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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에 세 형제가 내조하여 각각 받은 칭호. 시기 불명. 고려사상 확인됨. ** 백제 문주왕에게 담왕이 받은 칭호로 족보상 기록됨, 후대 도동음률(명칭에 이설 있음)은 삼국사기상 좌평으로 확인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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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 개요
指雲王(483년 ~ 508년)탐라국 27대 왕.
지운왕이 즉위한 이후 고구려와 북위에 사신을 보내 특산물인 가(진주, 마노)를 조공한다.
그리고 498년 갑작스럽게 백제군이 탐라국을 치려고 무진군(武珍郡, 지금의 광주광역시)까지 내려오려 하자 탐라국에서 급히 사신을 보내 화의를 청한다. 이에 백제는 군대를 회군시켰으며 이후 탐라국에 간섭하여 고구려, 신라와의 외교를 끊은 걸 보면 탐라국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한 듯 하다. 이후 내법좌평[1] 고진로(高眞老)[2]가 파견되어 탐라국의 산천과 지형을 시찰한다.
고구려 문자명왕대의 기록을 보면 북위에 사신 예실불을 파견해 탐라국이 복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보고를 올린다. 그렇다면 탐라국은 원래 백제의 산하에 있었다가 장수왕대에 고구려가 백제를 멸망에 가깝게 박살낼 때 겸사겸사 바닷길을 통해 복속시켰지만 백제가 중흥하자 다시 백제의 산하로 돌아가게 된 것이 된다. 또한 498년이면 마침 웅진성을 수도로 다시 백제를 중흥시킨 동성왕의 치세에 해당한다.
[1] 백제 관직 16등급의 최상급인 6좌평의 하나로서 대신급이다.[2]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등장하지 않아 존재가 불명확하다. 삼국사기에는 그 대신 이름이 비슷한 진로(眞老)가 병관좌평으로 등장하는데, 해당 업무와 직책의 관련성이나 성씨로 보아 삼국사기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높아보인다. 그런데 진로는 497년 5월에 사망했다고 아예 사망한 연도에 달까지 기록되어 있으니 정말로 진로가 탐라국에 파견되었던 것이 맞다면 기록에 약간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