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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5 12:33:40

페르시아 전쟁/해석

1. 개요2. 일반적인 해석3. 서구중심주의적인 해석이라는 의견4. 기존의 해석이 정당하다는 의견과 반론

1. 개요

페르시아 전쟁은 후일 세계를 지배하게 된 서구문명의 시초인 고대 그리스 문명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부터 지켜냈다는 해석이 있는 전쟁이라 전쟁의 결과가 후대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 특히 주된 해석이 서구중심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해석이 아니냐라는 의견과 그렇지 않다는 의견이 있다.

2. 일반적인 해석

페르시아군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인류 문명의 역사는 영원히 바뀌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많다. 그리스가 승리한지 수십년 후, 그리스를 통일한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유럽과 이집트, 아프리카 일부, 중동, 동방까지 정복하는 기염을 토해내면서 그리스 문명의 흔적이 퍼져나간다. 그때 퍼져나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 반도에서 로마 제국이 발전하고, 그 로마 제국이 다시 지중해유럽을 지배한다. 그리고 유럽문명이 근대화와 산업화를 바탕으로 전세계에 퍼져나갔다.

덕분에 전쟁사를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책에서 제일 첫페이지에 나올만한 내용이 바로 아테네가 치렀던 마라톤 전투의 전령 이야기나 테르모필레 전투스파르타 전사들의 희생이다.[1]

3. 서구중심주의적인 해석이라는 의견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해 너무 서구중심주의적인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견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따지고 보면 그리스 문화는 당시 페르시아 문화보다 훨씬 뒤져 있었다는 것.

흔히 그리스 폴리스들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침략을 물리쳤다고 표현되지만, 고대 세계에서 일컫는 '자유'는 국가의 자주권에 가까운 의미이며, 현대인이 인식하는 시민 개개인의 자유와는 거리가 있는 개념이다. 사실 대부분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다수의 노예를 기반으로 유지되고 있었던 반면 페르시아는 노예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근거 자체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페르세폴리스와 같은 웅장한 도시들과 정교한 수로는 노예들의 노동력을 쥐어짜내 만든 것이 아니라 엄연히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어 공사한 결과물들이었다. 오히려 노예가 없으면 국가 운영 자체가 불가능한 스파르타[2]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곤 하나 인구의 80% 가량은 노예 신분이었던 아테네야말로 보편적인 인권의식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으며, 전쟁에서 패배하면 포로가 되는 것이 일반 상식이었던 고대 시대에 "페르시아 제국에는 노예가 없다."라고 선언한[3] 페르시아야 말로 선진적인 사회를 구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페르시아 문명은 그리스 문명에 비해 여성 인권도 존중되었다. 고대 그리스 여성들은 기본적으로 남자들이 누리는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남편의 허락 없이는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심지어 갓 태어난 여자 아이를 생매장하는 일도 허다했다. 여자 아이가 자라서 시집갈 때 지참금을 줄 형편이 못 되는 경우에 한해서. 그나마 스파르타는 남편이 죽으면 재산을 아내가 물려받고, 여성도 군사 훈련을 받고 군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다른 폴리스들에 비해서 여성의 권리가 좀 더 보장받은 편이었는데, 이는 물론 수적으로 훨씬 많은 노예인 헤일로타이들의 반란을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페르시아는 다른 문화를 존중했지, 점령지의 시민들을 강제로 개종시키거나 억압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대 세계에서 페르시아는 침략자가 아니라 해방자로 인식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대표적으로 페르시아의 초대 군주인 키루스 2세는 바빌론을 점령한 뒤 유대인들을 그대로 해방시켜 페르시아의 든든한 우방으로 삼았다. 오죽하면 유대인들은 키루스 2세를 '메시아' 로까지 여겼을 정도[5]

페르시아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한 만큼 국가 운영 역시 굉장히 효율적이고 합리적이었는데, 약 1세기 이후 페르시아를 점령한 알렉산더 대왕은 급격히 팽창한 마케도니아 왕국을 통치하기 위해 페르시아의 시스템을 그대로 가져와 적용하였을 정도였다.[6]

4. 기존의 해석이 정당하다는 의견과 반론

사실 페르시아 문명이 그리스 문명에 비해 훨씬 앞서있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으며 현대 문명에 가장 많은 기여를 한 것은 페르시아 문명보다는 그리스 문명이라는 점은 과연 페르시아 문명이 그리스 문명보다 앞선 것인가?라는 의문을 던지게 하는 점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이쪽에서는 그리스의 문명은 민주주의의 법제도, 과학 기술, 철학, 조각, 건축, 연극 등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며 이들 중 많은 부분이 현대에도 그대로 계승 되었는데 페르시아 문명은 대부분 현대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이 없다. 만일 페르시아 문명이 그리스보다 우월했다면 어째서 이 그리스를 뛰어넘는 문화가 계승되어지지 않았는지 해괴한 일이라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론.
그러나, '그리스 문명은 현대에 계승되었고, 페르시아는 그렇지 않으니까 그리스 문명이 더 우월하다'는 식의 논리는 굉장히 단순한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리스 문명이 현대까지 전해진 것은, 고대 로마-동로마(비잔티움)-르네상스-근대 유럽을 거치면서 꾸준히 계승 및 발전을 시키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당장 동아시아만 하더라도 고대의 중화 문명이 열등해서 현대인들이 서구식 생활을 하는건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페르시아 문명이 제대로 후세에 계승되지 못한 이유는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이 이슬람 정복의 첫빠따를 얻어맞고 멸망한 뒤, 페르시아 문명의 근간이었던 조로아스터교와 전통들이 이슬람화 과정에서 그야말로 갈려나갔기 때문이지 그리스 문명보다 뒤떨어져서가 아니다. 반대로 이슬람 정복으로 조기에 멸망당한 게 동로마 제국이고 건재한 게 사산조 페르시아였다면 그리스 문명이 과연 지금처럼 "현대에도 그대로 계승"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페르시아 문명도 그냥 인류사에 무의미하게 소멸한 건 결코 아니다. 제국과 종교는 망했을망정 문화와 기술은 이슬람 제국에 상당 부분 흡수되어 전성기 이슬람 문명의 발전에 충분히 한몫을 했다.[7] 게다가 페르시아는 로마에게 정복당한 뒤 한동한 정체성 자체가 없었고 근대에 와서야 그리스인이라고 자각한 그리스와 달리[8] 마케도니아의 정복, 파르티아의 지배 이후 부활했으며 이슬람화 이후에도 페르시아의 정체성은 남아 근세에는 오스만 제국과 함께 중동을 양분하는 제국이 되었고 지금도 페르시아 국가는 계승 되고 있다.[9]
서구 중심주의 사관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당시 그리스가 에게 문명의 영향을 받았고 에게 문명이 동방문명의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10] 실제 그리스가 서구 문명의 시초로 유럽인들에게 여겨진것도 19세기 중후반의 민족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자부심의 부각 이후부터이며 고대 그리스 자체도 동방문명적인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당장 그리스 폴리스 문명에서 그리스 본토뿐 아니라 페르시아 지배 영역인 이오니아 역시 중요 지역이었다. 심지어는 그리스인들은 세상을 셋으로 보았다; 그리스-동방-바바로이스. 바바로이스는 바바리안의 의미가 아니라 언어가 다른, 이어족임을 말한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 문명의 기원은 서구적 기원이 아닌, 그리스의 기원일 뿐이다.
또한 그리스의 요소들은 계승되었지만 페르시아의 요소들은 계승되지 않았다는 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주장이다. 실제로 그리스도 페르시아도 역사건 철학이건간에 제대로 계승된 부분은 미미하며, 그나마 그리스 문화를 동경한 로마의 지식인들에 의해 일부가 다소 로마화되어 보존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정작 현대 사회에 알려진 그리스 문화 등은 르네상스 시기에 복원되고 개조된 것들이 대부분이며, 이는 유럽에서 극렬한 기독교에 대한 반감으로 그리스 문화를 모티브로 삼은 것에서 기인한 것이지 그리스의 문화적 요인들이 페르시아보다 더 오래 살아남아서가 아니다(더불어 그리스의 문화 수준은 아닐지라도 고대 페르시아의 문화 역시도 이 시기에 유럽 내에서 재조명 받기도 했다). 되려 유대인 문화와 유대교에 미친 페르시아의 문화적 영향은 매우 엄청난 것이며, 이 유대교가 더 나아가서는 기독교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면 페르시아 역시 후대에 큰 영향을 남겼다고 보아야한다. 애초 유대교 자체가 그 발전과정에서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걸 상기 바란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무관심한 제도나 통치적 측면에서는 그리스가 비교도 어려울 정도로 기여한 바가 더욱 크다. 사트랍으로 불리는 속주 제도는 이후 대부분의 다문화 제국들이 오랜 기간 차용한 총독/속주 제도의 원형이 되었으며, 페르시아가 구축한 무역망은 항해술의 발달로 신항로가 개척되기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무역로로 자리잡았다. 그 외 조세나 다문화적 포용정책 등 다양한 법제와 제도적 요소들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마케도니아에서도 그대로 차용한 부분이 많으며, 이 역시도 지중해 전체에 지속적으로 계승되었다.
결국 페르시아가 후대에 남긴것이 없다는 주장은 일부 매체들과 근래 중동의 폭력적 이미지에서 비롯된 편견에 기인한 부분이 크며, 페르시아의 직접 통치를 받지 않은 유럽지역의 경우 조차도 페르시아로부터 받은 간접적 영향은 적지 않다고 보는 것이 옳다.

비록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미숙했다하더라도 인류사에 굉장히 희귀한 사례를 남겼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당장 생각해봐도 근현대 이전에 민주주의를 정치체제로 택하고 장기간 발전시키고 선기능과 부작용을 모두 남긴건 아테네와 그리스 문명 정도로 결코 흔치 않다. 페르시아같은 왕정은 흔하디 못해 21세기 현대에도 넘쳐난다. 아테네 거주민 30만 중 약 5만명의 자유민이 참정권을 행사 했는데 이는 16.6%에 해당한다. 페르시아가 아무리 선진적이었어도 시장 상인이나 노젓는 노동자가 왕을 선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11][12] 나중에 선거로 왕을 뽑는 국가들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 때도 아테네만큼의 참정권을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이후로도 군주제가 아니더라도 인종, 성별, 빈부에 따라 권리를 주지 않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또한 자유민을 비교한다면 페르시아엔 이들 중에 왕족, 귀족 계급과 사제 계급이 존재하였고 참정권은 이들 계급에게만 국한 되어있었으나 그리스는 모든 시민들이 참정권을 가지고 있었다.[13] 게다가 폴리스엔 선거와 의회가 있고 헌법이 존재하여 한 개인의 전횡을 제도적으로 견제하였는데 페르시아는 왕이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고 그 왕의 변덕에 따라 자유민의 생사가 결정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자유민의 경우 그리스가 페르시아보다 평등하다고 볼 수 있다는 것.[14]
▶반론
'페르시아가 아무리 선진적이었어도 시장 상인이나 노젓는 노동자가 왕을 선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는 문장엔, '민주주의적 가치를 '선진적'인 것이라고 보는 시선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적 가치는 선진적이다'라는 말은 현대의 기준으로 역사를 판단하는 것이고 그리고 그 현대의 기준이라는 것도 19~20세기 서구문명의 영향이 세계적으로 보편화 되어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민주주의적이라고 해서 그리스가 선진적인가? 그렇다면, 세종대왕은 노예제를 찬성하고 왕정을 옹호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열등함을 가지고 있다고 바라보아야 하나? 그리스 문명이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타 문명보다 선진적이라고 하는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 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즉 자유의 가치에 대한 유럽인들의 자부심이 길러낸 서구 우월주의의 일환일 뿐이며 오늘날엔 많은 반론을 받아 구사관이 된 사관일 뿐이다. 물론 무산자까지도 나름대로 의견을 낼 수 있으며 그것이 정당하게 보장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시 시대적 기준으로 보면 창의적이고 폄하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권에서조차 아테네의 제도는 특이한 수준이었고[15] 심지어 아테네 내에서조차 부유층 등을 중심으로 한 반민주주의 세력이 있었고 나라까지 팔아먹곤 했다. 결국 당시 시대적 기준으로 보면 다른 나라들이 후진게 아니라 아테네가 달랐던 것 뿐이다.
두번째로 그리스 문명이, 자유의 가치를 지니는, 서구 문명의 시원이냐는 의문도 있다. '그리스 문명이 서구 문명의 시원이다'라는 주장은 오늘날엔 그 감동이 예전보다 확연히 줄어들었다. 우선 (19세기 사가들이 생각한 것처럼 근대적 의미의) 자유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았으며, '그리스 문명=서구 문명의 시원'이라는 명제도 그 의미가 많이 흐릿해졌다.[16] 우선 고대 아테네의 "자유"라는 개념 자체를 알아야한다. 고대 아테네의 자유는 폴리스의 자유, 정치에 있어서 평등한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지 자유주의적 자유와는 다른 개념이다. 자유는 폴리스의 자치와, 정치적 구성원으로서의 평등한 참정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스 세계 내 폴리스들은 그들의 자치를 위해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했지, 자유의 수호를 위해 단결하지 않았다.[17] 그리스 세계 내 폴리스들의 정치 체제는 다양하였고 그 중 민주정은 소수였다. 대부분 귀족에 의한 과두정을 정치체제로 삼았다.
그리고 아테네 조차도 대부분의 시기동안 정치 주도는 귀족이 주도하였으며, 참정에 관해서도 하층과 귀족층의 참여 정도는 컸다. 귀족층이 정치 참여를 더욱 많이 하였다. 일반인들이 선출직에 선출될 수 있었지만 생업 종사에 바빠 거부하기도 하였다.
결국 그리스 문명은 자유의 가치를 공유하지도, 아테네의 민주정은 그리스적이지도 그렇게 민주적이지도 못하다.[18]

또 다른 논의로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 시민과 노예와 같이 죽은 것과 키루스 2세가 인권 보장 정책[19]을 핀 것을 비교하면서 페르시아가 더 평등했다고 말하는데 이는 비교를 잘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키루스 2세의 인권 보장 정책에서 스파르타의 경우처럼 전선에서의 노예에 대한 처우를 명시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또한 페르시아가 그리스 군에게 끔살당한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페르시아군이 그들과 보유한 노예들에게 그들의 생존을 위한 어떠한 노력을 했는지를 서술해야 옳은 비교라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20] 그리고 테르모필레 전투 문서에서 나오듯이 다른 이들을 후퇴시켜주기 위해 자발적으로 싸운 시민들도 있는데 이들의 행동을 무시하고 테르모필레 전투를 무작정 폄하하는 거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이런 인권 보장 등의 정책은 전근대 국가라 할지라도 키루스 2세같은 성군이 나오면 나올 수 있을 법한 일이고 중요한 사실은 그 다음 왕이 누구냐에 따라서 이 제도가 유지되기도 하고 폐지되기도 한다. 요컨데 관대한 성군 한 명에 의해 좌우되다보니 그 한 명이 교체되면 아무리 좋은 정책도 없던게 되어 버릴 수 있었다. 즉 키루스 2세가 한 행적으로 페르시아 전체를 평가하기엔 무리수가 있다. 물론 페르시아가 그 시대 기준으로 보면 제법 관용적인 편이긴 한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그리스가 이긴게 아니라 페르시아가 전쟁에 이겼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의 의견으로는 스파르타의 왕이 죽고 아테네가 두번 불탔다는 점에서 페르시아의 승리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는 전쟁을 벌이는 목표를 이뤘느냐 아니냐로 결정될 뿐이다. 같은 논리라면 노량해전의 승자는 일본이며 뤼첸전투의 승자도 구스타브 아돌프가 아니라 발렌슈타인이다. 다른 분야들은 다양한 의견과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전쟁의 승패는 따질 필요조차 없이 명백한 그리스의 승리다.

페르시아는 왕이 직접 친정하여 수륙 양면의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해 그리스 전체를 복속시키고자 하였으나 해군과 육군 양쪽으로 궤멸당했다. 오히려 이후의 대 페르시아 전선에서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이 이오니아 지역을 점령하는 등 역공까지 가했다.

[1] 지금도 테르모필레에는 "지나가는 나그네여, 라케다이몬(스파르타를 뜻한다. 사실 스파르타의 진짜 명칭은 라케다이몬이고 스파르타는 같이 쓰이던 이름이었을 뿐이었다.)에 가서 전해주오. 우리는 국가의 명에 의해 여기 누워 있노라고"라고 적힌 석판이 놓여 있다고 한다.[2] 이쪽은 '생산'에 해당하는 일은 거의 다 노예에게 시켜놓았다. 스파르타가 몰락한 원인 중 하나가 이 노예인 헤일로타이들의 나라 메세니아를 상실한 것이기도 했을 정도로 노에들의 노동에 크게 의존했다.[3] 인문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경덕[4] 물론 페르시아는 대제국이었고, 정복지에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간접 통치를 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중앙 정부의 행정이 잘 닿지 않는 곳에서까지 노예를 완전히 근절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비록 형식적인 선언 뿐이었다고 해도 기원전에 군주가 저런 선언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페르시아 제국 정책의 선진성과 유연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사실 페르시아 제국보다 영토도 훨씬 작고 행적력도 뛰어난 대한민국만 해도 신안군과 같은 외진 지방에서 노예를 부리다 발각되는 사건도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만의 한계라 보기도 어렵다.[5] 이게 어느 정도냐면 이전에도 이후로도 이민족 군주 중에서 키루스 2세만큼 유대인에게 평이 좋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6] 이게 얼마나 대단하냐면 사실 페르시아 이전에도 서아시아를 거의 통일할 뻔한 국가가 하나 있었다. 바로 아시리아인데 이쪽은 너무나도 가혹한 폭압통치를 했고 결국 서아시아를 통일해보기도 전에 피지배민족이나 타국에 의해서 멸망했다. 영토만 봐도 아시리아는 서아시아만 차지하고 있었는데 페르시아는 이보다 더 거대해서 아프리카와 유럽에까지 영토를 걸치고 있던 국가로서 말 그대로 아시리아보다 민족구성이 복잡한데도 아시리아와는 달리 제대로 통치하는데 성공했다.[7] 이슬람은 정복을 했지 초기 이슬람의 주류인 아랍인들은 페르시아처럼 제국을 운영해본 적이 없었고 때문에 거대한 제국을 운영해는데 도움을 줄 이들이 필요했는데 마침 자신들이 정복한 페르시아인들은 직전까지 그 제국을 운영해본 이들이다. 당연히 통치에 끌어들일 수 밖에 없다.[8] 그리스가 동로마 제국을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와 맥락이 있는데 만일 동로마 제국이면 그리스는 로마에게 정복당한 뒤 그리스 왕국이 설립되는 19세기까지 독립적인 국가를 세운적이 없는 국가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동로마제국이 건재하던 시절 서유럽에서 동로마제국을 그리스인의 제국 동로마 황제를 '그리스인의 황제' 라는 식으로 로마의 제국과 로마의 황제가 아닌 그리스인의 제국 그리스인의 황제라고 하기는 했지만 이는 서유럽의 신성 로마 제국 문제도 있고 교황과 관련된 문제도 있어서 그랬으며 말은 이랬을 뿐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정하지 않은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정작 동로마 시절에는 외부에서 '그리스인'이라고 부르면 신경질을 낼 정도로 싫어했다고 한다(...)[9] 이게 어느 정도냐면 호메이니조차 페르시아를 부정하지 못했다.[10] 애초 지리상으로 그리스와 에게 해가 그나마 유럽 중에서는 동방과 제일 가깝다. 여기에 이집트와도 가까운건 덤 물론 이집트는 페르시아 전쟁기 동안은 그냥 페르시아 영토일 뿐이었지만[11] 아테네 공화정 자체는 당대를 놓고 봐도 그렇게 선진적인 시스템은 아니다. 법치에 기반하는 현대 민주주의와는 당연히 비교할 수도 없고, 비슷한 정치 시스템을 찾는다면 오히려 원시 부족정에 가깝다. 그런 시스템을 규모가 커진 다음에도 유지하는게 신기하고 희귀한 사례이긴 하지만[12] 참고로 아테네에서 이런 식으로 참정권이 있는게 가능했던 것은 아테네의 자랑이었던 해군 때문이었다. 해군은 노잡이만 수만명이 필요해서 중보병 정도면 부유층만으로도 어떻게든 구성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해군은 그런게 불가능해서 결국 무산층들까지도 동원되어야 했다. 물론 그랬기에 해군은 아테네의 민주주의의 지킴이기도 했다. 반대로 그랬기에 부유층들은 해군을 까대곤 했다.[13] 물론 그리스 시민 자체가 일종의 특권계급이다. 애당초 시민이라는 것 자체가 아테네만 벗어나면 사실상 귀족에 가깝다. 스파르타의 기준으로 보면 아고게와 공동식사에 지불될 금액을 낼 수 있는 계층에 한정되어 있으니[14] 다만, 헤로도토스의 말을 신용할 경우 페르시아 군주는 마음대로 사람을 사형시킬 수 없었다.[15] 다만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쥔 일인독재는(왕정인지 공화정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바르바로이의 기준으로 볼 만큼 좋지 않게 여겼다. 그랬기에 그리그권 도시들의 정치체제는 거의 다 과두정 체제[16] 그것은 그리스 문명은 결코 독단적인 문명도 아니었고, 그리스 문명이 서구 문명 전체를 아우르는 문명으로 보기엔 힘들다는 점 때문이다.[17] 가령 페르시아 전쟁때 그리스계 도시인 테베가 페르시아 편이었다든가 펠레폰네소스 전쟁 당시에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았다든가 아테네의 코논이 이끄는 해군이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았다든가 등등[18] 민주주의적 모습은 어느 정도 띤 것은 사실이다. 귀족에게 주도될 뿐이지만. 실제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오늘날 우리의 시각으로는 민주적이지 못하다 평가하지만 당대에는 정말로 민주적인 제도로 보았기에 오늘날 민주국가에서는 민주주의 폐지하자! 라는 얘기가 나오면 즉각 비난맞을 일이지만 아테네에서는 지금의 민주주의에 비해서 민주적이지 못한 제도조차도 아테네의 부유층들은 용인하지 못해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하지 말고 엘리트 중심의 정치를 하자는 등의 주장을 피며 심지어 이를 위해선 매국노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민중들은 그들의 이야기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만[19] 애당초 그냥 선정이지 현대적 인권개념도 아니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현대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하면서 정작 키루스2세의 정책을 현대적 인권에 대입하는 것은 이중적이다[20] 이것 또한 마찬가지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이르기를 페르시아의 귀족은 아무리 노예가 죄를 지었어도 사망할 만큼 형벌을 가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