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ミスター・パッション / Mr.Passion> [ruby(KENSO, ruby=ケンソー)] |
링네임 | 스즈키 켄조 (鈴木 健三) Kenzo Suzuki[1] 스즈키 켄조 (鈴木 健想)[2] [ruby(KENSO, ruby=ケンソー)][3] | |
본명 | 스즈키 켄조 [ruby(鈴木 健三, ruby=すず き けんぞう)] | |
생년월일 | 1974년 7월 25일 ([age(1974-07-25)]세) | |
신장 | 191cm | |
체중 | 118kg | |
혈액형 | O형 | |
출생지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아이치현 헤키난시([ruby(碧南市, ruby=へきなん し)]) | |
가족 관계 | 배우자 스즈키 히로코(1975년생)[4] | |
학력 | 카리야키타([ruby(北, ruby=きた)])고교 (졸업)[5] 테이쿄대학 (럭비부 / 중퇴) 메이지대학 (럭비부 / 학사) | |
유형 | 파워하우스 + 쇼맨 | |
시그니쳐 무브 | 왼손 하리테[6] 폴링 래리어트[7] 빅 붓[8] 스피어 DK 락[9] - | |
피니쉬 무브 | 백드롭 하가쿠레([ruby(葉隠, ruby=は がくれ)]) II[11] 다이빙 엘보우 드롭 하가쿠레([ruby(葉隠, ruby=は がくれ)])[12] | |
별명 | 슈퍼 루키 (スーパールーキー)[13] 극악 월드 스탠다드[14] ([ruby(極悪, ruby=ごくあく)]ワールド・スタンダード) 미스터 패션 (ミスター・パッション) | |
테마곡 | IT'S THE ONLY WAY (2000)[15] Ya Mama - Fatboy Slim (2002 - 2003) War Robe (2004 - 2005)[16] Tokyo Drift - Teriyaki Boyz[17] (2007 - ) | |
데뷔 | 2000년 1월 4일 (25세) 도쿄도 분쿄구 도쿄 돔 신일본 도쿄돔([ruby(闘強導夢, ruby=とうきょうどうむ)]) 2000[18] vs 나카니시 마나부 | |
SNS | ||
주요 커리어 | WWE 태그팀 챔피언 1회 VKF 챔피언 1회 KO-D 6인 태그 챔피언 1회 King of Dark 챔피언 1회 GAORA TV 챔피언 1회 세계 태그팀 챔피언 1회 세계 최강 태그 결정 리그전 우승 (2010년) 간바레☆프로레슬링 월드 스트롱기스트 태그 토너먼트 우승 (2017년) 신일본 영 라이온스 컵 우승 (2000년) 신일본 영 라이온스 토너먼트 우승 (2002년) |
1. 개요
"ビチッと!!" [19]
(비칫토!!)
(비칫토!!)
일본의 PD, 프로레슬러. 후지테레비의 자회사인 쿄도 테레비 (共同テレビ) 제 3 제작부 소속.
2004~2005년 WWE에서 아내인 히로코와 함께 활약했다.
2. 커리어
2.1. 학생 시절 ~ 사회인 시절
카라야키타고등학교 시절부터 럭비 선수였던 스즈키 켄조는 고등학교 3학년 때 국체 아이치현 대표와 고교 일본 대표에 선출될 정도로 훌륭한 선수였고, 메이지 대학을 지망하고 있었지만 테이쿄 대학의 추천 입시를 보고 입학했지만 합숙소에 들어간 지 불과 4일만에 합숙소를 나와 대학을 중퇴하고 영국 유학을 떠나 진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20]이후 원래 목표로 하던 메이지 대학에 편입해, 메이지 대학 럭비부에 재적하게 되었다. 빡세기로 정평이 나있던 당시의 명대 럭비부의 합숙소 생활을 견디고 2학년부터 주전 록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1996년, 1997년에 2년 연속 일본 대학 리그 1위를 경험했고 98년에는 일본 대학 리그 1위는 놓쳤지만 2학년 아래 사이토 유야와 함께 중전차 공격수 콤비로 자리잡았으며, 럭비 일본 대표팀 상비군으로도 선출되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고향 아이치현을 포함한 츄쿄 광역권을 연고로 하는 도카이 테레비에 취직하여 도쿄 지사의 인터넷 영업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 프로레슬링과는 전혀 접점이 없었지만, 우연히 들린 미나토구의 한 스포츠 용품점의 점주를 통해서 '세계의 사나운 독수리' 사카구치 세이지[21]와 만난다. 이 사카구치의 열렬한 스카우트로 도카이 테레비를 퇴사하고, 1999년 4월 1일에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했다. [22]
2.2. WWE에 입단하기 이전
2000년 1월 4일 '슈퍼 루키 데뷔전'이라는 타이틀로 무려 처음부터 도쿄 돔에서 나카니시 마나부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른 스즈키 켄조는 190cm이 넘어가는 일본인 헤비급 중에서 상위권의 체격과 사카구치 세이지가 직접 스카우트한 사카구치 세이지의 대학 후배라는 압도적인 조건을 바탕으로 현장 감독 초슈 리키의 전폭적인 푸쉬를 받아 데뷔 4개월 만인 2000년 4월에 제 8회 영 라이온배 쟁탈 리그전에서 우승을 거두고[23] 이 해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신인상까지 수상했다.2001년에는 타나하시 히로시와 태그 팀 '킹 오브 더 힐스'를 결성하여 활동했고, 2002년에는 머리를 장발로 기르고 테마곡도 회사에서 제공해준 테마곡에서 벗어나 팻보이 슬림의 Ya Mama를 테마곡으로 쓰는 등 데뷔 2년차라고는 믿기지 않는 파격을 보여줬다.
사사키 켄스케와 블루 울프[24]까지 더해 '스윙 로즈(SWING-LOWS)'를 결성한 스즈키 켄조는 링네임을 '스즈키 켄조(鈴木 健想)'로 바꿨다.
2002년에는 영 라이온 토너먼트에서도 우승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스즈키 켄조였으나 자신을 전폭 푸쉬해주던 신일본 현장 감독 초슈 리키가 이해 2월에 이노키즘에 질린 무토 케이지 일파[25]가 신일본을 나가고 전일본 프로레슬링으로 이적한 책임을 물어 현장 감독에서 해고된 이후 안토니오 이노키의 분노를 사 퇴사 권고를 받고 퇴사하자 10월에 사사키 켄스케와 함께 신일본을 퇴단하며 초슈 리키를 따라가는 것이 확정되었다.
결국 2003년에 미국에 가게 해주겠다는 초슈 리키의 약속을 받고 초슈 리키가 세운 단체인 WJ 프로레슬링으로 이적한 스즈키 켄조는 미즈노 히로코와 결혼까지 하면서 새로운 활약을 다짐했고, 2003년 6월에는 약속대로 TNA에서 페리 새턴과 경기를 치르는 등 활동을 이어갔으나 여러 가지 사건을 겪은 WJ 프로레슬링에서 개런티가 미불되는 사건이 터지자 8월에 WJ 프로레슬링을 퇴단했다.
2.3. WWE
이후 스즈키 켄조는 미국으로 떠나 미국에서 경기를 가지기 시작했으며, 메이저 리그 레슬링, IPW에서도 잠시 경기를 가지는 한편 10월에 WWE의 다크 매치에 출연해 채드 윅과 히트에서 경기를 가져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는데, 이 때 WWE 회장 빈스 맥마흔이 스즈키 켄조를 보고 마음에 들어 계약 제안을 하며 2004년 1월에 WWE와 계약을 맺게 되는 또 다른 파격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내인 히로코까지 함께 계약을 맺어 WWE에서 활동하게 된다.[26]처음엔 빈스 맥마흔은 히로히토라는 링네임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을 물리친 미국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하는 일본인 캐릭터를 부여해 활동하려고 했지만 스즈키 켄조의 아내 히로코가 항의하면서 이 캐릭터는 다행히도 폐기되었고, 자신의 본명을 미국식으로 읽은 Kenzo Suzuki로 활동한다.
켄조 스즈키는 2004년 3월에 벨로시티에서 벌어진 다크 매치에서 빌리 건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으며, 2004년 스맥다운에서 데뷔해 스카티 투 하티를 꺾고 선수들을 차례로 꺾으며 WWE 그레이트 아메리칸 배쉬(2004)에서 빌리 건을 또다시 꺾는다. 그 후엔 존 시나와 대립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 만난 르네 듀프리와 엮이기 시작해 태그팀으로 다니게 된다.
켄조 스즈키는 르네 듀프리와 같이 폴 런던 & 빌리 키드먼을 꺾고 WWE 태그팀 챔피언에 등극하는데, 이둘은 레이 미스테리오 & 랍 밴 댐과 대립을 형성하며 WWE 노 머시(2004)에서 방어했지만 12월에 패하며 챔피언 자리를 잃고, WWE 아마겟돈(2004)에서 다시 맞붙지만 패하면서 챔피언 자리를 잃는다.
두 팀간의 대립에 더해 켄조 스즈키의 아내 히로코는 토리 윌슨과 대립을 형성하는데, 히로코는 토리 윌슨에게 패하고, 켄조 스즈키도 이윽고 르네 듀프리와 같이 다니는 일이 줄어들면서 싱글로 활동하나 큰 주목을 못받게 되고 WWE 로얄럼블(2005)에 6번으로 출전하지만 레이 미스테리오에게 탈락된다.
이후에는 별다른 활약을 못 하게 되며 잠깐 OVW로 내려가서 활동했고, 2005년 7월에 드래프트를 통해서 RAW로 이적하지만 WWE에서 벌어진 해고 러쉬에 켄조 스즈키와 아내인 히로코까지 리스트에 들어가면서 방출된다.
사실 켄조는 학창 시절 레슬링 경력은 물론 격투기 경력도 전혀 없었던데다 무엇보다 당시 데뷔 불과 4년차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여서 경기력이 매우 안 좋았음에도 불구하고,[27] 그래도 일본 선수답지 않은 큰 키와 나름 포스가 있는 얼굴에 체급도 작은 빅맨급은 되어서인지 푸시를 받았는데, 켄조가 데뷔하기 직전에 나간 울티모 드래곤이 일본 경량급의 역사를 뒤흔든 거물 중의 거물임에도 경량급이란 이유로 자버로 굴려졌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2.4. WWE 방출 이후 멕시코 시절
히로코와 같이 일본으로 돌아간 켄조 스즈키는 다시 링네임을 스즈키 켄조(鈴木 健想)로 바꾼 후 HUSTLE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고, 이 때 인디 프로레슬링 팬들에게 나름 전설로 남은 쿄겐사 이즈미 모토야와의 대결을 남기는 등(1편 2편) 본격적으로 쇼맨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2006년에 HUSTLE과의 계약이 종료된 후로는 멕시코의 CMLL에서 활동을 시작하는 한편, 일본 인디 단체의 축제인 '레슬 엑스포 2006'에 참전해 DDT 프로레슬링의 사장 타카기 산시로와 전류폭파 매치를 치르는 등 일본 인디계에서도 활약했다.
2007년에는 CMLL의 경쟁 단체인 AAA으로 이적했으며, 이적하자마자 AAA 최대 흥행인 트리플매니아 메인이벤트에 섰다. 2009년에는 오리엔탈 & SUGI와 함께 스테이블 '라 야쿠자'를 결성하는 등 활약을 이어가다 2010년에 AAA와 계약을 갱신하지 않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2.5. 전일본 프로레슬링
2010년 7월 25일 전일본 프로레슬링에 등장한 스즈키 켄조는 바로 VOODOO-MURDERS(약칭 VM)에 가입하면서 턴힐, 링네임도 KENSO(켄소)로 바꿔 활동하고, 관중석에 있던 무토 케이지를 습격하는 등 VOODOO-MURDERS의 일원으로 활약을 시작했다.9월 20일에는 과거 파트너였던 르네 듀프리와 아케보노 & 타이요 케아가 가지고 있던 세계 태그팀 챔피언십에 도전했으나 패했고, 10월 10일에는 하마 료타와의 대전에서 턴힐한 코우노 마사유키를 리더 TARU의 허락 없이 VOODOO-MURDERS에 초대했다.[28] 직후 열린 2010 세계 최강 태그 결정 리그전에 본명에서 링네임을 KONO로 바꾼 코우노와 함께 출전, VM의 멤버들을 개입시키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결승 진출에 성공했고, 결승에서 스와마 & 하마 료타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2011년 1월 3일 코라쿠엔 홀에서는 KONO와 함께 아케보노와 타이요 케아가 그대로 가지고 있던 세계 태그팀 벨트에 재도전했으나, 경기 도중 KONO와 분열하면서 패배했고, KENSO 자신도 자신이 VM에 불러들인 KONO에 의해 VM에서 축출당했다. 이후로는 역시 VM에서 축출당한 조디악과 함께 태그를 맺다가 그레이트 무타와 함께 태그를 결성했고, 6월 3일 KONO의 탈단으로 공석이 된 세계 태그팀 챔피언 자리를 두고 S.M.O.P(하마 료타 & 아케보노)와 6월 19일 대결하여 승리하면서 세계 태그팀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8월 26일에는 일본무도관에서 열린 동일본 대진재 부흥 지원 챠리티 프로레스 ALL TOGETHER[29]의 메인인 나카무라 신스케 & 스기우라 타카시 & KENSO vs 타나하시 히로시 & 스와마 & 시오자키 고 전에 출전하여, 타나하시의 하이 플라이 플로를 맞고 패배했다.
9월에는 전일본의 활성화를 위해 혁명이 필요하다며 신군단 'TEAM 비칫토'[30]를 만들어 멕시코 시절의 파트너였던 블랙 패밀리(다크 쿠엘보 & 다크 오즈)를 멤버로 들였으나, 팀 발족 첫 경기에서 바로 둘에게 배신당했다. 직후 그레이트 무타와 가지고 있던 세계 태그팀 챔피언 벨트도 블랙 패밀리(다크 쿠엘보 & 다크 오즈)에게 빼앗기며 무타와의 태그팀도 깨졌고, 새로 가입시킨 '상하이의 붉은 용' 소 슌도 비자 문제로 귀국 후 소식이 끊기며[31] TEAM 비칫토의 수난은 계속됐다.
2012년이 되고, 드래프트에서 지명한 카즈 하야시와 다시 세계 태그팀 챔피언 벨트를 노렸으나 실패했고, TEAM 비칫토도 해산하며 TEAM 비칫토는 한번도 제대로 가동된 적 없는 비운의 팀으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눈새 기믹을 제대로 장착하여 상대를 KENSO의 독특한 정신세계, 'KENSO 월드'로 빠트려 혼란을 주는 선수가 되었다.
이 와중 2013년 6월에 시라이시 노부오 신 사장의 횡포로 인해 또다시 전일본 선수 이탈사건이 터지고 말았는데, 이 때 KENSO가 신 사장 시라이시 노부오에게 선수들의 행동을 보고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KENSO는 눈새 기믹에서 진짜로 눈새 취급을 받게 되어버렸다.
2023년 11월에는 BURNING을 탈퇴한 시오자키 고와 스즈키 코타로, 아오키 아츠시가 신 유닛 Xceed를 만들자 KENSO도 거기에 참여했지만, 11월 21일 코라쿠엔 홀 경기에서 시오자키와의 태그팀으로 딜로 브라운 & 밤비 킬러를 상대하던 도중 서로 기술 오폭으로 사이가 틀어지며 즉시 시오자키를 하가쿠레로 공격하고 턴힐했다. 직후 KENSO는 딜로 브라운 & 밤비 킬러 & 쵸노 마사히로와 결탁하여 신 군단 DK를 만들었고, 밤비가 직후 부상으로 이탈하자 딜로 브라운과 세계 최강 태그 결정 리그전에 출전했으나 예선에서 탈락했다.
계속 DK의 일원으로 활동을 이어와 2014년 5월에는 KAIENTAI-DOJO에도 출전했으며, 5월 29일에는 마시모 켄고와 함께 스와마와 조 도링이 갖고 있던 세계 태그팀 챔피언 벨트에 도전했으나 패배했다. 6월 28일에 Wild Burning(스와마 & 아키야마 쥰)이 세계 태그팀 챔피언을 차지하자 이번엔 나가이 미츠야와 함께 재도전을 신청, 7월 12일에 타이틀전을 치렀으나 또다시 패배했다.
8월 30일에는 DDT 프로레슬링에도 참전하여 이시이 케이스케 & 이리에 시게히로 & 타카오 소우마가 가지고 있던 KO-D 6인 태그팀 벨트에 나가이 미츠야 & 마시모 켄고와 함께 도전했으나 경기 중간에 마시모에게 배신당하며 도전에 실패했다. 11월 30일에는 나가이 미츠야와 함께 또다시 세계 최강 태그 결정 리그전에 출전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하지만 12월 14일, 코라쿠엔 홀에서 열린 '와다 쿄헤이 레퍼리 40주년&환갑 기념 대회~와다 쿄헤이 프로듀스~에 출전하여 스즈키 코타로의 GAORA TV 챔피언십 벨트에 도전한 KENSO는, 스즈키 코타로에게 승리를 거두며 일본 커리어 첫 싱글 벨트를 획득했다. 이 벨트는 반년을 지켜내다 2015년 6월 4일 '싸우는 스시장인' SUSHI에게 패배하며 벨트를 내줬다.
2.6. 프리랜서
2015년 8월 1일자로 프리랜서 전향을 선언한 KENSO는 전일본 프로레슬링외에도 프로레슬링 NOAH, ZERO1에서도 경기를 가지고, DDT 프로레슬링에도 재출연하여 11월 3일에 타카기 산시로 사장이 가지고 있던 킹 오브 다크 챔피언 벨트에 도전하여 승리하였지만 5일만에 이와사키 코우키에게 패배하며 벨트를 빠르게 내주고 말았다.12월 13일에는 오오카 켄이 이끄는 #오오카 제국에 가입했고 2016년 1월 3일에는 T2히-(타카기 산시로 & 오오와시 토오루 & 히라타 카즈키)가 가지고 있던 KO-D 6인 태그팀 벨트에 남색 디노 & 슈퍼 사사당고 머신과 함께 도전하여 승리, 새로운 KO-D 6인 태그팀 챔피언이 되었으나 한달만에 T2히-에게 패배하며 벨트를 돌려주고 말았다.
이후에는 8월에 상하이의 IGF[32] 헤드 코치로 취임하며 일본에서 잠깐 벗어나 있었고, 2017년 2월 17일에 전일본에 오랫만에 출전, 3월 12일에 아키야마 쥰과 GAORA TV 챔피언 결정전 매치를 치르나[33] 패배했다.
2017년 후반에는 후지테레비의 자회사인 쿄도 테레비 (共同テレビ)에 입사하며 약 20년 전에 일했던 방송 업계에 되돌아오게 되었으며, 제 3 제작부 소속으로 직장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경기 빈도가 팍 줄었지만 그래도 선수 활동을 이어나가던 중 2020년에 코로나 범유행이 시작될 무렵부터는 선수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선수 생활을 잠시 쉬는 시기엔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지냈고, 2022년 하반기에 선수로 다시 복귀하게 된다.
3. 여담
- 2003년에 대학 시절에 만나 오랫동안 교제를 이어왔던 아나운서 미즈노 히로코와 결혼했고, 슬하에 아들이 있다. 미국 시절에 통역은 히로코가 해줬다고.
- 2002년 2월 1일, 안토니오 이노키가 링 위에 올라와서 신일본의 레슬러들에게 매우 뜬금없이 '너희들은 화내고 있냐?'라고 물어보고 마이크를 건네주고 답변을 요구한 일명 '2.1 삿포로 사변'에서 마이크를 건네받자 "저는 제 밝은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僕は自分の明るい未来が見えません!)"라는 더 뜬금없는 대답을 하여 이노키에게 "니가 알아서 찾으라고!(見つけろ!テメーで!)"라고 태클을 당하면서 그 전까지 어안이 벙벙해있던 관객들을 폭소시킨 적이 있다.[35]
- WWE에서 링네임이 히로히토로 정해질 위기에 처하자 스즈키 켄조도 "이 링네임으로 쇼에 나가면 누군가에게 칼에 찔릴 거다"라고 빈스 맥마흔을 설득했다고 한다. 덤으로 히로히토로 처음 데뷔 프로모가 방영되자 일본 정부 관계자 쪽에서도 즉시 정지 요청이 왔다고 한다.
- WWE 활동 당시 TIME지의 '세계에서 활약하는 일본인' 특집에서 당시 미국에서 활동 중이었던 일본인 프로레슬러 중 유일하게 게재된 적이 있다.
- 종합격투기의 인기가 높아지자 기자로부터 종합격투기 진출 의향을 질문받기도 했는데, "종합격투기는 승자를 위한 스포츠이지만 프로레슬링은 패자를 위한 스포츠라고 생각한다"며 프로레슬링에 대한 존중심을 나타낸 적이 있었다.
- 가장 존경하는 프로레슬러는 믹 폴리라고 한다.
- 입장할 때 양 손을 크게 옆으로 벌리는 포즈가 상징인데, '엘 아귈라 임페리얼'이라는 포즈로 멕시코의 상징인 독수리의 활짝 펼친 날개를 몸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즉 KENSO의 멕시코 경력의 상징과 같은 포즈이다.
- 2013년 신 사장 시라이시 노부오의 횡포로 인한 2차 전일본 선수 이탈사건이 터졌을 때, 콘도 슈지가 자신의 토킹 이벤트에서 KENSO가 시라이시 노부오 사장에게 선수들의 행동을 보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선수들은 물론 분노한 팬들에게까지 배신자 취급을 받게 된 흑역사가 있다. 무토 케이지는 퇴단 후에 이에 대해 "KENSO는 불쌍한 녀석이야"라고 반쯤 비꼬는 코멘트를 남기기까지 했다.
- 이 사건의 여파가 꽤 컸어서 당시 주간 프로레스에 연재 중이던 본인의 칼럼과 도쿄 스포츠에 연재 중이던 히로코의 칼럼까지 모두 연재 중단되었다.
- 2017년에 주식회사 쿄도 텔레비전[36]에 입사해 제3제작부에 배속되면서 프로듀서로 활동 중이다. 경력을 살려 프로레슬링 관련 영상도 제작했다고.
4. 둘러보기
<colbgcolor=#de0909><colcolor=#000000> | |||
시오자키 고 | 스즈키 코타로 | 아오키 아츠시 | |
KENSO | 미야하라 켄토 | 나카지마 요헤이 |
도쿄 스포츠 프로레슬링 대상 신인상 | ||||
마루후지 나오미치 (1999) | → | 리키오 타케시 스즈키 켄조 (2000) | → | 무라하마 타케히로 (2001) |
역대 세계 최강 태그 결정 리그전 우승자 | ||||
2009 | → | 2010 | → | 2011 |
신일본 프로레슬링 동기 태그 무토 케이지 & 후나키 마사카츠 | → | VOODOO-MURDERS KENSO & KONO | → | KAI & 사나다 세이야 |
[1] WWE 시절 사용하던 링네임으로, 사실상 본명을 영어로 표기한 것이다.[2] 2001년에 변경한 링네임. 본명과 읽는 법은 동일하나 이름의 마지막 글자만 다르다. WWE에서 귀국 이후 HUSTLE 시절에도 이 링네임을 썼다.[3] 2010년 7월 25일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VOODOO-MURDERS에 가입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링네임. 읽는 방법은 '켄소'이다.[4] 일본의 전 아나운서, 현 자민당 소속 정치가. 결혼 전 본명은 미즈노 히로코([ruby(水野 ひろ子, ruby=みず の ひろ こ)]). 후나바시시의회 의원을 거쳐 2019년부터는 치바현의회 의원. 스즈키 켄조와는 대학 시절에 만나 2003년에 결혼했으며, 켄조가 WWE에 건너가면서 본인도 디바로 아주 잠시 활약했고 일본 귀국 후에도 잠시 프로레슬링 관련으로 활약했다. 2015년부터 정계에 입문했다.[5] 고향 헤키난시 인근의 카리야시 소재 학교. 럭비부 소속이었다.[6] 왼손으로 상대의 뺨을 전력으로 후린다. 거의 기본기 수준으로 자주 애용한다.[7] 주로 왼팔로 사용하며, 래리어트로 상대를 후리면서 자신도 같이 쓰러진다. 래리어트를 칠 때 주먹을 쥐고 치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손바닥을 편 상태에서 치는 것도 특징.[8] 다리가 길어서 빅 붓은 꽤 멋진 그림이 나온다.[9] 롤링 게도 클러치.[10] 링 기어로 항상 착용하고 있는 허리띠로 상대의 목을 조르거나 후려친다. 당연히 반칙기. 여담으로 항상 애용하는 허리띠는 코스타리카에서 산 것으로, 가격은 약 200달러였다고 한다.[11] 클로우 홀드 STO. 상대의 얼굴을 아이언 클로로 붙잡은 상태에서 사용하는 STO이며, WWE 시절 개발한 피니셔로 구 명칭은 'Rising Sun' 이었다.[12] 러닝 니 어택. 신일본 시절 푸에르토리코 원정에서 개발한 피니셔. 무릎꿇은 상대에게 달려가서 샤이닝 위자드가 생각나는 모양새로 상대 얼굴을 무릎으로 차는 기술로, 모양새가 조금 투박하긴 하지만 190이 넘어가는 장신인 KENSO가 상대에게 전력으로 달려가서 무릎으로 얼굴을 후드려 까는 만큼 위력 하나는 발군이다. 구 명칭은 '샤이닝 어택'이었으며, 이름의 유래는 일본의 고서 하가쿠레.[13] 스즈키 켄조는 신일본에서 데뷔했을 때 부터 슈퍼 루키 취급이었다. 신일본의 영원한 넘버 투이자 메이지 대학 출신인 '세계의 사나운 독수리' 사카구치 세이지의 후배인데다가 190이 넘어가는 큰 키, 말끔한 얼굴까지 갖춰서 현장감독 초슈 리키의 눈에 들었고, 정말 미친듯이 밀어줬다.[14] 2010년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VOODOO-MURDERS에 가입한 이후 사용한 별명.[15] 신일본 프로레슬링 초창기 시절 사용했던 테마곡.[16] WWE 시절 테마곡.[17] AAA시절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곡으로, AAA의 사장이었던 안토니오 페냐가 사망하기 전에 AAA 음향 팀에 AAA에 일본인이 오면 이거 써 달라고 직접 골라준 곡이라고 한다. 정말로 AAA에 일본인인 KENSO가 오자 AAA 음향 팀은 정말로 안토니오 페냐의 유지를 따랐고, 이게 처음 TV쇼에서 나왔을 때 스즈키 켄조가 한 생각은 "이거 일본곡 맞음;;?"이었다고... 그래도 본인도 어느 정도 마음에 들었는지 일본 복귀 이후로도 계속 테마곡으로 사용하고 있다.[18] '투강도몽'이라고 쓰고 음독으로 '도쿄 돔(토우쿄우도-무)'이라고 끼워맞췄다.[19] KENSO가 항상 정열적으로 외치는 말. 사실 별 의미가 없는 말인데 어감이 강렬해서인지 KENSO의 상징이 되었다.[20] 영국에서는 바스에 1년간 체류하고 있었는데, 당시 영국왕실에 관한 보도 자세를 보면서 나중에 TV계에 종사하게 되는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21] 안토니오 이노키의 오른팔이자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영원한 넘버 투로 당연히 프로레슬링 업계에 굉장한 영향력이 있었다. KENSO의 출신 대학인 메이지대학 출신이자, 프로레슬러가 되기 이전에는 전국에서 놀던 유도 선수이기도 했다.[22] 이 때 교제중이던 대학 동창이자 후쿠시마 중앙 TV의 아나운서였던 미즈노 히로코를 설득해 미즈노도 도쿄로 불러들였다.[23] 참가자는 스즈키 켄조, 마카베 신야, 시바타 카츠요리, 타나하시 히로시,이노우에 와타루,후쿠다 마사카즈.[24] 몽골 울란바토르 출신의 프로레슬러.[25] 무토 케이지, 코지마 사토시,켄도 카신.[26] 이로 인해 히로코는 WWE에서 활동한 일본인 최초의 디바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27] 몸놀림은 체구에 비해서 상당히 빠른 편이었으나 쓸 수 있는 기술이 별로 없었는데다(가뜩이나 기술 수가 적었는데 WWE 규정에 걸려서 브레인버스터 등 일부 기술이 사용 불가능이 된 문제도 있었다.) 경기를 이끌어가는 능력이 확연히 부족했다.[28] 나중에 TARU도 코우노 마사유키를 동료로 인정했다.[29] 동일본 대지진 기금 기부목적으로 도쿄 스포츠의 주최 아래 최초로 신일본 & 전일본 & NOAH 메이저 3사가 모인 최초의 흥행이었다.[30] '비칫토'는 KENSO의 시그니쳐 워드이다.[31] 결국 소 슌은 2012년 12월 31일 공식 은퇴 기자회견을 가지고 은퇴했으며, 기자회견에는 KENSO도 함께 참가했다.[32] 이노키 게놈 페더레이션. 안토니오 이노키가 만들었다.[33] 전 챔피언 쿠로시오 지로의 무릎부상이 장기화되며 쿠로시오가 반납했었다.[34] 일본 최장수 만화 사자에상의 주인공 후구타 사자에의 남편으로, 처가에 얹혀 살고 있어서 일본에서는 처가살이하는 남편의 상징으로 통한다.[35] 다만 이전까지의 전개가 매우 이상했던 와중에 관객의 혼란도를 낮췄기 때문인지 이 문답 이전에 이노키를 링 위로 올린 장본인인 쵸노 마사히로는 KENSO에게 나이스 코멘트라고 칭찬했다고.[36] 후지 테레비와 산케이 신문의 지주회사인 후지 미디어 홀딩스의 자회사로, 후지 테레비 외에도 여러 미디어 회사에 프로그램을 제작해 주는 콘텐츠 제작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