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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1 09:44:54

한창우(기업인)

한창우
韓昌祐
파일:external/japanese.joins.com/20050609210822-1.jpg
이름 한창우 ([ruby(韓昌祐, ruby=ハン・チャンウ)], Han Chang Woo)[1]
출생 1931년 2월 15일 ([age(1931-02-15)]세)
경상남도 사천군 삼천포읍
(現 경상남도 사천시)
국적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
학력 호세이대학 경제학부
직업 기업인, CEO
가족 아들 한유 외 5명
손녀 한나경
1. 개요2. 생애3. 논란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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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센징이라고 차별하는 일본인들이 나를 이토록 강하게 만들어 주었죠"
대한민국 출신의 일본 기업가. 파칭코 기업 마루한의 오너이자 창업자.

2. 생애

1931년 2월 15일 생 한정수, 양건이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경상남도 사천군(삼천포) 출신으로, 5남매 중 셋째이다. 히노데 소학교에서 줄곧 1등을 하였으나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였을 때, 동네 읍장이 돈을 대준 덕에 1944년 삼천포중학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학교에서 시위 주동자로 몰려 퇴학을 당한다. 학비를 대준 읍장이 좌익이었기에 당시 우익 청년들의 반감을 사게 되어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 이 사실을 알게 된 한창우 씨의 어머니는 아직 어린 아들이지만, 징용으로 끌려가 광복이후 2년뒤인 1947년 일본에서 미장일을 하고 있던 큰 형에게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밀항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영어사전과 쌀 두 되만을 가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석탄 기차에 몸을 싣고 형을 찾아 도쿄로 갔다. 벽돌공을 하는 도중 몇 번이나 결핵으로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지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호세이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하지만 조센징이라 차별하는 분위기에 일자리를 찾을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교토에 있는 매형의 파친코점에서 일을 도왔다. 마침 매형 가게 옆에 더 좋은 파친코 가게가 들어서서 매형이 가게를 처분하려 하자, 그는 매형의 가게를 헐값에 인수하여 자기만의 경영시스템으로 돈을 벌고 사업도 확장하게 된다. 한창우 본인 말로는 젊은 사람이 순진하게도 파친코 기계조작을 안하니 대박이 잘 터진다고 소문이 나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고...

영업이 잘 돼 효고현, 도요오카와 교토 마이즈루 등으로 업장을 확대하고 1967년 일본에서 3번째로 큰 볼링장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1차 오일 쇼크가 터지며 5년만에 60억엔의 부채를 지게 되었다. 극단의 나쁜 생각도 하게 되었지만, 자신을 믿어주는 주위 분들과 가족을 생각하며 다시 사업에 전념한다. 이 때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재기를 다짐했다고 한다. 본업인 파친코로 돌아와 10여년간 고생을 한 끝에 활로를 찾았으나 1976년 장남 '한철'이 미국 여행 도중 강에 빠져 사망하는 시련이 닥쳐왔다.

아들의 죽음은 그를 충격으로 내몰았고 사업도 공백기에 접어들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추스른 그는 1980년 등장한 신형 파친코 기계 '피버'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재기에 성공했다. 이왕 파친코 사업을 할 바엔 일본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각오로 점포 안의 담배연기를 없애는 시설과 손님에게 90도로 인사하는 종업원 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등 기존 업체에서는 상상도 못할 새로운 서비스와 경영기법을 도입하였다. 또한 폭력단체의 개입을 차단하고 세금을 꼬박꼬박 내는 등 파친코업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는데도 힘을 쏟았다.

그 결과 불과 10년 만에 어마어마한 부채를 다 갚고 1995년 도쿄 진출에 성공하였으며, 점포가 일본 전국에 200여 개로 늘어나 1년 매출이 무려 12조원에 이르러 별명 그대로 '파칭코왕' 이 되었다. 이후 파친코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푸드서비스업, 청소용역업, 광고업, 건축업, 보험업, 은행업에 차례로 진출한 마루한은 연간 30조원의 매출을 내는 일본 30대 그룹의 반열에 올라섰다.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사회공헌 활동을 활발히 벌인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곤주호상, 수이호상(제3등 훈장)을 수상했고, 한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한창우나카코 교육문화재단을 만들어 사천 지역 학교에 10여 년간 6억5000만 원의 장학금을 쾌척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기도 하다.

2001년 노인이 되어 일본에 귀화하였으나 한국 한자 거의 그대로 귀화하고, 여권에 한국식 로마자 표기를 그대로 적어넣었다. 과거 일본에는 일본인스럽지 않은 이름이면 귀화를 안 받아주는 법이 있었으나, 한창우가 귀화를 한 2001년에는 이미 해당 법이 개정되어 개명없이 귀화가 가능했다.[2]

3. 논란

장녀가 이혼 후 흑인과 재혼했다는 이유로 대출금 및 이자를 반환하라며 장녀를 고소하였다. #

4. 여담


[1] 귀화 이후에도 한국식 독음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인명 한자 독음에 정해진 규칙이 없으므로 가능한 일이다.[2] 비슷하게 귀화한 재일교포 사업가 손정의의 경우, 1990년에 손씨 성을 유지한 채로 귀화하기를 원했으나 그 당시에는 법이 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국에서 손씨는 일본인에게 어울리는 성이 아니라며 거부하였다. 이때 손정의는 일본의 부부동성 제도를 이용하여 일본인인 부인의 성을 손씨로 바꾸는 꼼수를 써서 손씨 성을 유지한 채로 귀화할 수 있었다. 당시에 일본인끼리의 결혼에서는 부인이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것이 법적으로 강제되었으나 외국인-일본인 간의 결혼은 그렇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