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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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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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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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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
Cuzco
Qusqu / Qosqo(케추아어)
국가파일:페루 국기.svg 페루
쿠스코주
파일:CuscoCityClammer.jpg
쿠스코 전경
면적385.1km²
인구428,450명[1]
인구밀도1,100/km²
설립연도1100년경
해발고도3,399m
쿠스코 행정 사이트

1. 개요
1.1. 기후
2. 역사3. 쿠스코 주

[clearfix]

1. 개요

페루 안데스산맥에 위치한 고산도시. 해발고도 3,400m이고 과거 잉카 제국의 수도였으며, 근처에 마추픽추가 있다. 인구는 2007년 약 35만명, 2017년 기준으로 428,450명으로 페루에서 7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해발고도가 높아서 기후는 열대기후가 아니라 온대기후속한다.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배꼽'을 의미한다.

고대 잉카인들이 하늘은 콘도르, 땅은 퓨마, 땅 속은 뱀이 지배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쿠스코는 도시 전체가 퓨마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고 한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코리칸차 신전과 삭사이와만 섹시 우먼 성채 등이 있다.

쿠스코는 주위에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으로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주위 골짜기로 시가지가 확장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로 인하여 차 한대가 들어가기도 쉽지 않은 좁은 골목길이 다수 있어 스즈키 알토대코(?!)와 같은 경차가 택시로 자주 이용된다. 특히 한국 국내에서 생산된 중고 티코가 상당히 많이 이용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곳에 가면 한국어가 랩핑된 티코를 보는 것도 큰 재미가 될 것이다.

페루의 주요 고산도시인 와라스(해발 약 3,450m)보다는 낮지만 고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기에 고산병에 주의를 요한다. 고산병에 취약한 체질이라면 꼭 저지대때부터 아스피린 100mg을 챙겨먹어 두는 것이 좋으며, 마테 또한 상당히 상태를 완화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상태가 악화될 경우 소로치를 꼭 복용하길 바란다.

각종 투어나 여러가지 이유로 관광객이 굉장히 많다. 치안을 위해 경찰이 자주 보여서 페루 내에서 꽤 안전한 지역에 속하고 특히 랜드마크인 아르마스 광장에 경찰이 굉장히 많이있다.
참고로 북한개성, 일본도쿄, 중국시안 등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1.1. 기후


쿠스코의 기후는 고산기후에 해당하여 관측소에 따라서 구분이 달라지는데, 쾨펜의 기후 구분으로는, 유럽중기예보센터(ECWMF) 기준 툰드라 기후(ET), 미국 해양대기청(NOAA) 기준 열대 고산 기후(Cwb)이다.

트레워다(Trewartha) 구분 기준으로 Hlk - Hkk이다.

강수량은 ECWMF 기준 1278mm, NOAA 기준 737mm로, 건기, 우기가 뚜렷하게 나타난다는 것이 특징이다.

2. 역사

||<-2><tablewidth=450><tablealign=right><tablebordercolor=#000><tablebgcolor=#FFF,#1F2023><bgcolor=#000>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 화이트.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스페인어|
파일:스페인 국기.svg
]] Ciudad del Cusco
[[영어|
파일:영국 국기.svg
]] City of Cuzco
[[프랑스어|
파일:프랑스 국기.svg
]] Ville de Cuzco
[[한국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 쿠스코
국가·위치
페루 쿠스코 주
남위 13° 31′ 02.194″
서경 71° 58′ 48.014″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000><colcolor=#FFF>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3년
등재기준 (ⅲ)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ⅳ)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지정번호 273 }}}}}}}}}

13세기부터 1532년 잉카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까지 잉카의 수도였다.[2] 잉카 제국의 도로들이 이 곳에서 뻗어나갔으며, 파차쿠티 황제의 시기에 대대적인 개축 공사를 거치면서 높은 탑들과 석조 가옥들이 가득했다. 이후 투팍 잉카 유판키, 우아이나 카팍 황제 시기 동안 남미 대륙에서 가장 발전한 대도시였으며, 대제국의 수도에 걸맞게 제국 곳곳에서 올라온 유력자들이 이 곳에 저택을 짓고 살았다. 잉카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우아이나 카팍이 죽은 후, 쿠스코는 우아이나 카팍의 아들인 우아스카르의 지배 하에 놓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우아스카르가 아타우알파와의 내전에서 패하면서 아타우알파의 세력권에 들어왔다. 그러나 아타우알파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으니, 그가 내전에 승리하고 황위에 오른 직후에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침입해 들어와 아타우알파를 사로잡고 잉카 제국을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프란시스코 피사로 참고. 당시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곳에 왔을 때 스페인 병사들은 쿠스코의 건축물들과 질서정연한 거리, 그리고 막대한 양의 황금에 깜짝 놀랐다고 전해진다.[3] 그러나 스페인인들은 이곳을 점령한 후 쿠스코에 남아있던 많은 잉카의 건축물, 신전, 궁전을 파괴했고, 이 과정에서 허수아비가 된 잉카 황제들을 이용해서 엄청난 양의 금을 착취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휘하 군인들과 그의 동생 중 망나니었던 곤살로 피사로 등이 그들이 앉혀놓은 2대 허수아비 황제 망코 잉카 유판키에게도 지나치게 함부로 대하자[4][5] 망코 잉카는 결국 반란을 결심, 몰래 빠져나가는데 성공하고야 만다. 망코 잉카는 무려 20여만의 군대를 차출해내[6] 쿠스코 포위전을 벌여 수도 쿠스코를 탈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필사적인 전투에도 불구하고 잉카군은 인해전술의 덕을 끝내 보지 못했다. 사실 숫자의 우세라 쳐도 방어하기 딱 좋은 '요충지(쿠스코)' + '석기시대 수준의 고대문명 병사들은 우습게 볼 정예병들' 로 무장한 스페인 점령측은 결코 만만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 몇 개월에 걸친 공성전으로 인해 쿠스코의 잉카식 건물들은 이때 대부분이 무너졌다고 한다.

스페인에서 지원병이 몰려오고 점차 전세가 불리해지자, 잉카군은 페루 특유의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전을 택해야 했으나 오판으로 인력을 낭비했으며 끝내 쿠스코 탈환에도 실패, 결국 다른 곳으로 피신해야만 했다.[7] 이후 망코 잉카는 오얀타이탐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일부 국지적인 전과를 내었으나, 이미 망조에 접어든 제국을 되살리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쿠스코를 완전히 포기하고 험준한 산악 지대로 피신해 빌카밤바에 새로운 수도를 잡고 망명정부인 신잉카국을 세웠다.[8]

그렇게 잉카 지도층이 떠나고, 이곳을 완전 점령한 스페인은 그 남은 잔해를 새 도시의 기반으로 사용했다.[9] 스페인 본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고, 쿠스코에는 스페인풍과 잉카풍의 양식이 혼합된 새로운 식민지풍의 건물들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쿠스코에 새롭게 부임한 발베르데 주교[10]는 옛 태양신전이었던 코리칸차의 석벽 잔해 위에 산토 도밍고 성당을 지었고, 태양신 인티를 모시던 처녀들이 살던 신전을 허물고 교회와 유럽풍의 건물들을 새로 올렸다. 이후 식민지 시기동안 쿠스코는 안데스 지방의 스페인 식민지의 최고 중심지이자 쿠스코대교구의 주교좌성당 소재지로서 기독교 포교의 핵심 역할을 했다.[11] 새롭게 대학과 대성당이 들어섰고, 사람들이 일자리를 얻기 위해 몰려들면서 리마에 이어 한때는 페루 지역에서 가장 잘나가는 도시들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1950년 5월 21일에는 대지진이 발생해서 쿠스코 건물들의 3분의 1이 무너지는 대참사가 있었다. 신기한 것은 이때에 산토 도밍고 성당 등 유럽인들이 세워놓은 건물들은 상당수 파손되었으나, 옛 태양신전의 석벽이나 잉카 성벽처럼 잉카 제국 시기 지어진 건물들은 딱히 손상이 가지 않았다고. 이후 복구 작업이 실시되어 현재는 다시 산토 도밍고 성당을 비롯한 스페인 식민지풍의 느낌이 가득한 중소도시 규모를 유지하고 있으며, 1990년대 이래 관광객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페루의 문화수도에 걸맞게 관광업으로 엄청난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다. 현재 잉카 이전 시기 유적은 부분적으로만 남아있지만[12], 식민지 시기에 건설된 많은 건물, 광장, 거리, 교회 등이 잘 보존되어 있어 198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clearfix]

3. 쿠스코 주

쿠스코 주는 페루의 24개 주 중 한 주이다. 북쪽으로는 우카얄리 주, 동쪽으로는 마드레데디오스 주와 푸노 주, 남쪽으로는 아레키파 주, 서쪽으로는 아푸리막 주, 아야쿠초 주, 후닌 주와 접해 있다. 면적은 71,986㎢, 인구는 2017년 기준 1,205,527명이다. 주도인 쿠스코 군을 제외하면 인구밀도가 그리 높지 않다. 마추픽추도 쿠스코 주에 위치해 있다.

[1] 2017년 기준.[2] 페루 헌법에서는 쿠스코를 페루의 역사 수도로 지정하고 있다.[3] 쿠스코의 태양신전인 코리칸차는 금으로 만든 정원이 있을 정도로 화려했다.[4] 스페인군 중에서도 피사로 등 일부는 잉카 제국에서의 황제의 가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허수아비로 쓰려고는 했어도 아주 함부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특히 피사로의 바로 아랫동생의 경우 황제 아타우일파와 친해졌으며 그를 살리려고 했던 사람이다. 잉카를 장기점령한 상태에서 황제의 정치적 가치를 계속 이용하려면 살리는 쪽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곤살로 등은 그걸 간과하고 너무 막나갔다. 그들은 황제의 황후를 억지로 취한다던가, 황제에게 골든 샤워를 하는 등의 도가 넘치는 망나니짓을 하며 인권유린을 했다.[5] 참고로 이 시절 황제인 망코 잉카는 이전 황제였던 아타우일파가 스페인의 무력을 잘 몰라서 방심하다가 힘없이 당해 인질이 된 것과는 달리 스페인이 아타우일파를 무력화시키고 탐욕스럽게 황금을 착취하며, 그 와중에 끝내 아타우일파를 죽이기까지 하는 무서운 꼴들을 다 보며 황제가 됐던 사람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무력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황위에 올랐고 자기 신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그 무서운 스페인 사람들에게 대항하지 않고 애써 참아왔다. 그러나 곤살로 일당의 행각은 그들의 포악함을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반란을 계획하게 만들 정도로 심했다.[6] 망코 잉카는 스페인군의 강력한 병기들과 갑옷들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으로 초물량 전술을 이용하기로 했다.[7] 그나마 게릴라전과 매복전을 제대로 활용한 전투가 잉카 명장 키소 유판키가 잉카 북부에서 벌인 전투로 쿠스코로 가는 스페인 측 지원군 허리 자르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망코 잉카가 무리하게 유판키를 불러들이고 리마 포위전을 벌여 실패했다.[8] 참고로 이 신잉카국은 1572년 최후의 사파 잉카투팍 아마루가 사로잡히면서 멸망한다.[9] 아이러니하게도 쿠스코를 점령한 스페인의 콩카스타도르였던 피사로 일파의 경우 거의 다 그 최후가 영 좋지 않았다. 특히 가장 쿠스코 내에서 망나니짓을 했던 곤살로 피사로의 경우 과거 자기가 방어지로 삼았던 쿠스코 주변의 하키하우하나에서 스페인 본국의 군과 싸우다가 과거 자기가 잉카군을 대패시켰던 것마냥 대패, 자기도 참수당해서 사망했다.[10] 도미니코회 소속 수도사제로 피사로의 잉카 원정에 참가했다.[11] https://en.wikipedia.org/wiki/Cusco[12] 잉카 시대에 태양신전이었던 코리칸차 터 위에는 주교좌성당인 산토 도밍고 성당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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