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22 08:55:12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루토프스키



파일:Fryderyk_August_Rutowski.jpg

1. 개요2. 일생

1. 개요

작센 선제후국의 육군 총사령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활동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루토프스키는 1702년 6월 19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그는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2세사생아였고 어머니는 오스만 제국 출신의 파티마로, 1686년 부더 전투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여성이었다. 파티마는 마리아 아나로 세례를 받고 드레스덴 궁정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바르샤바로 이동한 뒤 아우구스트 2세의 사생아를 낳았다. 그 후 그녀는 아우구스트 2세의 주선에 따라 요한 게오르크 폰 슈피겔과 결혼했다. 루토프스키는 슈피겔 가문의 영지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리아 아나는 결혼 후에도 아우구스트 2세의 정부로 남아 있었고 1706년 아우구스트 2세의 또다른 사생아인 마리아 아우로라를 낳았다. 그 후 요한 게오르크 폰 슈피겔은 1715년에 사망했고 마리아 아나는 1720년에 사망했다. 이에 아우구스트 2세는 루토프스키와 마리아 아우로라를 거둬들였다. 1723년, 아우구스트 2세는 21살의 루토프스키를 파리로 보냈다. 그는 거기서 자신의 이복 자매 중 한 명인 아나 카롤리나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 안나는 처음에는 자신의 연인이 이복 오빠라는 걸 전혀 몰랐다. 그럴만도 한 것이, 아우구스트 2세는 1706년 바르샤바에서 헨리에타 레너드와 관계를 갖고 1707년 11월 아나 카롤리나를 낳은 뒤 두 사람의 존재를 금방 잊어버렸고, 헨리에타는 파리로 가서 사업가인 프랑수아 드랑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나는 자신의 친아버지가 프랑수아 드랑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안나 카롤리나와 루토프스키가 드레스덴으로 가서 아우구스트 2세를 알현하자, 아우구스트 2세는 비로소 그녀의 존재를 인지하고 1724년 9월 19일 아나 카롤리나를 자신의 딸로 공식 인정하고 오르젤스카 백작 부인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1724년, 아우구스트 2세는 파티마와 낳았던 두 아이를 인정하고 합법화했다. 그 직후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의 권한으로서 루토프스키와 마리아 오로라에게 백작의 칭호를 하사했다. 같은 해 10월 8일, 루토프스키는 아버지로부터 폴란드 최고 훈장인 흰독수리 훈장을 수여받고 작센군 대령에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1725년 2월 뮌헨베네치아를 여행했고 사르데냐 왕국의 수도 토리노에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를 알현해 피에몬테 연대를 지휘하며 알레산드리아에 주둔했다. 그는 그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토리노에 남아 있기 위해 아우구스트 2세에게 프랑스군에 입대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트 2세는 그를 작센군 사령관으로 삼고 싶어했기에 거부하고 드레스덴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결국 1726년 드레스덴으로 돌아온 루토프스키는 근위병 군단장으로 승진했다.

1727년 5월 26일 작센군 소장으로 임명된 루토프스키는 1728년 아버지의 권유에 힘입어 프로이센군에 입대했다. 그는 그곳에서 1년간 보병대 교습을 받은 후 1729년 작센으로 돌아왔고 1730년 작센 보병대 지휘관을 맡았으며 자이틴 여름 숙영지에서 작센군을 프로이센 방식 대로 훈련시켰다. 그러던 1733년 아우구스트 2세가 갑자기 사망했고 그 뒤를 이어 루토프스키의 이복형인 아우구스트 3세가 작센 선제후로 즉위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곧바로 발발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그는 처음에는 러시아 제국군에서 복무했다. 그러다가 1734년 6월 단치히 공략전에 참석한 그는 작센 군단과 함께 라인 강변의 필립스부르크에서 프랑스군과 대치하고 있는 사부아 공자 외젠오스트리아군으로 이동했다. 이후 그는 작센군의 군단들 중 하나를 지휘하며 프랑스군과 여러 차례 맞서 싸웠고 그 과정에서 당시 프로이센의 왕태자였던 프리드리히 대왕과 만나기도 했다.

루토프스키는 1736년 1월 1일 작센 근위대 중장 및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0월 7일엔 작센 장크트-하인리히-오르덴 기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1737년엔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우고 있는 오스트리아군을 지원하기 위해 작센군 8천 명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해 티모크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738년 4월 21일, 작센으로 돌아온 루토프스키는 대장으로 승진했고 1739년 1월 4일 폴란드 포병 장군 알렉산데르 야쿠브 폰 루보미르스키의 딸 프리데리케와 결혼했다. 1740년, 루토프스키는 직임에서 물러나 드레스덴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1년 9월 19일, 루토프스키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바이에른과 작센이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항하여 프로이센 및 프랑스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그 후 그는 피르나와 프라이베르크에 주둔한 작센군 2만여 명의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1월 9일, 레온하르트 중장이 이끄는 작센군 선봉대가 보헤미아 왕국으로 진입했다. 이후 프랑스-작센-바이에른 연합군은 프라하를 포위했다. 루토프스키는 도시를 즉각 공격하자고 제안했지만 프랑스군 장성들은 도시를 포위하는 쪽을 선호했다. 한동안 논쟁이 벌어진 끝에 루토프스키의 의견이 채택되었고, 연합군은 11월 26일 밤 공격을 개시해 다음날 함락시키고 프라하 수비대를 생포했다. 이후 작센의 기병대 10개 분대가 프라하에 남겨졌고, 나머지 작센군은 프라하 남쪽에 진을 쳤다.

1742년 1월 10일, 루토프스키는 그라프 루토프스키 용기병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742년 2월 19일, 그는 남부 보헤미아로 진군했지만 도중에 병에 걸렸고, 르노 중장이 몇 주 동안 그를 대신해 작센군을 이끌었으나 보급 부족으로 인해 굶주림에 시달리는 병사들을 통솔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해 3월 브르노에 도착한 작센군은 기력이 없어 포위전에 들어가지 못하다가 오스트리아군의 거센 역습에 직면하자 결국 4월 초 란슈크룬을 거쳐 보헤미아까지 북쪽으로 행군했다. 7월 초, 마침내 수많은 아사자를 남긴 채 피르나에 도착한 작센군은 더이상 오스트리아와 맞설 의욕을 잃고 11월 9일 마리아 테레지아와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한편이 된 1745년 프로이센에 대항한 군사 작전을 오스트리아와 함께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작센군은 슐레지엔 북부의 프로이센군을 차단하기로 했고, 오스트리아군은 남쪽에서 진격하기로 했다. 루토프스키를 대신해 작센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작센-바이센펠스 공작 요한 아돌프 2세는 6월 4일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에 참가했으나 프로이센군에게 참패했다. 이후 9월에 작센-바이센펠스 공작을 대신해 작센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루토프스키는 11월에 보병 15,290명, 기병 4,300명을 이끌고 괴를리츠 근처에서 로렌 공자 카를 알렉산더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과 접점을 이뤘다. 이후 작센군 본대는 슐레지엔 남쪽에서 베를린을 향해 진격하기로 했고, 작센군 분견대는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슐레지엔 북쪽에서 베를린으로 진군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북쪽으로 이동하던 작센군은 헨넬스도르프 전투에서 기습을 받고 형편없이 패배했다. 당시 작센군 병사들은 몇달 동안 봉급을 지급받지 못했고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너덜너덜해진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장비는 엉망이었기 때문에 사기가 극도로 낮아서 프로이센군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12월 12일, 루토프스키는 오스트리아군 소규모 분견대와 함께 케셀스도르프와 브리니츠 사이에 3개의 대형을 편성했다. 12월 15일 새벽 2시, 루토프스키는 카를 알렉산더에게 작센으로 와줄 것을 요청했지만 카를 알렉산더는 이미 헨넬스도르프 전투의 패배 이후 본국으로 후퇴해버렸기 때문에 이에 응하지 못했고, 결국 작센군은 뒤이은 케셀스도르프 전투에서 참패해 3,750명의 사상자 및 3천여 명의 포로를 냈다. 12월 16일 그로스-세드리츠로 후퇴한 루토프스키는 아우구스트 3세에 의해 경질되어 작센-바이센펠스 공작으로 교체되었다. 이후 작센-바이센펠스 공작은 작센군과 함께 보헤미아로 갔다가 프로이센과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전쟁에서 이탈했다.

1746년, 작센-바이센펠스 공작은 심장마비를 일으켜 6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루토프스키가 작센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작센의 재정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아 군대를 유지시킬 방안이 없었다. 결국 그 다음 몇년 간의 평화 기간 동인 작센 총리 하인리히 폰 브륄의 감축 정책을 막아내지 못했고, 이로 인해 작센군은 3만 명에서 1만 8천 명으로 급속도로 감축되어 전투력이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2.3. 7년 전쟁과 사망

1756년 프로이센군이 갑자기 작센을 침공했을 때, 루토프스키는 이를 막아낼 방안이 없었다. 결국 그는 피르나 근방으로 군대를 이동시켜서 강력한 방어 태세를 갖춘 뒤 오스트리아 지원군이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그는 6주 동안 프로이센군의 포위 공격을 버텨냈지만 식량과 탄약이 부족해진 데다 자신들을 구하러 진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이 10월 1일 로보지츠 전투에서 패퇴하자 결국 희망을 잃고 10월 16일에 항복했다. 그는 포로로 전락하여 비츠툼 가문의 영지에 억류되었지만 다른 수감된 장교들과 프랑스 및 오스트리아군에 복무하는 작센군 지휘관들과 접촉을 유지했다.

1763년 3월 8일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이 체결된 후 루토프스키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년 후인 1764년 3월 16일, 그는 필니츠에서 병사했다. 향년 6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