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마르쿠스 툴리오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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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마르쿠스 툴리오의 기타 정보 |
일본의 前 축구 선수 | ||
이름 | 툴리오 [ruby(闘莉王, ruby=トゥーリオ)] | |
본명 | 다나카 마르쿠스 툴리오 田中 マルクス [ruby(闘莉王, ruby=トゥーリオ)] Tanaka Marcus Tulio | |
출생 | 1981년 4월 24일 ([age(1981-04-24)]세) 브라질 상파울루 주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브라질|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85cm | 체중 83kg | |
직업 | 축구선수 (센터백 / 은퇴) | |
프로 입단 | 2001년 산프레체 히로시마 | |
소속 | 선수 | 산프레체 히로시마 (2001~2003) → 미토 홀리호크 (2003 / 임대)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 (2004~2009) 나고야 그램퍼스 (2010~2016) 교토 상가 FC (2017~2019) |
국가대표 | 45경기 8골 (일본 / 2006~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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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전 축구 선수. 현역 시절 주 포지션은 센터백으로, 간혹 미드필더나 중앙 공격수로도 활동했다.[1] 일본인 아버지와 이탈리아계 브라질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일본계 브라질인 3세다. 귀화 전 이름은 마르쿠스 툴리우 류지 무르자니 타나카(Marcus Tulio Lyuji Murzani Tanaka). 2003년에 일본으로 귀화했다.2. 클럽
브라질 상파울루주 출신으로, 당시 상파울루 주 3부리그[2]에 속해 있던 미라소우 FC의 유스 조직에 들었다가 1998년 일본 지바현의 시부야교육학원 마쿠하리고교(渋谷教育学園幕張高等学校)에 스카우트되어 일본 생활을 시작했다. 2001년에 산프레체 히로시마에서 데뷔했으며, 미토 홀리호크를 거쳐 2004년에 우라와 레드 다이아몬즈로 이적해 2009년까지 206경기에 출장해 41골을 터트리는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2010년에는 나고야 그램퍼스로 이적. 2012년 8월 4일 비셀 고베전에서 4번이나 득점을 성공시켜 5-0으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2015 시즌 후 계약 문제로 탈퇴했다가 2016 시즌 강등권에 처진 나고야에 일시 복귀하였으나 팀의 강등을 막지 못하고 방출되었다. 2016년까지 7시즌 동안 기록은 리그 188경기 36골, 컵 26경기 14골이다.
2017년에는 J2리그 소속 교토 상가 FC에 입단했다. # 그리고 교토에서는 2017 시즌 중반에 팀의 주 득점원이 되어 시즌 15득점을 달성했다. 심지어 4월 15일 에히메전에서는 프리롤과 톱을 오가며 해트트릭을 기록, 팀의 3-2 승리를 이끌었다.[3] J2리그 최고령 해트트릭 갱신은 보너스. 이 맹활약을 인정한 교토 측에서도 재계약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한다.
2019년 시즌을 마친 후 은퇴를 발표하였다. 마지막 경기가 하필이면 영혼의 골수까지 털려버리는 가시와 레이솔 전 1-13 참패였던 것이 티. 교토 소속 3시즌동안의 기록은 92경기 19골이며, 통산 529경기 104골로 일본에서 수비수로서는 최초로 100득점을 넘었다. J리그 특집영상
3. 플레이 스타일
강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힘있는 수비를 하며 공중전에 능하다. CB는 물론이고 DMF, FW까지 커버할 수 있는 범용성을 가지고 있으며 공격 의지도 높아 세트피스 상황도 잘 소화하며 해트트릭을 기록한 경기도 있다. 2003년과 2005년에는 팀 내 득점왕의 자리에 오르기도. 다만 고질적인 허벅지 부상에 시달리고 있으며 달리기가 느린 탓에 세트피스 실패 후 상대방의 역습에 취약하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4. 국가대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는 2006년에 데뷔했는데, 대한민국에서 그의 이미지는 (소속팀의 수비를 뒤흔드는) 강민수 하나도 제대로 처리 못하는 일본의 주전 수비수. 2010년 동아시안컵 최종전에서 강민수와 경합하다가 화를 참지 못한 채 강민수를 걷어차고 퇴장당하면서 "멘탈이 형편없네", "찰거면 제대로 찰것이지."(?) 등의 평가를 받았다.
이후 2010 남아공 월드컵 대비 평가전으로 2010년 5월 30일에 가졌던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에서 전반전에 기습적인 선제골을 터뜨려 일본에 희망을 가져다주고는 후반전에는 기가 막힌 자책골[4]을 넣으면서 2득점을 기록, 이어서 가졌던 코트디부아르와의 평가전에서도 자책골을 작렬하면서 웃음거리가 되었다. 또한 디디에 드록바의 오른팔을 무릎으로 걷어차 골절시키면서 코트디부아르 축구 팬들의 분노를 샀다. 본인은 자책골의 원인이 공인구인 자블라니 때문이라며 적응에 애먹고 있다고 호소하지만 그가 뛰고 있는 J리그 공인구는 '자블라니'다.
이로 인해 일본이 1군으로 싸우면 너무 강하기에 공격수를 수비수 자리에 놓고, 수비수를 공격수 자리에 놓아야 다른 팀들과 형평성이 맞기에 툴리오가 수비수로 뛰는거라며 그를 뛰어난 공격수로 평가하기도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기도.[5]
덤으로 구글 재팬에서 툴리오를 검색하면 나오는 연관 검색어는 다음과 같다.
5. 여담
- 브라질에서는 툴리오가 같은 조의 슈퍼스타 디디에 드록바의 월드컵 출전을 막았다면서 그에 대한 인기가 폭발적이라고 한다. 브라질에서 변호사를 하는 아버지는 인터뷰 요청 쇄도에 난감한 상황.
- FIFA 공인 블랙 리스트 중 한 사람이었다. 남아공 월드컵 직전에 열렸던 코트디부아르 대표팀의 평가전을 분석한 결과, 이 경기에서 툴리오의 플레이가 필요이상으로 과격한 악의적인 것으로 판정해 그를 요주의 인물로 분류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당시 일본 축구 협회의 한 관계자는 "툴리오가 만약 경고를 받을 정도의 반칙만 해도 심판들은 즉시 퇴장 명령을 내릴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걱정하기도 했었다.관련 기사[6][7]
- 수비를 적극적으로 하는 탓에 가와시마 에이지 골키퍼와 공중 충돌하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종종 벌어지기도 했다. 파라과이 전에서는 가와시마 골키퍼를 머리로 들이받았고 잠시후 가와시마 골키퍼는 반대로 툴리오를 걷어찼다.
- 라이트 노벨 이것은 좀비입니까?에 이름을 따 온 오리토 툴리오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축구를 좋아하는 그의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인데, 원래는 박지성 또는 델피에로로 지으려다가 가장 일본인 이름같은 툴리오로 지었다고 한다.
- 은퇴를 한 이후에는 고향 브라질로 돌아가서 약혼자와 결혼하고 툴리오 집안의 가업인 부동산 회사, 변호사 사무소를 운영할 것이라고 한다.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서 브라질 농장 생활을 공개하고 있으며, 2022년 즈음부터는 축구 관련 컨텐츠도 올리고 있다.
[1] 일본의 클럽이나 특히 대표팀에는 제공권을 잘 다투는 장신 공격수가 극히 드물어 전술상 최전방 제공권 다툼이 필요할 때는 툴리오가 공격수 자리에서 그 역할을 담당했었다. 대표적인 예는 2010년 월드컵이고, 다른 사례로 유상철이 두 번째 요코하마 F. 마리노스 소속 시절 센터백 기용이 예정되어 등번호 2번을 받고도 곧잘 투톱으로 나선 적도 있다.[2] Campeonato Paulista Série A3.[3] 사실 우라와나 나고야 시절에도 상황에 따라 공격수로 기용되며 두자릿수 득점을 올리곤 했다.[4] 영상. 하필 이 경기는 센터백 파트너였던 나카자와 유지마저 자책골을 터뜨려서 잉글랜드에 1-2로 패했다. 골은 일본이 넣고 승리는 잉글랜드가 가져간다[5] 주 포지션은 스위퍼지만, 일본 선수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탁월한 속도와 기술, 헤딩 능력 때문에 미드필더 내지 공격수로 활약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본선이라든가.[6] 그러나 남아공 월드컵 본선에서는 큰 문제를 일으키 않고 나카자와 유지와 함께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수비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툴리오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 대표팀은 카메룬과의 경기에서는 무실점,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는 1실점만을 기록했다. 거기다가 네덜란드와의 경기 막판에는 본연의 역할인 타겟형 스트라이커로도 활약했다!! 헤딩으로 오카자키 신지에게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헤더로 걷어내다가 그것이 하필 로빈 반 페르시의 발에 닿아서... 그리고 반 페르시는 냅다 스네이더에게 패스했고, 그리고 그것이.[7] 당시 일본 대표팀에는 키 큰 공격수가 없어서(정확하게 말하면 185cm의 키를 가진 야노 키쇼가 유일한 장신 공격수였으나 비상용 백업 정도로 취급되었을 정도로 기량이 부족했던지라...)오죽했으면 혼다 케이스케가 제로톱 역할식으로 원톱을 소화했을 정도였다. 이 당시 백업이였던 오카자키 신지도 키가 크다고 할 수 없었던 데다가 그 때문에 당시에는 공중볼 능력이 전성기 시절만큼 좋지 못했고, 그 이후에 치러진 2011 AFC 아시안컵에서는 이 때문에 마에다 료이치를 주전 원톱으로 써야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