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박 무소속 연대 | |
영문 명칭 | <colcolor=#000> Alliance of Independent Pro-Park Candidates[2] |
성격 | 선거 전략상 표기[3] |
인원 | 후보자 16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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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8년 치러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일부 무소속 출마자들이 내건 구호. 교섭단체나 정당도 아니었고 단순히 무소속 후보들의 연합체였다.2. 배경
당시 한나라당은 친이계가 당권을 잡고 있었고 이른바 '공천 학살'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친박계 인사가 공천에서 배제되었다. 이런 와중에 박근혜[4]는 '살아서 돌아오라'라는 말로 무소속 출마를 말리지 않았다. 이에 친박계 인사들이 대거 탈당, 일부는 무소속으로 출마하고 일부는 미래한국당이라는 원외정당에 대거 입당하였고 아예 '친박연대'라는 자신들만의 정당을 차렸다.이중 친박연대에 가담하지 않은 무소속 후보들이 연합체를 결성한 것이 이른바 '친박 무소속 연대'이다. 이들은 대부분[5] 선거 벽보에 '무소속'이 아니라 대문짝만하게 '친박 무소속 연대'라고 써붙이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과시했다. 대표적인 것이 김무성.[6]
3. 성격
3.1. 공직선거법 위반 여부
공직선거법 위반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선관위에서는 문제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 #공직선거법에서 선거와 관련해서 여러가지 제약을 걸고 있는데, 이것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공직선거법 제87조 제2항 위반 여부
이 '친박 무소속 연대'가 사조직 혹은 기타 단체인지가 쟁점이 되었다. 하지만 선관위는 친박 무소속 연대를 '사조직'이 아님으로 규정하고 단순한 '선거 전략상의 표기'로 보았다. 즉, 분류:정치 조직 단체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공직선거법 제88조 위반 여부
타 후보의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는 공직선거법 제88조가 문제 되는데, 지역구가 겹치지 않는 만큼 해당 조항에 문제가 없다는 해석이 내려왔다.
3.2. 친박연대와의 관계
서청원이 주도한 친박연대와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2008년 4월 '행동 통일'을 결의했다. # 합동 기자회견은 물론이고 어깨띠에서 친박연대와 상징색(친박연대 파란색 (#0C449B)
)을 통일했던 것이 대표적이다.친박연대 홍사덕 후보와 친박 무소속 연대 성윤환 후보의 합동 기자회견 |
3.3. 공보물 상 표기
여기에 속한 많은 후보들이 선거 벽보에서 파란색 배경색, 빨간색 후보자 기호, 그리고 노란색 HY울릉도 글꼴로 "친박 무소속 연대"를 표기했다. 물론 16명이 완전히 통일시킨 것은 아니고, 유재명 후보는 '친박 무소속 연대'를 빨간색 고딕체로, 이경재 후보는 빨간색 명조체로 표기하였다. 최구식, 성윤환, 박팔용 후보는 벽보에는 표기하지 않았다.4. 선거 결과와 복당
김무성, 유기준, 한선교 등[7]이 당선되었으며, 친박 무소속 연대, 친박연대, 자유선진당 같은 보수야당들의 등장에 힘입어 한나라당은 과반에 턱걸이한 153석만을 획득한다.[8] 정당 지분(비례대표 의석)이 걸려있던 친박연대와 다르게 이 친박 무소속 연대 소속 당선인들은 무소속이었으므로 처음에는 복당이 어려웠으나 이후 합의에 따라 빠르게 한나라당에 복당할 수 있었다.5. 해당 인물
※ 친박연대 소속 인물과는 구별된다. |
5.1. 경기도
5.2. 인천광역시
5.3. 대구광역시
5.4. 경상남도
5.5. 부산광역시
5.6. 경상북도
6. 여담
20대 총선 때는 이것을 비튼 비박 무소속 연대도 거론 및 실현되었다.[9] 유승민(대구 동을), 류성걸(대구 동갑), 권은희(대구 북갑), 조해진(밀양의령함안창녕) 등 경상도의 유승민계 무소속 의원들이 사실상 연대를 구성하였으나 유승민을 제외하고는 모두 낙선했다. 이재오(은평을), 임태희(분당을), 강승규(마포갑), 안상수(중동강화옹진), 조진형(부평갑) 등 수도권 5개 선거구의 비박 무소속 후보들도 연대를 조직했으나, 안상수만이 생환에 성공하는 등 친박 무소속 연대에 비해서는 부진했다.[1] 이중 김무성은 이후 비박근혜로, 더 나아가서 반박근혜로 전향한다. 본인자체가 박근혜 본인뿐민 아니라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전두환씨와 사이가 안 좋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 막내출신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주변에서는 친박으로 잠시 외도했다가, 이후에 비박으로 돌어선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여담으로 위에 나온 유기준, 한선교, 이경재는 돌아선 김무성과 다르게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이후인 지금에도 친박을 자처하거나, 친박임을 분명히 나타내는 행동을 한다.[2] 코리아헤럴드의 표기이다.[3] 3번 문단 참조.[4] 물론 박근혜 본인은 공천을 받아 한나라당에 남았다.[5] 성윤환 후보의 경우 공보물에 표기를 하지는 않았다.[6] #여기서 벽보를 확인할 수 있다.[7] 참고로 친박 핵심 인물들 중에서 최경환이나 유정복, 현기환 등은 예상 외로 공천장을 따내는데 성공하여 한나라당 당적으로 출마했었다. 다만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친박이라고 무조건 공천을 안 주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서청원이나 홍사덕처럼 대선정국에서 요란(?)을 떤 케이스만 아니면 예상 외로 쉽게 공천을 따낸 케이스도 생각보다 꽤 있었다. 실제로 박근혜의 비서실장이던 유승민이나 박근혜의 대변인으로 호위무사를 자처하던 이혜훈 역시 당시에는 친박계의 브레인으로 널리 알려졌음에도 무난히 공천을 받는데 성공했고, 박근혜의 그림자로 불리던 이정현은 후순위지만 비례대표로 국회 입성이 성사되기도 하였다. 물론 최경환과 유정복은 탕평인사의 일환으로 이명박 정부에서 장관을 지내는 등 MB와 딱히 척을 지지 않았으며, 김무성에 따르면 현기환 역시 박근혜 청와대에서 그나마 말이 잘 통하던 사람이였다고 하니 최강성 친박이 아니면 친이계 입장에서도 굳이 배척하진 않았던 모양이다.[8] 당시 한나라당은 수도권 압승에도 불구하고 강원· 충북권에서는 통합민주당과 무소속에, 대전· 충남권에서는 자유선진당에, 영남권에서는 친박연대와 친박무소속연대에 밀려 의석 수를 상당히 많이 빼앗겼다. 17대 대선 당시만 해도 강원권이나 충청권이나 영남권이나 이명박 대통령이 압승했었기에 한나라당 입장에서 무난히 승리할 것으로 예상했던 지역들임을 생각하면 많이 아쉬운 부분. 또한 보수정당간의 표 분산으로 민주당에 헌납한 지역구도 여럿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친박연대와 한나라당의 표가 정확하게 반으로 갈려 지역구를 날려먹은 용인시 처인구(현 용인시 갑)이나 한나라당, 친박연대, 자유선진당, 무소속으로 보수표가 4갈래로 갈라져 민주당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된 대전 서구 갑 같은 웃지 못할 사례도 속출했었다.[9] 이때도 공천 파동이 있었으며, 여기에 나온 후보들 중에는 이 당시 공천 파동으로 인해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한 경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