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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16:38:37

청주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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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주시의 역사에 관한 문서이다.

삼한시대 청주는 마한의 땅이었다. 백제시대에는 상당현이라 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서원경이란 이름으로 신라 5소경 가운데 하나였다.[1]

고려 태조 23년(940년)비로소 "청주"라는 이름을 처음 얻은 이후 조선시대 후기까지 매우 중요한 지방의 요충지 역할을 담당했다.

1908년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하였고, 1946년 미군정에 의해 청주부와 청원군이 분리되었으며, 1949년 청주부가 청주시로 개칭되었다.

2012년 6월 27일, 청주시와 청원군의 행정구역 통합이 결정되어 2014년 7월 1일 통합 청주시가 출범하였다.

2. 연혁

년대연혁
삼국시대(백제)상당현
685년
(신라 신문왕 5년)
서원소경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
서원경
940년
(고려 태조 23년)
청주
983년
(고려 성종 2년)
청주목
1896년
(조선 고종 33년)
청주군
1909.6.25청주군 청주면
1931.4.1청주군 청주읍
1946.6.1청주부
1949.8.15청주시
1963.1.1청원군 사주면 편입
1983.2.15청원군 강서면 22개리, 강내면 석소리, 낭성면 산성리 편입
1987.1.1청원군 강내면 정봉리, 신촌리, 청원군 남이면 죽림리 편입
1989.7.1동·서부출장소 개청
1990.8.1청원군 남일면 장암리 등 15개리 편입
1995.1.1상당·흥덕구청 개청
2012.6.27청주·청원 통합 확정
2014.7.1통합청주시 출범

3. 상세

3.1. 선사 시대

청주 옥산면 소로리에서 탄화된 볍씨들이 발견되었다. 이는 현재 전세계에서 쌀 재배 국가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즉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전에 발견된 볍씨이자 청주지역에서 무려 구석기시대부터 정주농경사회가 존재했다는 의미가 있는 발견으로 벼 농경의 기원에 대한 큰 반향을 일으킨 귀중한 유물이다. 지금은 소로리 볍씨 기념물이 세워져 있고 박물관도 건립 추진중이다.

3.2. 원삼국시대 ~ 후삼국시대

원삼국 시기에는 마한 목지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특이하게도 흥덕구 오송읍 일대는 부장된 유물만 보면 주로 고조선과 관련이 깊은 다른 충남전라 내륙부와는 달리, 부여-옥저 계열 주민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백제국이 떠오르기 전까진 마한 내부에선 그저그런 별볼일 없는 지역이었으나, 백제가 천안 청당동 목지국을 제압하기 시작한 3세기 중후반 이후부터 점차 세력이 커지면서 백제국의 주요 남진 기지로 활용된다. 이후 한성백제가 궤멸하는 475년까진 백제 왕실의 든든한 우군이었으나, 한성이 함락된 이후 장수왕의 고(구)려가 웅진백제까지 완전히 타도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 남진하는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고(구)려의 판도에 들어가고야 만다.

이후 동성왕 시기에 백제가 문자명왕 시기의 고(구)려에게서 탈환해낸 것으로 보이며, 상당현(上黨縣)으로 편재된다.

통일신라 때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개편하면서 옛 백제 지역 행정구역인 웅주에 속했고, 지금으로 치면 광역시격인 소경 중 하나인 서원경(西原京)이 되었다. 서원구서원대학교 등의 이름은 서원경에서 유래한 것이다.

후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청주는 고려와 묘한 인연을 반복하게 된다. 고려를 부활시킨 궁예가 바로 이 청주 출신이었으며[2] 궁예가 패서 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활용한, 아지태를 비롯한 옛 백제계 사람들도 주로 이 청주 출신들이었다. 하지만 고려 일변도식 계승의식을 나름 극복하고자 한 궁예가 패서 호족들의 불만 탓에 왕건에게 쓰러지면서 청주 일대 민심은 동요하게 되며, 918년 즈음 결국은 후백제로 넘어가게 된다. 앞서 원삼국-삼국 시대 있었던 패턴과 거울상처럼 뒤집힌 패턴.

이후 925년에 고려가 후백제에게 맹공을 가해 오늘날의 청주시청 소재지를 포함한 청주 2/3 정도를 탈환하게 되며, 932년에야 다시 완전히 되찾게 된다. 고려 태조 왕건이 재위 시절, 이 고장이 '맑고 깨끗한 고장'이라고 하여서 청주라는 지명을 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3.3. 고려

태조 때 청주목이 되어 충주와 함께 충청도의 어원이 되었다.

고려시대의 무인 집권자중 한명인 경대승이 청주 경씨이며, 조선 초기의 유명한 문신 한명회가 청주 한씨이다.[3]

현존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이 간행된 흥덕사 유적이 청주에 있으며, 그 옆에 고인쇄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청주시 차원에서 직지와 관련된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으나, 그 의욕이 지나친 나머지 전혀 상관없을 법한 자리에서까지 직지를 홍보하고 있는 모습이 간혹 보인다. 예를 들면 한의학 박람회에 직지 부스가 있다든지. 청주에 놀러와서 동네를 한 바퀴 돌면 '직지' 혹은 'JIKJI'라는 글자가 박힌 가로수나 가로등, 횡단보도 보호석, 버스 정류장 등이 보이는 건 기본이고 직지의 모습이 그려진 간이 매대라든가 직지의 이름을 넣은 도로, 초등학교, 어린이집, 태권도장, 뼈해장국집 등 정말 '직지'가 넘쳐난다.

사실 청주시 자체가 그다지 내세울 만한 명승지나 유적이 따로 없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국보라지만 용두사지 철당간을 홍보하기에는 임팩트가 부족하고 상당산성도 좀 그런데 마침 '세계 최초'라는 엄청난 타이틀을 가진 직지가 있다 보니 이렇게 된 모양. 하지만 이는 청주와 관련된 역사가 별로 알려지지 않아 생기는 안타까운 일. 청주가 그 북쪽으로부터 남진하는 방향에서 중요한 입지에 있었던 나머지 주로 고구려사와 백제사에서 인연이 얽힌 인물이 제각기 의외로 많은데 이에 대해 관심이 조명되면 차후 얘기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장수왕, 문자왕, 동성왕, 궁예, 견훤, 왕건. 고구려, 백제, 고려, 후백제의 주요 인물이 포진되어 있다.

3.4. 조선

조선 후기까지 청주목(淸州牧)과 문의현(文義縣)으로 이루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청주목은 고려시대 속현 중 하나인 청천현을 조선 초 행정구역 개편 때부터 편입해 있었다.

23부제 실시 후에는 공주 관할로 넘어갔다가 13도제 실시 후 충청북도 청주군과 충청남도 문의군이 되었다. 1906년 월경지 주안면이 회덕군에, 현재의 천안시 수신면 지역이 목천군에 편입되었다.

참고로 당시 청주목의 면 이름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떨어지는 이름들이었는데 동주내면, 서주내면, 남주내면, 북주내면, 서강내일면, 서강내이면, 서강외일면, 서강외이면, 북강내일면, 북강내이면, 북강외일면, 북강외이면, 산외일면, 산외이면, 산내일면, 산내이면, 남일면, 남이면, 남차이면 이런 식이었다(...). 그리고 조선 말엽에는 이것들 중 일부는 또 상하로 분할되기까지 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 직전 청주군 산하 면 명칭은 그저 혼돈 그 자체이기 그지없는 명칭들이었는데, 나열을 해보면 동주내면, 서주내면, 남주내면, 북주내면, 서강내일상면, 서강내일하면, 서강내이상면, 서강내이하면, 서강외일상면, 서강외일하면, 서강외일상면, 서강외일하면, 북강내일상면, 북강내일하면, 북강내이면, 북강외일면, 북강외이면, 산외일면, 산외이면, 남이면, 남차이면, 남일상면, 남일하면, 산내일면, 산내이상면, 산내이하면, 청천면, 이렇게 옛 속현 출신인 청천면을 제외하고는 전부 위치 관계를 나타내는 말과 숫자로만 구성되었며 '면'을 뺀 부분이 2음절인 곳은 남이면과 청천면뿐이었다. 그나마 방위를 나타내는 말만 들어간 게 아닌 구체적 장소를 나타내는 말도 들어가서 좀 낫다.

3.5. 일제강점기

파일:attachment/청주시/역사/chong1914.jpg
1914년 현 청주시 일대의 행정구역 상황. 읍내 시가지를 '청주면'으로, 그 주변 지역을 '사주면'으로 청주면을 둘러싸는 도넛 모양으로 따로 편제한 것이 눈에 띈다.[4]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 충청북도 문의군이 청주군에 병합되었다. 또한 청천면이 괴산군에 편입되었다.

1928년 4월 12일: 청주면의 정(町)명이 개정되었다.(충청북도 고시 제15호)
개편 이후 개편 이전
본정1정목 본정1정목, 본정2정목, 제정, 도하정, 욱정1정목 일부, 청수정 일부
본정2정목 본정3정목, 본정4정목 일부, 욱정1정목 일부, 동정 일부, 욱정2정목 일부, 상생정 일부, 서정 일부
본정3정목 본정4정목 일부, 본정5정목, 동정 일부, 북정, 서정 일부, 서성정 일부
본정4정목 본정6정목 일부, 본정7정목 일부
본정5정목 본정6정목 일부, 본정7정목 일부
도하정 문외리
청수정 청수정 일부, 남정, 대흑정, 시장정, 욱정2정목 일부, 욱정3정목, 상생정 일부, 신장대 일부
동정 욱정1정목 일부, 성동정, 대성정 일부, 본정6정목 일부
서정 상생정 일부, 서정 일부, 성서정 일부, 신장대 일부, 대교정, 서천정 일부, 천정 일부, 본정6정목 일부
영정 본정6정목 일부, 본정7정목 일부, 천정 일부
수정 수정, 본정6정목 일부, 본정7정목 일부
대성정 대성정 일부, 탑동정 일부
금정 탑동정 일부
석교정 석교정, 탑동정 일부
화천정 서천정 일부, 천정 일부

1931년 청주면이 청주읍으로 승격되었다. 1935년 사주면 일부가 청주읍에 편입되었다.

1937년 4월 1일, 사주면 외덕리, 내덕리, 교동리, 금천리, 산북리, 운천리, 영운리, 화흥리 등이 청주읍에 편입되어 남산정(산북리), 운천정, 외덕정, 내덕정, 문동정(교동리), 금천정, 영운정 등이 새로 설치되었다.

3.6. 대한민국

파일:attachment/청주시/역사/cheng1946.jpg
해방 직후인 1946년 청주읍이 청주부(府)로 승격되어 청주군에서 분리되고, 청주군의 잔여지역은 청원군으로 개칭되었다. 동시에 일본식 동명을 정리하였다. 1949년 청주부가 청주시(市)로 개칭되었다.
개편 이전 개편 이후
본정1정목 남문로1가
본정2정목 남문로2가
본정3정목 북문로1가
본정4정목 북문로2가
본정5정목 북문로3가
도하정 서운동
청수정 남주동
동정 문화동
서정 서문동
영정 영동
수정 수동
대성정 대성동
금정 탑동
석교정 석교동
화천정 사직동

파일:attachment/청주시/역사/chong1963.jpg
1963년 청주시를 둘러싸고 있던 청원군 사주면을 편입해 시역(市域)을 넓혔다.

파일:attachment/청주시/역사/chong1983.jpg
1983년 청원군 강서면 등을 추가로 편입하였다.

1987년 남이면 죽림리와 강내면 일부를 편입하였다.

1989년 동부출장소와 서부출장소를 설치하였고, 1990년 또다시 청원군 북일면, 남일면, 남이면 일부 추가 편입을 통해 지속적으로 영역을 넓혀 나갔으며, 1990년대 초엽, 인구 50만명을 돌파하였다. 1980년대 청주시의 인구가 25만명 정도였다는 걸 감안하면 무려 두배 가까이 늘었다! 비수도권 기초자치단체중 당시 가장 인구가 많았던 전주시를 앞지른 것은 2002년~2003년 경이었다.

1995년 흥덕구(구 서부출장소)와 상당구(구 동부출장소)의 2개 일반구를 설치하였다.

2014년 7월 1일 청원군과 통합되어, 청주부(청주시)-청원군 분리 68년 만에 다시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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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이름들은 각각 상당산성, 서원구/서원대학교 등에 남아있다.[2] 출생지가 서라벌이었을 개연성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성장기를 청주에서 보낸 것만큼은 분명하다.[3] 청주 한씨는 한국의 한씨중 가장 많고 본관별로 성씨를 나누어 세어도 10위에 드는 많은 씨족인데, 청주에서는 이 청주 한씨들을 대머리 한씨라고 부른다. 청주시 근교의 한씨 집성촌 동네 이름이 대머리라서 그렇다는데, 행정구역상으로는 상당구 방서동(구 방정리)이며, 대머리는 '큰마을'을 뜻하는 '대멀'에서 나왔다 한다.[4] 이처럼 대전광역시의 전신인 대전군 역시 이 때 대전역 일대(중구 은행동, 동구 정동, 중동, 원동, 인동)를 대전면, 그 외곽지역을 외남면으로 도넛 모양으로 편제했다. 이후 사주면이 청주시에 편입되듯이 외남면이 대전부에 편입되는 것도 마찬가지. 대전광역시/역사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