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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8-29 20:49:45

찰리와 그의 악단

1. 개요2. 연혁3. 전후의 평가

1. 개요

영어: Charlie and His Orchestra

나치 독일 시기 활동한 재즈 빅 밴드. 비슷한 관제 악단이었던 독일 춤과 오락 악단은 그나마 순음악적으로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 악단은 흑역사다.

2. 연혁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과 추축국은 모두 라디오를 적극적인 선전 방송으로 활용했는데, 이미 전쟁 전부터 저렴한 라디오 수신기를 '국민 라디오'라고 이름붙여 보급할 정도로 이 매체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던 괴벨스도 적국을 겨냥한 선전 방송의 활성화 작업을 직접 지도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에서 해외로 송출하는 단파방송의 제작과 통제는 선전성 산하 제국 방송(Reichs-Rundfunk-Gesellschaft)의 국제 방송부에서 관할하고 있었는데, 이 방송부에서는 특히 영국을 겨냥한 선전용 단파방송 제작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 적국 방송의 내용 여하를 불문하고 청취했다가 발각되면 중형에 처해진 독일과 달리 영국에서는 독일의 대영방송에 대한 제재 조치가 미미한 수준이었고, 방송의 목적은 당연히 영국인들의 민심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선전성은 영국 파시스트 연맹 조직원이었고 1940년에 독일 시민권을 취득한 미국계 영국인 윌리엄 조이스를 초빙해 제국 방송 함부르크 지국의 브레멘 스튜디오에서 송출되던 대영/대미 영어 선전 방송의 진행을 맡겼다. 이 방송의 공식 명칭은 저머니 콜링(Germany Calling)이었지만 이후 호호 경(Lord Haw-Haw)[1]이라는 별명으로 매우 유명해졌다. 괴벨스는 영국에서 인기있는 재즈 음악을 자국의 영어 선전 방송에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해 1940년에 뒤셀도르프에서 활동하던 색소폰 주자 루츠 템플린에게 이 방송의 음악을 전담하는 빅 밴드를 하나 만들게 했는데, 이것이 찰리와 그의 악단이었다.

나치 음악 정책에서 재즈를 백안시했기 때문에 현악기를 대거 투입하고 재즈색을 줄이도록 강요받았던 독일 춤과 오락 악단 같은 여타 공개적 관제 악단과 달리, 이 악단은 반대로 미국이나 영국식 빅 밴드의 악기 편성과 연주 레퍼토리에 가능하면 완전히 근접하도록 조직되었다. 이 때문에 이 악단에서 정규 편성된 현악기는 리듬 섹션콘트라베이스 정도였고, 음악도 '적극적으로 스윙하고 뜨겁게 울리는' 정통 재즈를 추구했다. 심지어 당시 독일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연주와 청취가 금지되었던 베니 굿맨 같은 유대인 작곡가의 작품도 영미 재즈 스탠더드에 포함된다면 허용했다.

하지만 대부분 보컬 없이 기악 연주 위주로, 보컬이 있어도 무조건 독일어 가사로 불러야 했던 독일 밴드들과 달리 이 악단은 거의 대부분 보컬리스트 '찰리(본명은 칼 슈베들러)'를 대동하고 연주했고, 노래도 대부분 영어 원어로 불렀다. 하지만 원곡 그대로 부르는 것은 물론 아니었는데, 일단 1절은 그대로 갔지만 2절에서 반영국, 반유대주의, 반공 등 적국이나 적대시하는 인종, 이념에 대한 비하라든가 독일에 대한 간접적 찬양을 담은 개사가 가해지는 식이었다. 찰리 외에 랄레 안데르센도 이 방송에 동원되어 군가 식으로 편곡된 릴리 마를렌을 비롯한 몇 곡을 이 악단의 반주로 부르기도 했다.

물론 저 방송 자체가 영국에서 송출하는 반영국 해적 방송이라는 위장술을 유지하기 위해 이 악단도 존재 자체가 대내외에서 공식적으로는 부정되는 비밀 악단이었고, 단원들의 본명도 모두 무기명 혹은 기밀로 처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 정보부는 이미 전쟁 중에도 이들 정보를 모두 입수하고 있었고, 1943년에 보컬리스트 '찰리'가 선전 방송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는 소식은 이듬해 영국 잡지 데일리 익스프레스에서 보도되기도 했다.

하지만 적국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방송의 목적은 제대로 달성되지 못했는데, 일부 극렬 독빠 극우 파시스트들이나 독일군 포로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청취자들은 진행자 조이스의 띨띨한 옥스퍼드 억양과 어설픈 선동 방식을 비웃었고 이 악단이 연주하는 선전용 리메이크 재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독일 또라이들의 재롱잔치 관찰' 혹은 욕하며 듣는 막장 드라마급 방송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래도 그 덕에 청취자 수는 상당히 많아서 약 600만 명에 달하는 영국인들이 이 방송의 '고정 청취자'였다는 통계도 있다.

그리고 비밀 악단이었던 탓에 이 악단의 단원들은 독일 춤과 오락 악단처럼 병역 면제 같은 공개적인 혜택을 받을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초기에는 주로 독일인들로만 편성했던 것이 이후 동맹국인 이탈리아나 점령국이었던 네덜란드, 벨기에 등지의 연주자들을 대거 중용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1943년에 연합군 공군폭격이 심해지자 본거지였던 베를린에서 비교적 안전한 독일 남서부의 슈투트가르트로 옮겨갔고, 여기서 종전 직전까지 계속 선전 방송용 음악을 녹음했다.

3. 전후의 평가

물론 종전 후 이 밴드 멤버들은 모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독일 춤과 오락 악단과 마찬가지로 이들에 대한 처벌은 극히 미미했다. 심지어 종전 직후에는 드럼 주자였던 프리츠 브로크지퍼가 잔존 멤버들을 모아 '브로크지퍼 프레디(Brocksieper Freddie)'라는 밴드를 결성해 슈투트가르트와 루트비히스부르크의 미군 전용 클럽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저 밴드를 어디 출신 단원들이 만들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미군 병사들은 괴벨스의 밴드(Goebbels' band)라고 반 쯤 조롱하는 식으로 불렀다.

물론 독일인이 아닌 점령국 출신 단원들 가운데에는 적국에 부역한 혐의로 징역을 선고받은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이들도 출소 후에는 계속 재즈를 연주하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악단을 창단하고 이끌었던 루츠 템플린도 전후 계속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갔고, ARD의 빅 밴드 창립 멤버가 되기도 했다.

다만 선전 가사로 노래를 부른 칼 슈베들러의 경우 워낙 안좋게 찍혔던 탓에, 종전 후 다시 무대로 복귀하지 못하고 음악 외의 직업을 전전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후의 이력이야 어쨌든 이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찰리와 그의 악단에서 연주했다는 것을 거론하기를 꺼렸고, 독일 언론에서도 1970년대에 가서야 이 악단의 실체를 다룬 보도를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그나마 정치색이 없었거나 있어도 미미했던 음악을 주로 연주했던 독일 춤과 오락 악단 같은 나치 시대의 여타 관제 밴드들과 달리, 이 악단은 대놓고 연합국 디스와 나치 이념 설파를 했기 때문에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심지어 독일 재즈계에서는 이 악단의 음악이 재밌다는 뉘앙스의 말만 해도 매장당하기 십상.

이 때문에 독일에서는 2000년대까지도 이 악단의 녹음을 공식 상업용 음반으로 만들어 발매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었고, 기껏해야 옛 적국이었고 패전국의 선전 정책을 마음껏 깔 수 있는 승전국이라는 입장인 영국이나 미국에서 소규모 음반사가 몇 곡을 골라 CDLP로 발매한 것이 고작이었다. 독일 현지에서 공식적으로 CD가 제작/발매된 것은 2011년에 가서였다. 음악이 절대권력과 결탁했을 때 얼마나 극악한 똥쓰레기가 배출될 수 있는 지 보여주는 사례로 길이 남을 듯.

이들의 녹음 일부를 들을 수 있는 사이트도 있다. 영어 청취력이 좀 된다면, 이들이 원곡을 얼마나 망쳐놨는 지 확실히 알 수 있다.

[1] 밑에서도 서술되어 있지만, 조이스가 어설픈 옥스퍼드 억양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그 발음을 비꼰 속어였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도 미군 병사들이 저 방송을 일부러 들으며 비웃었다는 내용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