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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회차 | 연도 | 우승 | 준우승 | 점수 |
1 | 1988~89 | 조훈현 | 녜웨이핑 | 3-2 | |
2 | 1992~93 | 서봉수 | 오타케 히데오 | 3-2 | |
3 | 1996 | 유창혁 | 요다 노리모토 | 3-1 | |
4 | 2000~01 | 이창호 | 창하오 | 3-1 | |
5 | 2004~05 | 창하오 | 최철한 | 3-1 | |
6 | 2008~09 | 최철한 | 이창호 | 3-1 | |
7 | 2012~13 | 판팅위* | 박정환 | 3-1 | |
8 | 2016 | 탕웨이싱 | 박정환 | 3-2 | |
9 | 2020~23 | 신진서 | 셰커 | 2-0 | |
10 | 2024 | 이치리키 료 | 셰커 | 3-0 | |
* 우승 당시 三단이었으나, 중국기원의 규정에 따라 즉시 九단이 되었다. | }}}}}}}}} |
최철한 崔哲瀚 | Choi Cheol-han | |
직업 | 바둑기사, 프로 포커플레이어 |
소속 | 한국기원 |
출생 | 1985년 3월 12일 ([age(1985-03-12)]세) |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충암고등학교 (졸업[1])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양어대학[2] (일본학 / 학사) |
병역 | 사회복무요원 소집해제 |
입단 | 1997년 |
단급 | 九단 |
한큐바둑 닉네임 | bibibig(P) |
타이젬바둑 닉네임 | 열시미,가닥구 |
최철한 九단 한국바둑리그 2016년 세리머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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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2019년 5월부터 J88Poker팀 소속으로 프로 포커 플레이어로도 활동하고 있다.#2. 생애
2.1. 어린시절부터 프로 입단까지
1985년 3월 12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에서 태어났다. 1991년에 동래구 거제동(현 연제구 거제동)에서 살며 부산백양초등학교 1학년 재학하던 중 아버지를 따라 상경했다. 서울로 이사온 지 1주일 후, 아들에게 바둑을 가르치고 싶었던 아버지 최덕순(아마 5단)의 뜻으로 권갑용 도장에 들어가 처음으로 바둑에 입문했다. #1 #2 #3당시 최철한의 재능에 대해 스승 권갑용은 "초보자 교육부터 시켰는데 보통 아이들은 3, 4개월 걸리는 교육을 1주일 만에 마스터했다.", "1년 만에 핸디캡 1급으로 승급하는 기록을 가지고 있을 만큼 기재가 뛰어났다.", "연구생 6조부터 1조까지 논스톱으로 올라간 기록의 보유자"라고 말했다. #
1995년 이붕배, 김성준배에서 우승하고 해태배에서 준우승 하는 등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를 휩쓸었다.
1997년 5월, 12세 2개월 나이에 단 한 번 도전하여 프로 입단에 성공했다. 이는 역대 최연소 입단기록 4위이다.
2.2. 수상 기록
아시안 게임 | ||
금메달 | 2010 광저우 | 남자 단체전 |
혼성페어 |
3. 기풍
별명은 '독사'[3]. '올인보이'라는 별명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쓰이지 않는 편이다. 보통 프로기사들은 위험부담이 큰 작전을 싫어하고 전투가 일어나도 타협하는 경우가 많은데, 최철한은 모든 것을 한 국면에 걸고 승부를 보려고 아주 지독하고 끈질기가 달려들기 때문이다. 두터운 기풍과 막강한 수읽기를 바탕으로 한 공격력은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굳이 이세돌과 비교하자면, 이세돌은 날카로운 비수로 끊임없이 급소를 찌르고 예측하지 못한 곳에서 공격이 날아온다면, 최철한은 모닝스타나 큰 몽둥이를 가지고 대놓고 휘두르는 쪽에 가깝다. 그러나 이런 기풍과 달리 실제 성격은 몹시 온화하고 부드럽다고 한다. 가토 마사오의 전성기 모습과 비슷하다고 한때 일본 바둑계에 소개된 적도 있다.4. 상세
포스트 이창호 시대의 서막을 연 것이 목진석이라면 최철한과 이세돌은 본격적으로 포스트 이창호 시대를 만들어 나간 기사들이다. 특히 최철한은 최초로 이창호에게 상대전적이 앞섰던 기사로, 국수전 타이틀을 빼앗아 오기도 했다.[4]2004년 응씨배에서는 창하오 九단한테 3:1로 졌지만 2008년 응씨배에서 이창호 九단을 3:1로 이기고 응씨배 타이틀을 차지했다. 또한 최철한은 중간에 사회복무요원[5]으로 2005년부터 2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소집해제되었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승선하여 남자 단체 [6] 금메달, 혼성 페어 [7] 동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2015년에는 한국바둑리그 사상 최초로 100승을 달성했다.
후배 기사 윤지희 三단과 2012년 6월 결혼을 발표했다. 프로 기사 부부 4호이다. 그런데 결혼하기까지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번역 2015~2016 중국 증시 폭락 과정에서 최철한 九단의 만류로 윤지희 三단이 중국 주식 사기를 단념했는데, 이게 바로 최철한 九단 재산을 지킨 일화도 있다. 기사
여담으로 오른쪽 귀로는 아예 듣지를 못한다는데, 왼쪽 귀로 초읽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흰돌 자리를 좋아하는 것과 기풍도 이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한국은 초시계를 직접 눌러야 한다면 초시계를 '검은돌 잡은 사람의 왼쪽-흰돌 잡은 사람의 오른쪽'에 놓는다. 참고로 일본은 흰돌을 잡은 사람이 시계 놓는 자리를 정하기 때문에 초시계 멈추는 단추가 둘 다 하얗다. #
2015년 축구를 하다가 발목 부상을 입는 바람에 3개월 정도 휠체어 신세를 졌다. 이에 조치훈 九단이 생각나게 하는 휠체어 대국이 연출됐다.(...) 위 사진의 상대는 다카오 신지 九단으로 2015년 LG배의 장면이다. [8]
2018년 9월 21일 천부배 A조 16강전에서 천야오예에게 패해 떨어졌다. 11월 23일 농심배 5국에서 판팅위에게 지면서 4연승 허용.
2021년 1월 23일 박진솔을 상대로 바둑리그 통산 150승을 달성했다. 12월 10일 국수산맥배 세계 부문 16강전에서는 판팅위에게 패해 탈락.
2022년 7월 31일 대통령배 결승에서 송지훈을 이기고 우승했다.
5. 라이벌
동갑내기 라이벌 박영훈 九단과의 관계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국내에서의 입지는 최철한, 세계대회의 입지는 박영훈이 앞서 나간다. 최철한은 박영훈이 해내지 못했던 한국바둑랭킹 1위와 국제전인 초상부동산배에서 한국팀 주장으로서의 활약,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을 달성했다. 반면 박영훈의 세계 대회 성적은 우승 3회[9], 준우승 6회[10]로 우승 2회[11], 준우승 2회인[12] 최철한에 우위에 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최철한이 우위였지만 06~09년은 박영훈의 우위[13], 10년도 초중반은 최철한이 다시 성적에서 앞서나가다가 16년부터는 박영훈의 3년 연속 세계대회 결승진출로 앞섰다. 2023년 기준 상대전적은 23승 24패로 최철한의 열세.이창호, 이세돌과 3인 간의 관계도 흥미롭다. 이세돌과 최철한이 한창 두각을 나타낼 때 이창호 다음의 한국 바둑 1인자 계보를 누가 이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리고 최철한은 국내 최고의 전통 기전이자 이창호의 상징과도 같던 국수전을 쟁취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국내 기사 중 최초로 상대 전적에서 이창호를 압도하며 왕좌에서 끌어내렸다. 반면 이세돌은 이창호에게 상대전적도 뒤졌을 뿐더러 큰 대회에서 유난히 발목을 잡혔다. [14] 하지만 최철한은 이세돌에게 상대전적 및 국내대회와 세계대회의 결승무대에서 연거푸 이세돌에게 패배했다. 마치 가위바위보 같은 (최철한>이창호>이세돌>최철한) 이 세 기사간의 경쟁은 이세돌이 랭킹 1위와 세계대회에서 독주하며 끝을 맺었다.
이창호를 1인자 위치에서 끌어내린 사람은 최철한이지만 정작 1인자가 된 이는 이세돌이라는, 최철한 입장에서는 얄궂은 상황. 생각해보면 조남철과 김인의 시대에 균열을 낸 건 서봉수지만 1인자가 된 건 조훈현이었고, 조-서 양강 시대에 균열을 낸 건 유창혁이었지만 1인자가 된 건 이창호였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
6.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15]
6.1. 국내 기사
- 강동윤 15:19
- 김지석 15:17
- 박영훈 25:27
- 박정환 6:14
- 홍성지 10:6
- 신민준 4:5
- 신진서 4;8
- 원성진 23:18
- 이세돌 24:34
- 이영구 12:9
- 이창호 35:30
- 조한승 16:22
- 허영호 13:6
- 김명훈 7;4
6.2. 중국 기사
- 구리 8:11
- 창하오 6:7
- 천야오예 9:13
- 쿵제 7:4
- 커제 1:4
- 판팅위 7:3
6.3. 일본 기사
- 장쉬 3:2
- 하네 나오키 4:2
7. 통산 경력
2001년제1회 KT배 마스터즈 프로기전 준우승
2003년
제8기 박카스배 천원전 우승
2004년
제47기 국수전 우승
제15기 기성전 우승
제9기 박카스배 천원전 우승
제6회 농심신라면배 한국대표 우승
2004 바둑대상 최우수시기사상
2005년
제48기 국수전 우승
제5회 응씨배 준우승
제16기 기성전 준우승
제18기 후지쯔배 준우승
제2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준우승
제2회 중환배 우승
제10기 GS칼텍스배 우승
2006년
제49기 국수전 준우승
제7회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준우승
제25기 KBS 바둑왕전 준우승
제11기 GS칼텍스배 준우승
2007년
KB국민은행 2006 한국바둑리그 MVP
제18기 기성전 준우승
2008년
제1회 세계마인드스포츠게임 남자단체전 금메달
2009년
제10기 맥심배 우승
제6회 응씨배 우승
2010년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혼성페어 동메달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바둑 남자단체 금메달
2011년
제15기 박카스배 천원전 우승
제54기 국수전 우승
제55기 국수전 준우승
제16기 천원전 우승
2012년
제13기 맥심커피배 준우승
제7기 원익배 십단전 우승
2012 olleh배 준우승
제56기 국수전 준우승
2013년
제17기 박카스배 천원전 준우승
제41기 하이원리조트배 명인전 우승
2014년
제18기 천원전 준우승
제19기 GS칼텍스배 준우승
2015년
제20기 GS칼텍스배 준우승
제16기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우승
바둑대상 연승상(12연승)
2016년
2016 KB국민은행 바둑리그 우승
2017년
2017 KB국민은행 바둑리그 준우승
2022년
제4기 대통령배 전국바둑대회 우승
[1] 원성진 九단, 박영훈 九단과 33회 동기동창이다.[2]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대학으로 승격된 것은 2011년부터고, 당시에는 일본어과와 일본학과가 모두 동양어대학 소속이었다.[3] 후술될 내용대로 리즈시절 이창호 킬러라고 불리울만큼 강했는데, 두터운 승부를 이끌려는 이창호의 빈틈을 그가 끊임없이 공격해서 이겼다고 해서 독사의 이미지가 생겼다.[4] 90년대 이창호의 최전성기에는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을 제외한 한국기사들은 1년동안 국내기전에서 이창호에게 한 판도 못 이긴 적도 있다.[5] 당시 명칭은 공익근무요원[6] 이창호, 이세돌, 최철한, 조한승, 강동윤, 박정환[7] 김윤영 기사와 페어를 이뤘다.[8] 다만 조치훈은 교통사고를 심하게 당해 양 다리가 모두 부러지고 인대와 연골이 모두 나간데다 왼 팔까지 부러지는 중상이었고, 최철한은 축구를 하려고 몸을 풀다 넘어져 왼 발목만 부러진 거라 부상 정도가 다르긴 했다. 부상 당시 최철한은 대회를 고작 이틀 앞둔 상황이었고, 수술을 미루고 대국했다. 진통제를 먹을 수 없어(집중력이 떨어질까봐) 고통을 참고 뒀다고. 참고로 저 대국에서 반집승했다.[9] 후지쯔배 2회, 중환배[10] 삼성화재배 2회, LG배, 춘란배 2회, 몽백합배[11] 응씨배, 중환배[12] 응씨배, 후지쯔배[13] 최철한은 응씨배 준우승 이후 극심한 슬럼프를 겪었다.[14] 2003년 LG배 결승전에서 설욕에 성공하지만 2001년 LG배 결승전, 응씨배 4강전 등에서 이세돌은 이창호에게 번번이 무릎을 꿇었다.[15] 2024년 7월 16일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