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정선거 폭로 파문과 진상조사
2012년 4월 11일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직후, 국민참여당 출신의 참여계 오옥만 후보는 온라인 투표에서 여성 명부 1위를 차지했지만 현장 투표에서 윤금순 후보에게 밀려 9위로 떨어진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선출 과정에 부정선거가 있었다 주장하였다. 또한 국민참여당계의 노항래 후보와 이영희 후보 사이에서도 선거관리인의 서명이 누락된 투표함을 무효처리하는 문제를 놓고 다투고 있었다. 이에 당에서는 4명의 후보 간의 분쟁해결을 위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의혹이 터진 후 NL, PD, 국민참여당계 등 당내 정치계파가 아닌 민주노총계 조준호(민주노총 출신) 공동대표를 위원장으로 하는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고 당대표단은 2012년 4월 13일 당내경선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고 전권을 위임하고 빠른 시일내에 조사를 마무리 짓도록 했다.[1]
그리고 5월 2일, 1차 진상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하지만 1차 진상조사는 정작 조사해야 할 4명의 후보간의 분쟁 해결은 조사하기는커녕 대표단에게 보고하지 않고 진상조사위가 독단적으로 결정하여 현장투표와 온라인 투표 전체의 규정 위반과 조작 가능성을 광범위하게 조사하였다. 즉, 진상조사위 차원에서 모종의 표적수사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당시에는 관악구 을 선거구 여론조작 파문에 이어서 당권파가 알아서 셀프 빅엿을 날린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물론 2001년에 이와 비슷한 용산 지구당 사건이 있었고, 그 외 여러 위장전입 사건과 2008년 민노당 비대위 불인정 사건 등이 있었다. 그래도 앞의 사례들은 아직 군소정당이었을 때라 관심을 못받았지만, 관악구 을 선거구 사례와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건은 그때와는 사건의 파장부터가 달랐다.
일단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비례대표 1번으로 당선된 윤금순 당선자가 사퇴를 선언했고, 이정희 대표도 정계은퇴로 해석될 수 있는 성명을 발표하고 당대표직 사퇴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정희 대표는 진상조사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혀 진솔한 사과와 쇄신을 기대한 여론에 찬물을 부어버렸고, 이 때문에 사실상 통합진보당은 이대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예측이 많아졌다. 일각에서는 국민참여당계(유시민)+구 새진보 통합연대측(노회찬, 심상정)의 분당설까지 나오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민주노총과 전농, 전여농등 통합진보당의 외곽 지지세력들도 잇달아 강력한 재창당 수준의 쇄신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지지철회를 선언하겠다는 발언들이 터져나와 상황은 점입가경으로 흘러갔다. 민주노총 등의 이런 강력한 반발에는 민주노동당계 안에서만 활동하고 대외적으로 활동하지 않은 이석기의 등장과 민주노총 후보가 모두 낙선했기 때문이다. 이정희 대표가 민주노총 출신의 조준호 공동대표 주도로 이루어진 진상조사 결과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민주노총을 무시하는 태도라고 여긴 것이 큰 원인으로 보인다.
아래 사태가 확산된 이후인 5월 9일에도, 투표율이 100%를 넘는 선거구가 2곳이나 있고, 주민번호가 2000000으로 끝나는 사람도 있으며, 이름만 다르고 주민 번호가 같은 사람이 5명이나 존재하는 등의 사실이 추가로 공개되었다.# 이정희 대표는 이에 대해 주민번호가 200000으로 끝나는 경우는 해외 거주자가 선거 당시 주민번호가 없어 그렇게 기재한 것이고, 한국의 주민번호 특성상 동일 지역에서 출생한 사람 20명만 모이면 7명이 주민번호 뒷자리가 일치한다고 해명했다. 더불어 이정희 대표는 전화면접 조사에 대한 문제도 제기했다.
그리고 2012년 5월 9일에 민주노총 측에서 통합진보당이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상습적으로 당원들의 명의를 빌려서 대리투표를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한편 5세 아이도 당비만 내면 투표권을 가진다는 보도가 나왔으나 이는 오보였다.#
2012년 5월 21일에 현대자동차 전주 공장 노조에서 대자보를 붙이고, 경선때 이석기 측에서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공개투표를 시켰다고 폭로하였다. 경선에 현대자동차 노동자 후보가 출마했음에도 노조에서 자X자동차 조직이 이석기를 지지한다고 하며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공개투표를 시켰다는 것이었다.#
2. 당권파의 필리버스터와 폭력사태
5월 5일에 사건 수습을 위해 장장 18시간 동안 회의를 했으나, 이정희 대표가 대표단 사퇴까지는 동의해도 정작 문제가 된 비례대표 사퇴안에 대해서는 수용을 거부한다는 입장을 보이면서[2] 의견차를 좁히는데 실패했다.5월 8일 아침에 진행된 CBS 인터뷰에서 김선동 의원이 "표들이 뭉텅이로 붙어있던 것은 표들을 붙여놨던 풀이 다시 살아나서 붙었을 수도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이 많았으나 2차 진상조사위원회에서 조사위원 전원이 배석한 가운데 투표용지 2장을 떼었다 붙이는 실험을 한 결과, 실제로 풀이 살아나 붙은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권파들만 모여서 연 공청회에서 이정희 대표가 유죄라는 증거가 없으니 우리는 무죄다라는 발언을 하여 막심한 공격을 받았다.# 법리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지만, 정치인으로써 할 말은 아니었고 당내의 상황 또한 그 발언이 용납될 분위기도 아니었다. 한편 이 시기 통합진보당의 홈페이지가 개편되었는데, 개편이라는 빌미로 과거 당원게시판의 게시물들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당권파에 대한 많은 질타의 글을 가리려고 하는 당권파의 수작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5월 9일 부정선거에 대한 추가적인 보도가 나간 이후 이정희 대표는 전국운영위원회에 참석하여 해당 보도를 실은 언론사들(경향신문, 오마이뉴스)에게 되려 소송드립을 시전했다.#
통합진보당의 의결권한은 대표단회의(공동대표단 및 사무총장 등 중앙당 주요당직자) - 운영위원회(대표단 회의 인원이 포함된 50여명) - 중앙위원회(운영위원회 인원이 포함된 1000여명) - 전당원대회(전 진성당원) 순으로 나갈수록 커진다. 대표단회의에서 합의가 되지 못한 것을 운영위원회로 넘겨 쇄신안을 의결하고 비대위 구성 등 후속조치 추인을 중앙위원회로 넘겼는데, 당권파는 바로 전당원대회를 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일반 당원을 대상으로 하는 투표는 투표율이 높지 않으므로, 의결이 유효한 51%의 투표율을 전제하고 이중 26%만 확보하면 쇄신안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비당권파는 국민참여당계 등으로 당원의 수는 많지만, 조직력이 약하기 때문에 전당대회에 참여해 투표를 할 당원의 수는 당권파에 비해 절대적으로 줄어든다. 중앙위원회의 경우, 국민참여당계+진보신당계+구 민주노동당계 비주류(울산연합, 인천연합)가 합세하면 운영위에서처럼 당권파보다 숫자가 많다. 그러나 결국 전당원대회는 열리지 않았고, 후술하는 대로 중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5월 12일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킨텍스에서 중앙운영위가 개최된 직후 이정희 대표가 사퇴하였으며, 이 때문에 심상정 대표가 사회권을 넘겨받아 의장으로서 회의를 주재했다. 그러나 회의 진행 도중 당권파 측에서 회의 전날 일부 운영위원이 교체되었다는 점을 문제삼으며 회의방해를 시도했다. 신당권파 측은 3개 정당이 합쳐졌으므로 각자 일정한 지분을 갖고 각자의 운영위원을 각자의 방식으로 뽑도록 했기 때문에 원래 하던대로 당 수뇌부에서 검토와 합의 하에 위원들을 선출하자고 주장했으나, 그것은 합당 당시에 적용되는 것이었고, 이미 합당하여 통합진보당이 운영되고 있는 시점에서는 통합진보당의 의결절차를 밟아 중앙위원을 뽑는 것이 맞았다. 이에 심상정 의원이 자제를 요청했지만 당권파측 당원들은 계속 필리버스터를 시도했다. 게다가 참관인석의 경기동부계열 평당원들은 계속해서 피켓팅을 하면서 구호를 외쳐서 도저히 정상적인 회의가 진행될 수 없게 방해했다.[3]
이에 비당권파 위원(심상정, 유시민)들이 참관인을 퇴장시키고 회의를 진행시키자는 의견을 냈으나 묵살되었고, 결국 파행으로 치달으며 정회되었다. 의장인 이정희 의원이 퇴장하고 유시민 공동대표가 의장을 맡아 회의를 진행하려 했으나 참관인들의 방해로 인해 또 다시 정회되었다. 이후 당권파측이 쇄신안 통과를 막기 위해 국회 본관 출입문을 점거하며 운영위원들의 출입을 막았다.#
또한 회의 정회 이후에도, 당권파 측은 유시민을 비롯한 비당권파 운영위원을 감시하였다.
또한 중앙위원회 참관인 충북도당 소속의 H씨는 유시민과 유시민의 지지단체인 시민광장이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전원사퇴와 이석기, 김재연 국회의원직 사퇴 의결을 위한 수적 우세를 점하기 위해 중앙위원을 국민참여당 출신 시민광장계로 임의교체한 사실을 목격했다며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후 중앙위원회에서 그런 사실이 없다고 발언한 유시민은 한차례 계속된 공방과 정회 후 중앙위원 임의교체 사실을 인정했으나, 참여계 내부의 일이고 민주노동당 측에서 문제를 제기해서는 안된다고 말을 번복했다. 민노당 측은 회의속개를 위해 대승적 차원에서 잠시 접기로 합의하였다.
그렇게 정회와 속개가 반복되다가, 밤 9시 40분경 표결을 하여 운영위원들이 만장일치[4]로 강령 개정안을 통과시키자 이를 강행처리로 받아들인 당권파 측 중앙위원과 참관인들이 의장단석을 향해 돌진했다. 이 과정에서 조준호, 유시민 대표가 구타당하고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당권파를 막기 위하여 진행요원들이 몸싸움을 하는 등 헬게이트가 열렸다.
이 과정에서 젊은 당권파 당원[5]이 조준호 공동대표의 머리를 이 악물고 쥐어잡는 모습이 대서특필[6]되었다.[7] 다만 이 사진에 등장한 인물이 10대라는 보도는 오보라고 한다. 물론 당권파 당원들과 대학생들이 저지른 폭력 행위는 절대 오보가 아니다. 이 사진은 그 해 가장 임팩트 있는 정치 이슈 사진으로 거론될 정도로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당시 상황이 나온 영상이다. 회의에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여준 이후 당권파의 이미지는 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졌고 당권파, 혹은 더 나아가 통합진보당에 대해 마음을 돌리는 사람도 급격히 늘어났다. 이후 위 사진의 여성에게는 '머리끄덩이녀'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었고, 결국 2012년 7월 29일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이 회의 장면은 인터넷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으며, 덕분에 당일 새벽의 실시간 검색어 1위, 2위에 통합진보당과 우위영(당권파) 대변인의 이름이 올랐다. 유시민은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이게 뭐하는 짓이야!"라고 말하며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한편 이러한 상황 속에서 비당권파측 위원들은 비공개 인터넷 카페를 개설하고 따로 전자투표를 해서 쇄신안을 통과시켰다.# 쇄신안의 내용은 "5월 12일 중앙위원회 보고 후 공동대표단 총사퇴, 경선을 통해 선출된 비례대표 당선·후보자 전원(14명) 총 사퇴 권고[8]" 등이다. 그러나 '권고안'이라 강제성은 없었으며, 당권파측은 비당권파의 일방적인 날치기라 주장하고 여전히 사퇴거부로 맞서며 쇄신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결국 청년비례대표 3번이었던 김재연 당선자가 나는 합법적이고 당당하다며 사퇴 권고안을 거부했다.#[9] 하지만 현 당권파(경기동부연합, 광주전남연합)가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당내 지분 과반수를 차지한 게 아닌데다가, 당내 중도파(권영길, 강기갑), 울산연합과 인천연합이 쇄신안에 동의하며 비당권파에게 힘을 실어주어 사태는 점점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한편, 2012년 5월 16일에 당권파의 집단 폭행을 당한 조준호 공동대표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보도가 나왔다. 통합진보당 대변인실의 보도자료에 의하면, "조준호 전 공동대표가 지난 12일 중앙위원회에서 일부 당원들로부터 폭행당한 후 목 관절의 수액이 이탈하는 디스크 증상이 왔다"며 자칫하면 전신마비가 올 수도 있기에 목에 인공관절을 삽입하는 대수술을 한다고 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3. 혁신 비대위 체제
이후 5월 13일 비당권파측에서 회의를 재개하자, 당권파인 장원섭 사무총장이 중앙운영위는 당규와 무관한 개별행동이고, 이에 따라 당 시스템을 이용할 수 없다면서 서버를 차단해버렸다. 트위터와 인터넷 상에선 장원섭의 난이라면서 난리가 났다.# 이에 비당권파인 유시민, 심상정 대표 측은 아직 중앙운영위는 해산된 게 아니라면서 맞섰다. 당권파가 대놓고 당권 장악을 위해 온갖 수단을 불사할 것임을 천명한 셈이었다.그리고 비당권파 측에서 당 시스템과 별개인 타 서버를 이용하면서 전자회의를 통해 쇄신안과 비대위 구성안이 통과되면서 강기갑 비상대책위원장 체제가 확정되었다. 그리고 장원섭 사무총장 해임안도 통과되었다. 물론 당권파 측에서는 강력히 반발했다.##
당시 비당권파가 꾸린 비대위원 명단은 이렇다. 강기갑 위원장 외에 사무총장 격인 공동집행위원에 권태홍 전 국민참여당 사무총장과 중립성향의 민병렬 부산시당 위원장이 임명되었고, 대변인에는 인천연합의 이정미 전 선대위 대변인이 임명되었다. 이외에 진보신당 탈당파 출신의 이홍우 전 민주노총 사무총장도 비대위원에 내정되었다. 외부 인사들로는 정태인, 김민웅 교수가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또한 조국 서울대 법대교수와 공지영 작가도 물망에 올랐으나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리고 버티기로 일관한 당권파측의 대응을 보다 못한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이 진보 시즌2 운동을 시작하자고 제안하며 통합진보당에 입당했다.# 이정희 대표가 영입했으나 폭력사태에 분개하며 쇄신파로 돌아선 비례대표 14번 후보 서기호 前 판사도 이에 호응해서 통합진보당이 기존 당원들에게 "기존당원들 탈당 멈춰주세요. 한 달후 당대표 선거 도루묵됩니다"라며 탈당하지 말 것을 촉구했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통합진보당 입당을 권유했다.# 덕분에 일반적인 예상과는 달리, 통합진보당 홈페이지와 당게시판에 당원으로 가입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한편, 2012년 5월 14일 오후에 통합진보당 당사 앞에서 당권파로 알려진 박영재가 "중앙위 전자투표 결정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분신을 시도했다. 3도 화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갔으며, 강기갑 위원장이 문병을 가기도 했지만 박영재는 12일 있었던 당권파 폭력사태 현장에서 비당권파에 직접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태가 심각해짐에도 불구하고 당권파의 김미희 당선자는 2012년 5월 16일 기자회견에서 국회의원을 사퇴할 만큼 심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비대위도 인정 못한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고 김재연 당선자도 유시민 전 대표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사실상 사퇴하지 않겠다라는 뜻을 밝혔다. 또한 이석기 비례대표 당선자는 CBS 라디오 방송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하여 "12시간, 20시간은 반론 받아야 진보정당"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당권파측은 강기갑 위원장 중심의 혁신 비대위가 당원들의 의사를 무시한 비대위라면서 당원중심의 비대위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10] 이는 이미 당권파 측의 이상규 당선자가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당권파들의 이런 행동에 통합진보당의 분당 테크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2012년 5월 17일, 민주노총에서 통합진보당 지지철회 및 집단탈당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었으나, 강기갑 비상대책위원장이 쇄신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데다가 지지를 철회할 경우 생기게 되는 손해가 크다고 판단해 일단 지지철회에 관한 논의는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012년 5월 18일, 당권파 핵심 인물인 이석기, 김재연 두 당선자가 당적을 경기도당으로 옮겼다.# 각 시도당이 당원의 출당 권한을 갖고 있는 당헌을 이용하여 비대위가 출당조치를 못하도록 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서울시당은 비대위를 지지하지만 경기도당은 당권파의 세가 강하기 때문이다.[11] 그러나 또한 통합진보당 당규 상, 중앙당이 당원의 지역당을 조정할 수 있고 출당에 관한 제소가 들어올 경우 피제소자가 아닌 제소자가 소속된 지역당에서 출당심사를 하므로 의미 없는 발악이었다. 동시에 당권파는 현 비대위에 대해 업무정지 가처분 소송을 걸 준비까지 하였다.#
한편 같은 날, 이석기에 이어 이번에는 경기동부연합 멤버 중 하나인 이상규(서울특별시 관악구 을 지역구) 당선자가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하여 "비례대표 출당은 곧 분당 시나리오"]]라는 소리를 했다. 이미 경기동부연합와 광주전남연합 등 당권파는 분당을 각오한 상태라는 것이다.#
2012년 5월 19일, 비례대표 2번을 받은 이석기 비례대표 당선자는 민주노동당에도 입당한 적 없고 통합진보당에 입당한 지 5개월밖에 안 된 신규 당원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12] 그는 절대로 사퇴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2012년 5월 20일, 결국 구 당권파 측에서 당원비대위 출범을 강행했다.#
그리고 2012년 5월 23일에 강기갑 비대위원장은 이석기, 김재연의 사퇴시한을 25일로 늦춰 한 번 더 명예회복의 기회를 주고, 동시에 새로나기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그 동안 논란이 되왔던 북한 관련 입장을 대폭 수정하고, 6월 당대표자 회의 전까지 노동자 중심 정치과 당내 패권주의 청산, 반핵 등을 내건 쇄신안을 준비했다.#
그리고 2012년 6월 7일에 통합진보당 측에서 이석기, 김재연을 비롯한 구 당권파측 인물 4명을 당적에서 제명했다.
4. 당대표 선거
이런 가운데 새 당대표를 선출하는 경선도 한참 진행되었다. 당초 혁신 측에서는 심상정 의원을 내세우고, 구당권파 측에서는 오병윤 의원을 내세워서 양파전이 예상되었다.그러나 중도파쪽에서 강병기 전 최고위원을 내세우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혁신측에서는 비대위원장으로서 당을 수습하는데 앞장섰고 지속적인 혁신이라는 명분을 위해서도 강기갑 비대위원장의 당대표 출마가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강기갑 위원장을 설득했고, 당초 당대표 출마가 유력하게 점쳐지던 심상정 의원도 강기갑 위원장에게 힘을 모으는 쪽으로 불출마로 돌아섰다. 다만 강기갑 위원장은 같은 전농 출신인 강병기 전 최고위원의 출마 때문에 조금 껄끄러워했다고 한다.
구당권파 측은 강병기 전 최고위원으로 단일화하거나 오병윤 의원이 출마하는 방안을 놓고 고심했다. 결선투표제가 있는 만큼 1차 투표에는 오병윤 의원이 출마해서 구당권파의 입장을 피력한 뒤에, 결선투표에서 강병기 전 최고위원쪽으로 밀자는 얘기도 나왔다.
이후 오병윤이 불출마를 결정한 뒤 구당권파 측에서 강병기에게 표를 몰아주기로 하고, 동시에 강병기의 입장도 구당권파에 가까워지면서 사실상 신당권파 VS 구당권파의 대결구도가 되었다.
이후 박영재가 사망하고 2차 조사결과가 나왔는데, 발표 하루전에 언론사에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2차 조사 결과에서도 1차와 동일하게 총체적 부실, 부정선거라는 결론이 나오면서 구당권파가 엄청난 반발을 보이며 역습을 시작했다, 거기에 당대표 선거중에 서버 오류가 발생해 투표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구당권파가 이를 빌미로 신당권파를 공격해 오히려 신당권파가 궁지에 몰리고 있는 형편이 되었고. 거기에 모 IT전문가가 새로운 서버가 초, 중, 고등학교에 납품되는 것으로 서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글을 올리며 신당권파가 축출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이석기, 김재연 제명안을 내놓고 2심에서도 이석기, 김재연, 조윤숙, 황선이 제명처분되었고 당대표 경선 시작전 모 IT전문가가 선거전 서버를 무단 열람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그리고 2012년 7월 3일 서울광장에서 한중 FTA 반대집회가 열렸는데 거기서 이석기 의원이 참석하려다가 실랑이 끝에 3분만에 집회장에서 떠나는 상황이 벌어졌다. 반대로 강기갑 의원은 환영받았다고 한다.
2012년 7월 6일, 한시적으로 의원직을 겸한 윤금순 후보가 사퇴서를 냈다. 국회의원이 되었으므로 7월 9일에 국회에서 처리하여 의원직을 잃었다. 조윤숙은 사퇴서가 국회 본회의에서 수리되기 전인 6일 제명이 무효라는 소송을 냈다.# 그러나 10일 선관위는 이에 개의치 않고 서기호 前 판사가 의원직을 승계하는 결정을 내렸다.
2012년 7월 10일, 통합진보당 원내 의원 13명 중 구당권파 5명을 제외한 신당권파 5명과 중립 의원 2명의 만장일치 결의로 심상정 의원이 원내대표로 추대되었다.
황선도 제명 무효 소송을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당적을 옮기는 꼼수는 쓰지 않고 자기가 가입해 있는 지역당에서 1심 제명 결정을 받았었다. 그래서 이들은 잘못된 전제에 기초했으므로 모두 사퇴를 결정한 것이 위법한 처분이며, 조건부 사퇴 입장을 밝힌 것은 윤금순과도 같은데 자기들이나 김수진 후보[13]는 제명결정을 한 점 등을 이유로 들고 있다.#
2012년 7월 10일부터 12일까지 인터넷 투표가 진행되었고, 13일에 현장투표, 14일 ARS 투표가 진행되었다. 7월 15일 새벽에 개표가 완료되어 개표결과가 발표되었다.[14] 강기갑 혁신비대위원장이 예상보다 큰 표차로 당대표로 선출되었고, 이로 인해 당 쇄신작업과 이석기, 김재연 의원 제명, 그리고 민주통합당과의 야권연대도 지속될 거라는 전망이 있었다.
한편, 최고위원 5명을 뽑은 선거에서 신당권파가 2명을 차지하는데 그쳤지만[15] 최고위원회가 당 대표, 원내대표, 선출직 최고위원 5명, 부문(지명직) 최고위원 2명 등 9명으로 이뤄지는 것을 감안하면 신당권파가 6명을 차지하게 되어 구당권파는 당내 권력을 완전히 잃은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상당수 시, 도 위원장과 중앙위원 과반수[16]를 구당권파가 차지했기 때문에 구당권파에게도 힘이 꽤나 남아있었다.
5. 제명 실패와 파행
덕분에 구당권파 측에서 역습을 할 거라는 예상이 있었다.# 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아서 신주류에서 이석기, 김재연 의원 제명 의총을 한다고 밝히자 구당권파 측에서 기자회견을 잇달아 열며 반발하였다. 거기에 출당조치가 내려져 출당되었을 경우 바로 복당시킬 계획까지 짜고 있었다.# 2012년 7월 23일 의총에서 김제남 의원이 제명안을 7월 26일 중앙위원회 회의 이후에 처리하자고 하는 바람에 연기되었다.그리고 7월 26일 의총에서 제명안에 찬성할 걸로 보였던 김제남 의원이 기권표를 던지면서 제명안은 부결되었다.# 이로 인해 심상정, 정진후, 강동원 의원이 당 대표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히면서 강기갑 대표 체제가 타격을 입었다.
이 때문에 신당권파 측 의원들과 지지자들, 다수 당원들은 그야말로 멘탈붕괴 상태에 빠졌다. 어느 정도냐면 김제남 의원이 이전에 소속된 시민단체인 녹색연합까지 억울하게 욕을 먹었을 정도였다. 제명안이 부결된 다음날 강동원 의원이 기자회견에서 "김제남 의원은 도대체! 왜! 제명안을 처리하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배신했습니까!"라고 깠고, 이에 대해 김제남 의원이 해명하는 과정에서 기권표를 던진 이유를 혁신안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는 참으로 희대의 궤변을 날리면서 신당권파와 지지자들을 더욱더 환장하게 만들었다.[17] 이에 대해 박원석은 김제남이 자기가 혁신 종결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는데, 진짜로 혁신을 종결하게 되었다고 깠다.
이에 힘입은 구당권파는 진상보고서가 부실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신당권파를 압박할 수 있게 되었고, 거기에 민주노총의 지지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며 민주통합당과의 야권연대마저 불투명하게 되었다. 김제남 본인이야 당원들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이유로 태도를 바꿔 기권표를 던졌다지만, 통합진보당이 수도권에서 의석을 얻은 이유가 야권연대 덕분이었고 거기에 민주노총이 구 민주노동당의 전통적 지지세력임을 감안해본다면 차후 선거에서 쪽박찰 일만 남아있게 되었다는 걸 간과했다는걸 알 수 있다.
6. 집단탈당과 분당
김제남 의원이 이석기 김재연 출당(제명)안에 무효표(를 가장한 거부권)을 발동하여 출당을 무산시키자, 통합진보당 평당원들은 집단 탈당을 시작하였다.특히 국민참여당계 당원들이 많이 탈당을 하였으며, 국민참여당계 강동원 의원이 김제남 의원한테 배신감을 느낀다며 아예 대놓고 분당과 탈당을 언급하였다.#
민주노총 역시 분노했고 민주노총 금융노조 소속의 현대증권 노조가 가장 먼저 탈당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금속노조 박상철 위원장도 탈당하였다.#
2012년 7월 27일 하루에만 무려 1500여명의 당원이 탈당했다.# 그리고 일부 국민참여당계 탈당 당원들을 중심으로 이명박 대통령과 권재진 법무부장관 앞으로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해 달라는 청원을 했다.#
통합진보당은 통합을 선언한지 1년도 안 되어서 사실상 재분당 수순으로 들어섰다. 이 와중에 김미희, 김재연, 김선동, 이석기, 오병윤, 이상규 의원은 호소문을 내며 이제 갈등을 접고 화합하자는 내용의 호소문을 발표했으나 애초에 탈당계기를 만들어준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뭐라 할말이 없었다.
이 와중에 열흘동안 칩거하던 강기갑 대표는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기호, 정진후, 박원석 의원의 거취 문제 때문에[18] 실제 분당까지는 난관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초 분당까지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다. 일각에서는 구당권파가 김재연은 살리는 대신 이석기가 자진사퇴하여 당을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었지만 결국 그딴건 없었다. 되려 구당권파는 구 국민참여당의 빚까지 거론해 더 어그로를 끈 상황이었다. 더욱이 강기갑 대표의 계파로 분류되는 인천연합[19]도 분당 대열에 동참할 경우 계파 조직력이 흔들거릴 것이기 때문에 분당을 못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으나, 결국 분당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구당권파는 제2 당원비대위를 조직하겠다고 했다. 제2 당원비대위 운운은 신당권파의 분당 및 탈당 흐름에 제동을 걸려는 목적인 것으로 보였지만, 워낙 구당권파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 탓에 분당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구당권파는 분당과 탈당은 진보진영의 공멸이라고 주장하면서 묘하게 구 국민참여당계를 맹비난했다. 심지어 김미희 의원의 남편인 백승우는 유시민과 심상정은 노동자와 농민의 정당이라면서 왜 아메리카노 쳐드심?이란 글을 버젓이 올렸다. 통합진보당 아메리카노 커피 사건에 자세한 내용이 설명되어있다.
강기갑 대표는 구당권파에 대한 최후통첩 겸 분당을 위한 명분쌓기로 이석기, 김재연의 자진사퇴, 구당권파의 폭력사태 사과, 백의종군을 요구했다. 안철수가 제18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하면 민주통합당의 친안철수 성향 의원들과 시민사회단체, 통합진보당의 신당권파가 통합한 안철수 신당이 나올 것이라는 소문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민주노총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통합진보당 이탈은 늘어만 갔다. 2012년 7월 26일부터 8월 23일까지 6천여명의 당원들이 탈당했으며 8월 23일 이후에도 민주노총 서비스 연맹 조합원 3천여명도 탈당을 선언해 9천여명의 당원들이 탈당했다. 결국 구당권파가 발악할수록 통합진보당의 붕괴만 가속화되었다.
2012년 8월 28일, 민주통합당이 8월 29일에 열리는 최고위원 회의에서 통합진보당과의 야권연대를 철회할 것을 논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또한 이석기, 김재연에 대한 자격심사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누가 봐도 철회로 결론을 내려놓고 논의 절차만 거치는 것이 명백했던 상황이었다. 민주통합당은 앞으로 야권연대는 새로 태어날 진보당이나 안철수 교수와의 연대를 의미한다라고 선을 그어 신당권파의 신당을 지지하고 구당권파는 나가리시킬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민주통합당의 이런 전격행보에 따라 신당권파의 분당과 신당창당 움직임은 더욱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였지만, 민주통합당은 추후 논의로 이 사안을 미뤄버렸다.
2012년 8월 30일, 이상규 의원은 백의종군하라는 강기갑 대표의 발언에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며 사실상 최후통첩을 거부했다. 이상규는 이석기, 김재연의 자진사퇴에 대해서는 이미 절차상 끝난 일인데 재론할 필요가 없으며 폭력사태는 일방적인 의사결정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걸로 서로 분당할 명분이 전부 쌓였다.
그런데 2012년 8월 31일에 뜬금없이 이정희 전 공동대표가 대선 출마를 준비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신구 당권파가 제갈길을 갈 것이 분명해진 시점에서 이정희의 대권 출마 운운은 대단히 치졸한 정략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대선이 초박빙의 승부로 흘러갈 가능성이 큼에 따라 민주통합당이나 유력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안철수 측에 이정희의 지지율을 양도하여 야권연대에 참여하는 대신 일정 지분을 보장받겠다는 술수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여기에 대선 출마를 선언할 경우, 28억의 선거보조금이 나오기 때문에 이것도 고려 대상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진보개혁 성향의 네티즌들은 드디어 저것들이 대선까지 발목을 잡으려고 작정했구나라고 분개했다.
결국 당 최고위원회에서 혁신 재창당 안건이 상정되지도 못했고, 2012년 9월 6일에 개최될 예정이던 당 중앙위원회 개최까지 취소되면서 분당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강기갑 대표는 분당의 책임을 속죄하겠다는 의미로 물과 소금도 먹지 않는 단식에 돌입했고 신당권파에선 "남은 것은 질서있는 퇴장 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한편 이정희 대표는 대선 출마를 고민 중임을 시인해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2012년 9월 5일에 신당권파는 구당권파와 더이상 한 당에 있을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강기갑 대표가 단식중인 상황을 고려해서 구체적인 탈당 일정 발표는 뒤로 미루기로 했다. 가장 중대한 문제 중 하나인 김제남, 박원석, 서기호, 정진후 등 신당권파 소속 비례대표 의원들은 제명절차를 밟을 것으로 전해졌다. 현행 국회법상 비례대표 의원은 당에서 제명되어야만 의원직을 유지한 채 탈당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지방의원 11명도 같은 절차를 밟기로 했다.
2012년 9월 6일에 강기갑 대표는 희망의 끈을 놓겠다고 선언해 분당이 공식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네 명의 신당권파 비례대표 의원들에 대한 제명절차가 진행되어 서울시당 당기위에서 이들을 제명한 후 강대표가 주관한 의원총회에서 10명의 의원중 7명이 찬성해 제명이 가결되었다. 구당권파측은 셀프제명에 권한도 없는 강대표가 의원총회 주관이 말이 되느냐며 법적조치까지 불사하겠다고 말했다.
2012년 9월 10일에 강기갑 대표는 분당의 책임을 지고 당대표직을 사퇴한 뒤 탈당을 선언했다. 또한 진보진영 분열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겠다는 의미에서 정계은퇴도 선언했다. 강동원, 심상정, 노회찬 등 3명의 지역구 국회의원도 탈당을 선언하고 탈당한 4명의 비례대표 의원들과 합류하기로 했고 구 국민참여당계 당원 3천명은 이미 모아둔 탈당계를 한꺼번에 제출하기로 했다. 인천연합과 통합연대는 지도부의 방침에 따라 개별 탈당하기로 했다.
한편 구당권파는
2012년 9월 11일에 구 민주노동당의 핵심이었던 권영길, 천영세 전 의원이 탈당을 선언했으며 구 국민참여당계 3800여명이 일시 탈당했다. 이후 천호선 최고위원 등이 탈당했으며 마지막으로 유시민 전 대표도 탈당하면서 탈당이 마무리되었다. 탈당파들은 새진보정당추진회의를 결성하여 내부결속을 다지면서 창당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이후 정의당의 전신인 진보정의당을 창당했다.
한편 구당권파는 자기들만의 세계에 도취되어 강남스타일 말춤이나 추는 행태로 서기호 의원에게 비난받았다.
7. 제18대 대통령 선거와 그 이후
2012년 9월 25일, 경기동부연합의 이정희 전 대표가 미국대사관을 등지고 광화문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당 대표 대행을 지냈던 민병렬 최고위원도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당내 경선이 성사됐지만, 경선은 요식행위일 뿐이었고 결국 이정희 전 대표가 대선후보로서 확정되었다.후보 등록기간에 가장 먼저 등록해서 지지율도 낮은 후보가 제일 먼저 등록했다고 까였다. 여의도 텔레토비에서까지도 깠을 정도였다. 진보정의당이 심상정 후보의 정식등록을 포기하고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 지지를 선언한 것과는 상반된 태도라서 제발 문재인 후보 발목이나 잡지 말라는 태도가 야권 지지층들 거의 대다수의 태도였으나 이정희는 카이저 소제였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낙선시키려고 나왔다고 스스로 자처한 대로 1차 TV 토론에서 토론은 둘째치고 박근혜 후보를 매우 거세게 깠다. 심지어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본 이름인 다카키 마사오를 지상파 TV에서 대놓고 언급했을 정도였다. 원래 토론에는 약했던 박근혜 후보는 이정희 후보의 까기에 맥을 못추었으며 안철수의 사퇴와 박근혜 후보의 상승세에 침체된 분위기던 야권 지지층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물론 이때의 비난은 정치에 별 관심없던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한자리에 뭉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서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원인이 되었다.
방송이후 0%대이던 이정희 후보의 지지율은 1%대로 상승했고 문재인 후보 입장에선 한표가 아쉬운 상황이라 이정희 후보가 완주할지 안할지에 노심초사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결국 이정희 후보는 3차 TV토론 직전에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이정희 후보의 사퇴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재인 후보는 3%차로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했다. 패배의 원인에는 그녀가 지목되었다. 그녀가 분명 보수층들을 결집시키는 역풍을 불러온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침체되어 있던 야권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고 진보의 결집에도 나름 영향을 미치긴 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참고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은 재보선에서 상당한 역량을 보였다. 평균 20% 득표에 당선자 한 명은 호남에서 민주통합당과 경쟁, 한명은 완전 초선이었다. 거대 양당 외에 통합진보당을 제외한 어떤 정당도 이 같은 역량을 보일 여건이 없는 관계로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문재인 후보의 낙선 이후 새누리당의 정부 장악력이 아주 세진 상황에서 통합진보당의 미래는 매우 불투명해졌다. 결과적으로 놓고 봤을 때, 통합진보당은 이정희 후보의 존재감을 얻긴 했으나 종북세력이라는 낙인표는 모든 야권세력을 침몰시키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민주통합당과 안철수 세력, 진보정의당, 진보성향의 시민사회 세력들이 주축이 되어서 재편될 야권에서 통합진보당이 설 자리는 없어보였다. 그나마 다른 원내 진보정당인 진보정의당이 식물정당이 되어가서 한가닥 희망이 있나 싶었지만 2013년 1월 28일에 합의 추대형식으로 이정희 전 대표가 대표직에 복귀했다.
2013년 5월 15일에 이정희 대표는 변희재를 상대로 한 종북발언에 대한 명예훼손 재판에서 승소하여 종북논란에서의 깨끗함이 밝혀지고 1500만원의 배상 판결을 받았다.#[20]
노동현황에서 유력한 움직임을 보였었다. 노동, 학생, 청년 등의 운동권 분야에서도 조직력을 잘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내란혐의로 국정원과 검찰이 이석기 등 주요인물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면서 당 창당이래 최악의 위기상황에 빠졌다.
이후 2014년에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1000명 이상의 후보 선출을 선언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으나[21] 통합진보당 내란선동 사건으로 통합진보당은 해산되었고 결국 경기동부연합 계열은 회복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1] 이정희 대표는 결정이 잘못됐다고 후회한다고 한다, 당헌에 의하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처리했어야 했는데, 당내 문제는 당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유시민 대표의 말에 그렇게 결정했다고 한다.[2] 의장이였던 이정희 대표가 만장일치를 주장하며 끝내 표결에 부치지 않았다.[3] 피켓팅은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었다. 진보신당이 과거 민주노동당과 합당을 할 움직임이 보였을 때 진보신당 당원들은 회의장 앞과 안에서 조용히 피켓팅으로 의사를 표시한 바 있고, 진보정당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정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법이다. 평당원이 당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 중 하나다.[4] 2/3 이상의 다수로 가결될 것이 확실한 사안에 대하여 굳이 표결하지 않고 다수의 동의를 얻어 '만장일치'라고 선언하고 넘어가는 일종의 관행이 있으나, 100명 정도의 중앙위원 및 많은 평당원들이 반대하고 있던 상황에서 만장일치를 외친 것은 문제가 있었다.[5] 이 당원의 정체는 통합진보당 경기도당 여주-이천 지역위원회 소속 회계담당자인 24세(당시 나이) 박 모씨로 밝혀졌다.[6] 중앙일보 기자가 촬영했다. 1면 톱에 나와있다.#[7] 웃으면서 쥐어잡는 상황이라고 보기도 하나, 격한 몸싸움이 벌어진 정황상 전자 쪽이 들어맞을 듯하다.[8] 전략공천자는 여기서 제외되었다. 때문에 경선과 상관없이 공천을 받은 정진후, 김제남, 박원석, 유시민, 서기호, 강종헌 등 6명이 비례대표를 승계받아 국회에 입성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유시민 대표가 비례대표 승계를 고사하였다.[9] 김재연 당선자는 2012년 3월 20일 100분 토론에서 "말씀하셨던 부분(부정선거)이 사실로 밝혀지면 당연히 그렇게 (사퇴) 해야겠죠."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10] 이 소식에 대하여 진중권 교수는 "그것은 당과 관계 없는 사적인 동아리일 뿐이다" 라고 일축하였다.[11] 애초에 경기도당 위원장 안동섭이 경기동부연합의 실세파 중 한 명이자 민주노동당 출신으로, 5월 12일 킨텍스 중앙위원회에서 계속 필리버스터를 시도하여 회의 진행을 막고 유시민, 심상정, 조준호 공동대표단 폭행에도 가담한 사람이다.[12] 이로써 그 스스로의 입으로 진보통합을 가장 먼저 주장했기 때문에 아무리 짧게 잡아도 최소한 1년 전에는 당적도 없으면서 당을 배후에서 움직여왔다는 뜻이고, 그런 막후실세 노릇이 10년은 되었다는 증언등이 나와 그가 막후실세가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다. 그러나 이석기 의원은 cnp 대표이사로 함께 선거를 치러오면서 민주노동당과 인연을 맺었고, 진보언론 민중의소리의 이사를 맡기도 했다.[13] 이 사람은 2012년 6월 16일 1심 제명을 받았지만 6월 29일 사퇴했다.[14] 원래 14일 밤에 개표결과가 발표될 예정이었지만 개표작업이 늦어졌다.[15] 천호선 후보에게 표가 집중된 영향이 컸다.[16] 단, 이 경우는 울산연합 계열을 구당권파로 분류한 경우로 경기동부연합, 광주전남연합 계열로 한정할 경우 소수파가 된다.[17] 이 때문에 평소에도 구당권파와 가까웠고 이정희에 의해 정계에 진출한 김제남이 의도적으로 투표를 부결시키기 위해 신당권파를 속였다는 음모론이 나오고 있는데, 그의 앞뒤가 안 맞는 변명보다는 음모론 쪽이 훨씬 설득력이 있고 논리적이다. 그의 변명이 진심이었다면 이는 그의 사고구조가 정상인지 의심이 갈만한 수준이기 때문이다.[18] 당시 현행 공직선거법 제192조에는 "비례대표 의원이 탈당하면 의원직을 상실한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출당이나 당 해산을 통해 당직을 상실한다면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지만, 구당권파측에서 필사적으로 반대하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19] 울산연합의 경우 처음에는 신당권파와 함께 경기동부연합을 압박했으나 애매한 포지션을 취하더니 지도부 선거에서 구당권파와 함께하고 결국 통합진보당에 남았다.[20] 변희재는 일간베스트 등의 넷극우 집단에서 가장 활발한 이데올로거로 활약한 사람이다. 실제로 진중권 교수를 상대로 소송전에서 이겼던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그 위상은 상당히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소송전의 패배로 이정희나 통합진보당에 대해서는 사실상 입을 다물어 버린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21] 특히나 안철수와 단일화한 민주당이 기초무공천 논란에 빠져 재대로 된 후보도 선출하지 못한 상황에서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까지 겹쳐 무주공산이 되었기에 통합진보당의 역할이 커질 확률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