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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 | Philipp Heinrich Scheidemann 필리프 하인리히 샤이데만 |
출생 | 1865년 7월 26일 |
사망 | 1939년 11월 29일 (향년 74세) |
재임기간 | 1919년 2월 13일 ~ 1919년 6월 20일 |
종교 | 개신교 (칼뱅파) |
출신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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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이후 혁명의 대혼란 속에서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총리를 역임한 인물이다.2. 생애
1865년 헤센 지방의 카셀에서 출생했다. 10대에 아버지를 잃고 가족의 생계를 부양하기 위해 인쇄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면서 일찌감치 사회주의에 눈을 뜨고 사민당에 가입했다.[1] 사민당이 빌헬름 2세에 의해 합법화된 이후 고향 카셀지방에서 발행되는 사민당의 기관지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해 1903년 제국의회에 사민당 소속 의원으로 당선된다. 사민당이 원내 제 1당으로 부상한 1912년 총선 이후에는 의회 부의장을 역임하면서 사민당을 창당한 아우구스트 베벨의 후계자로 자리를 확고히 한다.2.1. 독일 제국 시기
이 시기 샤이데만의 정치적 성향은 중도 좌파에 가까웠다. 일례로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의 위기 상황에서 사민당이 독일 제국의 전쟁 수행을 위한 채권 발행에 동의할 지 말 것인지를 놓고 격렬하게 내분[2]을 빚고 있던 상황에서 양측간의 중재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3][4] 이러한 중재가 무위로 돌아가고 사민당이 분당된 상황에서 샤이데만은 당내 우파로 전쟁 수행을 지지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를 선택했고, 1918년에 킬 군항의 반란 이후 독일 제국이 붕괴돼가는 상황에서 설립된 에베르트 내각[5]에 입각한다.빌헬름 2세가 네덜란드로 도망갔지만 아직 황태자 빌헬름 폰 프로이센을 빌헬름 3세로 세울지 혹은 다른 사람[6]을 황제로 세울지, 공화정을 선포할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을 때, 그는 광장에 모인 시민들 앞에서 "쓰레기 같은 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선포됐다, 에베르트가 수상이 되었다"며 멋대로 공화국을 선포한다. 에베르트는 공화국을 선포할지 안 할지는 그가 단독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며 거세게 질책하지만[7] 이미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고, 그대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탄생한다.[8]
2.2. 총리 재임기
이후 1919년 1월 바이마르 공화국을 구성하기 위한 최초의 총선이 치러지고, 샤이데만은 출마하여 당선된다. 같은 해 2월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대통령을 역임중이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샤이데만에게 초대 총리직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고, 여기에 샤이데만이 응하면서 샤이데만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총리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정국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극좌세력은 끊임없이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기 위해 전국에서 폭동과 파업을 일으켰고, 독일 전국의 주요 대도시마다 극좌세력과 정규군, 극우세력 사이의 총격전이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는 판국이었다.[9] 이런 상황에서 라인란트와 바이에른에서는 1870년 독일 통일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분리독립운동까지 펼쳐졌다. 이렇게 휘청휘청한 샤이데만 내각의 숨통을 끊어놓은 것은 파리 강화 회의와 베르사유 조약이었다. 가혹하기 짝이 없는 조약 조항들에 대해 샤이데만 내각은 협상국에게 거세게 반발하면서 어떻게든 독일에게 그나마 유리한 종전 협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1919년 6월 협상국은 독일에게 최후통첩[10]을 날렸고 샤이데만은 조약에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사임한다. 총리직에 오른지 불과 127일만의 일이었다. 후임총리로는 노동부 장관으로 재임하던 구스타프 바우어가 임명됐다.2.3. 여생
총리직에서 사임한 이후에도 샤이데만은 활발히 정치활동을 펼쳤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베르사유 조약 이후 샤이데만은 극우세력들에게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혔고[11] 공공연히 샤이데만에 대한 암살시도가 자행됐다. 실제로 1922년에는 그에 대한 화학테러가 자행되기도 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1933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샤이데만은 망명을 떠나야 했고 스위스, 프랑스, 미국 등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2차대전의 지옥문이 막 열린 1939년 11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세상을 떠난다.
[1] 이 당시에는 아직까지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발의한 사민당 탄압법이 유효했기 때문에 사민당에 가입하는 것은 감옥행까지도 감수해야하는 위험천만한 불법행위였다. 당연히 정당 활동도 정상적인 정당활동이 아니라 지하조직처럼 이루어졌다.[2] 전쟁 수행에 찬성한 대표적인 세력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같은 당내 우파였으며, 반대한 세력은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당내 좌파였다.[3] 샤이데만이 이때 내놓은 중재안이 '채권 발행에는 찬성하되, 종전 후 영토 확장 / 배상금 지불 등에는 단호히 반대하자'였다. 그게 반대한다고 되는 일인지야..[4] 당연히 이 애매한 중재안은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한채 욕만 먹었고(...) 사민당은 분열된다. 이 분열 당시의 앙금으로 후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민당 정부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비롯한 옛 동지들이 극우 자유군단에게 린치를 당해 살해되는 것을 방조라 쓰고 동의라고 읽는다.했고, 덕분에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내내 공산당과 사민당의 관계는 험악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 좌파의 분열 덕에 가장 이득을 본 게 나치(...)[5] 독일의 휴전 제안에 대해 당시 우드로 윌슨을 비롯한 연합군 지도자들이 '민주정부 아니면 독일이랑 대화는 없다'고 강하게 버티니 독일 군부나 귀족들이 사민당에게 거의 강제로 똥 치우라고 만들어준 독일 제국 최후의 내각이다.[6] 대표적으로 독일 제국 구성국들 중 프로이센 다음으로 제일가던 바이에른 왕국의 루트비히 3세가 가장 유력했다.[7] 그는 직전 총리인 막시밀리안 폰 바덴을 섭정으로 지명하는 방법을 원했다.[8] 공화국의 이러한 탄생 사유 때문에 바이마르 공화국은 공화국임에도 두 대통령 모두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는 아이러니가 있다. 나치 집권 이전까지만 해도 독일 군주제 복권 여론은 높았었다.[9] 1919년 3월 베를린에서만 이런 식으로 1,000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5월 뮌헨에서도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10] 5일안에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을 재개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샤이데만 내각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수장으로 하는 독일 군부에게 전쟁이 재개할 경우 버틸 수 있겠냐고 문의했고 독일 군부가 '불가능'이라는 답신을 보내면서 사실상 모든 것이 결정되게 된다.[11] 이 시기 극우세력들이 공화주의자와 사민당 지지자를 깔 때 쓴 말이 '샤이데만 같은 놈들(Scheidemänner, 독일어 männer는 mann의 복수형이다.)'일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