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 | 후쿠다 마사카즈 [ruby(福田 雅一, ruby=ふく だ まさかず)] | |
출생 | 1972년 5월 17일 |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토치기현 오오타와라시([ruby(大田原市, ruby=おお た わらし)])[1] | ||
사망 | 2000년 4월 19일 (향년 27세) 미야기현 게센누마시내 병원 | |
신장 | 188cm | |
체중 | 105kg | |
혈액형 | A형 | |
학력 | 아시카가공업대학부속고교 (졸업)[2] 니혼대학 (레슬링부 / 학사)[3] | |
시그니쳐 무브 | 노도와오토시 초크 슬램 | |
피니시 무브 | 우라나게 | |
별명 | ||
테마곡 | RIDE THE WIND (1999.1 - 2000.4)[4] | |
데뷔 | 1996년 3월 20일 (23세) 도쿄도 분쿄구 코라쿠엔 홀 레슬 유메 팩토리[5] 몽용전([ruby(夢勇伝, ruby=ゆめゆうでん)])'96 최종일 vs 바자라 & 더 울프 (w/나카노 신이치) | |
마지막 경기 | 2000년 4월 14일 (27세, 커리어 4년) 미야기현 게센누마시종합체육관 신일본 제 8회 영 라이온배 1일차 vs 시바타 카츠요리 |
1. 개요
일본의 전 프로레슬러.일본에서 링 내 사고로 인해 사망한 최초의 남성 프로레슬러로 기록된 안타까운 유망주이다.
2. 경력
중학생 때까지 스모를 해서 관동 스모대회에서 3위를 기록한 후쿠다는 레슬링 명문 아시카가 공업대학 부속고교로 진학하며 레슬링을 해왔고, 3학년 때 인터하이에서 8위 안에 드는 활약을 보여주며 레슬링 명문인 니혼대학으로 진학했다.1994년 대학 4학년 때 국체에 출전해 82kg급에서 2위를 기록하는 호성적을 내고 졸업했고, 1995년 6월에 레슬 유메 팩토리에 입문하여 1996년 3월 20일 레슬 유메 팩토리의 코라쿠엔 홀 대회에서 데뷔했다.
10월에는 같은 고교 출신의 선배 카미카제와 아시카가 익스프레스를 결성하고, 1997년에는 무아와 WAR에도 출전했다.
곧 키 크고 체격 좋은 후쿠다를 신일본 프로레슬링이 눈여겨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1998년 5월 제 5회 베스트 오브 더 슈퍼 주니어에 A로 출전하기까지 했다.
결국 1999년 1월에 후지나미 타츠미의 추천을 받았는데, 후쿠다의 고민을 꿰뚫어보던 레슬 유메 팩토리의 사장 타카다 류가 후쿠다를 방출 처리해주어 신일본 프로레슬링으로 이적했다.
하시모토 신야의 심부름꾼을 맡으면서 영 라이온 생활을 착실히 했고, 선배들의 이쁨을 받는 후쿠다는 곧 수뇌부의 눈에 들었으나, 10월에 경기 이후 경막하혈종 판정을 받아 4개월간 이탈했다가 병원을 바꿔 가며 출전 허가를 얻어냈다.
2000년 3월 28일에는 두 기둥 나카니시 마나부와 나가타 유지를 주축으로 요시에 유타카와 후쿠다 본인까지 당대의 유망주들과 '파이팅 클럽 G-Eggs'를 결성하며 밝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는 듯 했으나...
3. 비극적인 사망
2000년 4월 14일, G-Eggs에 들어간 후 첫 경기인 시바타 카츠요리와의 영 라이온배 개막전 중 시바타의 강력한 플라잉 엘보를 머리에 맞았는데, 경기 종료 후에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져 게센누마시내의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검사 결과는 또다시 경막하혈종이었고, 후쿠다는 두 번 다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좌뇌, 우뇌, 연수가 모두 망가져 결국 뇌사 판정을 받고 말았다.
혈압이 한 자릿수를 기록하면서도 심장이 뛰고 있던 후쿠다의 심장은 결국 4월 19일에 한계를 맞이했고, 4월 19일 후쿠다 마사카즈는 사망하고 말았다. 이전해 10월 뇌출혈이 있었음에도 너무 빨리 복귀한 일이 초래한 충격적인 비극이었다.
이 때 하필 신일본이 지방 순행 일정 중이여서 후쿠다의 임종을 지켜본 것은 오가와 나오야에게 패배하고 은퇴 위기에 빠진 채 흥행에서 제외되어 있던 선배 하시모토 신야 뿐이었다. 후쿠다의 사망을 지켜본 하시모토는 "최후에는 뇌사상태에 빠져서... 우뇌가 망가지고, 좌뇌가 망가지고, 연수까지 망가져서...그래도 맥은 계속 움직였어. 그녀석은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싸웠어"라고 말하며 통곡했다.
4. 여담
- 사람좋고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신일본 순혈이 아니였음에도 신일본 선배들의 이쁨을 듬뿍 받았고, '마츠요시(松吉)'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 1999년 1월에 신일본에 이적한 후 사망 전까지 하시모토 신야의 심부름꾼을 맡았는데, 차 사랑이 극도로 지극해서, 어리버리해서 차에 기스 낼까봐 후쿠다 다음 심부름꾼 스즈키 켄조에게는 차 운전조차 안 맡기던 하시모토가 후쿠다에게는 운전을 맡길 정도로 신뢰했다.
- 후쿠다가 사망 후 다음 심부름꾼 스즈키 켄조가 하시모토의 차에서 신경 쓰이는 기스를 발견하고 하시모토에게 알려줬더니 그렇게 차에 집착하는 하시모토임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고 한다. 이건 후쿠다가 운전하다가 낸 기스였는데, 하시모토는 "후쿠다가 운전했을 때의 상처여. 후쿠다와의 추억이니까 그건 안 지워도 돼."라고 하며 이 기스를 끝까지 지우지 않고 남겨뒀다고 한다.(출처:스즈키 히로코 칼럼)
- 후쿠다의 사망은 여러 선배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우선 은퇴 위기에 몰려있던 하시모토는 후쿠다를 대신하여 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결국 그해 8월에 현역에 복귀하였다. 그리고 은퇴 시합까지 치르고 현장감독으로 뒷선으로 물러나 있던 초슈 리키는 아끼던 후배 후쿠다 마사카즈[6]의 죽음 이후 마찬가지로 후쿠다를 대신하여 싸운다는 생각으로 그해 7월 30일 오니타 아츠시와의 전류폭파 데스매치를 받아들이며 현역에 재복귀하였으며, 초슈는 입장할 때 한 손에 후쿠다의 영정 사진을 들고 입장했다.
- 후쿠다의 마지막 대전 상대가 되어버린 시바타 카츠요리는 큰 죄책감에 빠졌고, 이후 매년 후쿠다의 고향인 토치기현 오오타와라시에 마련된 후쿠다의 묘소를 찾아 근황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 신일본 시절 동료이던 '복숭아색 거한' 요시에 유타카의 아내 미나(美奈)를 소개시켜 준 장본인이다. 1999년에 이적 후 같은 대학의 탁구선수 출신인 미나 씨를 요시에에게 소개시켜 줬고, 둘은 2003년 결혼에 골인했다. 안타깝게도 사랑의 다리가 되어준 후쿠다가 2000년에 사망한 데 이어 요시에 유타카도 2024년에 심근경색으로 갑작스러운 사망을 맞이하고 말았다.
- 후쿠다의 임종을 지켜본 유일한 선배 하시모토 신야도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2005년 사망했으며, 마지막 경기 상대인 시바타 카츠요리도 2017년 동일한 경막하혈종 판정을 받고 생존률 17%의 상태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
[1] 본래 출생지는 나스군 쿠로바네마치([ruby(黒羽町, ruby=くろばねまち)])였으나 2005년에 오오타와라시에 편입되었다.[2] 현 아시카가대학부속고교. 같은 현내지만 후쿠다의 고향 쿠로바네마치와는 100km 떨어져 있는 아시카가시 소재의 학교. 레슬링 명문으로 1976 몬트리올 올림픽 국가대표였던 야츠 요시아키, 일본 최고의 프로레슬러 미사와 미츠하루와 카와다 토시아키, 전 ZERO1의 KAMIKAZE, 가면 레슬러 슈퍼 라이더가 이곳 출신이며, 이외에는 몇몇 배구 선수들이 이곳 출신이다.[3] 스모,레슬링 명문으로, 레슬링부 소속이었던 동문으로는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대표 '난폭무사' 야츠 요시아키, 1984년, 1988년, 1992년 3회 올림픽 출전에 빛나는 '아마레슬링의 신' 혼다 타몬, 아마 시절 만만찮은 실적을 남긴 '야수' 후지타 카즈유키와 그레이트-O-칸, 판크라스 출신의 전 선수 타카하시 요시키, 여성부의 '괴물' 하시모토 치히로 등이 여기 출신이며, 비 레슬링부 출신으로는 이시카와 타카시와, 학생 프로레슬링(프로레슬링 동아리)인 니혼대학 프로레슬링 연구회 출신의 야스 우라노, 조운 자룡, 미와 후토시, 다이스케 간바레☆프로레슬링 대표 오오카 켄, DDT 프로레슬링의 KUDO, BASARA의 카자토 다이치, 2AW의 모가미 큐, 대일본 프로레슬링의 요시노 타츠히코 등이 있다.[4] 신일본 프로레슬링 시절 사용했던 테마곡.[5] レッスル夢ファクトリー. 1994년 8월 SPWF의 사무국장이었던 타카다 류가 세운 단체로 아소산, 온료, K-ness., GENTARO, 후고 후고 유메지, 쌍둥이 형제 후도 리키야, 시모다 다이사쿠 등이 이곳 출신이었다. 2001년 10월에 경영난으로 해산했다.[6] "다음 생에는 내가 너의 심부름꾼이 되어 줄게"라고까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