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00 Greatest Greeks | ||||||||
※ 2009년 그리스 Skai TV 방송이 그리스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그리스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알렉산드로스 3세 | 게오르요스 파파니콜라우 |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 |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 소크라테스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아리스토텔레스 |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 플라톤 | 페리클레스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 콘스탄티노스 카라테오도리 | 멜리나 메르쿠리 |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 니코스 카잔차키스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오디세아스 엘리티스 | 호메로스 | 마노스 하지타키스 | 레오니다스 1세 | 히포크라테스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피타고라스 | 콘스탄티노스 카바피 | 마리아 칼라스 | 아르키메데스 |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 | 엘 그레코 | 콘스탄티노스 11세 | 요르기오스 세페리스 | 리가스 페레오스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아리스 벨루키티오스 | 요안니스 메탁사스 | 니코스 갈리스 | 게오르기오스 카라이코스 | 데모크리토스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 | 디오니시오스 솔로모스 | 야니스 마크리야니스 | 아다만티오스 코라이스 | 야니스 리트오스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테미스토클레스 | 헤라클레이토스 | 투키디데스 | 유클리드(에우클레이데스) | 파블로스 멜라스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아테네의 크리스토둘로스 | 아타나시오스 디아코스 | 테오도로스 자고라키스 | 디미트리 나노풀로스 | 무명용사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페이디아스 | 아리스토파네스 | 코스티스 팔라마스 | 에톨리아의 코스마스 |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소포클레스 | 니코스 벨로야니스 |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 니콜라오스 마르지오리스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 |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 에피쿠로스 | 알렉산드로스 파파디아만티스 | 오톤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반젤리스 | 솔론 | 클레이스테네스 | 아이스퀼로스 | 바실리오스 2세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콘스탄티누스 1세 | 이온 드라구미스 | 코스타스 시미티스 |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테오 앙겔로풀로스 | 니코스 실루리스 | 스텔리오스 카잔티디스 | 차릴로스 플로라키스 | 에우리피데스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카롤로스 코운 | 유스티니아누스 1세 | 라키스 라조폴로스 | 헤로도토스 | 다나시스 벤고스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헬레네 글리카츠아흐와일러 | 카티나 팍시누 | 알리키 부지욱라키 | 마르코스 밤바카리스 | 그리고리스 람브라키스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바실리스 치차니스 | 피로스 디마스 | 마노스 로조스 | 마노리스 글레조스 | 엘레나 무잘라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필리포스 2세 | 디미트리스 혼 | 라스카리나 부불리나 | 탈레스 | 프락시텔레스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헤로도토스 Ἡρόδοτος | Herodotus | |
이명 | 할리카르나소스의 헤로도토스 Ἡρόδοτος ὁ Ἁλικαρνασσεύς[1] Ηρόδοτος ο Αλικαρνασσεύς[2] Hērŏdŏtus Hălĭcarnassensis[3] |
출생 | 기원전 484년경 |
페르시아 제국령[4] 카리아 사트라피, 할리카르나소스 | |
사망 | 기원전 425년경 (향년 58~59세) |
마케도니아 펠라 or 칼라브리아 투리이 | |
국적 | 고대 그리스 |
직업 | 역사학자, 모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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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서구에서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5] 영어 history는 이 사람의 저서 제목에서 비롯되었다. 말 그대로 서구에서 '역사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아버지'인 것. 역사서를 쓰는 틀과 형식도 이 사람이 만들어놓은 틀을 후대에 장기간 그대로 쓰거나 아주 조금씩만 수정하면서 발전하여 왔다. 특정 분야의 전반적인 틀을 혼자 통째로 만들었다는 측면에서, 철학에서의 플라톤, 과학에서의 아이작 뉴턴 정도가 각 장르에서 이들과 동급의 위상을 가진다.[6]
2. 저서: 《역사》
기원전 430년에 저술한 《역사》(Historiae / Ἱστορίαι)로 유명하다. 본디 뜻은 그리스어로 조사하다, 조사해서 알다라는 것으로 상상이 아니라 직접 조사해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쓴 저서이다.[7] 스스로 처음에 밝히길 위대한 사람들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고, 어떠한 이유로 아시아와 헬라스가 반목하게 되었는지 밝히기 위해, 《역사》를 집필했다고 한다. 《역사》는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이야기로 19세기~20세기 초까지는 그리스 옹호적인 저술이라고 알려졌지만 최근에는 아테네의 단점들도 저술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학자들도 많다.[8] 《역사》는 당시의 그리스 문학과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었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또한 다른 고대 역사가와는 달리 "내가 누구누구에게 듣기로는..." 하는 형태로 출처를 밝히는 점에서 독특하다. 책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사실에 기반해 합리적으로 적으려 노력했고, 간혹 황당무계한 소리도 하지만 고대인 기준을 적용하면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수준으로 보인다. 낭설도 그 출처를 기록함과 동시에 루머의 교차 검증, 비슷한 지방의 실제 사례 비교, 낭설에 대한 합리적 분석으로 사실 판단 노력 등등 정성이 많이 들어갔다. 그리고 써 놓으면서도 '이 책은 내가 듣거나 알고 있는 걸 전하려는 목적이 있다.', '내가 들었으니 전하기는 하는데 사실 나도 안 믿는다.' 등의 평을 자주자주 덧붙인다. 당시 정보 환경을 감안해 볼 때 출처를 명시하는 건 굉장한 일.[10] 그러나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에 들어서서는 본인의 논평이나 자세한 교차 검증이 적어지는 등 좀 과장을 섞은 것 같기도 하다.
또, 사실을 전하기보다 어느 정도 당대 현실 정치에 대한 비유 혹은 당대의 주요 논쟁에 대한 이슈 참여도 보인다. 페르시아에서 귀족들이 모여 귀족정, 왕정, 민주정 등 최선의 정치 체제에 대해 토론하고 표결에 붙이는 구절은 당대 그리스의 정치 체제에 대한 소피스트들의 논쟁을 옮겨 온 것으로, 헤로도토스가 이를 통해 그리스 당대의 정치에 대해 비판하고자 했던 모양이다.
비록 헤로도토스가 조사한 사실이 사실인지 아닌지 신빙성이 의심되는 부분도 있고 그의 분석이 틀린 부분도 있지만[11] 당시 그와 같이 생각하고 저술한 사람은 알려진 바가 없다는 걸 생각하면 그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더욱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그다지 없기 때문에 헤로도토스의 저서에 많은 부분을 의지해야 했다.
2.1. 정확성
놀라운 것은 오늘날에 이르러서 고대 동방 모든 지역의 사정이 해명됨에 따라 헤로도토스가 전하고 있던 사실들이 의외일 정도로 정확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헤로도토스의 탐사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답사'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는 우선 여행하는 지역의 비문 자료들을 참고했으며, 신관들을 닦달하여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심지어 이집트에서 올라탄 배에서 노잡이에게 질문하기도 하고... 각 지역의 가이드들에게 지겹도록 질문했다고 한다. 이렇게, 다양한 호기심과 그에 따른 질문은 간혹 왜곡된 정보를 받긴 하지만 헤로도토스가 각 이야기에 자신의 코멘트를 달면서 객관성도 확보한다. [12]- 에트루리아의 기원도 고고학적인 연구를 통해 헤로도토스가 언급한 소아시아 기원설에 신빙성이 실리고 있다. 정확히는 에트루리아인의 기원은 이탈리아반도 선주민과 아나톨리아계 이주민의 혼혈임이 유력시되는 상황이다.
- 나일강 삼각주가 토사가 쌓여 바다를 밀어낸 것이란 것도 알아냈다.
- 헤로도토스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끄트머리에 실제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도시들을 직접 방문하고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역대 왕계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 현대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굴된 점토판들에서 언급되는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고 심지어 점토판의 훼손, 고의적 누락 등으로 불분명한 시기의 역사를 헤로도토스가 서술하고 있기까지 하다.
- 최초로 중국을 소개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흑해를 지나가는 초원의 부족들을 설명하면서 ''세리카(Σηρικὰ)'를 언급하는데[13] 이 세리카가 중국이라고 보는 견해이다.[14] 헤로도토스는 가장 가까운 쪽에서부터 먼 쪽 기준으로, 남쪽에서 북쪽 기준으로 설명하는데, 세리카는 가장 마지막에 설명된다. 세리카는 지금까지 소개된 가운데 가장 북쪽이고, 그래서 너무나도 춥기 때문에 그 이북으로는 사람이 살지 못한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고대 초원길 가장 동쪽에 연결된 북중국이라고 생각한다.[15][16] 어쨌든 이후 세리카라는 나라는 중국의 주요 수출품인 비단과 동일시되면서, 비단을 만드는 나라인 세리카가 곧 중국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 페르시아 제국의 근위병인 불사 부대 병사들이 손에 쥔 창의 끝에 석류 모양의 추가 달려 있었다고 적었는데, 실제로 페르세폴리스 궁전 벽에 새겨진 페르시아 병사들의 손에 들린 창의 끝에 석류 모양의 추가 있었음이 확인되어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 군사를 묘사한 내용이 정확했음이 밝혀졌다.
2.2. 오류
정확성이 높다고 기술한 내용들이 다 정확한 것은 아니며 근본이 카더라 통신인 만큼 당대 널리 퍼져있던 헛소문들로 인한 오류도 많다. 그러나 랑케 이후의 근대 역사학을 고대인 헤로도토스에게 강요할 수도 없거니와 헤로도토스도 100% 과학적이고 올바른 역사를 써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쓴 것은 아니다[17]. 게다가 적도에 만년설이 있다든가, 한낮의 해가 북쪽으로 뜬다든가 하는 내용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정확하지만, 그 당시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내용이어서 "나는 못 믿겠다"고 써놓기도 했다.- 피라미드(정확히는 쿠푸의 대피라미드)의 건축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쿠푸왕이 노예 20만 명을 동원해 자신의 무덤을 만들도록 채찍 아래 노예 노동을 강제한 잔학무도한 왕이라고 깠다. 이로 인해 '채찍을 맞으며 피라미드를 짓는 노예들'이라는 이미지가 사람들의 뇌리에 제대로 박혀 현재까지도 각종 창작물에서 그렇게 묘사될 정도이고, 이 때문에 오랫동안 쿠푸왕은 허영심 많고 잔학무도한 폭군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각종 유물과 유적의 발굴로[18] 피라미드 건축은 강제 노동이 아니라 당시 종교적,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공공 근로 사업이었으며, 노동자들에게는 급여, 복지, 휴가가 제공되었고 심지어 파업까지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19], 헤로도토스의 주장은 현대 학계에서 완벽하게 논파되었다. 민주정 체제를 채택하고 전제 군주를 본능적으로 경계했던 그리스 출신인 헤로도토스는 거대한 대피라미드를 짓기 위해서는 평민들에 대한 착취가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기본으로 깔고 들어간 서술을 한 것이다. 또한 쿠푸의 대피라미드가 이집트 신왕국 시기에 지어졌다고 기록했으나, 쿠푸는 이집트 고왕국 시대 인물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몇천 년 차이가 난다.
- 페니키아 출신인 카드모스가 전파한 페니키아 문자를 토대로 그리스 문자가 탄생해서 아주 오랫동안 써왔다고 했다. 그러나 1900년에 아서 J. 에반스가 크노소스 궁전에서 점토판을 발굴하면서 고대 그리스 이전인 미케네 문명 시대(기원전 17세기 ~ 기원전 12세기)에는 선형 문자 B라는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했음을 알아내 반박되었다. 카드모스나 카드모스의 모델이 된 인물이 존재했다고 여겨지는 시기는 기원전 1600년~1500년 사이일 것이라고 알려졌는데, 이 시기에는 선형 문자 B가 쓰이고 있던 시기이다. 실제 역사대로라면 그리스 문자는 카드모스보다 후대인 기원전 8세기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 악어새(이집트물떼새)와 악어의 공생 관계의 대표적 오류 사례, 악어새는 딱히 악어의 입 찌꺼기를 양치질해 주는 건 아닌데 헤로도토스의 언급 때문에 사람들의 의식에 공생을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하거나 특징이 있는 예로 어느 정도 고정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20]
2.3. 주요 내용 및 서술 방식
'역사'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 대전쟁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그렇지만 실제 전쟁 이야기는 뒷부분에 가서야 나오고 앞부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기까지의 기나긴 경과들이 서술된다.우선 이야기는 그리스도, 페르시아도 아니고 리디아라고 하는, 현재 터키 서부 지방에 자리 잡았던 국가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페르시아의 건국자인 키로스보다 4대 정도 앞선, 리디아의 왕조가 기게스라는 사내로 넘어가는 과정의 일화부터 시작하는데, 이 사내는 왕의 심복이었지만 왕의 강요로 왕비의 알몸을 몰래 보고 나서[21] 이를 눈치챈 왕비가 "나와 함께 왕에게 복수하든지, 아니면 내 손에 죽든지."라는 협박을 하고, 결국 기게스가 왕을 살해하고 자신이 왕이 된다.
이 사내의 4대손인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와 일대 대전을 치르고 전쟁에 패하여 복속된다. 그다음에 이야기는 키루스 2세의 일대기로 넘어간다. 아니, 그 전에 페르시아는 메디아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하였으니 메디아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 메디아는 히타이트의 지배를 받다가... 이런 식이다.
이후 페르시아가 바빌론을 점령하는 장면에서 잠시 멈추고 바빌론의 역사와 풍습, 지형 등을 이야기하며 '역사'에서 가장 자세하게 설명된 이집트의 역사와 지리, 풍습에 대한 내용들도 키로스의 아들 캄비세스가 이집트를 공략하는 장면 앞에 나온다. 이런 방식으로 이집트, 리비아, 스키타이, 트라키아 등 여러 민족과 그리스의 여러 도시에 대한 내용들이 언급된 후 본격적인 전쟁 이야기로 넘어가고 그리스가 대제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하는 시점까지 이어진다.
이러다 보니 양이 방대해지고, 지리나 풍습에 대한 서술이 상당한 양을 차지하는데, 이런 부분에 대한 호불호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역사가들에게는 당연히 눈물 나게 귀중한 자료이지만, 일반 독자로서는 상당히 지루할 수 있다. 하지만 2500년 전쯤의 인류의 생활이 어떠했을까 궁금한 사람들에게는 매우 다양한 종족의 문화들을 접할 수 있어 나름 재미있을 것이다.
물론 지리나 풍습에 대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그리스-페르시아의 대전쟁이라는 큰 플롯과 여기에 간접적으로 연관된 풍부한 에피소드들이 대부분이라 읽기에 상당히 재미있다. 에피소드들은, 어느 도시가 어느 도시를 침략하면서 옛날에 있었던 어떤 사건을 명분으로 삼았는데, 이 사건이란, 누가 꿈에 뭐를 보고 델포이에 신탁을 받으러 갔는데, 어쩌고저쩌고하는 식이다.
많은 에피소드들에서 신탁이나 신의 섭리 같은 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 비과학적이라고 비판받긴 하지만, 당시의 신탁이라는 게 정치 상황에 따라 내려지기도 하고 사후에 해석되기도 하는 것이니 실제 역사와도 관련성이 높다고 할 것이다. 애초에 이 시기는 웬만한 역사적 사건을 죄다 신의 섭리라는 식으로 기술하던 시대다 보니, 이런 서술이 나오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가령 중동의 고대 역사에 대해 서술한 서적 가운데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성경만 해도 기이한 기적들이 나오는 부분이 많고, 카데시 전투에 대한 이집트 측의 기록에서는 느닷없이 람세스 2세가 신으로 변신하여 적들을 쓸어버렸다는 무슨 에이지 오브 미쏠로지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가 버젓이 들어가 있다. 이는 똑같이 고대 시대를 살던 헤로도토스라고 다를 것도 없는 것이다.
2.4. 번역
그리스어 원전 번역으로는 국내에 천병희 교수의 번역과 김봉철 교수의 번역이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 고대 그리스사 전공학자의 번역이라는 점이 두드러진다.3. 여행 덕후
여행 범위도 엄청난데 헤로도토스가 그의 저서에서 여행했던 부분들을 종합해 본다면 동쪽으로는 바빌론 내지 수사, 서쪽으로는 리비아의 키레네, 남쪽으로는 나일 상류의 시에네(아스완), 북쪽으로는 흑해 부근의 콜키스 지방과 아라비아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다. 간단히 말해서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세계' 라 알려진 부분은 거의 돌아본 것이나 다름없다.[22]심지어 초기 슬라브인과도 접촉하기도 했다. 슬라브 자체가 스키타이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농사도 했기 때문에 헤로도토스는 이들을 "농경 스키타이"라는 명칭을 지어줬다.
4. 여담
-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총 9권 구성이며 각 권은 학예의 여신들인 무사이로 이름이 붙어있다. 클레이오(Clio), 에우테르페(Euterpé), 탈리아(Thalia), 멜포메네(Melpomene), 테르프시코레(Terpsichore), 에라토(Erato), 폴리힘니아(Polymnia), 우라니아(Urania), 칼리오페(Calliope) 순이다.#
5. 대중 매체
- 도미네이션즈
헤로도토스의 튜닛이 유물로 등장한다.
-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
주인공의 조력자로 등장한다. 미스티오스가 델포이에 신탁을 받으러 왔을 때 그가 가진 레오니다스의 창에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첫 등장 하며 그를 아테네로 인도해 페리클레스와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한다. 이후에도 미스티오스와 함께 여정을 다니며 메인 스토리에 관여한다. 모든 스토리가 일단락된 이후엔 미스티오스와 작별하면서 레오니다스의 창을 받으며 그에게는 자신이 쓴 책 한 권을 선물한다. 수백 년 뒤, 이 책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보관되면서 모든 스토리가 끝난다.
[1] 고대 그리스어, 헤로도토스 호 할리카르나세우스.[2] 현대 그리스어, 이로도토스 오 알리카르나세프스.[3] 라틴어, 헤로도투스 할리카르나센시스.[4] 카리아는 기원전 550 ~ 450년, 다시 기원전 428 ~ 334년까지 페르시아의 속국이었다.[5] 고대 동양 사학의 아버지인 중국의 사마천을 제외하면, 이 정도의 찬사를 듣는 역사 저술가는 없을 것이다.[6] 역사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키케로에 의해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사실 이 키케로는 그의 저서인 <법률론>의 제1권에서 "하긴 역사의 아버지로 일컫어지는 헤로도토스나 테오폼포스의 경우에도 무수한 지어낸 이야기로 가득 차 있지만"이라는 식으로 비판했다.[7] 실제 어원은 이렇다. ἱστωρέω라는 단어는 (조사하다 inquire) 에서 하나 더 올라가 ἳστωρ(목격자)라는 단어에서 온 것인데, 실제로 헤로도토스는 소아시아 출신에 이집트, 레반트, 메디아 지역까지 여행한 것으로 보이며, 그가 본바와 들은 바를 명확히 구분하는 저술에서도 마찬가지로, 그가 역사 서술에서 '보고 관찰한'것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8] 자문화 중심적인 부분도 있긴 하지만 누구든 자신이 사는 곳 문화를 가장 좋아할 것이라는 선진적인 말도 했다.[9] 당시 그리스는 법조문도 시처럼 쓸 정도였다. 그리고 어휘가 잘 정리되지 않은 고대인들의 경우 시보다 산문이 더 어렵다. 그리스어의 경우 제법 정리된 편이긴 하지만.[10] 이는 동양의 역사가로 비유하면 기전체 정사보다는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의 서술 방식과 유사하다. 일연 역시 당대 역사가치고는 출처를 충실히 남겼고, 문학적 가치도 높으며, 카더라성 전승이나 일연 본인조차 못 믿을법한 전승도 일단 실으면서 부연 설명을 충실히 남겼다.[11] 그래서 거짓말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많은 고대 역사가들이 구라 치지 말라는 소리 들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특히 헤로도토스처럼 역사와 풍물지가 섞인 듯한 책을 쓴 사람은 더 그렇다.[12] 출처: 라이오넬 카슨_고대의 여행 이야기 (가람기획)[13] '세레스(Σῆρες)'는 '세리카 사람'이라는 의미.[14] 다만 초원에 존재한다는 점, 더 북쪽으로는 사람이 살 수 없다고 기록한 점을 미루어 보아, 오늘날 몽골 초원의 어느 한 부족을 지칭했다는 의견도 있다.[15] 헤로도토스는 물론 당대 그 어느 누구도 경도와 위도에 기반한 방위를 올바르게 계산할 수 없었으므로, 대강 북쪽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동쪽의 카슈미르가 세리카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16] 해로로 갈 수 있는 동쪽 끝 남중국은 '시나이(Σῖναι)'라 하여 세리카와 구별했다.[17] 사실 근대 이전의 역사 기록들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이 한 일을 자랑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남긴 것들이지, 무슨 후세 사람들한테 정확하고 과학적인 기록을 남겨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되라는 생각을 가지고 남긴 것들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고대 중국의 철학자인 맹자도 "책에 적인 내용이라고 해서 모두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차라리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낫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8] 특히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근처에서 노동자의 무덤과 마을 유적이 발굴된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19] 예시로 과음으로 인한 숙취 때문에 업무를 하루 빠진 노동자의 기록이 남아있다. 노예였다면 술을 입에 대거나, 업무를 마음대로 빠질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20] 실제 아프리카 대형 포유류 코뿔소, 하마, 영양, 코끼리에 기생하는 기생충을 쪼아 먹는 소등쪼기새가 있는데 최근에도 공생 관계로 알려져 있지만 소등쪼기새가 피를 마시려고 동물의 상처를 더 크게 벌려 놓거나 헤집는 등 더욱 심하게 만드는 모습이 여러 차례 목격되어 애매한 사례.[21] 왕은 자랑하고 싶었다고 한다.[22] 인도란 데가 있다는데 거기가 세계의 끝이라더라 정도는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