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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7 20:12:42

헬무트 리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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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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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6b94> ▲ 1~10위
순위 이름 국적 격추 수 주 기종 비고
11위 테오도어 바이센베르거 독일 208대
12위 한스 필리프 독일 206대
발터 슈크 독일
14위 안톤 하프너 독일 204대
15위 헬무트 리퍼트 독일 203대
16위 발터 크루핀스키 독일 197대
17위 안톤 하클 독일 192대
18위 요아힘 브렌델 독일 189대
막스 슈토츠 독일
20위 요아힘 키르슈너 독일 188대
▼ 21~3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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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리퍼트 (Helmut Lipfert : 1916년 8월 6일~1990년 8월 10일)

1. 개요2. 서훈3. 소개4. 초기 경력5. 공중전의 시작6. 말년

1. 개요

독일의 전투기 조종사.

2. 서훈

2급 철십자 훈장 (1943. 3. 12)
1급 철십자 훈장 (1943. 4. 29)
전선 비행장 금장 (1943. 4. 26)
공군 명예컵 (1943. 11. 14)
독일황금십자장 (1944. 1. 28)
기사 철십자훈장 (1944. 4. 5)
백엽 기사철십자훈장 (1945. 4. 17)

3. 소개

203대라는 초인적인 격추를 거두어낸 수퍼 에이스인 헬무트 리퍼트는 단 11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100대를 격추시키는가 하면, 14개월 만에 130대를 떨구는 놀라운 격추 행진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렇게 탁월한 에이스인 헬무트 리퍼트였지만, 1943년과 1945년 사이에 무려 15회나 격추당해야만 했고, 또 그때마다 심각한 부상을 입지 않고 사지가 멀쩡하게 돌아왔다.

4. 초기 경력

헬무트 리퍼트는 독일 제국 동부의 작센-마이닝겐 공국(Saxe-Meiningen)의 리펠스도르프(Lippelsdorf)라는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입대 연령이 되자 국가노동봉사단(Reichsarbeitsdienst)에 징집된 그는 총 대신 삽을 들고 제식훈련을 받았다. 히틀러에 의해 군대가 확장되면서 노동봉사단원 중에서 상당수의 인력들이 보병으로 옮겨졌는데, 리퍼트는 제1기갑사단(1. Panzer-Division) 예하의 직할 부대인 제37신호대대(Nachrichten-Abteilung 37)로 가서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처럼 헬무트 리퍼트는 처음 군생활을 조종사로서가 아니라 기갑사단에서 보병으로 시작했었다. 나치 독일이 폴란드 침공으로 2차 대전을 일으키고 전격전으로 진격을 거듭한 독일군은 프랑스를 점령했고 이때 리퍼트는 상사까지 진급했지만 여전히 제1기갑사단에서 복무하고 있었다. 그후 루프트바페로 옮겨 간 그는 조종사 비행훈련을 받게 되었고, 1942년 11월에 A1과 A2 교육을 마쳤다. 그 무렵 독일 공군은 4개의 훈련 코스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A1, A2와 B1, B2가 그것이었다. A 훈련은 기본 이착륙부터 시작하여 곡예비행과 장거리 항법과 불시착 요령까지 교육을 받았고, B 훈련은 고공 비행과 계기 비행, 야간 이착륙 같은 좀 더 고급의 과정이었는데, 워낙 교육 과정이 치밀하게 잘 짜여져 있어서 단발 전투기 임무는 A교육만 이수해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가 처음 Bf 109 조종석에 앉게 된 것은 그의 나이 26세. 전투조종사로서는 매우 고령에 속했지만, 불굴의 의지는 나이어린 조종사들의 열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1942년 6월 16일에 그는 장교 교육과정을 시작해 8월 1일에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프랑스 생-쟝-당젤리(Saint-Jean-d'Angély)에 주둔하고 있던 동부 보충비행단(Ergänzungs-Jagdgruppe Ost)을 거쳐 12월 6일에는 제52전투항공단(JG 52) 제6비행중대(6./JG 52)로 부임하게 된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부대는 스탈린그라드로 항했다.

5. 공중전의 시작

리퍼트 소위의 첫 번째 공중전 임무는 1942년 12월 16일이었는데, 그 후에도 몇 차례 임무를 수행했으나 격추의 기쁨을 맛보지는 못했다. 해가 바뀌어 1943년 1월 30일에 드디어 리페프트 소위는 소련 공군LaGG-3 전투기를 1대 떨구면서 첫 승리를 기록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격추 스코어를 올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 시기는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후퇴가 시작되는 시기로 소련 공군의 전력도 날로 커져가고 있던 때라, 이 상황에서 대부분의 격추를 달성한 리퍼트의 전과는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헬무트 리퍼트는 첫 격추 후, 28개월 만에 700회의 임무 비행을 했고, 203대 격추라는 놀라운 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이중 그가 100대 격추를 달성한 것은 조종사 경력을 시작한 후 단 11개월 만에 이루어진 것이었고, 나머지 103대는 14개월 동안 달성한 기적적인 스코어였다.

활동 초기에 달성된 기록은 경험이 부족한 신참 파일럿으로서 거둔 성과라 놀라지 않을 수 없고, 후기에 거둔 전과는 소련 공군의 기세가 날로 높아지는 상황에서 짧은 기간만에 이루어낸 성적이라 더더욱 놀라운 것이라 하겠다. 동부전선 후기 독일 공군이 처한 상황은 연료와 전투기 부품이 부족한데다 그것을 몰 조종사도 없는 매우 어려운 나날이었고, 운용 가능한 가동 기체도 3대1에서 10대1로 소련의 공군력에 비해 절대적으로 숫적인 열세에 처해 있던 상황이었다.

동료들이 평가하는 리퍼트는 매우 성실하고, 책임감이 투철한 전투조종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리퍼트도 지상에서는 가끔 동료들에게서 떨어져, 길고 긴 명상에 잠기기도 했다고 한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잃게 된 가까운 동료들의 최후를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나 일단 전투에 들어간 그는 절대 임무를 포기하는 일이 없었고, 공중전 도중 달아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고 한다.

6. 말년

리퍼트의 조종사 경력 대부분은 JG 52에서 보낸 것이었는데, 종전 직전인 1945년 2월 15일부터는 JG 53의 제1비행단 지휘관으로 전속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기 3주일 전, 리퍼트는 제837호 백엽 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는다. 종전 이후에 다른 대부분의 조종사들이 군과 관련된 일에 계속 종사했지만, 리퍼트는 자신의 조종사 경력에 연연하지 않고 교사가 되어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파란만장한 전설의 에이스이자 하늘의 용사였던 헬무트 리퍼트는 1990년 8월 10일, 아인베크(Einbeck)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