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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21:08:28

요시히토(가쓰라노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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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결혼으로 인한 황적이탈
[궁]: 분가하여 새 미야케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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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가쓰라노미야
가쓰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桂宮宜仁親王
파일:external/nippon.zaidan.info/z0001_01.jpg
<colbgcolor=#AF001F><colcolor=#dca600> 이름 요시히토(宜仁)
미야고 가쓰라노미야(桂宮)
출생 1948년 2월 11일
도쿄도 시나가와구
미카사노미야 저택
사망 2014년 6월 8일 (향년 66세)
도쿄도 분쿄구
도쿄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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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F001F><colcolor=#dca600> 신위 친왕(親王)
경칭 전하(殿下)
부모 부친 다카히토 친왕
모친 유리코 비
형제자매 누나 고노에 야스코
토모히토 친왕
여동생 센 마사코
남동생 노리히토 친왕
학력 가쿠슈인 유치원 (수료)
가쿠슈인 초등과 (졸업)
가쿠슈인 중등과 (졸업)
가쿠슈인 고등과 (졸업)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정치학과 / 학사)
호주국립대학교 대학원 (졸업)
종교 신토
오시루시
(お印)
[1]
계수나무(桂) }}}}}}}}}
파일:Katsuranomiya.jpg
소쿠타이(束帯)를 입은 요시히토 친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Japanese_Crest_of_Katura_no_miya_Yosihito.svg.png
가쓰라노미야의 문장

1. 개요2. 생애
2.1. 황실 가계도
3. 내연 관계?4. 사망5. 여담

[clearfix]

1. 개요

다이쇼 덴노의 4남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3남 2녀 중 차남(셋째). 즉, 쇼와 덴노의 조카이자 아키히토 상황의 사촌 동생, 나루히토 현 덴노의 당숙이다.

태어났을 당시에는 황위 계승 서열 7위[2]였다가 사망 시점에선 황위 계승 서열 6위[3]였다. 그의 후순위 계승자는 남동생 노리히토 친왕이 있었으나 노리히토 친왕이 2002년 요절하면서 신적강하된 구 황족을 부활시키지 않는 이상 요시히토 친왕의 후순위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2. 생애

1948년, 다카히토 친왕유리코 비의 셋째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누나 고노에 야스코, 형 토모히토가 있고, 여동생 센 마사코, 남동생 노리히토가 있다.

빠른년생이라 1947년생과 같이 학창시절을 보낸 것으로 추정[4].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에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에 유학했다. 그후 1974년부터 1984년까지 10년 간 NHK에서 근무하다가 일본농협, 일본산림박람회, 일본공예회 등에서 이사로 일했다.

평생 독신으로 산 인물[5]로, 만 40세가 되기 직전인 1988년 1월 1일에 자신의 백부인 쇼와 덴노로부터 '가쓰라노미야(桂宮)'라는 미야고(궁호)를 하사받았다. 가쿠슈인 재학 시절에 친구들은 그를 '미카사'로 불렀다. 황족이라 성씨가 없어서 아버지의 미야고를 대신 사용했던 모양이다.

미야케를 창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88년 5월 26일, 자신의 침실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급성경막하출혈이 발병한 것으로 침실에서 넘어져 머리를 크게 다친 것으로 추정된다. 급성경막하혈종으로 의식불명으로 있다가 8월에 의식을 회복하였다. 11월에 퇴원하였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1989년 큰아버지인 쇼와 덴노의 장례나 아키히토의 즉위식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재활 치료를 받아 1991년 11월부터 휠체어를 타고 공무를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이때쯤부터 오른 눈의 실명 및 우반신의 마비, 기억 장애 등을 겪게 된다.

한국에서 요시히토의 인지도는 거의 없는 수준이고, 형 토모히토가 재일교포에게 했던 일에 비해 요시히토는 친한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에 망언을 하는 입장도 아니기 때문에 일본 황족 중 가장 인지도가 낮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입장이지만, 일본에서는 그래도 자기 나라 황족이라고 기억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인들이 기억하는 요시히토의 모습은 오른쪽 눈을 찡그린 채[6] 안경에 콧수염을 기르고 휠체어를 타고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으로 기억되는데, 이건 요시히토가 쓰러진 후 공개활동을 재개한 1991년부터 2008년까지의 모습이다. 사진에서 보듯 당뇨합병증으로 한쪽 눈을 잃었으며, 말년에는 형 토모히토 친왕과 마찬가지로 암 발병으로 인해 성대를 적출하면서 목소리를 잃기까지 했다. 쓰러지기 전 사진을 보면 그 역시 형 토모히토와 마찬가지로 담배를 폈으니 그게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2008년 패혈증이 발병하면서 요시히토는 집에서 거의 누워지냈고, 2014년 죽을 때까지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7]

2.1. 황실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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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도시미치
         
이케다 다카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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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히사나가
구로다 요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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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다다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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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소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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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게 구니마로
모리야 케이



3. 내연 관계?

보통 결혼하면서 궁가(미야케)를 창시하는 게 통례임에도 나이가 40세가 되어가자 독신 상태임에도 큰아버지에 의해 떠밀리듯이 궁가를 창시하게 되었다. 주간지 보도에 의하면 일본 피겨 스케이팅 연맹 임원 아리자카 아키코(有坂昭子)와의 내연관계가 거의 정설처럼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일본 야후에서 아리자카 아키코를 치면 바로 연관검색어로 가쓰라노미야가 나올 정도. 1988년 5월에 요시히토가 혼수상태로 아리자카를 찾았고, 이때 소식을 들은 아리자카는 삿포로에서 단신으로 상경하여 이때부터 병수발을 들면서 같이 살게 되었다는 얘기다.

물론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아리자카의 신분은 어디까지나 가쓰라노미야의 고용인. 사실 공식적으로 교제했더라도 결혼까지 가는 데는 매우 힘든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아리자카가 요시히토보다 3살 연상에 아들 하나가 있는 이혼녀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이 이상 공식적으로 밝혀진 건 없다. 이와 별개로 설령 그들 사이에서 아들이 있다고 해도 현행 황실전범에서는 사생아의 황위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4. 사망

파일:카츠라노미야서거전.jpg
서거 5개월 전인 2014년 1월 13일의 모습

2014년 6월 8일 오전 10시 55분경, 심장마비로 급서(急逝)하였다. 평생 독신인 상태에서 가쓰라노미야라는 1인 궁가를 창설한 지라 가쓰라노미야는 그의 죽음과 동시에 단절되었다. 그가 쓰러지지만 않았어도 늦게나마 결혼해서 자손을 남겼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그가 쓰러진 시점에서 그는 이미 40세였다. 요시히토의 동년배인 1940년대생 일본인들은 평생 독신으로 살 예정이 아니라면 이 시점에서 거의 대부분 결혼해 있는 상태였다. 1950~60년대생 일본인들도 1988년 시점에선 상당수가 이미 결혼한 상태이기에 쓰러지지 않았어도 결혼을 했을지는 알 수 없다.

아울러 그의 부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과 모친 유리코 비 부부는 아침에 가벼운 산책을 할 정도로 건강하고 금슬이 좋은데 아들 3명을 모두 먼저 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일본 황실에 남은 황족 21명 중에서, 이제 남성은 5명뿐이다. 남동생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은 딸 3명[8]만 남겨두고 2002년에 사망, 형 토모히토 친왕도 2012년에 딸 2명[9]만 남겨두고 사망하였고, 두 사람 모두 아들이 없어 미카사노미야 가문은 절손될 예정이다. 분쿄구의 황실 묘지에 묻혔다.

2015년 6월 8일, 황실과는 별도로 1주기 추모제를 지냈다.

2016년 10월 27일, 아버지 다카히토 친왕이 사망했다. 향년 100세.

2019년 6월 8일, 나루히토 덴노 내외[10] 등의 황족[11] 및 구 황족들의 참배 속에서 5주기 추모제를 지냈다.

5. 여담

콧수염을 기르기 전에는 아버지 다카히토, 콧수염을 기른 후에는 할아버지 다이쇼 덴노를 닮았다.

[1]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2] 큰아버지 쇼와 덴노 시절인 쇼와 23년에 태어났다. 이 시절 계승순위는 사촌형이자 황태자였던 아키히토 덴노(1위) - 사촌형 마사히토(2위) - 둘째 큰아버지 야스히토(3위) - 셋째 큰아버지 노부히토(4위) - 아버지 다카히토(5위) - 형 토모히토(6위) 다음이었다.[3] 사촌형 아키히토의 재위 중인 헤이세이 26년 별세. 이 시절엔 당조카이자 황태자였던 나루히토 덴노(1위) - 당조카 후미히토(2위) - 당조카손자 히사히토(3위) - 사촌형 마사히토(4위) - 아버지 다카히토(5위) 다음이었다. 형 토모히토가 그보다 2년 전인 2012년 별세했기 때문.[4] 2월 28/29일생까지 빠른년생인 한국과 달리 일본은 3월 31일생까지 빠른년생이다. 물론 2월생이므로 한국 기준으로도 빠른년생이다. 형 토모히토도 빠른년생이다.[5] 일본에서 후계자 자체가 매우 귀한 21세기면 독신인 점이 친척 황족들과 국민들의 눈초리를 받기 충분하지만, 다이쇼 덴노가 4남, 쇼와 덴노가 2남 5녀, 아키히토가 2남 1녀를 두어서 20세기까지만 해도 황실 입장에선 후계자 걱정을 딱히 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쇼와 덴노가 즉위하고 아키히토가 탄생하기까지는 고준 황후가 딸만 넷을 줄줄이 낳아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기도 했다. 메이지 덴노처럼 후궁제를 부활할까 하는 논의도 이 시절 있었다.[6] 요시히토처럼 병으로 실명할 경우, 동공에 초점이 없거나 각막이 투명해지기 때문에 눈이 점차 감겨지고, 나중에는 치료가 불가능해지면 완전히 눈이 감겨지게 된다.[7] 말년에 장기간 와병 생활을 했다는 점은 노태우와 비슷하다. 게다가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안 되고, 이동할 때는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는 것까지 비슷하다. 대신 노태우는 패혈증이 아닌 소뇌 위축증이라는 희귀병으로 인해 성대가 멀쩡히 있어도 목소리를 아예 내지 못했고, 와병 생활을 한 것.[8] 쓰구코 공주, 센게 노리코, 모리야 아야코[9]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10] 덴노 내외는 관련 규정에 의해 추모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추모식이 끝난 후에 묘소를 방문하여 참배하였다.[11] 단, 미카사노미야 가문과 사이가 안 좋은 노부코 비는 불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