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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00:07:00

합천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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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군
합천읍
陜川邑 | Hapcheon-eup
<colbgcolor=#ef3120><colcolor=#ffffff> 광역자치단체 경상남도
기초자치단체 합천군
행정표준코드 5480038
관할 법정리 9리
하위 행정구역 22행정리 82반
면적 53.03㎢
인구 10,885명[1]
인구밀도 205.26명/㎢
정치 {{{#!wiki style="margin:-0px -11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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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 산청군·함양군·거창군·합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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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호 (3선)
경상남도의원 | 합천군 선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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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영 (초선)
합천군의원 | 가 선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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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복지센터 중앙로 61 (합천리 789)
합천읍사무소
1. 개요2. 지명 유래
2.1. 합천리2.2. 서산리2.3. 영창리2.4. 금양리2.5. 용계리2.6. 내곡리2.7. 외곡리2.8. 장계리2.9. 인곡리
3. 지역 특징4. 교통
4.1. 도로교통4.2. 버스교통
5. 교육
5.1. 교육환경
6. 출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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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남도 합천군, 대양면, 봉산면, 율곡면, 묘산면과 맞닿아 있다.

2. 지명 유래

2.1. 합천리

2.2. 서산리

- 내안계(內安溪) : “안안지골”로 불리며, 조선 세조 때 현재 마을 뒤 골짜기에 “안계사”라는 절이 있어 마을 이름을 안계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외안계(外安溪) : “바깥안지골”이라고도 하며, 합천에서 내안계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내안계보다 약 1백년후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 계림(溪林) : 계림마을은 새마, 굿마, 보림, 상보림, 남전동 등 5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잇고, 관내 행정리 중 자연 마을 수가 가장 많다. 조선말엽 상삼리면에 속한 지역으로 남전동 옆 골짜기에 지금의 시장격인 저자가 있었다고 하며, 지금도 저자골로 불리고 있다.
- 새 마 : 신촌 또는 계림이라고도 하며 관내에서 가장 마을의 역사가 짧다. 서기 1900년 가을 사천에 살던 밀양박씨 63세손인 박준제(朴俊濟)공 일가 몇 명이 처음 정착하면서 마을이 만들어졌다고 함.
- 굿 마 : 이 마을은 조선말엽부터 해방 이후까지 “노암동”으로 불렀으며, 약 120여년전 고성군 하일면에 거주하던 합천이씨 29세손인 관구(寬久)공이 처음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 앞 전답이 모두 인근의 하상보다 낮아 굼논(濕畓)이 많으므로 “굿마”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합천천 건너 산 밑에 위치하고 있어 교통이 아주 불편할 뿐 아니라 조금만 비가 와도 교통이 두절되어 통행이 불가능한 실정으로 마을세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한편으로는 개울건너편에 새마을이 형성되어 새마라고 부르고 이곳을 “구”마을이라 하다가 굿마로 부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 보 림(寶林) : 이 마을은 합천천을 건너 외곡리 신평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원래 남전동 옆 저자골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외곡천과 합천천이 합류하는 지역으로 매년 홍수피해가 잦은 곳이다.
- 상보림 : 이 마을은 원래 보림촌으로 불린 곳으로 오현동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이 창건된 것은 약 450여년전으로 추정되며, 계림 관내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보인다. 처음 마을이 들어선 것은 합천이씨 20세손인 이 대(垈)공이 현 마을 북쪽 약 50m지점 고개 넘어 보림골에 정착하였으며, 제법 많은 가구가 그곳에서 300여년을 보내다가 약 150여년 전, 전국에 유행했던 전염병으로 많은 주민이 죽고 마을이 피폐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마을 서쪽 약 1km지점 산기슭에는 일제강점기 아연을 생산한 폐광이 있다.
- 남전동(南田洞) : 이 마을은 외곡천을 사이에 두고 보림과 마주하고 있다. 마을이 창건된 것은 조선말엽으로 추정되나 그 유래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보림동에서 볼 때 서남쪽에 있어 남전동으로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2.3. 영창리

- 본 동(本洞) : 이 마을은 보통 영창이라고 불려지며, 합천천을 사이에 두고 합천리(읍 소재지)와 바로 인접해 있다. 마을 창건 연대는 1600년대 말쯤으로 추정되며, 당초에는 마을 뒷골짜기 “생골”이라는 곳에 아주 오래 된 촌락이 있었는데, 마을 위치가 너무 높아 주민 생활이 불편하다 보니 자연 쇠퇴하고 이곳 본동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영창”이란 마을 이름은 조선조 말엽에 마을앞 도로변에 정부 양곡 창고가 있었는데, 여기에 기인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마을에는 조선조 말 한학자인 회당(光山金銖)선생이 제자를 가르치던 창계서당(滄溪書堂)이 있다.
- 의원동(宜院洞) : 이 마을은 본동에서 서북 방향에 접하고 있으며, 일부지역은 지대가 낮아 여름철이면 가끔 홍수 피해를 입기도 한다. 마을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읍 소재지와 같이 가장 오래된 마을중의 하나로 조선시대에는 옥산과 함께 상삼리면의 행정 중심지였으며, 합천향교(陜川鄕校)가 있던 곳이다. 이곳에 있던 향교는 1881년에 야로면 구정리로 이전한 후 현재까지 그곳에 있다
- 신소양(新昭陽) : 상·하동 2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상동(上洞, 윗마을) : 상동마을은 마을 창건 연대가 100여년 밖에 안되어 “새마” 또는 “신기”라고도 부른다. 당초 합천이씨 몇 가구가 살았는데, 이들은 마을 뒤 산 넘어 생골이라는 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을에는 광산김씨 재실인 광암재와 합천이씨 재실인 강양재 및 망덕재가 있고, 마을 뒤 골짜기에는 수질이 좋은 약수터가 있어 많은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 하동(下洞, 아랫마을) : 예전에는 “구소양” 또는 “소양”으로 불리다가 한 때 “양정”이라고도 불렸다. 마을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말경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꽤 오래된 마을이다. 조선조 말 한 때는 역(驛)이 있었으나, 이곳에 있던 역을 금양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광산김씨 재실인 육모재가 있고, 합천군 축협 양돈센터와 한전변전소가 있다.

2.4. 금양리

- 금양마을은 본동(本洞) 하나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읍 소재지에서 북쪽(대구방향)으로 약 4㎞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국도 24호선과 33호선이 분기하는 삼거리가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마을이 창건된 것은 약 290여년 전 조선 중엽으로 당시 인근마을(현 신소양 下同)에 있던 역(驛)이 이곳으로 이전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일부 주민은 마을 앞 서남쪽 뱀골(일명 당상백이)에 살던 사람들이 교통이 편리하고 양지 바른 이곳으로 이주하여 합류하였다고 한다.
- 신소양(新昭陽) : 사동마을은 금양삼거리에서 국도 24호선을 따라 거창 방향으로 조금 가면 도로변에 상,중,하사동 3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 상사동(上巳洞) : “웃배암골”이라고도 하며, 관내 자연 마을 중 가장 위쪽(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작은 개울을 경계로 용계리 법정과 접하고 있으며, 이곳은 원래 옹기굴이 있던 곳으로 처음에는 “점촌”이라고 불렸는데 120여년전 삼가 덕정에 거주하던 진주 강씨들이 들어와 정착하면서“강촌”으로 부르기도 했다. 마을 앞 개울가에는 전에 물레방앗간이 있어 인근 지역의 곡식을 찧었다고 한다.
- 중사동(中巳洞) : 마을 창건 연대가 약 250여년 전 쯤으로 추정되며 , 관낸 자연마을 중 가장 오래된 마을이다. 마을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합천이씨와 파평윤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마을에는 도 지정문화재 자료 제 127호인 주자영정을 모시는 “자양강당”이 있다.
- 하사동(下巳洞) : 금양(金陽)에서 가장 가까운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통칭“아래배암골”로 불린다. 마을이 창건 된 것은 약 200여년전 쯤, 금양마을 앞 뱀골에 살던 합천이씨 29세손인 이상필(李相弼)씨 형제가 처음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3개 마을 모두를 사동(배암골)으로 부르는 것도 금양 뱀골에서 이주하면서 그대로 따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근대 문학가였던 이주홍(李周洪)씨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2.5. 용계리

- 상용계(上龍溪) : 만대산 바로 밑에 위치하고 있다. 당초에는 진주강씨 몇 집이 살았으나 마을형태를 갖춘 것은 조선 선조때 합천이씨 수가구가 임란을 피해 이곳에 이주해 오면서였다고 한다. 그 후 150여년 뒤 동래정씨들이 들어와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함께 살고 있다.
- 하용계(下龍溪) : 법정과 상용계 마을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약 350여년 전 인동장씨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그 후손들이 한 가구도 살고 있지 않으며 밀양박씨와 동래정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법정 : 금양삼거리에서 국도 24호선을 따라 거창방면으로 약 4㎞정도 떨어져 있으며 단일 자연마을이 행정리로 되어있다. 이곳에 마을이 창건된 것은 약400여년 전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중엽에 마을 앞을 지나던 어느 노승이 귓속 혼잣말로 「마을위치는 좋으나 앞이 너무 훤히 트여 재앙이 잦다.」고 함에 따라 온 동민이 나와 마을 앞을 가리기 위해 냇가에 많은 정자나무를 심어 숲을 무성하게 가꾸었다고 한다. 지금 마을앞에 있는 두 그루의 정자나무도 그때 심었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상사동 마을과 경계지점에는 조산(돌무덤)이 있는데 수년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매년 정월 보름에 온 동민이 모여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2.6. 내곡리

- 내곡 : 내곡마을은 만대산 서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합천읍 관내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이 창건된 것은 약 600여년전인 고려 말엽 합천이씨 10세손인 원경(李元慶)공이 처음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며 지금까지 거의 합천이씨 단일 성씨로 살아왔다. 예전에는 상곡 또는 상상곡이라고 하였다. 마을에는 도지정문화재 자료 제 128호인 청금정(淸襟亭)과 충현사(忠賢)가 있으며 조선시대 팔정여(八旌閭)를 하사받아 소사 들목에 모시고 있다.- 소사(本洞) : 도로변 들목에서 보면 바로 우측 양지쪽에 있는 마을로 “소사촌”이라고도 한다. 마을 창건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내·외곡마을과 거의 같은 연대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본 마을 입구 교량 옆에는 수백년 된 정자나무 한 그루가 있고 그 옆에는 조산(돌무덤)이 있는데 이곳은 매년 동짓달 초이튿날에 마을 주민들이 모두 모여 당산제를 지내는 곳이다.
들목 : 바로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외곡 주민들이 출입하는 길목으로 주막형식의 취락지가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태종 때부터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두상면 소재지로써 제법 많은 주민이 살았던 곳이다

2.7. 외곡리

- 외곡 : 소사 들목에서 국도를 따라 조금만 가면 ‘마령재’가 시작되는데 왼편 아래쪽 양지에 있는 마을이 외곡이다. 마을이 창건된 것은 약 550여년 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 임란을 전후하여 성산이씨들이 많이 들어와 현재까지 대성으로 살고 있다. 조선말엽에는 두상면 상두리에 속한 지역으로 이곳을 자곡(자지리)으로 불렀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당시 이 마을에 중국 선비들의 왕래가 있었는데 이들이 와서 보고 앞뒤산이 황폐하고 주변바위들이 검붉은 색깔이라 하여 자곡으로 불렀다고 하며 근래까지도 “바깥자지리”라 불렸다. 지명이 외곡으로 불린 것은 일제하인 1914년 지방행정구역 조정 이후 부터였다. 마을앞에 있는 자산국민학교에는 용계, 내곡, 외곡의 아동들이 다녔는데 1992년 폐교되었다. 예전에는 상곡 또는 운곡이라고도 부른 적이 있다.- 신촌(新村) : 신촌(新村)마을은 계림의 보림동마을과 인접하고 있으며 골짜기가 하도 협소하여 ‘홈내미’란 속명도 있다. 마을이 창건된 것은 약 260여년전인 조선 영조때 산청군 단성에 거주하던 김녕김씨 18세손 김덕항(金德恒)공이 진사에 등과하여 성균관에 유학 중 당시 어지러운 정국(政局)을 한탄하며 이곳으로 와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1980년 여름에는 집중호우로 산사태가 발생하여 가옥 3동이 전파(全波)되고 주민4명이 사망하는 재난을 당하기도 하였다.
- 평촌(坪村) : 평촌마을은 주변이 대체로 넓은 들로 형성되어 “들마”라고도 불리운다. 이곳에 마을이 창건된 것은 1760년경 성산이씨 27세손 광춘(光春)공이 넓고 비옥한 토지를 찾아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하며 지금도 마을 주민 대부분이 그의 후손들이다. 또한 밀양박씨들도 가구수는 얼마되지 않지만 거의 같은 시기부터 거주한 것으로 보여진다

2.8. 장계리

- 본동(本洞) : 약 450여년전 김해김씨 64세손인 우상(宇相)공이 일가 몇 집과 이주해와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 앞에는 멀리 인덕산에서 합천으로 흐르는 긴 내(川)가 있어 마을 이름을 장계라고 불렀다고 한다. 마을 창건자인 우상(宇相)공의 부인 성주 도(都)씨는 재주가 능통하여 조선 말엽 임란때 마을어귀를 안개로 덮어 마을 앞을 지나는 왜적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했다는 전설이 있다.
- 내기동(內基洞) : “안터”라고도 부르며 앞 430여년 전 합천이씨 15세손인 계손(繼孫)공이 내곡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처음 정착한 곳은 현재 마을 약간 위 “웃터”란 곳이였는데 약 100년후 학교 옆 도로변인 “대문밖”이라는 곳으로 이주하였다가 수년 뒤 현재의 위치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뒷산에는 아주 오래 된 절터가 있는데 이곳에 “장계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앞에 있는 장인초등학교는 1993년 폐교되었다.
- 육정 : 마을 창건 연대가 약 500여년 전으로 가장 오래 된 마을 중 하나이다. 처음에는 합천이씨와 달성서씨 몇 가구가 지금 마을 입구인 속칭 “개밥골”하부에 터전을 이루었으나 약 70여년 전 풍수지리설에 의해 현재의 마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마을 이름을 육정으로 부른 것은 당시 마을 주변에 여섯그루의 큰 정자나무가 있어 육정으로 불렀다고 하며 그 중 한그루는 지금도 마을 어귀에 남아있다- 백암(白岩) : 남암리 3개 마을 중 가장 큰 마을로 보통 “흰바우”로 불리며 마을이 창건 된 것은 약 550여년전 양산이씨들이 정착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 뒷산과 주변에 흰바위가 많아 마을 지명을 백암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 남옥(南玉) : 일명 “나무골”로도 불리며 약 450여년 전 함양 오씨들이 집단으로 거주하였으나 160여년 전 유행성 전염병인 “호열자”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마을이 피폐되어 남은 사람은 읍소재지와 타지로 이사를 하였고 그 후 수년 뒤 합천이씨들과 의령 운무실에 거주하던 칠원 윤씨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넘실 : 3개 자연 마을 중 가장 역사가 짧은 마을이다. 1925년경 외곡리 신평 마을에 살던 광주인 노수용(盧秀龍)씨가 처음 단독으로 이주하였고 그 후 십수년 뒤 몇 가구가 더 들어오면서 마을 형태로 이루게 되었다

2.9. 인곡리

- 인곡(本洞) : 약 400여년 전 조선말 임란 때 용주 허우산에서 난을 피하던 창원황씨8세손인 하중(夏中)공이 우산재를 넘어 이곳으로 와서 우거진 숲과 가시덤불을 쳐내고 움막으로 거주를 시작하였다고 하며 얼마 뒤 서산정씨 14세손인 소남(紹南)공과 달성서씨 12세손인 성옥(省玉)공이 들어와 마을 형태를 이루었다고 하며 지금도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 영하동(嶺下洞) : 영하동은 본동 입구에서 서북쪽 약 2.7㎞ 떨어진 인덕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두리태 또는 재밑터라고도 부른다. 150여년 전 밀양손씨 40세손인 희우(希雨)공이 처음 이주하여 살았다고 한다. 이렇게 높은 지대에 정착하게 된 것은 당시 합천지역에서 거창이나 함양을 갈 때 지름길로서 많은 길손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곳이였다. 한때는 큰주막, 작은주막 등 주점이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갓골 : 관동 또는 본동으로도 불리워지며 마을 뒤에는 광덕산이 있다. 마을이 창건 된 것은 약 460여년 전 칠원 윤씨들이 처음 정착하였고 그 뒤 의성김씨 17세손인 김시채공이 일가를 데리고 이주하면서 제법 큰 마을을 이루었다. 조선 말엽에는 인곡리 전체를 두상면 두리터 또는 두릉으로 불렀으며 마을 앞 도로변에는 당시 곡내 주민들이 이용하는 두릉장터가 있었다고 한다.
- 샛담 : “새터”또는 “신촌”이라고도 부르며 1770년경 갓골에 거주하던 진주강씨 23세손인 응주(應周)공이 풍수지리설에 능하여 지금의 마을 위치가 자손이 번창하고 부귀영화를 누릴 터라하여 처음 이주하였으며 그 후손들이 단일성씨로 살고 있다.
- 백자동 : “잣마무골”이라고도 하며 개울을 사이로 곡내에서 유일하게 서편을 바라보고 있다. 마을이 창건 된 것은 약 350여년 전 조선 인조 때 서산 정씨들이 처음 들어와 살게 되었으며 지금도 그 후손들이 대성으로 살고 있다.

3. 지역 특징

읍소재지는 합천리이다. 합천읍은 합천군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읍소재지를 낙동강 지류인 황강이 감싸흐르고, 관내 주요 수계는 합천천과 금양천을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모든 행정기관이 합천읍에 집중해 있으며, 동쪽은 율곡면, 남쪽은 대양면과 용주면, 서쪽은 용주면과 봉산면, 북쪽은 묘산면과 경상북도 쌍림면이 각각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도로 교통에 있어 읍소재지를 통과하고 있는 국도 제24호선과 제33호선이 전국 주요도로를 연결하는 주교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생활권이 진주와 대구로 분산되어 있다. 왜냐하면 합천읍은 대구광역시진주시의 중간 지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합천읍에서는 대구로 가는 것이나 진주로 가는 것이나 소요 시간이 1시간 정도로 비슷하다. 그리고 합천읍은 합천군에서 유일하게 PC방, 편의점, 황강 등 놀 수 있는 곳이 많아 젊은 사람들이 비교적 많은 곳이다.

군청, 경찰서, 소방서가 있다.

합천리 황강가에 대야성 전투로 유명한 합천대야성이 있고 인근에 그 분의 호를 딴 일해공원이 있다.

4. 교통

4.1. 도로교통

33번 국도1034번 지방도가 지나간다. 2028년에 남부내륙철도가 지나갈 예정이다.

4.2. 버스교통

합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각 면지역과 거창 또는 의령군 신반으로 가는 서흥여객 농어촌버스[2]와 합천에서 묘산, 야로, 가야를 거쳐 해인사로 가는 경전고속 농어촌버스(808번)가 운행중이다. 이외에도 서울과 대구, 진주, 부산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있다.

5. 교육

초등학교 - 합천초등학교 (공립), 남정초등학교 (공립)
중학교 - 합천중학교 (공립), 합천여자중학교 (사립)
고등학교 - 합천고등학교 (공립), 합천여자고등학교 (사립)

5.1. 교육환경

타 시군과 달리 교육환경은 좋지 않지만 학교규모는 합천에서 큰 편에 속한다.

6. 출신 인물


[1] 2023년 6월 주민등록인구[2] 야로면, 가야면은 묘산-야로-가야 농어촌버스가 1일 1회, 야로-가야 농어촌버스가 1일 3회로 운행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