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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페르난데스(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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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 Sri[1] Anthony Francis Fernandes CBE[2]설득왕

1. 개요2. 뉴비 시절3. 에어아시아, 갑니다!4. 튠 호텔 개업과 그 이후5. 마케팅 끝판왕 페르난데스
5.1. 레이싱 스폰서5.2. 축구 스폰서
6. 그의 업적

1. 개요

말레이시아기업인. 인도계 말레이시아인이다. 튠 그룹의 공동 창설자이자 에어아시아CEO. QPR의 구단주이며 2014년까지 존재한 포뮬러 1 케이터햄 F1 팀의 대표.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은 남인도계 기독교도다. 인도 남부에 상당수 있는 가톨릭과 인도 독립교회 그리스도교도들은 포르투갈어 성명을 쓴다.[3]

2014년 12월 10일 박지성에어아시아 홍보대사로 임명하면서 기자 간담회를 열었는데, 허니버터칩땅콩 리턴 사건을 일타 쌍피로 엮는 입담을 보여 주었다.

2017년 10월 16일 말레이시아 현지언론 등에 따르면 토니 페르난데스 회장은 지난 14일 프랑스 남부 해안 코트다쥐르(Cote d'Azur)에서 클로이(Chloe)라는 한국 여성과 비공개 결혼식을 진행했다고 보도했다. 2021년 여름 득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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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토니 페르난데스 에어아시아 그룹 회장.ⓒ뉴 스트레이트 타임즈 홈페이지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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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비 시절

1964년 4월 30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의사인 아버지[4]와 사업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5] 어렸을 때 음악 교사였었던 어머니에 이끌려 모임에 참여하며 타파웨어 주방용품을 팔면서 마케팅 경험을 쌓았다. 어머니가 작사, 작곡한 노래를 페르난데스가 피아노를 치며 불렀고 손님들이 몰리면서 물품 판매도 많아졌다.

영국으로 조기 유학을 떠나 1977년부터 1983년까지 명문 엡솜 칼리지에서 공부하며 명문 런던 정치경제대학교에 입학, 1987년에 졸업한다. 영국 유학 시절 그는 방학 때 비행기표 값이 비싸서 집에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주 히스로 공항으로 가 이착륙하는 비행기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때부터 저가 항공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6]

1984년 개항한 항공사 버진 애틀랜틱항공에서 잠깐 감사인으로 일알바했다. 그다음 런던의 버진 레코드에서 회계사로 1987년부터 1989년까지 일했다.[7] 1991년에는 영국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취득한다.

말레이시아로 귀국한 다음 말레이시아 워너 뮤직 회사의 최연소 전무 이사가 되었다. 1992년부터 2001년까지 워너 뮤직 그룹의 동남아시아 지역 담당 부사장을 맡았다.

14년 동안 음반 업계에서 일하던 그는 워너 뮤직의 모회사인 타임 워너가 아메리카 온라인과 합병될 때 어렸을 적부터 꿈꿔 왔던 저가 항공사 설립을 위해 스톡옵션을 처분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정부는 새로운 항공사 인가를 거절했다.

3. 에어아시아, 갑니다!

"Now Everyone Can Fly"

하지만 말레이시아 정부 산하의 회사가 보유하고 있던 에어아시아의 실적이 부진하여 경영이 좋지 않자, 2001년 당시 말레이시아 수상이던 마하티르는 페르난데스에게 에어아시아의 인수를 제안했다.[8] 그는 낡은 비행기 2대와 1,100만 달러의 부채가 있던 국영 항공사를 단돈 25센트에 구매하게 되었다.
2001년 당시 말레이시아 전체 인구 중 비행기를 탄 사람의 비율이 6%에 불과할 정도로 요금이 비쌌지만, 에어아시아는 '이제 누구나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기존 항공 요금의 50%로 내렸다. 일부 구간은 버스 요금보다 저렴할 지경이었다.[9]

그래도 항공 업계는 '에어아시아가 뭔가요? 먹는 건가요?'라며 조만간 망할 것으로 일축했다. 그 당시 9.11 테러의 영향으로 항공 수요가 크게 줄고 사스, 조류 인플루엔자가 아시아 대륙에 적지 않은 피해를 끼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페르난데스의 진두지휘 하에 에어아시아는 1년 만에 승객 100만명을 돌파하고 모든 부채를 갚으며 매출은 흑자로 돌아서게 된다. 페르난데스는 그 당시 위기가 오히려 기회였다고 말한다. 9.11 테러 이후 항공기 임대 비용이 40% 줄어들었고 다른 항공사에서 해고된 직원을 쉽게 데려올 수 있었다. 게다가 에어아시아 노선의 절반 가량은 다른 항공사가 취항하지 않은 곳이었다. 또 말레이시아 여행객들이 기내 서비스가 없는 대신 시간과 비용을 줄이는 걸 선호할 것을 믿어 아일랜드라이언에어 방식을 그대로 채용했다.

수상이 했던 말을 나중에 이해한 페르난데스는 당시 항공업계의 관행은 단순한 일도 복잡하게 만들고 값싸게 처리할 수 있는 것도 비싸게 하는 둥 비합리적인 일이 많아 자신이 항공업계에 전혀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가지 예로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어아시아격납고를 지으려고 전문 건설업자에게 의뢰하니, '2000만 달러 주셈'이라고 했다. '비행기 창고치곤 너무 비싸지 않나' 싶던 페르난데스는 자신의 저택을 지어 준 건설업자에게 똑같이 물어 보니 '헤헤, 사장님 50만 달러면 떡 치는구먼요'라고 말했다. 40배의 차이가 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격납고 설계와 공법으로 특허까지 받았다. 그래서 다른 항공사에서 에어아시아에 격납고를 지어달라며 특허료를 지불했다. 전혀 다른 사업에서 경험을 쌓은 페르난데스이기에 가능했던 것. 비용을 줄이는 방법이란 방법은 무엇이든 찾아내며 에어아시아 비행기는 공중에서 감속하면서 착륙해 기름과 타이어 마모도를 줄인다고 한다.

사스가 터졌을 땐 오히려 홍보 비용을 세 배로 늘리며 요금을 추가 할인하며 비행편을 절대 취소하지 않았다. 다른 항공사와 정반대로 사업했으며 페르난데스는 마케팅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브랜드를 알리는 데 전혀 돈을 아끼지 않되[10] 광고를 최대한 단순하게 하여 '값이 싸고, 취항지가 많다'가 끝이다. 언론과 항상 접촉하고 트위터 등의 매체로 끝없이 자신을 알리며, 에어아시아 직원에게도 마케팅 교육을 철저히 시킨다. 조종사가 기내 방송으로 친절하게 이착륙 정보와 관광지 가이드를 안내한다고 한다.

그렇게 악착같이 경영하여 10년 동안 순수입이 연평균 57% 증가하는 고속 성장을 이뤘다고 한다. 고정관념에 항상 도전해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왜 그렇게 해야 하냐'라며 깨부쉈다. 기존 항공사와 다르게 사업하기 위해 항공업계의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의 인재를 데려왔다. 자회사 사장 중 가수 출신도 있다고 한다.

저가 항공사 덕분에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본 적 없는 사람들이 자주 타게 되었으며 그와 관련된 여행, 관광업계 이외 많은 업계가 활성화되었다. 동남아시아한류의 영향이 매우 커 저가 항공으로 대한민국 관광을 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니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지금은 유럽아메리카를 제외한 나머지 대륙 14개 노선 100개의 비행기를 띄우는 아시아 최대의 저가 항공사다. 스카이트랙스에서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좋은 저가 항공사 순위 2009, 2010, 2011년 연속 1등을 하였고 포브스의 2010년 아시아 최고의 기업인으로 선정되었다.

2012년 6월 파리 에어쇼에서 에어버스A320 Neo 200대(180억 달러)를 주문하여 2016년부터 순차적으로 운항한다. 파리 에어쇼 최대 규모이자 에어버스 사상 세 번째 규모다.

4. 튠 호텔 개업과 그 이후

튠 그룹 회장인 페르난데스는 2007년 '5성급 수면, 1성급 가격'을 캐치 프라이즈로 잡은 튠 호텔을 개업했다. 제한된 서비스를 받는 호텔로 저렴하지만 다른 서비스를 요청하려면 돈을 내야 한다.사실상 여관이다 첫 번째 호텔은 쿠알라룸푸르 중심가에 있으며 말레이시아 구석구석 호텔을 확장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영국, 필리핀, 태국,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등 외국에도 튠 호텔을 개업했으며 2015년까지 전 세계에 100개의 지점을 만들 예정이다. 튠 호텔 숙박기

2008년 영국 공인회계사협회 회원이 된다.

2009년 ASEAN 농구 리그 단장을 맡으며 아세안 지역 스포츠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말한다.

자신이 졸업했던 명문 학교인 엡솜 칼리지의 분교를 말레이시아에 세웠다. 전교생 중 3분의 1은 전액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한다. 에어아시아 직원 중 조종사가 되고 싶은 사람에겐 항공 학교에 다니게 해준다. 비지니스 학교를 설립할 계획도 세웠다.

2010년 페르난데스는 4억 달러의 재산으로 포브스가 추산한 말레이시아 부자 순위에서 19위를 차지하였다.

튠 그룹은 프리미어 리그, 챔피언쉽 리그, 리그1, 리그2, 잉글랜드 FA컵의 공식 스폰서이기도 하다. 영국 프로축구심판협회를 2010-11 시즌부터 3년 동안 후원하며 이전에는 에어 아시아가 제휴했었다.

그가 창업한 튠 그룹 자회사 목록
Tune Air[11] Tune Hotels[12] Tune Talk[13] Tune Money[14] Tune Sport[15] Tune Tones[16]

5. 마케팅 끝판왕 페르난데스

회사 광고 마케팅의 최고는 스포츠 구단의 스폰서가 되는 것이다. 그는 포뮬러 1에 먼저 손을 댔다.

5.1. 레이싱 스폰서

2010년 말레이시아 F1 팀을 창단하면서 로터스 그룹으로부터 팀 이름을 따내 '로터스 레이싱'으로 F1에 참가했었는데 로터스 그룹이 갑자기 명명권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별수 없이 과거 F1에서 사라진 '팀 로터스'의 명명권을 소유하고 있던 데이비드 헌트에게 명명권을 사면서 2011 시즌부터 '팀 로터스'로 이름을 바꾼다.

하지만 '로터스'라는 이름이 들어간 모든 재산권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주장한 로터스 그룹이 F1 스폰서로 합류하면서 F1에는 '팀 로터스'와 '로터스-르노 GP'가 공존하게 되었다. 명명권을 두고 법정 분쟁이 발생하고 런던 법원은 '팀 로터스'가 F1에서 팀 명을 정당하게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면서, 라이센스 계약이 종료되었어도 '로터스 레이싱' 명칭을 사용한 것에 대한 로터스 그룹의 손해배상 청구를 인정하며 양측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로터스'라는 이름이 공존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로터스 그룹이 상고 의사를 밝히면서 법정 공방이 장기화될 것으로 보였지만 빡친 페르난데스는 2011년 투자자와 함께 영국의 자동차 브랜드 케이터햄을 인수하고 2012년 팀 이름을 '케이터햄 F1 팀'으로 바꾸면서 모든 공방은 끝이 났다.

법정 소송을 마치며 기분 좋게 2012 시즌을 시작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19라운드 동안 10위안에 들지도 못하며 포인트를 전혀 얻지 못했고 F1 WCC 11개 팀 중 10위로 시즌을 마무리하였다. 그나마 비탈리 페트로프가 마지막 브라질 그랑프리에서 11위를 기록한 게 최고 등수. 2년 연속으로 0포인트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자...

페르난데스 구단주는 '케이터햄을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겠다'며 눈물 나는 결정을 내렸다.그러나 여전히 케이터햄 대표

F1의 2010년 시즌 시작 전 자신이 잠깐 일 했었던 영국의 저가 항공사 버진 애틀랜틱 항공의 사장 리처드 브랜슨에게 컨스트럭터 순위에서 지는 쪽이 이긴 팀의 항공사 스튜어디스 제복을 입는 내기를 제안했다. 결국 승부는 리처드 브랜슨이 졌고 그는 에어아시아 여자 승무원 제복을 입고 일일 승무원으로 일했다.

단순히 F1만 하는 것이 아니고 케이터햄 그룹에는 F1과 GP2에 참여하는 케이터햄 F1 팀, 자동차를 제작하는 케이터햄 자동차, 에너지 드링크인 EQ8을 판매하고 있다. 또한 2012년에는 당시 자우버첼시 FC와 파트너십을 맺어 첼시 로고를 C31 차에 붙여준 것처럼 후술할 자신이 최대 구단주인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 로고를 케이터햄 CT01에 붙여 홍보하기도 하였다.

2014년 7월, 결국 케이터햄을 스위스-아랍 컨소시엄에 매각했다. 케이터햄 F1 팀은 2010년 로터스 레이싱 시절부터 2014 시즌까지 단 1포인트도 획득하지 못했는데 라이벌 팀 마러시아 F1 팀모나코 그랑프리에서 포인트 2점을 획득하고 F1이 갈수록 대형 팀들 위주로 굴러가면서 결국 못 버틴듯.[17]

5.2. 축구 스폰서

페르난데스는 웨스트 햄 유나이티드 FC퀸즈 파크 레인저스 FC의 팬이었다고 한다. 웨스트 햄의 극렬 팬이어서 2011년 5월부터 웨스트 햄을 사기 위해 노력했지만 웨스트 햄 구단주들이 제안을 거절해서 구매하지 못했다고 한다.여기서 운명이 갈렸다

그러던 2011년 8월 버니 에클레스톤과 플라비오 브리아토레[18]의 지분 66%를 3500만 파운드에 사들이면서 최대 주주로 구단주가 되었다. 사실 나머지 33%를 보유한 주주가 락시미 미탈로 재산이 20조 원이 넘지만[19] 구단에 투자는 전혀 하지 않아[20] 많은 서포터즈가 실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구단주가 되고 나서 QPR은 상당한 투자를 받게 된다.

그가 구단주가 된 다음 영입한 목록
조이 바튼, 루크 영, 아르망 트라오레, 숀 라이트 필립스, 안톤 퍼디난드, 네덤 오누오하, 지브릴 시세, 바비 자모라, 라이언 넬센, 앤디 존슨, 로버트 그린, 삼바 디아키테, 박지성, 주니어 호일렛, 조제 보싱와, 줄리우 세자르, 에스테반 그라네로, 샘 마그리, 스테판 음비아, 탈 벤 하임, 로익 레미, 윤석영, 크리스토퍼 삼바, 저메인 제나스, 앤드로스 타운센트
그가 오기 전과 비교하면 상당한 선수들이다.

QPR 구단주의 눈물 나는 이야기는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2012-13 시즌에서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2012-13 겨울 이적 시장에서 2000만 파운드 넘게 지출한 것이 무모한 투자가 아니라고 밝혔다. 인생을 건 최고의 도박을 울면서 즐기고 있는 페르난데스 구단주

F1과는 다르게 강등한다 해도 QPR에서 손을 뗄 생각이 없다고 한다. 프리미어에 있든 챔피언십에 있든 새로운 아카데미와 경기장을 지을 계획이며 구단에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데, 팬들은 눈물만 나온다.

에어아시아 홍보를 위해 KBS VJ 특공대 2013년 3월 22일 방송븐의 "세계의 하늘을 누벼라, 새내기 승무원의 지옥 훈련" 꼭지에 20초 정도 출연했다. 여전히 지성팍에 대한 사랑을 보여줬다.[21]

2012-13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한 QPR이 1시즌만에 다시 프리미어로 승격했기에 그의 설득왕 시즌 2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2014-15 시즌에 한 시즌만에 다시 강등 당하면서 아직까지 챔피언십에 머무르고 있다.

6. 그의 업적

페르난데스는 에어아시아를 이끌면서 상당히 많은 성과를 거뒀다. 실패한건 축구랑 F1, 케이터햄 뿐이다

가장 큰 업적은 에어아시아를 국제 항공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다른 나라의 영공 개방이 되지 않았지만 2003년 마하티르 수상과 결탁, 태국과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국가에 로비 활동을 펼쳤다. 그 결과 에어아시아와 다른 항공사의 운항을 허락하였다. 지역항공사 예산 집행 기구를 열었고 지금은 동남아시아의 저가 항공사들을 관리하고 있다.

말레이시아의 파이어플라이, 싱가포르의 타이거 에어웨이즈, 스쿳, 발루에어, 젯스타 아시아, 태국의 녹에어, 타이 라이온에어, 베트남의 젯스타 퍼시픽,비엣젯 항공, 인도네시아의 라이온에어[22], 말린도 에어, 필리핀의 세부 퍼시픽이다.

그리고 태국과 인도네시아 현지 회사의 소수 지분을 잡았다. 태국에서 가장 큰 통신회사인 shin과 합작한 '타이 에어아시아'는 2004년 2월 개항하고 매년 100만 명 이상의 승객을 유지하고 있다. 저가 항공사인 'PT 어에어'가 2004년 12월 '인도네시아 에어아시아'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시작해 현재 인도네시아의 다섯 개의 국내 목적지에 공급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업적으로 여러 가지 상을 받았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서 다음과 같은 에어아시아에서의 뛰어난 업적을 기려 Visionaries & Leadership Series에 선정했다.
2003년 '올해의 말레이시아 CEO'
2003년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와 비지니스 타임즈가 선정한 '올해의 CEO 상'
2003년 언스트 앤 영에서 선정한 '올해의 장래 유망시되는 기업가 상'
2005년 블룸버그 비지니스위크에서 선정한 '아시아의 25개 별'
2006년 말레이시아 언스트 앤 영에서 선정한 '올해의 기업가'
2009년 '아시아 태평양 지도자 상'
2010년 포브스에서 선정한 '올해의 아시아 사업가'
2011년 패스트 컴퍼니에서 선정한 '비지니스 업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100인'중 52위
2011년 CNBC에서 선정한 '여행업계 지도자 상'
2011년 영국에서 개최된 제5회 저가항공사시상식에서 선정한 '올해의 CEO'
2012년 인도 GQ가 선정한 '올해의 글로벌 사업가'
페르난데스는 말레이시아 국왕으로부터 Tan Sri, Dato' Sri 작위를 받았고 201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오피시에를 받았다. 2011년엔 영국과 말레이시아 간의 교육과 상업 교류를 증진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대영제국 훈장 3등급 명예장(honorary CBE)을 받았다. 2013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로 승급되었다.


[1] 말레이시아에서 2번째로 명예로운 연방 작위로 외국인을 제외한 75명 만이 소유할 수 있다.[2] 2011년 받은 3등급 대영제국 훈장의 약자. 영연방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이 받는 명예장이고, 등급 또한 2등급 미만이라 기사 칭호(Sir)와는 관계가 없다. 나중에 영연방과의 지속적인 교류와 공헌이 인정되어 1등급이나 2등급 명예장을 받더라도 영연방 시민권을 등록하지 않으면 역시 SIr 칭호는 붙지 않는다. 외국인이 영국의 군주에게 기사로 서임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시로, 前 타타 그룹 회장 라탄 타타(Ratan Naval Tata)는 2009년 2등급 명예장, 2014년 1등급 명예장을 받았지만 그의 이름 앞에 Sir 칭호가 붙지는 않는다.[3] 말레이시아의 국교는 50%를 차지하는 이슬람교쿠알라룸푸르는 수도 국립 모스크인 마스지드 네가라(Masjid Neegara)가 있을 정도로 골수 무슬림 국가이다. 기독교도는 화교와 말라카에 잔류한 남인도인들 뿐이다. 그나마 인도계 내에서도 기독교도는 소수이고 주류 그리스도인은 전부 중국계이다. 이 나라 중국계 여자들에게서 아그네스나 안젤리카, 베로니카, 마리아, 스텔라 등 세례명을 흔히 볼 수 있다.[4] 그의 아버지는 세계보건기구 말라리아 퇴치 프로그램에 참여해 말레이시아에 왔다가 정착했다.[5] 그의 부모 모두 포르투갈인도계통 집안 출신이다. 그래서 외모는 인도사람이지만 가톨릭교도이며, 성씨가 '페르난데스'인 것.[6] 1980년대에는 저가 항공사는 그리 많지 않았고 대다수가 플래그십 아니면 대형항공사들이었다. 그래서 항공권이 매우 비쌌다. 지금도 싼 것도 9만원 아니면 10만원으로 싼 건 아니지만 20년전에 비해 많이 저렴해진 것이다.[7] 뜬금없지만 영국에 있는 동안 아마추어 기타리스트였고 피아노 8급을 따는 등 음악에 대한 열정이 있어 관련 산업에서 일을 시작했다.[8] 이 때 마하티르 수상은 페르난데스에게 '넌 항공 사업을 해 본 적 없으니까 성공할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9] 당시 쿠알라룸푸르~페낭 구간 39링깃, 버스로 40링깃.[10] 많은 이들이 알다시피 스포츠 구단으로 홍보한다.[11] 에어아시아와 에어아시아X가 포함되었으며 2007년 설립한 에어아시아X는 장거리 저가 항공사다.[12] 아무리 그래도 호텔은 호텔이기에 여관 따위와는 비교가 불허다.[13] 이동통신망사업자에게 통신망을 임대받아 독자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체로 2009년 선불제 통신 서비스를 시작하였다. 말레이시아 가상이동통신망사업자로 생각하면 된다.[14] 생명 보험과 포괄적 보험, 형편에 맞는 선불 크레디트 카드 등 금융 서비스를 제공받도록 하는 온라인 회사다. 2007년 이후로 튠 토크와 튠 호텔의 연계하여 서비스되고 있다.[15] 케이터햄과 QPR, 농구 등 스포츠와 관련된 사업을 하고 있다.[16] 미디어와 창조적인 산업에 투자하고 감독한다. 콘서트나 영화를 제작하며 장려한다.[17] 그 당시 포인트를 획득하였던 마러시아 드라이버는 쥘 비앙키 였는데 안타깝게도 일본 그랑프리에서의 사고로 2015년에 세상을 떠났다.[18] 이탈리아인 사업가이며 무려 23세 연하인 슈퍼모델 하이디 클룸과 교제하여 딸 레니를 낳았으나 갈라선 후 딸은 클룸이 키우고 있다.[19] 주식이 대다수라 재산 액수가 자주 바뀐다.[20] 이적료로 겨우 100만 파운드만 썼다.[21] 박지성과 토니 페르난데스의 관계는 선수와 구단주 이상의 관계인 것으로 유명하다. 박지성이 PSV 아인트호벤의 임대생활이 끝나고 나서 원소속팀인 QPR에 복귀를 할지, 은퇴를 할지 논의를 위해서 서로 만났는데 박지성은 은퇴하는 의사를 밝히자 토니 페르난데스는 '벤치에 앉아만 있어도 좋으니까, QPR에 있어만 달라'라고 했다. 그리고 박지성이 그라운드에서 뛸 수 있을 때 은퇴해야한다는 자신의 뜻을 밝히자, 아무런 미련없이 그를 놓아주었다.그리고 기어이 광고도 함께 찍었다.[22] 아일랜드Ryanair와는 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