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03:09:20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

파일:칠레 국장.svg
칠레 공화국 대통령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 #0032a9; color: #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라몬 프레이레 프린시스코 안토니오 핀토 호아킨 프레이토 마누엘 불네스
<rowcolor=#fff>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마누엘 몬트 호세 호아킨 페레스 페데리코 에라수리스 사냐르투 아니발 핀토
<rowcolor=#fff>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도밍고 산타 마리아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 호르헤 몬트 페데리코 에라수리스 에차우렌
<rowcolor=#fff>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헤르만 리에스코 페드로 몬트 라몬 바로스 루코 후안 루이스 산푸엔테스
<rowcolor=#fff>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에밀리아노 피게로아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후안 에스테반 몬테로
<rowcolor=#fff>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아르투로 알레산드리 페드로 아기레 세드라 후안 안토니오 리오스 가브리엘 곤잘레스 비델라
<rowcolor=#fff>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카를로스 이바녜스 델 캄포 호르헤 알레산드리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 살바도르 아옌데
<rowcolor=#fff>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파트리시오 아일윈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리카르도 라고스
<rowcolor=#fff>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미첼 바첼레트 세바스티안 피녜라 미첼 바첼레트 세바스티안 피녜라
<rowcolor=#fff> 제37대
가브리엘 보리치 }}}}}}}}}
칠레 공화국 10대 대통령
호세 마누엘 발마세다
José Manuel Balmaceda
파일:presidente-balmaceda-2-e000db-640.jpg
출생 1840년 7월 19일
칠레 발파라이소주 산토도밍고
사망 1891년 9월 19일 (향년 51세)
칠레 산티아고
재임기간제10대 대통령
1886년 9월 18일 ~ 1891년 8월 29일
정당자유당
서명
파일:호세 마누엘 발마세다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사망4. 여담

[clearfix]

1. 개요

제10대 칠레 대통령.

2. 생애

1840년 칠레 부칼레무(Bucalemu)(现칠레 산토도밍고)의 부유한 가정에서 12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산티아고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1864년 전 대통령인 마누엘 몬트의 비서로 정치 생활을 시작하였고, 1864년 처음으로 카렐마푸(Carelmapu) 푸에블로 의원으로 선출되어 칠레의 자유주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뒤 아니발 핀토 대통령 밑에서 아르헨티나 주재 대사를 맡아 아르헨티나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지 않게 설득한 공로를 인정받고 도밍고 산타 마리아 대통령 밑에서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이후 내무부 장관도 1882년 역임하였다. 1886년 1월 17일 자유당과 급진당의 지지를 받고 자유당의 유일 후보로 선포되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반대파인 칠레 전 국방부 장관 호세 프란시스코 베르가라(José Francisco Vergara Echevers) 후보를 98.18%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찍어누름으로써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이 된 발마세다는 칠레의 근대화를 성공시키기 위해 약 10,000,000달러를 지출하여 각급 학교대학을 만들고, 낙후된 지역에 철도항만을 건설하는데 남부 지역에 철도를 건설하는데만 £6,000,000을 지출하는 등 광범위한 개혁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는 보수파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의회 역시 발마세다의 정책에 사사건건 반대하며 충돌하였고 1889년에는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1891년 1월 16일에는 발마세다와 의회의 권력을 놓고 타라파카에서 내전이 일어났고, 육군은 대통령을, 해군은 의회를 지지하며 서로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발마세다와 육군은 1891년 8월 28일 프라실라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이후 성직자들의 신뢰마저 잃은 발마세다는 아르헨티나 대사관에 은신하였다.

3. 사망

Mi vida pública ha concluido. Debo, por lo mismo, a mis amigos y a mis conciudadanos la palabra íntima de mi experiencia y de mi convencimiento político.

Mientras subsista en Chile el gobierno parlamentario en el modo y forma en que se ha querido y tal como lo sostiene la revolución triunfante, no habrá libertad electoral ni organización seria y constante en los partidos, ni paz entre los círculos del Congreso.

El triunfo y el sometimiento de los caídos producirán una quietud momentánea; pero antes de mucho renacerán las viejas divisiones, las amarguras y los quebrantos morales para el Jefe del Estado.

Sólo en la organización del Gobierno popular representativo con poderes independientes y responsables y medios fáciles y expeditos para hacer efectiva la responsabilidad, habrá partidos con carácter nacional y derivados de la voluntad de los pueblos, y armonía y respeto entre los poderes fundamentales del Estado.

El régimen parlamentario ha triunfado en los campos de batalla; pero esta victoria no prevalecerá. O el estudio, el convencimiento y el patriotismo abren camino razonable y tranquilo a la reforma y a la organización del gobierno representativo, o nuevos disturbios y dolorosas perturbaciones habrán de producirse entre los mismos que han hecho la revolución unidos y que mantienen la unión para el afianzamiento del triunfo, pero que al fin concluirán por dividirse y por chocarse. Estas eventualidades están más que en la índole y en el espíritu de los hombres, en la naturaleza de los principios que hoy triunfan y en la fuerza de las cosas

'Éste es el destino de Chile y ojalá que las crueles experiencias del pasado y los sacrificios del presente induzcan la adopción de las reformas que me hagan fructuosa la organización del nuevo Gobierno, seria y estable la constitución de los partidos políticos, libre e independiente la vida y el funcionamiento de los poderes públicos y sosegada y activa la elaboración común del progreso de la República.

No hay que desesperar de la causa que hemos sostenido ni del porvenir.

Si nuestra bandera, encarnación del gobierno del pueblo verdaderamente republicano, ha caído plegada y ensangrentada en los campos de batalla, será levantada de nuevo en tiempo no lejano, y con defensores numerosos y más afortunados que nosotros, flameará un día para honra de las instituciones chilenas y para dicha de mi patria, a la cual he amado sobre todas las cosas de la vida.

Cuando ustedes y los amigos me recuerden, crean que mi espíritu, con todos sus más delicados afectos, estará en medio de ustedes

번역본:
나의 정치 생활은 끝났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내 경험과 정치적 신념을 내 친구와 시민들에게 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의회가 승리한 이 반란이 칠레에 계속 존속하는 한, 어떤 정당에서도 선거의 자유나, 심각하고 지속적인 회의 조직도, 정당 간 평화도 없을 것입니다.

타락한 자의 승리와 항복은 일시적인 고요함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국가에는 오래된 분열과, 비통함, 도덕적 붕괴가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독립적이고 책임 있는 권력을 갖고 책임을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쉽고 빠른 수단을 갖춘 국민이 대표가 되는 정부를 조직해야만 국민의 의지에 기초한 민족성을 지닌 정당이 있을 수 있으며, 국가의 기본 권력 간의 화합과 존중이 있을 것입니다.

의회 체제는 전쟁터에서는 승리했지만 이 승리는 승리하지 못한 것입니다. 연구, 신념, 애국심만이 개혁과 대의 정부 조직을 위한 합리적이고 차분한 길을 열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혼란과 고통스러운 혼란만이 뒤따를 것입니다. 혁명을 단결시키고 승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그 단결을 유지하지만 결국에는 분열과 충돌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는 오늘 날 승리하는 원칙과 사물의 힘 사이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칠레의 운명이며, 과거의 잔혹한 경험과 현재의 희생을 통해 먼 훗날 새로운 정부의 조직이 성과를 맺길 바랍니다. 정당의 헌법은 진지하고 안정적이며 자유로운 개혁이 이루어지고 독립적인 공권력의 기능을 발휘하여 공화국 발전의 공동 발전을 진정시키고 활성화 할 것을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지해 온 대의명분이나 미래에 대해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깃발이 진정한 공화주의 국민정부의 구현이지만 그 깃발이 지금 피투성이가 된 채로 전장에서 접혀졌습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다시 일으켜 세워질 것이며, 우리보다 더 많고 운이 좋은 시민들이 지켜 줄 것입니다.

언젠가는 칠레 국가 기관의 명예와 조국의 행복,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온 국민이 불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이 저를 기억해 줄 때 가장 섬세한 애정을 지니고 저의 영혼을 위로해 주실 때 저는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결국 1891년 9월 19일 새벽, 유언장을 다 쓴 후 발마세다는 침대에 누워 왼쪽으로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나서 오른손으로 스미스 & 웨슨 의 중개인이 준 리볼버를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 를 당겨 자살하였다. 오전 8시였다.

이 패배는 칠레 역사상 1891년부터 1925년까지 지속되는 소위 "의회 시대(History of Chile during the Parliamentary Era (1891–1925)"를 열었다. 의원내각제와 달리 행정부입법부에 복종했지만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졌다. 행정력은 약화됐다. 대통령의 지위는 이 때부터 1925년까지 국가원수로 유지되었으나 정부에 대한 권한과 통제력은 축소되었다.[1]

4. 여담

그의 집권기에 이스터 섬이 칠레령이 되었다. 이에 당시 칠레 내에서는 황무지나 다름없는 섬을 굳이 돈들여서 차지해야 하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해군 대위인 폴리카르포 토로(Policarpo Toro)는 대통령에게 반드시 이스터 섬을 차지해야 한다며 회고록까지 전달했다.[2]

진보주의를 중시했고 견제를 많이 받았으며(군부,의회) 쿠데타로 인해서 말미에 누군가한테 받은 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에서 살바도르 아옌데와 비교될 때도 있다.


[1] 한 마디로 대통령이 아닌 의회와 군부가 견제하며 권력을 나눠먹는 체제가 된 것이다. 여담으로 발마세다 다음 칠레 대통령은 그가 임명한 해군 사령관인 호르헤 몬트(Jorge Montt Álvarez)이다. 반란을 일으킨 사람도 이 양반이다. 자신이 임명한 해군사령관에게 뒤통수를 맞고 결국 자살하다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2] 참고로 폴리카르포 토로 대위는 칠레 내전이 일어났을 때 유일하게 대통령을 지지했던 해군 대위였다. 이로 인해 체포된 후 내전이 끝나자 석방된다. 그는 1893년 호르헤 몬트 대통령에 의해 은퇴를 지명 받고 결국 은퇴했다. 그 후 조용히 살다가 1921년 65세의 나이로 산티아고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