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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05:27:01

켄 매팅리

<colbgcolor=#234794><colcolor=#fff> 토마스 케네스 매팅리 2세
Thomas Kenneth Mattingly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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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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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출생 1936년 3월 17일
미국 일리노이 시카고
사망 2023년 10월 31일 (향년 87세)

1. 소개2. 주요 활동 이력3. NASA 이후

1. 소개

Thomas Kenneth Mattingly Ⅱ(1936년 3월 17일 미국 일리노이시카고 출생 ~ 2023년 10월 31일 사망)는 미합중국 해군 제독이자 NASA의 우주비행사로, 아폴로 13호의 정규 팀원이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팀에서 제외된 뒤 아폴로 16호 승무원으로 활동한, 그리고 우주왕복선 시대에 펜타곤과 관련된 기밀 미션을 수행했던 다채로운 이력의 우주비행사이다.

영화 아폴로 13의 시청자에게는 우주에 나갈 기회를 억울하게 잃은 불운한 캐릭터로 기억되지만, 상세한 이력을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우주탐사 관련으로 화려한 실적을 자랑하는 행운아다. 우주왕복선의 초창기 개발사, 그리고 우주왕복선이라는 개념의 응용과 재도전에 있어서도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2. 주요 활동 이력

시카고에서 태어나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매팅리는 오번 대학교에서 항공공학을 공부한 뒤 해군에서 전투기 조종장교 과정을 수료하고 A-1, A-3 조종사로 미드웨이급 항공모함 USS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함에 배속되어 활동했다.

1966년 NASA 우주인단 5기[3]에 선발된 뒤 1970년 아폴로 13호의 사령선 조종사로 내정되었다. 프레드 헤이즈와 함께 동기들 중 처음으로 우주에 올라갈 기회를 잡은 매팅리는 강훈련과 수천 시간의 조종 경험을 통해 아폴로 13호의 안전한 여행을 책임질 것이라 기대되었지만 아폴로 13호의 예비 팀원이었던 찰스 듀크[4]가 홍역에 걸렸다. 문제는 이게 우주에 가서 홍역 발병하면 어쩌지? 하는 우려로 번져서 같은 장비들을 가지고 훈련했던 짐 러블, 프레드 헤이즈, 잭 스와이거트, 존 영, 매팅리의 어릴 적 의료 기록을 털어본 결과 매팅리만이 홍역을 앓은 적이 없었다. 즉 "면역이 없으니 바이러스에 노출되었을 우려가 있고, 발사 3일 전인 지금은 모르지만 우주에 올라가서 그게 발병하는 패닉에 사로집힌 의료팀과 디크 슬레이튼의 조치로 스와이거트와 교대되며 그라운딩 처리[5]

하지만 아폴로 13호가 우주에 가서 산소 탱크 폭발 사고로 인해 달 착륙은 고사하고 승무원들의 목숨이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면 강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매팅리는 사고 후 급히 소집되어 대책 마련에 나섰다. 매팅리는 특히 재진입에 필요한 전력 보전을 위해 매달렸고,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 아폴로 13호는 무사히 지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아폴로 13호에서 보여준 기민한 대처와 오랫동안 홍역 징후가 없음에 다시 비행 자격이 회복되었고, 스와이거트와 교대한 존 영과 그 새퀴의 팀에서 다시 사령선 조종사로 배정되었다. 아폴로 16호에서도 사령선 조종사였기 때문에 달에 직접 착륙하지는 못했지만, 달에서 돌아오는 길에 심우주 EVA[6]를 수행하는 기록을 남겼다.

이후 해군의 이적제의를 거절한 뒤 우주왕복선 연구에 참여[7]하였다. 사실 아폴로 시절보다 이 시절이 매팅리의 전성기다. 여러모로 제미니 시절부터 셔틀 시절까지 활약하고 함께 달에 갔던 선배 존 영과 겹치는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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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사대로 떠나는 ST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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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번 대학교에서 대대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매팅리와 하츠필드가 모두 오번 출신이기 때문.

1982년 컬럼비아의 마지막 궤도상 테스트 미션인 STS-4[8]의 미션 사령관을 맡았다.[9] 미션을 마치고 캘리포니아 에드워즈 공군기지에 착륙한 뒤에는 이례적으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영부인 낸시 레이건 여사가 마중을 나왔다.[10] 이런 인연으로 훗날 NASA를 나갈 때 우주 비행사로서는 이례적으로 제독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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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줄은 파일럿 로렌 슈라이버, 매팅리, 뒷줄은 게리 페이튼(Gary E. Payton), 제임스 버클리(James F. Buchli), 엘리슨 오니즈카(Ellison L. Onizuka). 이 중 페이튼은 미합중국 공군에서 NASA의 셔틀에다 끼워넣기로 우주에 올려보낸 MSE 우주비행사[11]이었는데, 매팅리의 해군부심 때문에 놀림을 받았다고 오니즈카는 이후 STS-51-L 미션에서 순직했다.

매팅리의 마지막 우주 미션은 1985년의 STS-51-C[12] 디스커버리 미션[13]이었다. 최초의 국방부 위성 미션으로, IUS(Inertial Upper Stage, 셔틀과 타이탄 등에 쓰였던 상단 로켓)로 매그넘 지구동기궤도 위성[14]을 궤도에 전개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당시 미션에 참여했던 페이튼의 2009년 발언[15]에 따르면 이 때 쐈던 위성은 지금도 잘만 돌아간다고. NASA에서도 이 미션에 대해 언론에다 되도록이면 떠들지 않으려 노력했던 편이라 발사 전 브리핑을 발사 9분 전에 했고, 미션이 상당히 급작스럽게 중단된 원인에 대해서도 일절 함구하고 있다.[16] 다만 이 미션은 발사가 굉장히 위험했다. 발사 일시가 1985년 1월 24일인데, 상당히 추운 날이었다. 1년 4일 후의 그 날처럼. 겉보기에는 순탄한 발사였지만, 고체 로켓 부스터의 O-ring이 1mm만 남아 있었던, 그야말로 싹 불타버리기 직전까지 갔음이 부스터의 회수 이후 밝혀졌다. 그런데 NASA는 1985년의 잔여 미션을 전부 취소한다거나 최소한 하반기 추울 때의 미션이라도 취소해야 한다는 로저 보졸리를 비롯한 O-ring 엔지니어들의 간곡한 요청을 무시하고 발사를 강행한다. 그 결과 1986년 1월 28일, STS-51-C의 승무원 오니즈카를 포함한 일곱 승무원이 챌린저호의 O-ring 문제로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STS-51-C 미션을 수행하며 매팅리는 달에 갔다 온 우주비행사들 중 마지막으로 우주 임무를 수행한 인물로 기록되었다.[17] 이후 NASA를 나왔고 이듬해 해군에서도 퇴역했다. 해군에서 퇴역할 시기에 관한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있는데, 사실 매팅리는 아폴로 미션 이후 해군부 장관에게 보직 네가 부르는 것 아무거나 시켜줄테니 돌아와라 하는 파격적인 제의를 받았지만 우주왕복선 미션에 매력을 느끼고 NASA에 더 오래 잔류했다. 그리고 STS-4 이후에도 해군우주사령관 자리에 앉혀줄테니 돌아오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이놈의 국방부 기밀 미션이 좀 많이 연기되었던 터라 복귀가 차일피일 미뤄졌고, 그 사이 해군우주사령관 자리는 리처드 트룰리가 일찍 가져갔다. 결국 능력만 보면 해군에서 우주계획과 관련해서 손꼽히는 인재였음에도 보직이 애매해지며[18] 별 두개를 끝으로 퇴역했다.

기회가 된다면 2002년 4월 22일 존슨 우주 센터 Oral History Project T.K. 매팅리 편(영문)을 읽어보자.[19]

3. NASA 이후

이후 그루먼에서 사장으로 있던 프레드 헤이즈의 연락을 받고 그루먼에 스카웃되어 우주정거장 부서에서 근무하다가 제너럴 다이나믹스로 옮겨 아틀라스 부스터를 연구했다. 이후에는 막 록히드 - 마틴 마리에타가 합친 록히드 마틴에서 X-33 SSTO 우주왕복선을 제작했지만, 안타깝게도 프로그램이 도중에 취소되었다.

현재는 Systems Planning and Analysis 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1] 왼쪽부터 짐 러블, 켄 매팅리, 프레드 헤이즈. 아폴로 13호의 공식 대원사진.[2] 왼쪽부터 켄 매팅리, 존 영, 찰스 듀크. 아폴로 16호의 공식 대원사진. 아폴로 13 영화에서 그를 연기한 게리 시니스와 달리 실제로는 빡빡이다. 본인은 강연에 초대되어서는 게리 시니스 대신 웬놈의 요다를 보게 된 여러분에게 정말 미안하다.는 개드립을 쳤다.[3] 전설의 테스트 파일럿 조 엥글의 기수로 유명하고, 아폴로 계획 막바지와 스카이랩 미션에서 활동한 이들이 주로 이 기수에 몰려 있다.[4] 아폴로 11호의 착륙 직후 환호하는 NASA 직원들 사이에서 아폴로 11호에게 보낸 "이제야 숨 좀 쉬겠다!"는 발언으로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인물이다. 아폴로 13호의 예비 달 착륙선 조종사로 활동했지만 아폴로 13호의 발사 얼마 전에 아이들에게서 홍역이 옮았다.[5] 이런 일의 원인은 아폴로 7호의 흑역사 때문이었다. 미션이 다 끝나갈 때쯤 우주인 3명이 모두 우주감기에 걸렸고 휴스턴의 관제소와 격한 욕설이 오가는 말싸움 끝에 전원 그라운딩 처리당한 선례가 있어 이전보다 질병 감염을 더 신경쓰기 된 것.[6] 월면도 아니고 지구 궤도상도 아닌, 말 그대로 '망망대우주'의 공간에서 실시하는 EVA. 최초는 15호의 앨프레드 워든이 수행했다. 사령선을 책임지는 중책을 맡았음에도 달을 밟지 못하는 설움을 겪었던 사령선 조종사들에게 아폴로 계획 J 미션부터 추가로 주어진 일정이었다.[7] 존 워너 해군부 장관이 직접 전화를 해오며 항공 병과장이든 뭐든 다 시켜준다고 제안했지만 정작 해군 항공 계열에서는 베트남 전쟁 참전자들의 텃세가 심함을 느끼고 그냥 셔틀 프로그램에 남기로 결정했다. 사실 셔틀 프로그램의 앞길이 화성 탐사의 로망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는 것을 직감하고 이직을 고민 중이었다고.[8] 기체 테스트 외에 미합중국 공군의 기밀 화물(미사일 감지 시스템으로 추정)을 궤도에서 테스트하는 임무가 포함되어 있었다.[9] 함께 임무를 수행한 파일럿 행크 하츠필드는 이후 디스커버리의 처녀비행 STS-41-D에서 사령관을 맡는다.[10] 마지막 테스트 비행이었던지라 착륙 후 우주왕복선의 실질적인 운용이 가능하다는 상징적인 선언을 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 이런 자리를 맞추기 위해 미션 날짜도 7월 4일 독립기념일에 에드워즈 기지에 착륙하는 것으로 맞췄다. 이후의 STS-5부터는 정식으로 미션 스페셜리스트들을 데리고 우주에 올라가서 이런저런 임무들을 수행하게 된다.[11] 정식 명칭은 Manned Spaceflight Engineer 프로그램으로, MOL이 폐지된 이후로도 미 공군이 스스로 우주개발에 나서려다가 우주왕복선을 취역시킨 NASA에 주도권을 내주자 어떻게든 우리네 관계자를 올려보내야 안심이 되겠다...는 의도로 NASA의 정규 우주비행사들과 함께 훈련을 시켜서 비정규직인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로 올려보내는 우주인 양성 프로그램이었다. 사실 미션 하나하나마다 1회용으로 두세 명씩 뽑아서 쓰던 편이고 그나마 미션이 진행되던 시기 NASA가 너무 쓸데없는 짓거리(사우디아라비아 왕자, 미국 하원의원을 우주에 올린다던가)를 많이 했던데다 챌린저 참사로 계획이 다 헝클어진지라 차일피일 미뤄지다보니 실제로 우주에 올라가 펜타곤 미션을 수행했던 인물은 이 STS-51-C의 페이튼과 STS-51-J의 윌리엄 페일리스 뿐이었다.[12] 1984 회계년도부터 NASA가 벌인 삽질 중 하나로, 그냥 계획 발표한 STS-1,2,3 순으로 하던 것을 회계년도 4,5와 발사장 1(플로리다), 2(캘리포니아)-순서 ABC... 같은 괴이한 명명체계로 바꿨다. 이 미션들은 주로 1984년부터 1985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런 괴이한 명명법의 마지막 미션은 STS-51-L... 이 시기의 미션들 중에 일부는 펜타곤의 군사위성과 관계된 미션들이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국가 기밀급의 군사기밀들이 다수 포함된지라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로널드 레이건의 로망이었던 SDI와 연계되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13] 원래 챌린저에 탑승하여 발사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타일이 떨어져나가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여 디스커버리로 대체되었다. 미 공군 역시 셔틀 시대 초기에 제작된 궤도선들 중 디스커버리를 특히 좋아해서 서부 반덴버그 기지에서 발사하려던 첫 공군 미션도 디스커버리로 낙점했을 정도인데, 디스커버리 궤도선 자체가 역대급의 강운을 타고났는지 아니면 초기 제작에서부터 다른 것들보다 믿음직스럽게 만들어졌는지는 몰라도 NASA 역시 챌린저 사고와 STS-107 컬럼비아 사고 이후 각각의 셔틀 프로그램 재개 미션에다 디스커버리를 투입했다.[14] 국가정찰국(National Reconnaissance Office)과 CIA 같은 정보기관에서 쓰는 것으로, 소련 도/감청에 쓰이는 것이었다 카더라.[15] 1995년 SDI가 축소되며 공군을 나온 후 국방부에서 MD를 연구하다 2010년 퇴직했다. 이후 모교인 미국공군사관학교에서 우주공학 교수로 재직 중.[16] 이 미션은 셔틀 실무 미션으로는 역대 최단기간 미션이며, 에드워즈 공군기지에 내릴 때 페이튼은 굉장히 짜증을 냈다고 전해진다. 매팅리는 셔틀 개발 시점부터 활동한 베테랑이었지만 제작 이전부터 이어진 공군의 훈수질에 대해 은근한 불쾌감을 갖고 있었고 해군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며 이 미션 내용 역시도 본인은 로렌 슈라이버를 가르친다는 태도였다. 엘리슨 오니즈카는 이후 51L(그 폭발한 미션)에서 IUS를 다시 써먹어야 했기에 IUS를 열심히 공부했지만 정작 페이튼과는 어울리지 못했다. 훗날 51L 미션을 앞두고 IUS 운용에 대해 상당한 자신감을 드러낸 것을 보면 매그넘의 실제 설치도 오니즈카와 버클리가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랬던 51C 미션에서 페이튼은 자리나 채우는 짐짝 취급을 받으며 심하게 따돌림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이 내용은 당시 관계자들의 회상 내지 추측에 기반한 것이며 실제 임무 기록은 철저히 기밀로 유지되고 있지만...[17] 원래 존 영 또한 1986년 8월 발사 예정이었던 STS-61-J 아틀란티스 미션에서 사령관으로 내정되었지만 챌린저 폭발사고 이후 NASA의 높으신 분들을 깠던 바람에 높으신 분들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먹이며 영을 일선 우주비행 임무에서 배제시키고 NASA의 간부로 임명했다. 해당 미션은 허블 우주 망원경의 궤도 전개 미션이었는데 이 미션은 매팅리의 미션에서 데뷔한 로렌 슈라이버가 사령관을 맡아서 1990년에야 수행되었는데, 1990년에 거의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였던 영인지라 윗선과의 마찰과는 별개로도 좀 무리이기는 했다.[18]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이 점점 노하우를 웬만큼 쌓아간다고 판단한 NASA는 공군의 군사위성을 우리가 셔틀로 많이 쏴주겠다면서 예산을 싹 쓸어왔지만, 매팅리의 미션을 포함한 극히 일부 사례를 빼면 이 시절의 미션들은 대중에의 홍보에 너무 목을 매는등 산만하고 허술한 면이 많았다. 매팅리가 NASA에서 나온 것은 이런 산만한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던 원인도 있었는데, 결국 매팅리가 NASA를 나온 이후 벌어진 챌린저 참사를 끝으로 공군은 도널드 쿠티나의 주도 하에 NASA에 목매지 않고 스스로 위성을 쏘아올리기 시작한다.[19] 존슨 우주 센터에서 꾸준히 진행하고 있는, 역사적 인물들과의 인터뷰를 녹음/채록하여 역사에 남기고 있는 프로젝트다. 우주 매니아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