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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d30><colcolor=#000> | |||
출생 | 1779년 4월 27일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사망 | 1831년 6월 15일 (향년 52세) | ||
러시아 제국 비텝스크현 비텝스크구 비텝스크 (現 벨라루스 비텝스크주 비텝스크) | |||
묘소 |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 ||
재위기간 | 전러시아의 황제 (논란) | ||
1825년 12월 1일 ~ 1825년 12월 2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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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 (Константи́н Па́влович Рома́нов) | ||
아버지 | 파벨 1세 | ||
어머니 |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 ||
형제자매 | 알렉산드르 1세, 알렉산드라, 옐레나, 마리야, 예카테리나, 올가, 안나, 니콜라이 1세, 미하일 | ||
배우자 |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율리아네 (1796년 결혼 / 1820년 이혼)[1] | ||
요한나 그루진스카 (1820년 결혼) | |||
자녀 | 파벨 알렉산드로프[2], 콘스탄틴 콘스탄티노프[3]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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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임시 황제.파벨 1세의 차남으로 알렉산드르 1세의 동생이자 니콜라이 1세의 작은 형이다.[4]
그리고 알렉산드르 2세의 둘째 큰아버지이자,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의 둘째 외삼촌이다.
2. 생애
1779년에 당시 러시아의 황태자였던[5] 파벨 1세와 그의 아내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1796년에 14세가 되자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율리아네 공녀[6]와 결혼했으나, 혼인생활 동안 아내를 학대하다가 결국 1820년에 이혼하고 만다.1799년 프랑스와 러시아의 충돌 중 하나인 바시냐나 전투에 참전했으나 패배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용감함을 보여 아버지 파벨 1세에 의해 체사레비치(tsesarevich)라는 작위에 책봉되었다. 이는 황위 계승권자에게만 주어지는 작위인데, 당시에 파벨 1세가 자신의 장남 알렉산드르를 불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벨 1세는 알렉산드르를 황제로 내세운 팔렌 백작에게 암살당해 제위는 알렉산드르에게 넘어갔다.
이후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된 형의 명에 따라 폴란드 총독이 되었으나 억압적인 통치 탓에 폴란드인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이후 1807년 나폴레옹에게 패한 알렉산드르 1세가 틸지트 조약을 맺은 이후, 콘스탄틴은 나폴레옹과 러시아-프랑스 동맹을 지지하여 알렉산드르 1세의 신임을 잃기 시작했다. 사실 콘스탄틴 본인도 황위를 물려받을 의지가 없었고 1820년에 폴란드 귀족 출신의 요안나 그루진스카(Joanna Grudzinska)와의 재혼을 계기로 귀천상혼에 걸려 계승권을 잃을 예정이었다. 이러한 점이 맞물려 그는 체사레비치 작위가 무색하게 황제가 될 일이 없었다.
그러나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자신의 사후 계승여부를 정하지 못한 채로 급사하자, 아직 계승권이 남아있는 콘스탄틴이 옹립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콘스탄틴은 애초에 계승 의지가 없었던데다가 귀천상혼 법칙 때문에 25일 후 남동생 니콜라이 1세에게 제위를 양보했다. 하지만 니콜라이 1세를 탐탁지 않아 하던 혁명 세력이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일으켜 니콜라이 1세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곧 진압되면서 니콜라이 1세는 무사히 황위를 계승했다. 자칫 콘스탄틴 또한 처벌 받을 수 있었지만, 애초에 콘스탄틴은 계승 의지 자체가 없던데다 데카브리스트의 난 때도 자신을 옹립하려던 구제동맹을 애초부터 씹었던지라 처벌을 면했다.
이후 콘스탄틴은 다시 폴란드 총독으로 복직하였으며 1831년 사망하였다.
이후 콘스탄틴이라는 이름은 둘째 조카인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종손인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이 물려받았다가 콘스탄티노비치 계열이 단절됐다.
3. 가족관계
아들이 두 명 있었으나 둘 다 사생아였기에 황위계승권이 없다.첫째인 파벨 알렉산드로프는 러시아 제국군 장교였다.
둘째인 콘스탄틴 콘스탄티노프는 러시아 제국군 포병 장교 및 로켓 분야의 과학자였고 이 쪽 분야에서 나름 유명한 사람이다. 파벨 알렉산드로프와는 이복형제다.
4. 참고 자료
[1] 빅토리아 여왕의 이모이자 앨버트 공의 고모.[2] 조시피나 프레드릭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3] 프랑스 여배우 클라라앤 로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4] 알렉산드르 1세 사후 계승권 혼란으로 즉위했으나 25일 만에 아우 니콜라이 1세에게 양위하였다.[5] 당시엔 콘스탄틴의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가 재위 중이었기 때문.[6] 러시아식 이름은 안나 표도로브나.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의 셋째딸로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부인 빅토리아의 언니이자,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1세의 누나다. 콘스탄틴의 외숙모 안토이네테(막내 외삼촌 알렉산더 프리드리히 공작의 아내)의 여동생이기도 하다. 이후 작센코부르크잘펠트는 작센코부르크고타로 영지명을 변경한 뒤, 영국 왕실과 벨기에 왕실이 되면서 유럽 최고의 명문가로 떠오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