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 문서: 대한민국/정당/목록,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1. 개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이자, 대한민국 초기의 야당이다. 韓國獨立黨. 줄여서 한독당이라고도 한다.한국 항일운동사에는 '한국독립당'이라는 당이 두 개[1] 있는데, 공교롭게도 둘 다 1930년도에 창당되어 혼동을 가중시킨다. 둘 중 하나는 지청천이 만주에서 결성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이었던 당이다.
2. 한국독립당(1930, 만주)
1920년대 초 만주의 무장 독립운동 세력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로 나뉘어 있었다. 20년대 중후반 민족유일당 운동의 영향으로 만주 지역에서도 3부 통합 운동이 전개되는데, 통합의 방법에 대한 의견차로 인해 하나의 단체로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북만주 지역의 혁신의회(1928)와 남만주 지역의 국민부(1929) 둘로 나뉘게 된다.혁신의회를 주도하는 인물은 김좌진이었다. 1929년에 혁신의회는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로 개편되었다가, 1930년 1월 김좌진이 암살당한 이후 지청천이 이끌어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으로 개편하고 당군으로 한국독립군을 창설했다.
1933년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주 활동 영역이 만주에서 중국 본토 지역으로 이동하여, 한중연합군을 구성하여 전과를 올리나 중국공산당의 압력으로 연합군은 해산된다.
1934년 한국혁명당과 합당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당한다. 신한독립당은 1935년 5당 합당에 참여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당하나, 당내 노선 갈등으로 2개월만에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계열이 탈당할 때 신한독립당 계열도 일부 탈당하였고, 이후 1937년에는 지청천 자신이 탈당하여 조선혁명당을 창당한다. 1937년 이후 민족혁명당은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된다.
조선혁명당은 이후 1940년에 김구의 한국국민당 및 조소앙의 한국독립당과 3당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한다. 이로써 묘하게도, 만주에서 탄생한 한국독립당의 당맥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창당한 한국독립당 계열의 두 정당들과 합류하여 또다른 한국독립당을 이루는 것으로 이어진 셈이다.
3. 한국독립당(1930, 임시정부)
1930년 임시정부 산하의 정당으로 창당됐다. 자료에 따라 김구 중심으로 서술한 자료에서는 1930년에 김구가 한국독립당 창당을 주도했다고 적고, 그렇지 않은 다른 자료에서는 조소앙 중심으로 한국독립당이 창당됐다고 적고 있어 두 정당이 별개의 정당이 아닌가 혼동할 수 있는데, 이들 모두가 임시정부의 여당 격으로 창당된 하나의 정당을 서술하는 자료들이다. 이동녕, 김구, 조소앙, 이시영 등이 한국독립당의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그러나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안창호의 체포로 당의 지도력과 구심력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여 항주파(조소앙), 가흥파(김구), 상해파 등이 분열하게 되고, 이 때 이후로 한국독립당은 조소앙이 주도하게 된다. 또한 1935년 민족혁명당 합당에 반대하여 김구는 따로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여 갈라져 나간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1930년 임시정부에서 창당한 한국독립당의 주도 인물을 조소앙으로 이해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1930년대 민족유일당 운동의 영향으로 1935년 5당 합당에 참여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당하나, 당내 당권 경쟁과 노선 갈등으로 2개월 만에 조소앙 등이 탈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재건한다. 이후 1937년 지청천의 조선혁명당도 다시 분당해 나옴에 따라 민족혁명당은 김원봉 주도의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편된다.
민족혁명당에서 갈라져 나와 한국독립당을 창당할 당시 당원이 10명에 불과하고 재정적으로도 궁핍하여, 김구의 한국국민당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뚜렷한 노선과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 3당 합당에서 당당한 민족주의 진영의 한 축으로서 자리하게 된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다시금 좌우를 망라한 민족유일당을 건설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지만 무산된다. 이후 민족주의 우파 진영만이라도 통합하자는 취지로, 김구의 한국국민당 및 지청천의 조선혁명당과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한다. 이 때 신당 창당을 위한 '3당 해체 선언'을 하였으므로, 형식 상으로만 말하자면 이 해에 조소앙의 한국독립당은 해체된 셈이다.
4. 한국독립당(1940)
1940년 5월 충칭에서 한국국민당 및 조선혁명당과 3당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한다. 1940년에 창당된 신생 한국독립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김구의 한국국민당 계열이 주도하였으나 이름은 조소앙의 '한국독립당'을 계승하였다.당의 군대로 1939년 한국독립당 당군을 결성했고, 이는 한국 광복군의 전신이 되었다. 1931년 무렵 활발히 활동한 '한국독립군'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이 군대는 지청천 등의 주도로 만주에서 결성된 또다른 한국독립당의 당군이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한국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자 1945년 11월 국내에 당으로 공식 등록하고 활동했다. 반탁 운동으로 미군정과 갈등을 겪으면서 활로를 찾기 위해 한국민주당을 비롯해 안재홍이 이끄는 국민당, 이갑성이 이끄는 신한민족당 등에 통합을 제안했다. 그러나 김구와 한국독립당이 내건 조건은 모욕적인 것이었다. 통합 정당의 강령은 임시정부의 삼균주의를 계승하고 총재와 당명 역시 한국독립당이 정하도록 했다. 한민당의 저항이 특히 컸다.[2] 결국 우익정당통합운동은 한민당이 불참한 상태에서 한독당과 국민당, 신한민족당이 통합되며 끝났다. 우익 최대 정파인 한민당이 빠진 통합의 효과는 한독당이 당초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다.
이후 김구가 남북 협상에 참여하면서 우익 측 지지자가 이탈하고, 총선에도 불참하면서 몰락했다. 단 김선 등 일부 당원들은 무소속으로 5.10 단독선거에 출마했다. 그 후 지청천, 신익희는 대한국민당으로, 이시영은 자유당을 거쳐 민주국민당으로, 이범석은 자유당으로 가는 등 뿔뿔이 흩어졌다.
김구 암살 이후로는... 망했어요. 당연히 임시 정부를 정통 계승한 한국독립당은 임시 정부 주석 김구의 힘으로 당을 유지하고 있었고, 김구의 지지 세력이 이런저런 이유로 다른 우익 계열에게 흡수되면서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구가 암살당했으니 와해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고, 이후 김구 암살 이후로는 사실상 정당으로서의 생명을 잃어 현대사에서 거의 잊혔다. 1949년 6월 전향자들을 교화시키려는 목적으로 결성된 관제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결성 되었을 때, 한독당계열 인사들도 반강제적으로 가입되곤 했었는데 대표적인 인사가 문학가 정지용 같은 경우가 있다.(...)
5. 역대 선거 결과
-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 1/200 0.15%
- 1948년 제1대 대통령 선거
- 대통령 김구 13/196 낙선
- 부통령 김구 62/197 낙선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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