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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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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상황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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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colcolor=#ece5b6> 한 추존 황제 태상황 | 太上皇 | |||
출생 | 기원전 270년 추정[1] | ||
초 패현 풍읍 중양리 (現 장쑤성 쉬저우시 페이현) | |||
사망 | 기원전 197년 8월 7일 (향년 70~80대) | ||
전한 장안 악양궁 (現 산시성 시안시) | |||
능묘 | 만년릉(萬年陵) | ||
재위기간 | 전한 태상황 | ||
기원전 201년 ~ 기원전 197년 8월 7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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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미상[2] | ||
부친 | 유인 | ||
배우자 | 소령황후 유온, 소령황후 이씨 | ||
자녀 | 4남 1녀 | ||
자 | 집가(执嘉) | ||
시호 | 태상황(太上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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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태공(劉太公)은 전한의 초대 황제가 되었던 고제 유방의 아버지이자, 전한의 추존 황제이다.태공이란 뜻은 어르신을 의미하며 실제 이름은 아니다.[3]
본디 태상황이란 중국의 황제가 자신의 아버지를 추존할 때 쓰던 칭호인데[4], 유태공과 한고제와의 위계를 정하기 위하여[5] 만들었다.
칭호를 만들 때, 기본적으로 유태공은 고조 유방의 아버지였기에 '크고 높다'는 '태상'(太上)을 두고, 황제(皇帝)의 글자에서 천자의 아비이므로 '황'(皇)자를 넣었으며, 정치엔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나라를 통치하다'라는 뜻을 가진 '제'(帝)를 떼어 태상황(太上皇)이라 했다. 이에 유태공은 태상황에 오르게 되었다.
이 선례는 후대에 물러난 중국 황제들이 태상황이 되는 것의 시초가 되었으니, 유태공은 중국 최초의 태상황인 것이다.
2. 생애
본래 평생을 고향인 패현 풍읍에서 평민으로 살았으나, 아들인 유방이 군세를 일으켜 군벌이 된 이후로는 다른 식솔들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이곳 저곳을 옮겨 살았다. 그러다가 팽성대전 당시 미처 유방이 챙기지 못해서 며느리인 여후 등과 함께 항우의 포로가 되었고, 이후 광무 대치때 항우가 태공을 높은 단 위에 올려놓고는 유방에게 항복하지 않는다면 태공을 삶아서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런데 이때 유방이 항우에게 던진 말이 가관이었다.너와 나는 의제 앞에서 형제의 의를 맺지 않았느냐? 그러니 내 아버지는 네 아버지도 된다. 한데 굳이 네 아버지를 네가 삶아 죽이겠다면 말리지 않을 테니, 그 국물이나 내게 한 사발 보내도록 하라!
이는 엄연히 정사인 《사기》 <항우 본기>에 전하는 기록이다. 게다가 항우는 귀족 출신이라 욕설에 그다지 익숙하지도 않았고, 거친 욕설을 잘했다는 유방 성격상 이런 말만 덤덤하게 했을 리는 없을 테니 차마 사서에 싣기 힘들 정도의 욕설과 조롱을 더 날렸을 것이다[6]. 즉 저 패드립도 사서에서 필터링을 거쳤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이런 역사에 길이 남을 패드립에 항우는 기가 막혀 유방을 상종도 못할 천한 것이라며 날뛰었으나, 인질극 따위는 유방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한 항백이 항우를 만류하여 유태공을 죽이지 못하도록 했다. 항우가 홧김에 유태공을 죽인다고 한들 이미 유방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스탠스를 취한 셈이라 아무 영향도 없으며, 남의 아버지와 마누라 목숨으로 인질극 협박이나 하고 죽여버리면, 되려 안그래도 악명이 자자했던 항우의 위신을 갉아먹는 역효과만 불러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항우는 왕릉의 어머니가 유방 편을 들며 자살했다는 이유로 시체를 팽형해버린 전적이 있었다.
이후 전세가 점차 유방 측에 유리하게 돌아가게 되자, 기원전 203년에 유방은 육고(陸賈)[7]와 후공(侯公) 등을 항우에게 보내서는[8] 천하를 양분할 것을 약속하면서 항우에게 사로잡혀있었던 부모와 처자식 등을 비롯한 식솔들을 돌려받았다. 유태공도 이때 살아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유태공은 저런 패드립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딱히 아들 유방을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판본에 따르면 광무 대치 당시 이런 아들의 패드립을 듣고 껄껄 웃었다고 한다.
이후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5일에 한 번씩 아버지인 태공을 찾아가 문안 인사를 드렸는데, 이때 이미 유방이 황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서로를 평민의 예로 대했다. 기원전 201년, 집안에서 유태공을 모시던 한 신하가 아무리 유방이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이니 예법에 맞게 영접해야 한다고 간했다. 유태공 또한 그 말을 받아들였고, 이후로 유방이 찾아올 때마다 문 앞에 빗자루를 들고 서있다가 천자를 대하는 예를 갖추어 뒷걸음질을 하며 아들을 맞이했다. 유방은 처음에 이를 보고 당황했으나 자초지종을 알고는 태공에게 간언을 한 신하에게는 500근의 황금을 상으로 내렸다. 그리고
"자식이 뛰어나면 아버지가 높아지는 게 도리지. 내가 천하를 평정한 건 전부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다."
라며 유태공을 태상황으로 추대했다.그 외에도 유태공에 대한 일화가 몇 가지 더 전한다. 유태공은 오래전부터 건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던 유방보다는, 농사를 지으며 성실하게 가장 노릇을 했던[9] 둘째 아들이자 유방의 형인 유중을 더 사랑했다. 훗날 황제가 된 유방은 자신의 형인 유중을 대왕(代王)에 봉했는데, 그는 흉노와의 싸움에서 크게 패배하여 봉국을 버리고 달아나는 바람에 합양후로 격하당했다. 뒤에 유방이 미양궁에 집안 사람들을 불러서 아버지 태공의 장수를 기념하는 연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아버지에게
"옛날에 저보고는 생업도 꾸리지 못하고 둘째 형처럼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어디가 더 의지가 되십니까?"
라며 농담을 했다고 한다. 유방은 젊은 시절만 하더라도 집안에서 나잇값도 못하는 천덕꾸러기 따위로 취급받았는데, 그 때문에 출세한 후에는 오히려 자신이 심술궂은 말들을 던지며 식구들에게 은근히 뒤끝을 부렸다. 그 유명한 갱갈후 사건[10]만 보더라도 감이 잡힐 것이다.[11]그러나 유방이 심술궂게 굴긴 했어도 그렇다고 해서 유방이 아버지 태공을 홀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서경잡기》에 따르면, 유태공은 본래 민간에 살던 사람이라 장안의 깊은 궁전으로 옮겨온 후에는 늘 우울해하기만 하고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유태공은 평생 동안 백정, 장사꾼, 술장수, 떡장수 등을 비롯한 거리의 평민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닭싸움이나 축국 등의 놀이를 좋아했고 자유롭게 살았기 때문에 적막하기 그지없는 궁궐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방이 이를 알고는 아버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하여 장안 근방에 고향인 풍읍을 본떠서 신풍이라는 마을을 만들고는 고향 사람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이에 유태공도 무척 기뻐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유태공은 황제가 된 아들 유방으로부터 나름대로 잘 대접을 받고 살다가 기원전 197년에 사망했다. 능호는 만년릉(萬年陵)이다. 아들 유방은 2년 뒤 경포를 토벌하다가 입은 중상이 덧나 붕어했다.
참고로 중국의 황제 중에 39명이 유태공의 후손이다. 아들 유방의 후손이 전한, 후한, 촉한을 이어나갔고, 거기다가 막내아들인 유교의 후손이 유송까지 세웠다.
3. 가계
- 조부: 유청(劉淸)
- 부친: 유인(劉仁)
- 본인: 태상황(太上皇) 유태공(劉太公)
- 배우자: 태상황후(太上皇后) 유온(劉媼)
- 아들: 무애왕(武哀王) 유백(劉伯)
- 아들: 대경왕(代頃王) 유중(劉仲)
- 아들: 전한 초대 황제 유방(劉邦)[12]
- 배우자: 태상황후(太上皇后) 이씨(李氏)
- 아들: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
알다시피 배우자인 유온(劉媼)이나, 유백(劉伯), 유중(劉仲) 등은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이름이라기엔 애매한 위치에 있다. 유태공이 본명이 아닌 것처럼, 유태공의 아내 유온 역시 이름이 아니다. 온(媼) 자는 "할머니" 정도의 뜻이다. 거기에 성씨도 실제 유씨인지 확실하지 않은 판. 즉 이 이름을 풀면 "유씨 집안의 할머니" 정도의 의미가 된다.
마찬가지로 유백, 유중 역시 실제 이름이긴 하나 "첫째, 둘째" 등의 뜻이다. 백중숙계 항목 참조. 실제로 한고제 역시 본명은 유계였다. 이는 막내라는 뜻. 이러한 사실은 유태공의 집안이 별 배경 없는 평범한 백성의 집안이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4. 매체에서의 등장
<초한전기>에서는 유방이 노관의 노름빚을 대신 갚아주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나이를 먹고서도 마땅한 일 하나 없이 건달짓이나 하는 아들이 한심했는지 가족의 법도대로 매를 치지만 나이가 있는 데다가 어이가 없어선지 몇대 치다 만다.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라고, 사고를 치는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기도. 유방이 진나라의 법 때문에 노역을 가며 배웅을 할 때도 울먹였고, 유방도 내심 마음에 걸린지 한번 더 큰절을 올린다. 아들이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도주하자 유태공과 여치도 옥에 갇히지만, 유방이 평소 인망을 쌓은 덕분에 조참, 하후영, 주가 등 여러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으면서 아들의 인맥에 내심 감탄하기도. 유방의 거병 후 옹치가 반란을 일으키자 가족들과 억류되었다가 풀려났고, 이후 한왕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며느리 간의 다툼을 비롯한 이런저런 트러블에 말려들기도 했다.유방이 한왕이 되고, 좀 팔자가 피나 싶었지만 팽성대전에서 초군의 포로로 붙잡힌 뒤 또 고초를 겪는다. 손목을 그어 자살을 하려 했지만 며느리들이 늦지 않게 발견한 덕분에 살아남는다. 시간이 한참 흘러 광무대치 땐 답답했던 항우가 유태공을 끌고 나와서 팽형을 해버리겠다고 유방을 협박하지만 유방이 위에도 서술된 것처럼 패기있게 뻗대고선 돌아가버리자 항우가 풀어주면서 겨우 한 숨을 돌린다. 하지만 유방도 아버지가 걱정된 나머지 막사로 돌아가자마자 통곡을 했고, 소하와 항백의 협상을 통해 아버지와 가족들을 풀어주도록 해서 겨우 다시 돌아올 수 있게 된다. 여치 못지 않게 온갖 고생을 다 하지만 더 이상의 출연은 없어서 통일 후 유방과 유태공의 이런 저런 에피소드는 나오지 않은 점이 아쉽다. 대신 마지막 화에서 황제가 된 유방이 패현의 자신의 옛 집으로 잠시 들렸을 때 아버지와 가족들의 옛 모습을 회상한다.
[1] 아들인 유방이 50대에 죽은 것으로 보이니 그 아버지인 유태공은 사망 당시 70~80대였을 것이며, 대략 기원전 270년대 사이에 태어났을 것이다. 잘하면 범증과도 나이 차가 별로 없었을 수도 있다.[2] 《사기》나 《한서》에는 태공(太公)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태공은 노인에 대한 존칭이니 요즘으로 치면 그냥 '어르신'이다. 공식적인 사서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일설에 의하면 이름이 단(煓)이고, 자가 집가(執嘉)였다고 하나 정확하지 않다. 말 그대로 일설일 뿐이다.[3] 본디 공(公)이라는 글자가 현대에는 작위인 공작으로 더 유명하나, 사실 고대 중국에선 나이 많은 노인을 공경하기 위해 쓰는 말이었다.[4] 진시황이 황제가 된 이후 자신의 아버지인 장양왕을 황제로 추존하면서 태상황이라는 시호를 올렸다.[5] 유방이 천자가 되어서도 유태공과의 예를 사가에서처럼 지내니, 유방은 천자인데 평민인 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리는 건 천자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것이었고, 이 점을 신하들이 문제삼았다. 그래서 칭호 신설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었다.[6] 항우가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던 폭군인 것이랑은 별개로 엄연히 뼈대 있는 귀족 가문의 자제였으므로 개인적으로는 기품이 있는 사내였다. 언어생활이 많이 자유로워진 현대에도 욕설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은 못 배웠다는 소리를 듣곤 하는데, 신분에 따른 환경 차이가 엄격하던 당시라면 오죽할까. 즉 배울 만큼 배웠고 나름대로 예절이 있는 환경에서 자란 항우에게 동네 백수 건달 출신인 유방이 퍼부은 욕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고수위의 욕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훗날 조선의 효종 역시 이 이야기를 두고 '이게 차마 사람이 할 수 있는 소리란 말인가.'라고 혀를 내두른 적이 있었다.[7] 역이기와 같이 <역생육가열전>에 실린 육가를 가리킨다.[8] 육가가 처음에 갔을 때 응하지 않자 두 번째로 후공이 파견되어 약조가 성사되었다.[9] 첫째 아들 유백은 일찍 죽었다.[10] 전말은 다음과 같다. 유방은 과거 젊었을 때 동네 건달들과 어울리며 저잣거리에서 패싸움을 벌이거나 술놀이에 끼어 새벽에 주사를 부리는 등 여러 사고를 치는 바람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자 패거리들을 끌고 큰 형 유백의 집에 들어앉아 밥이나 축내고 있었다. 당연히 형수는 이를 몹시 싫어 했는데 유방이 꼴보기 싫은 나머지 그가 국 좀 더 달라고 하자 대접할 국이 다 떨어 졌다는 듯이 국이 담겨 있는 솥의 밑바닥을 들으라는 듯이 크게 긁어 대었다. 이러한 노골적인 면박에 크게 거북해진 친구들은 집을 나갔고, 이후 유방이 솥을 확인 해보니 국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과 관계를 쌓는 것을 좋아하며 일단 만나는 사람들에 대해 크게 베풀기를 좋아하던 유방의 입장에선 크게 감정이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후 황제가 된 유방은 자신의 형제들을 모두 제후에 임명하고 봉토를 하사했지만 형수에 대한 섭섭함이 남아 있던 나머지 큰 형과 형수 사이에서 태어난 신(信)이라는 아들에게는 작위와 봉토를 하사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유방의 부친인 유태공이 봉토를 하사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자 유방은 '조카를 잊은 것은 아니지만 형수가 소인(小人)이어서 은혜를 베풀지 않았을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후 아버지의 간청을 무시하지 못하여 유신을 제후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 칭호는 '갱갈후'(羹詰候) 즉 '국 그릇을 긁는 제후'였다. 이와 같은 부끄러운 봉읍(封邑)을 받았으니, 유신은 영지를 받고도 시동생 면박 준 어머니 때문에 체면을 구겼다.[11] 물론 이것도 현재 시점에서 보아 "형수가 그런 것도 이해 못하고 속이 좁네"라고 유방의 형수를 욕하는 것이지, 당장 당시 형수 입장에서 보면 시동생이 장래에 한 나라의 창업군주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나이는 먹을 대로 먹은 백수 주제에 나가서 뭔가 일이라도 해서 집안 생계에 도움을 주긴 커녕 사고만 치고 다니고(수습은 거의 대부분 집안 사람들 몫이었을 거다), 그러면서 허구한 날 집에다 친구 불러다 술이나 퍼먹고 놀면서 그 친구들 술상 차리고 밥상 차리는 것까지 형수가 맡아서 하게 된 판에 형수로써는 그런 시동생이 결코 곱게 보일 수가 없다. 전근대가 아니라 현대에도 이런 일 생기면 대부분 "형수가 그럴 만했네"라며 대부분 형수 편을 들지 시동생 편을 들지는 않는다.[12] 개명 전 이름은 유계(劉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