든지 강시가 여기선 보통 강시와 달리 그냥 평범하게 걷거나 달리고 숨을 참으면 눈으로 보고 사람을 알아본다든지 보통 강시영화랑 다르다. 참고로 일본 제목은 강시대마왕(キョンシー大魔王).
- 《부귀열차》(1986)
- 《홍금보의 대나팔》(1986) - 원제는 벽력대나팔. 악역으로 나와 홍금보를 실컷 두들겨 패줬다. 그러다가 죽은 선배형사(강대위 분)의 유령이 홍금보를 들어 올리는데, 그 전에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라고 말하는데 황정리가 비웃듯이 "흥, 경찰?", "아니, 난 수퍼맨이다!" 라며 날아올라서 펼치는 반격에 당하는 악역으로 나온다. 여기서도 후덜덜한 강력함을 뽐내어, 날라차기로 연속으로 쳐맞던 홍금보로서는 선배 유령 아니었다면 못 이겼을 상대.여담으로 장학우가 이 영화로 데뷔했다.
- 《특명 어벤저 2》(1987)
- 《예스 마담 3 중화전사》(1987)[16]
- 《모래시계》 총 제작 연출 지휘, 로케이션, 무술감독, 조연(윤재용 회장의 보디가드 장근섭 역) 출연.
- 《국화와 칼》(1995): 이토 역
- 《돌아온 일지매》(2009) - 여기서는 미야모토 무사시로 분하였다.
[1] 영화 기획가로 데뷔.[2] 단역으로 데뷔.[3] 전해지는 바로는, 칼잡이가 칼을 들고 달려들 때 이를 피한 다음에 발로 머리를 찼는데, 이때 쓰러지면서 섬돌에 머리를 박아 죽었다고도 하고, 그 발차기가 상대의 머리 급소에 정통으로 명중한 바람에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고도 한다.[4] 요즘 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지만, 70년대에 재미교포 액션배우인 '한용철'을 주연으로 한, 통칭 '외다리 시리즈'와 전영록 주연의 《돌아이》 시리즈로 한국 액션 영화계의 한 장을 장식했던 인물이다.[5] 그래도 76년에 왕호와 함께 출연한 흑룡강과 밀명객에서는 각각 최종보스와 비중있는 동료(인질로 잡힌 어머니땜에 배신했다가 개심하고 주인공을 돕는다.) 역할을 맡기도 했다.[6] 중국의 유명 감독이자 제작자이다. 성룡과 함께 《사형조수(蛇形刁手)》,《취권》을 제작했고,《도성》,《신용문객잔》,《황비홍》시리즈 등 국내 팬들에게도 유명한 작품을 다수 제작한 제작자이다.[7] 영화에서 설정된 별호, 염라대왕의 귀신같은 발이라는 의미만 봐도 황정리의 실력이 중국 영화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개봉될 때는, ‘번개다리’라는, 뭔가 좀 그렇고 그런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번역의 한계인지는 몰라도, 연환천심퇴(連環穿心腿), 즉 연속으로 심장을 꿰뚫는 발차기라는 의미의 영화 속 그의 절초(絶招)명도, 옛날 자막이나 인터넷 등에서 떠도는 자막에서는, ‘두발차기’ 라는 이름으로 나오기도 한다.[8] 실질적으론 당수도 인물로 분류하는게 맞다고 생각된다. 대중적으로 나올때 당수도 도복을 입고 나오는데다가 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9] 물론 두 작품 밖에 더빙을 안 했지만, 황정리가 출연한 영화가 국내에서 대부분 방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메이저한 두 작품을 더빙한 것이므로 사실상 전담으로 볼 수 있다. 다만 SBS서 《사형조수(蛇形刁手》를 방영했을 때는 신성호가 맡았다.[10] 참고로 드래곤볼 시리즈의 원작자 토리야마 아키라가 공식적으로 맞다고 인정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아직까진 추측의 영역이다.[11] 실제 광동어 발음은 웡쨍레이에 가깝다.[12] 작 중에서 보물지도를 수송하는 일본인 호위무사 3인방 중 리더 역이었다.[13] 근황올림픽에서 밝히길 진심으로 각서까지 쓰면서까지 준비를 했고, 상대들 중에서 일부는 자신보다도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사람들도 간단히 쓰러뜨린 듯 하다.[14] 이 영화를 계기로 황정리가 큰 명성을 얻었다.[15] 특히 주무기인 발차기 이외에 검술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16] 한국수입사의 고질병인 제목 멋대로 붙이기에 희생된 작품이다. 예스 마담 시리즈가 아닌데도, 양자경 주연이란 이유만으로 《예스 마담》이라고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