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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4 23:49:34

피터 드러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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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er Drucker
파일:Peter Drucker.jpg
본명 피터 퍼디낸드 드러커
Peter Ferdinand Drucker
출생 1909년 11월 1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망 2005년 11월 11일 (향년 95세)
미국 캘리포니아주 클레이몬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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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작가, 학자, 교수
분야 경제경영학, 사회학
학력 함부르크 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 (국제법, 공법 / 박사)
종교 성공회[1]

1. 개요2. 생애
2.1. 출생기2.2. 청년시절
3. 평가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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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케팅의 목적은 소비자들의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발견하고, 그것을 충족시킬 방법을 마련하여 판매를 필수불가결하게 하는 것.”
"어제까지 유효했던 전제가 갑자기 의미가 없어지고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것이 오늘날 현실이다. 기업경영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경영에 관한 연구가 시작된 이래 학자, 평론가, 그리고 기업가들은 70년이 지난 지금(2000년대)도 여전히 몇 가지 종류의 전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전제는 모두 낡은 것이 되어 버렸으며 더이상 쓸모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21세기 지식경영 中

오스트리아 출생의 미국인 작가, 경영 컨설턴트, 경영학자, 사회학자, 대학 교수.

지식 경영의 패러다임을 연 선구자이자, 30권도 넘는 경영서적을 저술한 성실한 저술가이기도 했다. 마케팅이란 개념의 창시자로, 민영화마케팅에 대한 화두를 던진 것으로 매우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1959년에는 지식 노동자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스스로를 '사회생태학자 (social ecologist)'라고 부르기도 했다. 20세기 기업 경영 담론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서, 말년에는 경영학계의 구루 대접을 받았다.

저술하지 않은 분야가 없는 인물이기도 한데, 한 분야를 소소하게 주당 몇 시간씩 공부해 몇 년 누적하면 해당 분야의 전문가와 말이 통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분야로 관심을 옮겨 또 공부하는 방식이었다고.

2. 생애

2.1. 출생기

190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공무원 출신 아버지와 의사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경제학자이자 공무원으로 아버지의 영감을 받아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경제학자와 의사들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경제경영학과 의학을 입문하였다.

그가 경제경영학에 관심을 둘 수 있는 것도 부친의 영향 때문으로 알려졌는데 부친이 공무원이자 경제경영학자로 활동을 하였던 편이어서 부전자전으로 경제경영학에 전문적인 활동을 하였다. 또한 그의 모친은 의학을 공부하였고 의사를 지망했던 인물로 경제경영학 외에도 의학에도 관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2.2. 청년시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수도 을 떠나 독일의 함부르크에 있는 면제품 수출 회사에 견습생으로 입사하여 장사를 배웠다. 그의 부친은 그가 회사에 들어간 것을 그다지 탐탁해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공무원, 교수, 변호사 그리고 의사들을 배출했기 때문에 그의 부친은 그 역시 그러한 직업을 갖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학교 생활이 지겨웠고 일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부친의 심정을 헤아려 1927년 함부르크 대학교 법과대학에 등록을 했고 법학 공부를 했다.

주말에는 다른 두 견습생과 함께 주로 함부르크 근처의 아름다운 시골길에서 자전거 하이킹을 즐겼다고 한다. 주중의 5일 동안은 함부르크의 유명한 시립 도서관에서 저녁 시간 대부분을 보냈는데, 그 도서관은 그가 근무하는 회사 바로 근처에 있었다. 거기서 그는 독일어와 영어 그리고 프랑스어로 된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오페라를 관람했는데, 그는 견습생이었기 때문에 돈이 별로 없었지만, 다행히 대학생은 오페라를 무료로 관람할 수[2]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베르디의 오페라 팔스타프를 보고 완전히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때 베르디가 쓴 글 "음악가로서 나는 일생동안 완벽을 추구해 왔다. 완벽하게 작곡하려고 애썼지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늘 아쉬움이 남았다. 때문에 나에게는 분명 한 번 더 도전해 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를 읽고, 그 말을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다고 한다. 나중에 세계적인 석학이 된 후 사람들로부터 "당신이 쓴 책 가운데 어느 책을 최고로 꼽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웃으며 "바로 다음에 나올 책이지요."라고 대답했는데, 그렇게 말한 이유도 베르디의 교훈을 상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베르디가 여든 살이라는 나이에도 늘 자신을 피해 달아나는 완벽을 추구하면서 오페라를 작곡했던 그 때 그 심정으로 대답한 것이다.

그 후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최대 신문사에 금융 및 외교 담당 기자로서 첫발을 내디뎠으며, 프랑크푸르트 법과대학의 칼 슈미트 밑에서 헌법으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그러다가 그의 글들이 나치들에 의해 불에 타 없어지는 봉변을 당한 후, 그는 1933년에 영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그곳의 파이낸셜 타임즈에서 기자로 활약하였다. 1937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버몬트의 베닝턴 칼리지에서 철학 및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시에 기업에 경영컨설팅을 제공하는 일을 시작했다. 이때 '경제적 인간의 종말' '법인(Corporation)의 개념' 같은 몇 권의 주요한 책들을 출간하였는데, 그 책들이 그에게 오늘날의 엄청난 명성을 안겨 주었다.

3. 평가

4. 기타


[1] Peter Steinfels, "A Man's Spiritual Journey From Kierkegaard to General Motors", 「뉴욕 타임즈」, 2005.11.19., 2023년 1월 31일 확인[2] 개막 한 시간 전까지 극장 앞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막이 오르기 10분 전까지도 팔리지 않은 제일 값싼 좌석은 대학생에게 무료로 제공되었다.[3] 그러나 그토록 각광받던 잭 웰치의 경영 기법은 이후 GE의 몰락과 함께 빛을 바래게 됐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항목 참조.[4] 물론 이는 경영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갖는 한계이기도 하다.[5] 훗날 드러커는 폴라니 일가를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가장 재능이 풍부한 사람들이고 가장 큰 업적을 올린 사람들이지만 그처럼 큰 실패를 겪은 사람들도 없다"고 회고했다. 폴라니 가문에 대해 나름의 큰 인상을 받았지만, 그 나름은 이상 대신 현실의 길을 고른 것. 드러커는 공산주의자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유방임주의 신봉자는 아니다. 그의 책에는 그쪽에서 질색할 얘기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