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px;margin-top:-10px;margin-bottom:-10px;padding:0px" {{{#!wiki style="margin-left:10px; margin-right:-20px; display:inline-table" | <tablebordercolor=#fffff9,#323300><tablealign=center><tablebgcolor=#fffff9,#323300> | }}} {{{#!wiki style="padding: 0px; display: inline-table; margin-top: -5px;" | <tablebordercolor=#fffff9,#323300><tablealign=center><tablebgcolor=#fffff9,#323300> 응씨배 세계 프로 바둑 선수권 대회 역대 우승자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회차 | 연도 | 우승 | 준우승 | 점수 |
1 | 1988~89 | 조훈현 | 녜웨이핑 | 3-2 | |
2 | 1992~93 | 서봉수 | 오타케 히데오 | 3-2 | |
3 | 1996 | 유창혁 | 요다 노리모토 | 3-1 | |
4 | 2000~01 | 이창호 | 창하오 | 3-1 | |
5 | 2004~05 | 창하오 | 최철한 | 3-1 | |
6 | 2008~09 | 최철한 | 이창호 | 3-1 | |
7 | 2012~13 | 판팅위* | 박정환 | 3-1 | |
8 | 2016 | 탕웨이싱 | 박정환 | 3-2 | |
9 | 2020~23 | 신진서 | 셰커 | 2-0 | |
10 | 2024 | 이치리키 료 | 셰커 | 3-0 | |
* 우승 당시 三단이었으나, 중국기원의 규정에 따라 즉시 九단이 되었다. | }}}}}}}}} |
창하오 常昊 / Cháng Hào | |
직업 | 바둑기사 |
소속 | 중국기원 |
생년월일 | 1976년 11월 7일 ([age(1976-11-07)]세) |
국적 | [[중국|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상하이시 |
입단 | 1986년 |
단급 | 九단 |
[clearfix]
1. 개요
중국의 바둑 기사. 現 중국바둑협회 주석.2. 경력
만 10살 때 프로에 입단했고 입단 3년 후에는 중국 랭킹 7위까지 올랐다. 그리고 20세 때인 1996년에는 제10회 중일 슈퍼 대항전에 중국 대표로 출전해서 5연승을 기록, 중국 대표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이듬해 제11회 중일 슈퍼 대항전[1]에서는 일본 대표팀의 마지막 주자까지 격파하며 6연승을 기록, 또 다시 중국 대표팀에게 우승을 안겨주었다. 21세 때인 1997년에는 당시 중국 1인자 마샤오춘을 종합 전적 3-1로 꺾고 첫 본격 타이틀인 천원 타이틀을 획득했다. 중국 바둑의 세대교체를 상징하는 순간이기도 했으며, 2년 뒤엔 九단으로 승단했다.유독 국제 기전에 약한 모습을 보였는데 98년 여름 제11회 후지쓰배 때 창하오보다 한 살 위의 이창호에게 결승에서 패했고 2001년 말 제6회 삼성화재배 준결승에서는 숙적 이창호를 꺾고 결승에 올라 조훈현과 결승전에서 대결했지만 이번에도 1-2로 역전패를 당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2국의 반집패가 특히 뼈아팠다. 중국 팬들의 창하오를 향한 질타의 소리가 높아져 갔다. 그러던 중 2002년 토요타덴소배가 새로 창설됐다. 창하오는 이세돌을 2회전에서 만나 탈락시켰고 이듬해 초로 이어진 대회에서 결승까지 올랐다. 결승에서 창하오를 막아선 기사는 또 이창호였다. 백을 쥔 창하오가 꾸준히 리드해가자 중국 검토진들은 축제 무드로 들떴지만 바둑은 기어이 흑 불계승으로 끝났다. 창하오는 2004년에 접어들면서 다시 세계 정상권 노크에 힘을 낸다. 송태곤, 최철한을 제물 삼아 제2회 토요타덴소배에서, 그리고 유창혁, 쿵제, 송태곤을 꺾고 제5회 응씨배에서 잇달아 결승 고지를 밟은 것이다.
그 해 12월 최철한과의 응씨배 결승 두 판이 먼저 서울서 시작됐다. 1승 1패를 기록한 상황에서 일단 휴전. 그리고 곧바로 토요타덴소배 결승으로 이어져 이세돌과 한 판씩 주고받았다. 최종국은 그야말로 필승지세였지만, 최종 승자는 이번에도 창하오가 아니었다. 세계 기전 결승에 여섯 번 모두 패한 실망감으로 중국 팬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중국 인터넷은 창하오 성토장이 됐다.[2]
창하오는 이렇게 이창호에게 3번, 조훈현에게 2번, 그리고 이세돌에게 1번씩 세계 대회에서 결승전 6전 6패를 당했다. 당시 나이는 이미 29세였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제5회 응씨배 결승이 베이징서 재개됐다. 토요타덴소배에서 패배한 후유증으로 창하오는 7번째 준우승에 그치고 한국은 응씨배 석권 전통을 이어갈 것이란 예상이 많았지만 결과는 종합 전적 3-1로 창하오의 우승이었다.[3] 그 후 2007년 삼성화재배, 2009년 춘란배를 우승하며 준우승 전문가라는 이미지를 불식시켰다. 특히 이창호에게는 철저한 약자 신세였으나 세계 대회 결승에서 연거푸 이창호를 제압하며 천적이라는 꼬리표를 뗐다.[4] 하지만 이후로는 구리와 이세돌에 밀려 지금은 정상권에서 많이 내려온 상태.
2023년 7월에는 중국바둑협회 주석으로 선출되어 바둑 행정가로써도 활동 중이다.
3. 평가
녜웨이핑 九단의 제자로 녜웨이핑이 조훈현에게 응씨배에서 패한 뒤, "나에게는 무서운 제자가 있다"고 했는데, 바로 마샤오춘과 창하오이다.[5]기풍은 단단한 포석에 이창호에 비견되는 두터움이 매력. 그러나 비슷한 기풍을 가진 이창호에 비해 수읽기에서 밀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곤 했으며, 후반부 승부수에 새가슴이 되어버리는 모습을 많이 보이며 역전패를 당하는 상황도 많이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약점도 차차 나아지면서 이름값을 하는 성과를 만들어낸다.
창하오는 스승인 녜웨이핑이나 사형인 마샤오춘과는 다르게 예의바르고 겸손해서 기사들로부터 호평이 자자했다고 한다.[6] 본인이 대국에서 승리한 후에도 항상 "운이 좋았다"는 식으로 겸손하게 소감을 밝힌 것으로 유명하다.[7] 특히 라이벌이라고도 평가받았던 이창호에게도 존경한다는 등[8] 상당한 예의를 표하며 둘의 친분도 꽤 깊은 사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창호와의 대결 이후에 회식 자리에서 추가 복기를 요청하며 정중히 무릎을 꿇고서 이창호 옆에서 복기하는 모습이 찍히기도 했다. 이창호의 중국 내 위상을 알 수 있었던 장면이기도 했지만 창하오의 인품도 알 수 있었던 장면.
4.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4.1. 한국 기사
박영훈 4:8박정환 1:1
서봉수 5:3
유창혁 10:3
이세돌 7:17
이창호 15:31
조한승 4:3
조훈현 9:7
최철한 7:6
4.2. 일본 기사
고바야시 고이치 5:6왕리청 2:1
요다 노리모토 2:6
조치훈 2:3
[1] 제11회 대회를 끝으로 중일 슈퍼 대항전은 폐지되었다.[2] 스승 녜웨이핑은 “그토록 유리했던 바둑을 패했다니 믿을 수 없다”며 탄식했다. 사형인 마샤오춘은 바둑을 보고 있던 컴퓨터를 꺼 버렸다고.[3] 최철한 九단은 다음 대회에서 이창호를 꺾고 우승했다.[4] 이는 이창호의 기풍 변화에서 기인하는 점이 큰데, 이창호의 파훼법이 알려지며 2005년 이래 정상권에서 밀려나면서 기풍이 제법 호전적으로 바뀌었기 때문. 반해 창하오는 자신만의 기풍을 간직하며 달라진 기풍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5] 둘은 12살 차이로 활동 시기 전성기도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실력은 있어서, 녜웨이핑과 마샤오춘에 이어서 중국 바둑의 1인자 자리를 이어받았다는 평. 다만 기간은 둘에 비하면 짧아서, 이후 얼마 안가 구리 九단이 이 바통을 잇는다.[6] 녜웨이핑과 마샤오춘은 인터뷰 때마다 자신을 천재라고 여기며 다른 기사를 자극하는 말을 숱하게 남긴 바 있다.[7] 응씨배 우승 당시에는 우승 소감으로 "잉창치 선생의 한을 풀어드린 것 같아 기쁘다." 라고 소감을 밝혔다.[8] 근데 마샤오춘도 이창호에 대해선 존중을 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