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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1-09 11:12:44

한전종

파일:한전종.png
1932년 5월 13일, 촬영된 사진

韓琠鍾
1907년 5월 28일 ~ ?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2. 생애

1932년 작성된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따르면 1907년 5월 28일, 함경남도 홍원군 하원천사[1] 송흥리 89번지(現 신흥군 하원천리)에서 태어났다. 상경한 뒤에는 경기도 경성부 적선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적선동) 770번지에 거주했다.

1927년 4월 수원고등농림학교(現 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임학과입학했다. 이후 2학년 재학 중이던 1928년, 도쿄 유학생들이 조직한 조선농우연맹 소속의 도쿄제국대학 농학과 김태석(金泰錫), 박춘일(朴春日) 등과 함께 여름방학을 맞아 강연대를 조직하고 조선 각지에서 일제의 압박 정치를 배척하고 조선독립을 주창하는 강연을 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강연 금지 처분을 받았고, 곧 체포되어 학교 당국으로부터 무기정학 처분을 받아 낙향했다. 이후 고향에서 발생한 홍수 때문에 일가가 중화민국으로 이주하였다. 한전종은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연길현(延吉縣)[2]에서 동흥중학, 대성중학 교사로 일하다가 중외일보 용정지국을 경영했으며, 함경남도로 돌아가 신흥군 성야광업의 서기로 일하기도 하였다. 1929년부터 공산주의 서적을 읽으면서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였다. 이후 조선공산당재건국내공작위원회에 참여했다가 검거를 피해서 다시 간도로 도피했다.

1931년 5월, 코민테른 제15차 회의의 지령에 따라 하바롭스크의 극동국이 만주로 10여명의 한인 공산주의자를 파견하였는데, 이에 따라 한전종도 1931년 10월, 중국공산당 동만주특별위원회 간부로 있던 주건(朱健)에게 국내공작에 대한 교육을 받은 후 1931년 11월,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경기도 경성부와 함경남도 함주군 흥남읍,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각각 공산세포조직을 심었다. 특히 경성부에는 앞서 1931년 12월 중순 보성고등보통학교를 방문해 조상환(趙相煥)을 동지로 포섭하고 신대성(申大成)을 소개해주어 그를 지도하도록 했고, 12월 말에는 근화여학교 교원 장보라(張保羅)를 만나 정남이(鄭南伊)라는 인물을 소개받았고, 이어 정남이를 통해 이충후(李忠厚)·김경훈(金庚訓) 등을 소개받았다. 한전종은 이 세 사람을 지도해 근화여학교에 독서회를 조직하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신대성에게 지도를 위임했다.

그리고 1932년 1월 신대성·정종석(鄭宗奭) 등과 만나 '경성가두세포(京城街頭細胞) 지도부'를 조직한 뒤 각각 서기부와 조직부, 정치부로 부서를 나눠 전담하기로 하고, 대중단체로는 노동부와 농민부, 반제부 및 적색구원부를 설치했다. 이때 한전종은 서기부 책임 및 노동부 책임을 맡았고, 이두옥(李斗玉)을 만나 경성가두세포에 포섭했다. 2월 초에는 보성고등보통학교에 반제반(反帝班)[3]조직해 조상환을 반제반 책임자 겸 정치부 책임에 선임했다.

한편, 중국공산당 동만주특별위원회 조선국내공작위원회 파견원으로서 함흥부 중심의 이북 5도를 담당하던 김일수(金一洙)가 간도에서 체포되자, 당시 명천군에서 활동하던 박동화(朴東和)는 동만주특별위원회와 연락 및 운동전선의 통일을 위해 한전종을 초청했다. 한전종은 곧 함흥으로 가서 박동화의 소개로 최운봉(崔雲峯)과 만나 함흥 지역의 운동 정세를 토의했다. 이들은 함흥에서 국제공산당으로부터 파견된 이모씨의 그룹과 접촉하려 했으나 실패해 명천군으로 이동했다. 명천군에서 한전종과 박동화는 김창일(金昌鎰)[4]을 방문해 운동 정세를 토의하고, 김창일의 집을 본거지로 농민 중심의 명천군 가두세포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김국범(金國範)·기석순(奇錫順)·김초길(金初吉)·임태윤(任泰允)·태유덕(太有德)·안석종(安石鍾)을 포섭하고 조직을 정비해 조직부 책임에 태유덕, 선전부 책임에 김창일을 선임하기로 내정했다. 또한 당시 변호사로 활동하던 허헌의 조카 허전(許銓)을 포섭하려고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공장 방면에서도 활동할 필요성을 느껴 태남용(太南龍)[5]을 포섭하기도 했다.

그 뒤 한전종은 동만주특별위원회와 연락이 두절되자, 사회주의 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권총 3정과 탄약을 입수해 숨겨두었다. 그러나 곧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총포화약류취체령 시행규칙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고, 1932년 4월 8일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당시 본 사건의 관계자는 78명으로, 이 중 체포되지 않는 13명을 제외하면 32명이 기소되고 33명이 기소유예불기소처분을 받았다. 4월 18일에는 신대성[6]·정종석[7]·이두옥(李斗玉)[8]·김정구(金鼎九)[9]·이창주(李昌周)[10]·태남용·장보라·조상환·유동태(柳東泰)[11]·성낙응(成樂膺)[12]·이춘경(李春景)·김국범·김초길·임태윤·김성자(金聖子)[13]·강윤(姜鈗)[14]·홍순길(洪淳吉)[15]·유상훈(劉相勳)[16]·이남래(李南來)[17] 등 19명과 함께 경성지방법원 예심부에 회부되었고, 1933년 8월 15일 예심이 종결되어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 9월 29일 검사 측으로부터 징역 5년형을 구형받았고, 10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위 혐의들에 대해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이 소위 중국공산당 동만주특별위원회 조선국내공작위원회 사건이다.

8.15 광복 후 북한으로 돌아갔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후 내각 사무국 부국장을 지냈다. 초기엔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으나 1951~1953년, 허가이박헌영이 숙청되면서 생긴 공백을 메우면서 상층부로 진입하였다. 1953년 10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농민부 부부장을 지낸 것으로 파악된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56년 4월, 평안북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57년 8월,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9월,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김일의 뒤를 이어 농업상에 선출되었다. 1958년 9월 전원회의 이후 결정관철을 위하여 강원도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1959년 6월 전원회의에서 보수주의자로 비판을 받고 철직이 결정, 1959년 7월 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농업상에서 해임되어 김만금에게 자리를 물려주었고 이후 농업성 당위원회 총회가 열려 농업성 부상 리용석과 함께 농정에 관한 당 지시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반당 종파분자로 비판받고 숙청되었다. 이후 비참하게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참고문헌


[1]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하원천면으로 개칭되면서 신흥군에 편입되었다.[2]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3] 반제동맹 보성고보반(反帝同盟 普成高普班)이라고도 한다.[4] 동아일보에는 김창익(金昌益)으로 기재되어 있다.[5] 동아일보에는 태남길(太南吉)로 기재되어 있다.[6] 경성가두세포 조직부 책임 및 반제부 책임, 적색구원부 책임을 맡았다.[7] 경성가두세포 정치부 책임 및 농민부 책임을 맡았다.[8] 경성가두세포 조직원[9] 보성전문학교 중심으로 활동. 신대성, 이창주와 여러 차례 만남[10] 김정구·신대성과 여러 차례 만남[11] 보성고등보통학교 반제반 조직부 책임[12] 동아일보에는 成樂으로 기재되어 있다. 보성고등보통학교 반제반 정치부원[13] 이명 김오목례(金五木禮).[14] 신흥서점(新興書店)에서 점원으로 근무하다가 1931년 12월 말에 신대성에게 포섭된 뒤 동광당서점(東光堂書店) 이남래(李南來)를 신대성에게 소개해주고 세 사람이서 ML연구독서회를 조직함[15] 동아일보에는 洪吉로 기재되어 있다. 김정구에게 은신처 및 통신 연락처 제공. 김정구의 권유로 연희전문학교에서 동지 포섭할 계획 있었음[16] 동아일보에는 相勳로 기재되어 있다.[17] 1931년 12월 말에 신흥서점 점원 강윤으로부터 신대성을 소개받고 곧 세 사람이서 ML연구독서회를 조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