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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27 05:16:23

황정리

파일:external/image.cine21.com/P0000018_talk69310.jpg
2009년《씨네 21》인터뷰 촬영.
이름 황정리 (黃正利)
출생 1944년 12월 21일 ([age(1944-12-21)]세)
일본 제국 오사카부 오사카시
본적 경상남도 함양군
최종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0cm, 75kg, B형
소속 황정리세계무술총연합회 총재
대테러국제용병협회 최고고문
비케이시큐리티서비스 명예회장
학력 마산고등학교
데뷔 1967년 영화 '미워도 다시 한번(속)'[1]
1974년 영화 '돌아온 외다리'[2]

1. 개요2. 생애3. 여담4. 주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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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무술 배우.

1970년대에서 1980~9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중국을 넘나들며, 한 시대를 풍미할 정도로 활약했다. 한국 내에선 무협이나 무술영화 마니아가 아니라면 생소하고 낯선 이름일 수도 있지만, 무협물을 즐기는 양덕후들이나 그 외 무협영화 팬들 사이에선 그야말로 지존 대우를 받는다. 그 인기는 무협 마니아라면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다. 심지어 일본에도 따로 팬 사이트가 존재할 정도다.

2. 생애

1944년 12월 21일에 일본오사카에서 재일교포의 자녀로 출생했고, 해방 후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가끔 '황태수'라는 이름이 본명이라는 얘기도 나오지만, 이는 국내에서만 쓰던 예명이다. 황정리 본인도 인터뷰에서 이를 부정한 바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에 미군에서 군무원으로 근무하며 미군 장병들의 태권도 교관으로 활약했다고 전한다. 이때에 베트남 칼잡이에게 도전을 받는 바람에, 부득이하게 결투를 하였다가 원치 않았던 살인을 하게 되었다는 일화도 있다고 한다.[3] 물론 이는 그냥 떠도는 이야기로, 사실인지는 황정리 본인만 안다. 영어판 위키백과에도 이 일화가 올라와있기는 하나, citation need란 단서를 붙여 놓았다. 출처가 요구될 정도라는 건, 한마디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후에 이두용 감독[4]이 오디션을 열었을 때 나가서 솜씨를 보인 후 영화계에 진출했는데, 돌아온 배역은 결국 단역뿐이었다. [5]당시 영화계 인물 몇몇의 얘기에 따르면, 황정리의 무술 실력은 나무랄 데 없었지만, 주연을 맡기기에는 외모가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장래를 진지하게 고민할 무렵, 마침 오사원 감독[6]이 한국-중국 합작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방한했고, 그의 무술 실력이 눈에 띄어 영화 《남권북퇴》에 출연하게 된다.

이때의 인연으로 홍콩으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그리고 《남권북퇴》의 흥행 성공과, 이어 출연한 《사형조수(蛇形刁手)》에서의 상관일운(上官逸雲) 역과 《취권》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킹왕짱 발차기 고수인 악역, 염왕신각(閻王伸脚)[7] 염철심(閻鐵心)으로 나와 큰 명성을 얻었다.

실제로도 태권도[8] 고수로 이름이 높아, 정작 영화를 본 일반 관객들은 몰라도, 1970~80년대에 무술을 수련하여 제법 수준에 오른 수련자들치고 황정리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가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화려하고 강렬한 발차기 솜씨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과장이 아니라, 고전적 쿵후 액션의 경극 스타일 아크로바틱 액션에 익숙했던 1970년대 관객들에게, 이는 거의 컬쳐 쇼크나 다름없었다. 손으로만 보여주던 여러 기술들, 심지어는 금나술(擒拿術)이라 하여 잡아 비틀거나 하는 기술까지 발과 다리로 해내니, 당시 홍콩 관객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이다.

《사제출마》,《용소야》에서 합기도를 기반으로 한 신묘한 손기술과 함께 엄청난 속도와 변화의 발차기 기술을 보인 황인식이나, 공중에서 4번을 걷어차는 사방(四方)가위차기를 보인 왕호 등과 함께, 이 시대 한국 액션 배우들이 홍콩 액션 영화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당시 메이킹 필름을 보면 성룡이 살짝 어눌한 한국말로 액션 지시를 하는 걸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중국의 무협 드라마에도 출연하였고, 이 중 몇몇 작품은 국내에서도 VHS로 출시되었으나(삼원프로덕션에서 출시한《천룡검협》이라든가) 인지도는 거의 없다.

이소룡에게 척 노리스가 있다면, 성룡에게는 황정리가 있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실제로 성룡 영화(특히《취권》 시리즈)에서 이소룡 영화의 척 노리스가 했던 포지션을 그대로 담당했다. 그만큼 성룡과 오랫동안 같이 호흡을 맞춰온 사이이다.

물론 영화배우로서 주연을 맡고 싶어 했던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황정리는 거의 모든 영화에서 사실상 주연 가운데 1인이었지만, 주로 악역으로만 나왔으니, 그 아쉬움이 더 컸다고 한다. 이후 악역 연기를 통해 번 많은 돈과 인지도를 바탕으로 주연에 도전하여, 콧수염도 떼는 등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며, 황정리가 선한 주연을 맡은 영화도 나왔으나 그 반응은 영 신통찮았다고 한다. 결과만 놓고 보면, 황정리의 데뷔 초기, 이두용 감독의 판단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게 된 셈이다.

드라마《모래시계》에서 무술 감독을 맡은 것을 마지막으로 은퇴하여, 제주도에서 사업에 전념했다. 그렇게 10년 넘게 지나며 완전히 잊히는 듯했으나, 2008년,《돌아온 일지매》에 출연하여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10년에는 서울현대전문학교 액션연기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파일:external/nicolask.files.wordpress.com/hwang-jang-lee2.jpg

(신시아 로스록과 함께 찍은 사진; 우측에 서있는 남자가 황정리, 좌측에 있는 남자가 장일도)



2012년, 지인의 생일잔치 현장에서.

현재는 액션 배우를 은퇴한 뒤 평범한 일반인으로 살고 있다가 최근 세계무술총연합회(World Federation of Martial Arts) 본부를 한국으로 이전, 무술 제자 겸 마산고등학교 동문 후배인 김진용 IMACT(대테러국제용병협회) 회장을 WFMA 의장으로 추대, 국내 법인 설립자인 황정리무술사관학교와 엔터테인먼트 사업 등을 주관하는 황정리그룹 법인을 경영해나가며 홍콩 제작자 오사원 감독의 <아메리칸소림 2>에 캐스팅되었고(2019년 12월) 취권 레턴즈 제작 준비, 글로벌 오디션 개최, TV 프로그램 출연을 재개하고 있으며 제 2의 황정리를 물색하며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2020년 6월부터는 고향인 경상남도 함양에 초대되어 현지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생가를 되찾아 황정리 기념관 건립, 무술테마파크(세계무예성지) 조성 사업으로 인한 국제적 관광 명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기울이고 있다.



서구권에서는 'Hwang Jang Lee'란 이름으로 유명하다. 그밖에 《남권북퇴》에서 맡은 역인 'Silver Fox'가 별명으로 유명하여, 'King of Legfighters' 라는 엄청난 숭배를 받는다. 60~70년대 중국 배우인 왕우가 당시 유명한 영화였던 천황거성(天皇巨星)이라는 별호로 중화권에서 숭배 받았다면, 황정리는 서구권에서 숭배받았던 셈이다.



양덕이 만든 숭배 매드 영상

또한 최근에는 한국인(마산고등학교 동문 후배인 김진용)이 창설한 세계 최대의 무장경호 단체인 대테러국제용병협회(IMACT)의 최고고문으로 2020년 2월 17일 공식 위촉된 바 있다. 그를 전설처럼 생각해왔던 해외 지부장들과 용병 회원들은 그의 합류에 열띤 축하와 환영 메시지를 보내왔다는 후문이다.


3. 여담

4. 주요 작품



[1] 영화 기획가로 데뷔.[2] 단역으로 데뷔.[3] 전해지는 바로는, 칼잡이가 칼을 들고 달려들 때 이를 피한 다음에 발로 머리를 찼는데, 이때 쓰러지면서 섬돌에 머리를 박아 죽었다고도 하고, 그 발차기가 상대의 머리 급소에 정통으로 명중한 바람에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다고도 한다.[4] 요즘 세대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일 수도 있지만, 70년대에 재미교포 액션배우인 '한용철'을 주연으로 한, 통칭 '외다리 시리즈'와 전영록 주연의 《돌아이》 시리즈로 한국 액션 영화계의 한 장을 장식했던 인물이다.[5] 그래도 76년에 왕호와 함께 출연한 흑룡강과 밀명객에서는 각각 최종보스와 비중있는 동료(인질로 잡힌 어머니땜에 배신했다가 개심하고 주인공을 돕는다.) 역할을 맡기도 했다.[6] 중국의 유명 감독이자 제작자이다. 성룡과 함께 《사형조수(蛇形刁手)》,《취권》을 제작했고,《도성》,《신용문객잔》,《황비홍》시리즈 등 국내 팬들에게도 유명한 작품을 다수 제작한 제작자이다.[7] 영화에서 설정된 별호, 염라대왕의 귀신같은 발이라는 의미만 봐도 황정리의 실력이 중국 영화인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어느 정도 짐작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개봉될 때는, ‘번개다리’라는, 뭔가 좀 그렇고 그런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번역의 한계인지는 몰라도, 연환천심퇴(連環穿心腿), 즉 연속으로 심장을 꿰뚫는 발차기라는 의미의 영화 속 그의 절초(絶招)명도, 옛날 자막이나 인터넷 등에서 떠도는 자막에서는, ‘두발차기’ 라는 이름으로 나오기도 한다.[8] 실질적으론 당수도 인물로 분류하는게 맞다고 생각된다. 대중적으로 나올때 당수도 도복을 입고 나오는데다가 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9] 물론 두 작품 밖에 더빙을 안 했지만, 황정리가 출연한 영화가 국내에서 대부분 방영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메이저한 두 작품을 더빙한 것이므로 사실상 전담으로 볼 수 있다. 다만 SBS서 《사형조수(蛇形刁手》를 방영했을 때는 신성호가 맡았다.[10] 참고로 드래곤볼 시리즈의 원작자 토리야마 아키라가 공식적으로 맞다고 인정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아직까진 추측의 영역이다.[11] 실제 광동어 발음은 웡쨍레이에 가깝다.[12] 작 중에서 보물지도를 수송하는 일본인 호위무사 3인방 중 리더 역이었다.[13] 근황올림픽에서 밝히길 진심으로 각서까지 쓰면서까지 준비를 했고, 상대들 중에서 일부는 자신보다도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사람들도 간단히 쓰러뜨린 듯 하다.[14] 이 영화를 계기로 황정리가 큰 명성을 얻었다.[15] 특히 주무기인 발차기 이외에 검술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16] 한국수입사의 고질병인 제목 멋대로 붙이기에 희생된 작품이다. 예스 마담 시리즈가 아닌데도, 양자경 주연이란 이유만으로 《예스 마담》이라고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