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20:00:57

하용조

제1대 온누리교회 담임목사
제3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하용조
河用祚 | Ha Yong-jo[1]
파일:하용조.jpg
<colbgcolor=#00367a><colcolor=#fff>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출생 1946년 10월 14일[2]
평안남도 강서군
(現 남포시 강서구역)
사망 2011년 8월 2일 (향년 64세)[3]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세브란스병원
본관 진주 하씨 (晉州 河氏)
교단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학력 대광고등학교 (졸업)
건국대학교 (축산가공학과 / 학사)[4]
장로회신학대학교 (목회학 / 석사)
영국 런던 Bible College 수료
영국 WEC 국제선교센터 수료
영국 런던 Institute 수료
바이올라 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트리니티 대학교 명예 신학 박사
명지대학교 명예 철학 박사
숭실대학교 명예 기독교학 박사
가족 부친 하대학, 모친 김선일
배우자 이형기
자녀 아들 하성석, 딸 하성지
경력 제1대 온누리교회 담임목사
두란노서원 초대 원장
제1대 CGNTV 이사장
한동대학교 이사
제3대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5]
제9대 전주대학교 이사장[6]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1. 개요2. 생애3. 온누리교회4.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목사. 한국교회 복음주의 4인방이라 불리우는 인물들(옥한흠, 하용조, 홍정길, 이동원) 중 한명이다.#

2. 생애

1946년 평안북도 진남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기독교 집안으로 3대째 믿는 하대학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태신앙이여서 어린 시절부터 부모가 예배와 새벽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5살이던 그를 데리고 그의 가족은 경기도 이천시를 거쳐 전라남도 목포시까지 피난을 떠났다. 목포에 정착해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서울로 올라와 대광고건국대 축산가공학과('64학번, 現 축산식품생명공학과)에 다닌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 가입해 신앙 생활과 대학생 전도를 하며 지냈다.

1966년 의정부시에서 CCC 여름수련학교 도중 폐결핵을 발견한다.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대에 가야 했는데 폐결핵이 더 심해졌고 젊은 나이에도 당뇨, 고혈압 등으로 신장이 망가져 1주일에 투석을 3번하는 몸이 된다. 신앙으로 하루하루를 이겨낸 그는 군역 포함 총 7년을 대학에서 학생 전도를 하며 보낸다.[7]

1972년 3월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전공한 그는 3년만에 졸업해 마포교회의 전도사를 지냈다. 마포교회 장로였던 당시 TBC 김경태 PD와 평생 연을 쌓게 된다.

1976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목포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김경태 장로의 도움으로 가수 윤복희, 코미디언 구봉서 등과 함께 평창동에 연예인교회를 개척한다. 부흥에 대성공하고 화려한 생활에 지친 연예인들이 그의 교회를 찾게 됐다.

구봉서가 개신교에 귀의하게 된 계기도 하용조 때문인데, 일화가 제법 재미있다. 구봉서가 영화 촬영 중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크게 다쳐서[8] 집에서 정양하고 있었는데, 구봉서의 아내는 하용조와 다른 신도들과 함께 집에서 가정예배를 보았다. 구봉서는 처음엔 시끄럽다며 매우 싫어했지만 점차 예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어느 날 하용조가 성경의 세례 요한 이야기를 하면서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석청으로 연명하였습니다. 굶주린 삶을 살았지요." 라고 하자 듣고만 있던 구봉서는 일갈하길 "흥! 메뚜기에 석청? 고단백질에 로열젤리만 자셨구만!" . 이 말을 들은 하용조와 신도들은 포복절도했고, 이 일을 계기로 구봉서도 마음을 풀고 개신교에 귀의했단다.

1980년 두란노 서원도 만들고 교회도 완공될 무렵 지병인 간경화가 재발해 목회를 내려놓고 치료와 휴양 겸 영국으로 떠났다. 영국에서 복음주의의 대부 존 스토트(John Robert Walmsley Stott) 신부를 멘토로 하고 그의 신앙관을 배웠다.

1984년 귀국해 이듬해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에 온누리교회를 설립했다.

1994년 '2010년까지 2,000명의 선교사와 10,000명의 평신도 사역자를 세운다'는 '2천/1만' 비전을 선포했다.

2003년에는 '사도행전적 교회를 재생산해 온누리에 복음을 전한다'는 'Acts29'비전을 발표했다.

2011년 8월 1일 새벽[9]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져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 후 8월 2일 아침 8시 40분[10]에 결국 소천했다.

3. 온누리교회

온누리교회는 후임 위임목사를 공동의회와 장로 중 초빙위원회에서 결정하는 모범을 보였다. 온누리교회 부목사 중에서 그의 사망 당시 양재 온누리교회를 담당했던 이재훈 목사를 세워 위장세습 문제도 없고, 본인 측 입김도 최소화되었다.

4. 여담


[1] 트위터 프로필 기준.[2] 음력 9월 20일[3] 사인은 뇌출혈이며, 사망 시간은 오전 8시 40분이다.[4] 現 축산식품생명공학과.[5] 2005년~2011년[6] 1999년~2011년[7] 이로 인해 훗날 의사들로부터 받은 별명이 있는데, 바로 오뚝이 목사님이다.[8] 복합 골절상을 입어서 다리를 절단하는 것을 고려할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다.[9] 그 전날인 7월 31일에도 별 탈 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강단에 서서 설교를 했지만[12] 다음날 갑자기 쓰러졌다.[10] 사망하기 28분 전에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회복 중이라는 연합뉴스 측의 기사가 실렸었다. 수술은 잘 되었으나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2~3일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된다고 담당 의사가 말했으나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11] 당시 서빙고, 양재를 비롯한 여러 캠퍼스 교회에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2021년 기준 서빙고는 강단 뒷벽에 십자가가 선으로 그어져 있으며, 양재는 파이프오르간이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