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8D6D0><colcolor=#000000> 서퍽 공작 헨리 그레이 Henry Grey, Duke of Suffolk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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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헨리 그레이 (Henry Grey) |
출생 | 1517년 1월 17일 |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 |
사망 | 1554년 2월 23일 (향년 37세) |
잉글랜드 왕국 런던 탑 타워힐 | |
배우자 | 프랜시스 브랜던 (1533년 결혼) |
자녀 | 제인, 캐서린, 메리 |
아버지 | 제2대 도싯 후작 토머스 그레이 |
어머니 | 마거릿 워튼 |
형제 | 메리, 엘리자베스, 캐서린, 레너드, 앤, 존, 토머스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공작, 군인.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와 야합하여 딸 제인 그레이의 잉글랜드 여왕 등극을 주도했지만 메리 1세에게 패배한 뒤 처형당했다.2. 생애
2.1. 초년기의 행적
1517년 1월 17일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제2대 도싯 후작 토머스 그레이와 켄트 주 보튼 말허브 출신의 영주 로버트 워튼 경의 딸 마거릿 워튼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자매로 메리[2], 엘리자베스[3], 캐서린[4], 레너드[5], 앤[6], 존[7], 토머스[8]가 있었다. 그는 헨리 8세의 사생아인 헨리 피츠로이의 집에서 자랐으며, 당대 잉글랜드의 우수한 가정교사들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1530년 10월 아버지가 사망한 뒤 가문의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르면 그는 제18대 아룬델 백작 윌리엄 피츠앨런의 딸 캐서린 피츠앨런과 약혼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캐서린 피츠앨런과의 결혼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고, 이 때문에 4,000 마르크의 벌금을 내야 했다. 이 행위는 그가 출세에 좀 더 도움이 되는 결혼을 모색했기 때문에 감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헨리 8세의 절친한 친구인 서퍽 공작 찰스 브랜던과 헨리 8세의 여동생인 메리 튜더의 딸 프랜시스 브랜던과 약혼했다.[9]
하지만 헨리가 막 영지를 물려받았을 때, 그는 여전히 도싯의 영지를 관리하던 어머니의 보호를 받았다. 어머니는 아들이 약혼을 파기한 행위를 무례함의 표현으로 간주했고, 그가 내야 하는 벌금을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겨 도싯에 대한 재정 지원 지급을 제한하려고 했다. 이에 서퍽 공작은 마거릿 워튼에게 서신을 보내 자기 딸과 그녀의 아들의 결혼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도싯에 대한 보호권 이전과 헨리에게 자신의 재산을 관리할 권리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서퍽 공작의 제안은 헨리 8세의 지지를 받았고, 마거릿 워튼은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헨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젊은 부부의 부양을 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붙었으며, 그레이 가문은 프랜시스를 위해 그다지 많지 않은 지참금을 받기로 동의했다.
도싯 후작과 프랜시스 브랜던의 결혼 합의는 1533년 5월 24일에 이뤄졌고, 두 사람은 헨리 8세의 허락을 받아 결혼했다. 이후 메리 튜더와 그녀의 딸은 런던을 떠났고, 서퍽 공작과 도싯 후작은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인 앤 불린의 대관식을 준비하기 위해 수도에 남았다. 도싯 후작은 대관식 전날 런던 탑에서 열린 국빈 만찬에서 국왕을 모셨고, 그 후 다른 몇몇 귀족들과 함께 바스 기사단의 일원으로 선임되었다. 헨리와 프랜시스 부부는 결혼 후 레스터셔의 브래드게이트에서 살았다. 부부는 유아기에 사망한 두 자녀 외에도 제인, 캐서린, 메리라는 세 딸을 두었다. 프랜시스 부인과 그녀의 딸들은 왕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헨리 8세가 정한 왕위 계승 규칙에 따라 왕위 계승 서열에 포함되었다.
도싯 후작은 헨리 8세가 1547년에 사망할 때까지 궁정을 자주 방문했다. 그는 엘리자베스 공주의 세례식에 참석했고, 제인 시모어 왕비의 장례식에서 아내와 함께 장례 행렬을 걸었으며, 왕과 네 번째 왕비 클레베의 앤의 공식 회의에 참석했고, 의회 개회식에 2번 참석했으며, 1545년 헨리 8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다. 다만 프랑스에 대항한 군사 작전에서 특별한 군사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도싯 후작은 동시대 사람들에 의해 "유명하고 많은 사랑을 받는 귀족 신사", "교육 수준이 높고 지성이 뛰어난 사람"으로 묘사되었으며, 학자들에게 후한 대접을 해서 관대하고 친절한 영주로 알려졌다. 그는 야심이 많고 허영심이 강했으며, 왕족과의 관계를 자랑스러워했다. 그와 서신을 주고받던 신학자 중 한 명은 후작이 공로에도 불구하고 아첨에 매우 취약하고 "왕자"라고 불리면 매우 기뻐한다고 불평했다. 또한 그는 독서나 친구들과 함께 사냥, 카드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2.2. 개신교 세력의 거두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한 후, 도싯 후작은 에드워드 6세의 대관식 이틀 전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거행된 대관식에서, 도싯 후작은 서퍽 공작 헨리 브랜던과 함께 어린 왕이 왕홀과 구슬을 들고 가는 것을 도왔다. 그 후 도싯 후작은 개신교 신자가 되었는데, '교황을 배제한 가톨릭' 정도로 성공회가 유지되기를 희망했던 보수적인 인사들과는 달리 스위스의 종교 개혁가 하인리히 불링거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급진적인 복음주의자가 되었다. 불링거는 1551년에 자신의 작품 하나를 그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그는 자기 딸들을 개신교도로 양육했고, 그들의 교육을 주의 깊게 감독했다. 도싯 후작은 학습에 대한 사랑으로 유명했고, 아내 프랜시스와 함께 세 딸 제인, 캐서린, 메리가 실질적 능력과 지적 능력을 최고 수준에서 완전히 개발할 기회를 갖도록 했다. 그는 자신이 후원하는 개신교 신학자 중 특별히 학문적으로 뛰어난 인물을 선정해 딸들의 가정교사로 지명했는데, 그중 한 명인 성공회 사제이자 학자 존 에일머는 도싯 후작으로부터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비용을 지급받았다.세간에서는 제인 그레이가 어릴 때 조금만 실수를 해도 부모에게 잔혹하게 구타당하고 채찍질당하는 등 아동학대에 시달렸고, 교사에게 "제인 그레이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이는 18세기 초부터 영국 작가들이 제인 그레이의 비극적인 생애에 살을 붙이는 과정에서 덧붙여진 이야기인데, 이는 잉글랜드의 학자이자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3대를 모신 행정가인 로저 애샴이 저서에서 제인 그레이가 자신에게 이렇게 밝혔다고 기술한 데서 비롯되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앞에 있을 때, 말하든 침묵하든, 앉든 서든 가든, 가든, 먹든 마시든, 즐거워하든 슬퍼하든, 바느질을 하든, 놀든, 춤을 추든, 그 밖의 어떤 일을 하든, 나는 마치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과 같은 무게, 분량, 수에 따라 완벽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몹시 놀림을 받고 잔인하게 위협을 받으며, 때로는 꼬집고, 뜯고, 찧기도 하고, 그 밖의 다른 방법으로 (내가 존경하는 바를 표현하기 위해 그 이름을 밝히지 않겠습니다.) 엄청나게 혼란스러워서 지옥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로저 애샴은 제인 그레이와 실제로 만나본 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이 글을 썼으며, 헨리 그레이가 메리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일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정작 로저 애샴이 제인 그레이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녀의 부모에 대한 찬사를 담았으며, 제인과 부모의 미덕을 칭찬했다. 그레이 부부의 사제인 제임스 해든은 잉글랜드와 스위스에서 개신교 목사로 활동했고, 르네상스 인본주의자 존 플로리오의 아버지이기도 한 미켈란젤로 플로리오에게 제인이 경건함에 있어 부모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으며, 어머니 프랜시스와 무척 가까운 사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제인 그레이가 부모에게 심한 학대를 당했다는 걸 입증할 당대 기록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녀는 아버지가 붙여준 우수한 교사들의 훌륭한 교육 덕분에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그리스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인본주의에 숙달한, 당대 잉글랜드에서 손꼽히는 여성 지식인이 되었다.
도싯 후작은 튜더 왕조와의 긴밀한 친족 관계와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딸들을 통해 국가 문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했는데, 특히 장녀 제인에게 기대를 걸었다. 헨리 8세가 죽은 직후 권력은 도싯 후작과 긴장된 관계였던 호국경 에드워드 시모어에게 집중되었다. 에드워드 시모어는 헨리 8세의 여섯 번째 왕비 캐서린 파의 형제인 윌리엄 파에게 노샘프턴 후작 칭호를 수여하고 내각에 포함시킨 것과는 달리, 도싯 후작을 내각에서 배제했다. 이에 도싯 후작은 에드워드 시모어의 동생이며, 형이 권력을 독점한 것에 불만을 품은 토머스 시모어와 긴밀한 교류를 가졌다. 토머스 시모어는 하인 해링턴을 보내 도싯 후작에게 제인 그레이와 에드워드 6세를 결혼시키자고 제안했고, 자기가 에드워드 6세의 동의를 받아낼 수 있다고 장담했다. 도싯 후작은 이에 동의하며, 이 결혼이 성사되어 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면 토머스 시모어가 장래에 수익성 있는 직위에 임명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토머스 시모어가 체포되었다. 그는 에드워드 6세를 납치해 국왕과 제인 그레이의 결혼을 성사하고, 엘리자베스 공주와 자신의 결혼 역시 성사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도싯 후작은 이에 연루되어 심문을 위해 추밀원에 소환되었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도싯 후작은 에드워드 시모어에게 그의 아들인 하트퍼드 백작 에드워드 시모어의 신부로 제인 그레이를 삼으라고 제안함으로써 공모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토머스 시모어는 결국 1549년 3월 20일에 처형되었지만, 그는 무사히 빠져나왔다. 6개월 후 에드워드 시모어가 몰락하고, 워릭 백작(후에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가 권력을 잡았다. 존 더들리는 종교 개혁을 옹호하는 궁정 신하들과 동맹을 맺었는데, 도싯 후작은 재빨리 하트퍼드 백작 에드워드 시모어와 제인 그레이의 약혼을 파기하고 존 더들리의 측근이 되었다.
그 후 왕립 위원회에 남아있던 보수파는 추방되었고, 도싯 후작은 노샘프턴 후작 윌리엄 파,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허버트와 함께 성공회에서 가톨릭 색채를 빼내는 데 힘을 쏟는 대표적인 인사가 되었다. 1549년 12월, 도싯 후작은 추밀원의 위원이 되었고, 국왕의 집사, 레스터 성의 순찰 등 수익성 있는 직책을 획득했고, 레스터셔, 러틀랜드, 워릭셔, 노팅엄셔, 랭커스터 공국의 영지를 받았다. 게다가 국왕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중개자 없이 국왕과 직접 소통할 수 있었다. 1551년 아내 프랜시스의 이복 형제인 헨리 브랜던과 찰스 브랜던이 자식을 낳지 못하고 사망한 뒤, 아내 프랜시스가 서퍽 여공작이 되었고, 그는 프랜시스의 남편 자격으로 서퍽 공작이 되었다.
2.3. 딸을 잉글랜드 여왕으로 옹립하다
1553년 초, 에드워드 6세가 중병에 걸렸다. 그 후 6개월 간 회복과 재발을 반복하며 상태가 악화되더니, 5월이 되자 가망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에드워드 6세가 이대로 사망한다면,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 공주가 잉글랜드 여왕이 될 것이었고, 그렇게 되면 가톨릭을 배제하고 성공회에 개혁주의 신학을 도입했던 이들의 안위가 위태로울 게 자명했다. 이에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는 메리 공주를 기필코 왕위에서 배제하기로 마음먹었고, 이를 위해 결혼 동맹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서퍽 공작 헨리 그레이에게 그의 장녀 제인이 자신의 막내 아들 길포드 더들리와 결혼하자고 제안했다.19세기 영국 여성 역사 작가이자 시인인 아그네스 스트릭랜드(Agnes Strickland, 1796 ~ 1874)가 집필한 <영국 여왕들의 삶>에 따르면, 제인 그레이는 이 결혼을 받아들이길 싫어했지만, 어머니 프랜시스 브랜던에게 잔혹하게 구타당하고 채찍질당해 복종해야 했다고 한다. 이것은 이탈리아 추기경이자 교황청 특사 조반니 프란체스코 코멘도네가 "서퍽 공작의 첫째 딸인 제인이라는 이름으로, 비록 결혼을 강력히 반대했지만 어머니의 고집과 아버지의 위협으로 인해 복종해야 했다"라고 기록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코멘도네는 가톨릭을 잉글랜드에서 복원하려는 메리 1세를 강력히 지지한 교황의 특사였기에, 그녀를 몰아내고 제인 그레이를 여왕으로 세우려 했던 존 더들리와 헨리 그레이 부부를 비방하고자 지어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그 외에 제인 그레이가 부모의 협박을 받아 결혼을 승낙해야 했다는 걸 입증하는 증거는 전혀 없다.
사실 서퍽 공작은 자기 딸을 길포드 더들리와 결혼시키는 걸 그다지 원하지 않았다. 이 결혼이 성사된다면, 장차 잉글랜드 왕권이 자기들 가문에서 노섬벌랜드 공작가에게 넘어갈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섬벌랜드 공작이 이 문제에 대해 왕의 지지를 받았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는 결국 받아들였다. 1553년 5월 21일, 제인 그레이와 길포드 더들리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1553년 5월 28일, 주치의가 왕이 곧 죽을 것이 분명하다고 전했다. 1553년 6월 초, 에드워드 6세는 변호사들이 유언장 최종본을 작성하는 것을 직접 감독했고, "문서의 여섯 군데"에 서명했다. 그런 다음 6월 15일 존 더들리의 감시 아래 고위판사들과 변호사들을 침대로 불러모아 "날카로운 말과 화난 표정"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선왕 헨리 8세가 1543년에 반포한 제3차 왕위 계승법에 관한 특허장을 바꾸라고 명령했다. 개정된 특허장의 내용은, 그의 두 이복 자매인 메리 공주와 엘리자베스 공주는 왕위 계승 후보자에서 제외되고, 제인 그레이가 새 왕위 계승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에드워드 6세는 이 특허장을 의회에서 채택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그런 다음, 고문과 변호사들에게 자신이 보는 앞에서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고, 그들에게 자기가 죽고 나면 자기 뜻을 충실히 이행하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훗날 대법관 에드워드 몬태규는 이 일에 관해 메리 1세에게 사과하면서, 자신과 동료들이 문서의 유효성에 대해 법적 이의를 제기했을 때 존 더들리가 분노에 떨며 자신들을 위협했고, 자기 뒤에 서 있던 영주들이 "계속 거부한다면 반역자로 간주할 것이다."라고 결론 짓는 소리가 들렸기에 별 수 없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마지막으로, 6월 21일에 왕의 고문, 귀족, 대주교, 주교, 보안관 등 100명이 넘는 유력 인사들이 특허장에 서명했다. 그들 중 다수는 나중에 자기들이 존 더들리의 위협을 받아 강제로 서명했다고 주장했다.
1553년 7월 6일, 에드워드 6세가 15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틀 후, 노섬벌랜드 공작은 제인 그레이에게 선왕이 그녀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알렸다. 세간에서는 제인 그레이가 이 소식을 듣고 혼절했으며, "내가 아니라 메리 공주가 여왕이 되어야 한다!"라고 울부짖었지만 부모의 협박에 못 이겨 여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지만, 이 역시 후대 작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다. 제인 그레이 본인이 런던 탑에 투옥된 뒤 진술한 바에 따르면, 그녀는 7월 9일 노섬벌랜드 공작의 미완성 궁전인 사이온 하우스에서 열리는 의회에 참석하라는 소환장을 받고 그곳에 간 뒤, 시아버지 존 더들리와 프랜시스 헤이스팅스, 윌리엄 허버트, 윌리엄 파, 헨리 피츠앨런을 만났다. 귀족들은 제인 그레이에게 왕의 죽음을 알리고 그의 유언에 따라 그녀가 영국의 왕관을 수락해야 한다고 권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왕위를 잇는 걸 부담스럽게 여겨서 거절했지만, 부모와 시부모가 포함된 귀족들의 간절한 설득을 받았고, 남편 길포드가 "기도와 애무"라는 부드러운 방식으로 설득하자 결국 왕위를 수락했다고 한다.
1553년 7월 10일, 제인 그레이는 공식적으로 잉글랜드 여왕으로 선포되었고, 그녀와 길포드는 대관식을 준비하기 위해 런던 탑으로 이동했다. 당시 노퍽에 있던 메리 공주는 왕위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면서 추종자들을 끌어모은 뒤 런던으로 진격했다. 서퍽 공작은 앞날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았고, 7월 14일 노섬벌랜드 공작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전한 동안 아내, 딸, 사위와 함께 런던 탑에 남아서 경비병들의 호위를 받았다. 그러나 노섬벌랜드 공작이 출진한 사이 펨브로크 백작 윌리엄 허버트와 아룬델 백작 헨리 피츠앨런 등이 메리 공주를 지지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난다는 소식을 듣고 불안해 한 끝에 메리 공주 편을 들기로 결심했다. 7월 18일, 노섬벌랜드 공작은 반역자로 선포되었고, 7월 19일 의원들은 메리 공주를 잉글랜드 여왕으로 선포했다.
그 후 노섬벌랜드 공작을 따르던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노섬벌랜드 공작이 허무하게 생포된 뒤, 메리 여왕이 파견한 군대가 런던 탑에 이르렀다. 서퍽 공작은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직감하고 경비병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그 후 런던 탑을 떠날 것이며, 메리 공주를 여왕으로 선포하는 문서에 서명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제인에게 그녀의 통치가 끝났다고 알리고, 아내 프랜시스와 함께 베이너드 성으로 떠나 펨브로크 백작과 함께 노섬벌랜드 백작을 비난하는 대열에 합류했다. 그날 늦게, 런던 탑에 남아 있던 제인, 길포드, 노섬벌랜드 공작부인 제인 더들리가 체포되었다.
1553년 7월 25일 메리 여왕이 런던에 입성하기 직전에 존 더들리와 그의 아들 앰브로즈, 헨리가 런던 탑으로 끌려갔고, 7월 27일 서퍽 공작도 런던 탑에 갇혔다. 하지만 그는 며칠 만에 아내 프랜시스가 메리 여왕의 호의를 산 덕분에 사면받았다. 에식스의 뷰리외에서 메리를 만난 프랜시스는 노섬벌랜드 공작이 이 모든 일의 원흉이며, 자신들은 그에게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제인 그레이는 포로로 남았고, 서퍽 공작은 질병으로 움직일 수 없었기에 2주 더 런던 탑에 머물렀다. 한편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는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은 뒤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8월 22일 런던 탑의 타워 힐에서 처형되었다.
2.4. 토머스 와이엇의 난과 헨리 그레이의 처형
메리 1세는 잉글랜드 여왕이 된 후 잉글랜드 왕국에서 가톨릭을 회복하는 데 힘썼고, 이와 동시에 결혼 문제에 몰두했다. 그녀는 두 경우 모두 신성 로마 제국의 사절인 시몽 르나르의 조언에 의지했는데, 시몽은 그녀에게 매우 온건하고 점진적으로 일을 추진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11월 초 의회가 서퍽 공작이 이전에 강력하게 추진했던 에드워드 6세 하에서 채택된 모든 종교법을 무효화하기로 결의하자, 서퍽 공작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 하지만 딸의 목숨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일단 메리 1세에게 복종했다. 그는 메리 여왕에게 자기 딸을 용서해 달라고 간청했고, 여왕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을 공개적으로 선언했으며, 그녀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53년 후반, 메리 1세는 스페인의 펠리페 왕자와 약혼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결혼을 통해 잉글랜드가 가톨릭을 강력히 신봉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종속되어 버릴 거라는 두려움으로 인해 많은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1554년 1월 메리 여왕을 전복하고 엘리자베스 공주를 여왕으로 옹립하며, 초대 데번 백작 에드워드 코트니를 그녀와 결혼시키자는 음모가 계획되었다. 제인 그레이는 왕위 후보로 고려되지 않았고, 서퍽 공작은 개인적인 야망보다는 종교 개혁을 지켜야 한다는사명감에 따라 음모에 가담했다. 음모자들은 여러 주에서 동시에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헤리퍼드셔에는 제임스 크로프트가 반기를 들 예정이었고, 서부에서는 피터 케어우, 켄트에서는 토머스 와이엇이 일으키려 했다. 서퍽 공작은 서리에서 분견대를 모은 뒤 와이엇과 합류하기 위해 레스터셔로 진군했다.
그러나 반란군은 민심의 지지를 그리 받지 못했으며, 그들의 계획은 에드워드 코트니의 누설로 메리 여왕에게 사전에 전해졌다. 메리 여왕은 토머스 와이엇의 진영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이에게 사면을 내리겠다고 선언하고, 토벌대를 재빨리 동원해 반란 진압에 나섰다. 1554년 2월 초 반란은 진압되었고, 와이엇과 그의 부하들은 체포되었다. 서퍽 공작과 그의 남동생 존 그레이는 워릭셔 영지로 피신하려 했지만 집사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그들은 체포되어 런던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즉시 런던 탑으로 보내졌다.
제인 그레이와 길포드 더들리가 처형된 지 5일 후인 1554년 2월 17일, 헨리 그레이는 스페인의 펠리페 왕자가 잉글랜드에 입국한 것에 항의하여 레스터셔에서 반란을 일으킨 혐의와 여왕을 전복하려 한 혐의로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재판받았다. 그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잉글랜드 귀족이 외국인으로부터 조국을 지키는 것은 반역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판사들은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고, 그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그의 재산은 왕실에 몰수되었다. 2월 22일 그의 사형이 집행될 거라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메리 여왕은 서퍽 공작의 영혼을 구하고 그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개인 사제 2명을 그에게 보냈지만, 그는 단호히 거부하고 생애 마지막 시간을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하인리히 불링거의 저작을 읽으며 보냈다.
1554년 2월 23일 아침, 헨리 그레이는 타워 힐로 끌려갔다. 처형에 앞서 의식이 시작되기 전, 메리 여왕의 사제 휴 웨스턴은 서퍽 공작의 종교적 신념을 공격하는 설교를 했다. 헨리는 이에 분노해 웨스턴이 그를 따라 처형대로 올라가려고 하자 돌아서서 사제를 밀어냈다. 웨스턴이 그를 붙잡았고 둘 다 단두대 발치에 쓰러졌다. 그렇게 실랑이가 한창 벌어지다가 웨스턴이 자신은 메리 여왕의 요청으로 여기에 왔다고 소리치자 중단되었다. 헨리 그레이는 그를 풀어주고 진정한 뒤 여왕을 모욕하고 법을 어겼다는 것을 인정하는 연설을 했다. 그 후 그는 웨스턴에게 여왕이 자신을 용서했는지 물었고, 웨스턴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여왕이 공작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헨리 그레이는 무릎을 꿇고 시편 31편의 첫번째 라틴어 문구인 "In te Domine speravi"(주님, 내가 당신을 신뢰합니다.)라고 낭송한 후, 모자와 더블릿을 벗고 마지막 기도를 한 후 참수되었다.
3. 가족 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서퍽 공작 헨리 그레이 (Henry Grey, Duke of Suffolk) | <colbgcolor=#fff3e4,#331c00> 제2대 도싯 후작 토머스 그레이 (Thomas Grey, 2nd Marquess of Dorset) | <colbgcolor=#ffffe4,#323300> 초대 도싯 후작 토머스 그레이 (Thomas Grey, 1st Marquess of Dorset) | |
그로비의 존 그레이 경 (Sir John Grey of Groby) | |||
엘리자베스 우드빌 (Elizabeth Woodville) | |||
세실리 본빌 (Cecily Bonville) | |||
제6대 해링턴 남작 윌리엄 본빌 (William Bonville, 6th Baron Harington) | |||
캐서린 네빌[10] (Katherine Neville) | |||
마거릿 워튼 (Margaret Wotton) | |||
로버트 워튼 경 (Sir Robert Wotton) | |||
니콜라스 워튼 (Nicholas Wotton) | |||
엘리자베스 뱀버러 (Elizabeth Bamburgh) | |||
앤 벨냅 (Anne Belknap) | |||
헨리 벨냅 (Henry Belknap) | |||
마거릿 놀스 (Margaret Knolles) |
3.2. 아내
3.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레이디 제인 그레이 (Lady Jane Grey) | 1536년 혹 1537년 | 1554년 2월 12일 | 길포드 더들리 경 |
2녀 | 하트퍼드 백작부인 캐서린 시모어 (Katherine Seymour, Countess of Hertford) | 1540년 8월 25일 | 1568년 1월 26일 | |
초대 하트퍼드 백작 에드워드 시모어[12] 슬하 2남 | ||||
3녀 | 레이디 메리 키스 (Lady Mary Keyes) | 1545년 4월 20일 | 1578년 4월 20일 | 토머스 키스[13] |
4. 헨리 그레이의 미라화 된 머리?
전승에 따르면, 헨리 그레이는 런던 탑 내 성 베드로 애드 빈쿨라 예배당 바닥 아래에 묻혔으며, 그의 무덤은 딸 제인과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의 무덤 사이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승을 뒷받침하는 기록을 남아있지 않으며, 당대 사료에서도 그의 매장을 언급하는 기록은 없다. 1851년, 런던 탑에서 북쪽으로 약 500 야드 떨어진 옛 수도원 공동체인 홀리 트리니티 미노리스 교회를 정리하는 도중 제안 남쪽 아래의 작은 금고에서 미라화 된 머리가 발견되었다. 머리는 발견 당시 톱밥, 특히 참나무 톱밥으로 덮인 채 참나무 상자에 담겨 있었다. 참나무 톱밥과 직접 접촉한 결과로, 머리는 놀라울 정도로 잘 보존되었다. 머리의 상태로 보아 칼날, 아마도 사형 집행인의 칼날로 몸에서 잘린 것으로 보인다. 다만 몸통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1877년, 국립 초상화 미술관의 전 관리인인 조지 샤프 경이 머리를 검사했는데, 그는 머리의 특징이 당시 햇필드 하우스에 있는 솔즈베리 후작의 소장품이었던 헨리 그레이의 초상화와 매우 유사하다고 밝혔다. 이에 세간에서는 메리 여왕이 타워 힐에서 처형된 반역자들의 잘린 머리를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차원에서 런던 브리지에 전시하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이곳에 묻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그러나 이 머리가 과연 헨리 그레이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877년에 머리를 검사한 이들 중 누구도 고고학, 법의학, 고고학 또는 법의인류학에 대한 교육을 받은 바 없었으며, 건조 과정을 통해 훼손된 머리를 16세기에 그려진 초상화와 비교하는 샤프의 방법론은 현대 학계에서는 별 쓸모가 없다고 간주한다. 게다가 그 문제의 초상화는 현재 1570년대 중반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를 묘사했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홀리 트리니티 미노리스 교회는 1899년 바로 옆에 있는 세인트 보톨프 위드아웃 알드게이트 교회와 합병되었고, 교구장은 세인트 보톨프 교회의 목사에게 넘겼다. 그 교회는 오늘날까지도 목사의 관리하에 있으며, 미라화된 머리는 지하 납골당에 보관되어 목사와 측근 몇 사람의 엄중한 관리를 받고 있다고 전해진다.
[1] 전통적으로 헨리 그레이의 초상화로 알려졌지만, 최근에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의 초상화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2] 1508 ~ 1534, 헤리퍼드 자작 월터 데버루의 부인.[3] 1510 ~ 1561, 월든의 초대 오들리 남작 토머스 오들리의 부인. 초대 서퍽 백작 토머스 하워드의 할머니.[4] 1516 ~ 1542, 제19대 아룬델 백작 헨리 피츠앨런의 부인.[5] 1520 ~ 1521, 요절[6] 1520 ~ 1548, 울러스턴의 윌로비 남작 헨리 윌로비의 부인.[7] 1523 ~ 1564, 에식스 주 피르고의 영주.[8] 1526, 요절[9] 두 사람은 육촌이기도 했다. 헨리의 친할아버지 초대 도싯 후작 토머스 그레이가 프랜시스의 외할머니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이부오빠였다.[10]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의 딸.[11] 1554년 혼인무효화.[12] 초대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의 4남.[13] 샌드게이트 성의 성주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상급 수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